지하철이 덮칠 때, 그는 '레고 블록'이었다

[기고] 열차 유지·보수, 운영 기관이 관리해야 하는 이유

지난 29일 토요일, 서울메트로가 운영하는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서 스크린도어 정비를 하던 29세의 노동자가 열차에 부딪혀 사망했다. 강남역으로부터 신고를 받은 스크린도어 정비 업체 노동자는 홀로 스크린도어 안쪽으로 들어가 작업을 하다 변을 당했다.

선로나 이와 관계된 시설물의 정비나 보수는 열차 운행이 모두 끝난 심야 시간에 이루어지는 게 원칙이다. 다만 사고나 이에 준하는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관제실과 역의 통제 하에 열차 운행을 잠시 중단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운행 시간 중 선로변 시설물을 점검하는 것은 절대로 시도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더구나 열차 운행 간격이 극히 짧은 지하철 구간에서의 선로변 작업은 살인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지하철이 선로에 진입할 때의 속도는 시속 60킬로미터가 넘는다. 스크린도어로 막혀 있어 승강장으로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달려오는 열차를 봤을 노동자의 절망감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기관사의 입장에서 스크린도어가 설치된 역의 선로는 승객의 추락이나 접촉 우려가 없는 안전지대이다. 이런 조건에서 갑자기 사람이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비상 브레이크를 작동시키고 사고 순간을 마주해야 했던 기관사 역시 씻어내기 힘든 트라우마와 싸움을 벌여야 한다.

사고가 나자 운영 기관인 서울메트로는 정비를 맡고 있는 외주 업체에 책임을 돌렸다. 외주 업체는 업체대로 변명을 내놓고 있다. 정비는 2인 1조이나 점검은 1명이 가도 된다는 것이다. 단순 점검 출동이었기에 매뉴얼상의 규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말도 흘리고 있다. 사람의 생명이 꺼졌는데 누구하나 책임을 감수하겠다고 나서지 않는다. (☞관련 기사 : 지하철 정비도 외주 용역…"열차 추돌, 예고된 사고")

사고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은 '2인 정비 매뉴얼만 지켰어도 사고를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현실은, 아무리 좋은 매뉴얼이 있더라도 지켜지지 않으면 휴지 조각과 다름없다. 매뉴얼이란 안전 확보 강조 기간 같은 시기에 높은 사람을 데려다 보여주는 각본에 불과하다. 현장에서 매뉴얼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실상을 모르는 돈키호테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다.

이번 사고는 현장 출동 노동자가 예외적으로 위험을 자초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이런 행위들이 관행적으로 이루어져 오는 과정에서 터질 것이 터진 것이다. 을(乙) 중의 을인 외주 하청 업체의 현장 노동자가 혼자서는 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매뉴얼 준수를 요구했다면, 아마도 해고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매뉴얼이 노동 현장의 안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운영 기관이나 외주 업체의 알리바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이 사고는 그동안 한국 사회가 절대가치로 추종한 성장과 발전, 효율화란 것들이 얼마나 야만적인 기초위에 서있는지 보여준다.

한국 사회는 멀리서 보면 화려한 레고 블록 구조물처럼 그럴듯하게 보인다. 그러나 레고 블록의 특성이 그렇듯, 그 구조물은 작은 충격에도 쉽게 부서지고 만다. 전체 블록에서 떨어져나간 부분은 새로운 다른 블록으로 교체해 겉모양을 복원하면 된다. 이번 사고의 책임을 지고 외주 업체가 변경될 수도 있고 새로운 정비 요원이 투입될 수 있지만, 그것은 교체된 레고 블록과 다를 바가 없다. 언제든지 형태를 달리한 또 다른 사고의 충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일이다.

열차 운행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시설의 유지·보수 책임은 운영 기관이 지는 게 맞다. 하지만 이미 외주화가 뿌리를 깊게 내린 상황이다. 스크린도어 유지·보수를 운영 기관이 맡아야 한다고 말하면 이상주의자의 철모르는 주장으로 간주되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9세의 젊은 노동자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게 만드는 사회와 구조를 그대로 놓아둘 순 없다. 우선적으로는 외주 업체의 작업을 운영 기관의 감독 하에 두어야 한다. 열차와 접촉할 수 있는 위험한 작업은 절대로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지하철의 안전 운행을 책임지는 노동자들의 안전이 보장될 때, 시민들의 안전도 지켜진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