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갈 길 잃은 한국 외교

[주간 프레시안 뷰] "남북 화해 없이는 동북아 안정도 없다"

비무장지대(DMZ) 지뢰 폭발 사건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대응은 세월호 침몰, 메르스 사태 때와 너무도 닮은꼴입니다. 지휘탑의 부재, 그리고 이에 따른 위기 대응의 완벽한 실패가 그것입니다. 지난 4일 사건 직후, 군조사단은 현장 조사를 통해 북한 목함지뢰에 의한 것이라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5일 오후,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이 대통령에게 북한제 지뢰로 추정된다는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5일) 박근혜 대통령은 경원선 복원 기공식에 참석해 '남북 협력'을 강조했습니다. 통일부는 북한 통일전선부에 고위급회담 개최를 제안하는 서한을 전달하려 했습니다. 이후 10일까지 엿새간 매일 북한에 대해 서한 수령을 요구했습니다. 지뢰 폭발이 북한 소행인 것이 유력하다는 정황이 관계 부처 간에 공유됐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지뢰 폭발에 의한 우리측 병사 2명의 부상'이라는 당면 위기 상황에 대한 대응이 최우선적으로 강구됐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사건 발생 나흘 후인 8일에야 열렸고, 박근혜 대통령이 이 문제를 직접 언급한 것은 지난 12일이었습니다. 청와대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4차례 보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국방부 장관 등 관련 부처의 직접 대면보고는 없었고 서면 또는 전화를 통한 보고였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는 얘깁니다. 세월호 침몰 당일 7시간 동안 박근혜 대통령이 무얼 하고 있었는지가 논란이 된 바 있습니다. 메르스가 발생하고 수일이 지나도록 박 대통령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노무현 정부 당시 사스를 완벽하게 방어해 세계의 칭송을 받았던 한국이 졸지에 '방역 후진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30명 이상의 소중한 목숨을 잃었고, 관광산업을 비롯해 엄청난 경제적 피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번 지뢰 폭발 사고와 세월호 침몰, 메르스 사태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 것은 정부 당국자들의 현실 인식 능력이 대단히 미흡하다는 점입니다.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초기 단계에 막을 수 있었던 위기를 더 큰 규모로 키웁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정부 당국자들은 자신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 큰 문제점은 한국의 장기적 국가 목표에 대한 비전이 없다는 점입니다. 특히 대외정책 분야가 그러합니다. 물론 박 대통령은 집권 초기 한반도 신뢰 구축, 동북아 평화협력,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등을 3대 외교 과제로 내세운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첫 단추라 할 수 있는 남북대화는 전혀 진전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이희호 여사 방북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처럼, 북한 측의 필요는 외면한 채 우리 측 요구만을 내세우는 고압적 태도 때문입니다. 즉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대화 재개를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 정부는 6.15 정상회담의 핵심 주역인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을 방북단에서 제외했습니다. 장관을 역임한 '정치인'이라는 것이 방북 불허 이유였습니다. 방북을 주선한 김성재 통일준비위원도 김대중 정부에서 장관을 역임한 분이라는 점에서 타당한 이유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북한은 이번 방북단에 6.15 주요 인사가 포함될 것을 강력 요구했다고 합니다. 6.15는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남한의 최고지도자와 직접 만나 남북간 최초의 역사적 합의를 도출한 것으로 북한은 6.15선언에 특별히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북한에게는 6.15 주요 인사의 포함 여부가 한국 정부의 대화 의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었던 셈입니다. 게다가 출발 이전 '정부의 대북 메시지는 없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습니다. 그리고는 방북단이 도착한 직후 고위급회담 재개를 제안하는 공식문서를 북한 측에 보내려 했습니다. 방북단의 전언에 따르면 북한은 이 제안에 크게 분개했다고 합니다. 6.15를 무시했다고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더욱이 회담 의제도 이산가족 상봉, 8.15 공동행사 개최 등 우리 측 요구만을 명시했습니다. 5.24조치 해제 등과 같은 북한 측의 요구는 기타 의제에 묻혀버렸습니다.

북한으로서는 이러한 우리의 대화 재개 요구를 진정성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6.15에 대한 의도적 무시, 대북 전단 살포의 방치, 그리고 북한이 내심 간절하게 바라는 경제협력 등은 외면한 채 남한의 요구만을 논의하기 위한 회담에 나설 이유가 없습니다. 장성택 처형 이후 최대 지원세력인 중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북한은 내심 남한의 경제 지원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인천 아시안게임 때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 등 북한 권력 실세들의 깜짝 방남에서 드러난 것처럼 분명 북한은 남북대화 재개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북한의 체면을 세워주고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방안을 제시한다면 북한은 대화 테이블로 나올 것입니다. 경제적, 외교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는 한국이 북한에 그 정도의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과거 서독이 동독에 대해 했던 것처럼 '돈으로 평화를 사는'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이러한 길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북한의 굴복만을 바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 2004년 6월16일 서부전선 무력부대 오두산전망대에서 군인들이 대북선전용 대형확성기를 철거하는 모습. 당시 철거됐던 확성기가 다시 설치됐다. ⓒ연합뉴스

국내외의 많은 전문가들이 동아시아의 최대 외교 과제로 남북의 화해를 꼽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반면 군사적으로는 가장 불안정한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남북의 화해가 최우선 과제가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동아시아 지역은 미일 대 중국의 군사대결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형국입니다. 세계 경제 1,3위의 미국과 일본은 떠오르는 중국을 포위하기 위해, 2위의 경제대국 중국은 미일의 군사포위망을 뚫기 위해 군사력 증강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국 규모의 중견 국가가 세계경제 1,2,3위 국가들의 국익을 위한 군사 대결을 뜯어말릴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군사 대결을 방치한다면 한국은 최대교역국 중국을(한국의 대중 무역액은 미국의 2배가 넘습니다) 겨냥한 미일의 군사동맹에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동아시아의 화해와 평화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미일 대 중국 간 군사 대결의 빌미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북한과의 화해 협력입니다. 북한이 아무리 밉고 싫더라도 우리가 끌어안아야 합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경제협력입니다. 북한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남북대화에서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것은 경제협력입니다. 5.24조치 해제를 비롯해 남북 경제협력 확대의 전망이 확실하게 보인다면 북한은 남북대화에 응할 것입니다. 경제협력 확대로 북한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이 커진 연후에 비로소 북핵 문제라는 최대의 난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2005년 한반도 비핵화를 약속한 9.19 공동성명도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올 수 있었습니다. 비록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로 물거품이 되긴 했지만 말입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택했던 이 길을 박근혜 정부는 한사코 외면하려 합니다. 하지만 한국이 미일 대 중국 군사대결에 끌려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면 이 길밖에 없습니다.

한국은 동아시아 화해와 평화의 중재자, 촉진자가 돼야 합니다. 첫 번째 과제는 남북 화해입니다. 두 번째는 중일 화해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두 나라 모두 국가의 자존심과 국익을 위해 자국의 민족감정을 자극하면서 군사력 증강에 일로매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 차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에는 아베의 군사주의화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거셉니다.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대한 반대 여론이 찬성의 2배가 넘습니다. 일본의 양심적 정치인들 가운데 동아시아의 평화를 염원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바로 이러한 일본 내 평화세력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도 동아시아 평화 증진에 중대한 기여가 될 것입니다.

▲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12일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해 독립투사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연합뉴스
12일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2009~2010년)가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해 독립투사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습니다. 그는 독립투사 165명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 앞 제단에 국화를 올린 후 무릎을 꿇었고, "진심으로 죄송하다. 사죄의 말씀을 올린다"고 말했습니다. 감동적이었습니다. 1970년 12월 7일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바르샤바 유태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2009년 총리가 된 후 미국 주도의 일방적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벗어나 평화와 우애에 바탕을 둔 동아시아공동체 건설을 제창했던 정치인입니다. 비록 미국의 반대와 일본 관료 세력의 반발로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일본에는 분명 동아시아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원하는 정치세력이 있습니다. 대다수 일본 국민들도 평화와 화해를 원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를 접견해야 했습니다. 그를 직접 만나 한국 정부와 국민들도 동아시아의 화해와 평화를 간절히 원한다고 말해야 했습니다. 아마도 그랬다면 일본의 반전평화세력에 커다란 힘이 됐을 것입니다. 아베 총리에 대해 과거 역사를 반성하고 사죄하라고 골백번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일본에 발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한국이 나아갈 길은 분명합니다. 동아시아 평화의 중재자가 되는 것입니다. 북한과 화해, 협력하고 일본의 평화세력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남북관계가 진전됐던 김대중 정부 때 한일관계도 좋았던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번 지뢰폭발 사고로 남북관계는 또 하나의 암초를 만났습니다. 이명박 정부 집권 직후 금강산 박왕자 씨 피살 사건을 시작으로 2010년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사건을 거치면서 남북관계는 계속 뒷걸음질 치고 있습니다. 이제 북한은 박근혜 정부와의 대화를 포기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습니다. 남북관계 악화에는 물론 북한의 잘못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남북관계의 악화를 방치하고서는 동아시아의 갈등 상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북한 측의 책임은 분명히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한국의 국익을 위해,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한국 외교의 장기적 전략 목표는 무엇인지를 분명히 정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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