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유신 정치의 그림자가 보인다"

[민교협의 정치시평] 역사의 진보를 믿으며

나는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역사의 흐름과 방향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20대 군부 독재 시절에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민주화 투쟁에 자연스럽게 발을 들여놓으면서 느꼈던 그 답답함과 좌절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래도 그 깜깜했던 시대를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승리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비록 폭압적인 권력 아래 쫓기며 신음하는 형국이었지만 언젠가는 기필코 세상을 뒤집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했지만 흔들리지 않는 희망이 있었다. "역사가 부른다 멀고 험한 길을" 김민기의 '친구Ⅱ'를 친구들과 함께 마음을 다잡곤 했다. 역사의 진보를 신앙처럼 새기며 어둠의 시대에 저항했었다.

다만 시간이 문제였다. 언제 그 희망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세대에서 안 되면 후세대에서라도 이루질 것을 염원했었다. 평균 수명이 40세도 안 되었던 일제 시대에 36년 동안 식민 통치를 받았던 윗세대의 고난을 상기하면서 역사는 더디더라도 진보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했었다. 그것이 20대를 버텨 준 신앙이었다.

지난 1997년 말 50년 만에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루었고 권력 재창출로 이어진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젊은 날의 믿음이 옳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너무 조급했고 신자유주의를 너무 쉽게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기회 있을 때마다 쓴소리를 던졌지만 역시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그러나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마저 버린 것은 아니었다. 미완의 진보였지만 더욱 노력하면 세상은 더욱 좋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민주 정부가 권력을 잃고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면서 나의 역사관은 흔들렸다. 역사는 진보만 하는 것이 아니라 후퇴도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1970년대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보면서 심지어 더 후퇴할 수도 있다는 공포감마저 느끼게 된다. 서해 바다에서 벌어지는 북한의 공격적인 돌출 행위, 미국과 일본의 군사적 밀착, 무엇보다 세월호 사태와 메르스 사태에서 보여준 권력의 무능함, 대선 자금과 성완종 리스트 수사에서 보여주는 권력의 후안무치, 최근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후폭풍 등 국내 정치의 악화일로를 접하면서 이것은 후퇴 정도가 아니라 망해가고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후퇴 더 나아가 소멸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강한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일제 시대를 떠올려 본다. 우리가 일본과 전쟁을 해서 나라를 빼앗겼는가? 국내 정치의 불안과 무능으로 일본과 청나라를 끌어들였고, 일본의 술수에 말려 결국 나라를 빼앗겼던 것이다. 참으로 어이없는 망국의 역사였다. 지도자들의 무능과 탐욕, 그리고 갈등이 결국 나라와 역사를 송두리째 잃게 만든 것이었다. 북한과 매우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 등 주변국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대한민국의 권력은 주도는커녕 오히려 분위기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불안하기 짝이 없다.

진보만 하는 역사가 없듯이 퇴보만 하는 역사도 없다. 진보와 퇴보를 반복하면서 아주 크게 보아 역사는 진보한다는 내 나름의 가설을 만들어 보았다. 역사는 단진동을 하면서 진보한다는 뜻이다. 즉,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여러 차례 반복하다보면 어느 새 역사는 어느 정도 앞으로 나가 있을 것이라는 수정된 낙관론이다. 그러나 역사에 비해 지극히 짧은 시간을 살다 가는 우리네 인생의 입장에서는 역사의 퇴조기에 살다가 갈 수도 있고, 전환점에서 살다가 갈 수도 있다. 적어도 나의 성장기 동안은 역사의 진보를 경험했고 중년기를 지나면서 현재까지는 후퇴의 과정을 겪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역사 스스로 진보하거나 퇴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하고 할 수밖에 없다.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어떤 이들은 물질이나 기술에서 역사의 원동력을 찾기도 하지만 물질을 생산하고 기술을 개발하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물질과 기술의 위력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그것들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그러나 그것들을 만들어 내고 조직화하고 배치, 운용하는 것은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는 매우 중요하다.

지난 4월 국회 원내대표 연설에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의 복지 공약 파기와 증세 없는 복지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유승민 대표의 홀로서기 선언으로 볼 수 있는 이 연설은 박근혜 대통령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을 것이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누리 과정 예산을 시·도교육청에 떠넘기는 시행령 개정으로 이의 위법성을 제기하는 국회법 개정과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라는 파동을 거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새누리당은 유승민 원내대표의 퇴진을 놓고 친박과 비박의 대결로 내홍을 겪고 있다.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은 대통령제 국가에서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에게 입법부를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다. 우리 헌법 제53조 제2항은 이를 명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회는 재의에 붙이면 된다(헌법 제53조 제4항). 그러나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여당의 원내대표를 꾸짖고 사퇴 압박으로 비치는 발언까지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여소야대의 국회도 아니고 여당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현 국회에서 통과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하여 대통령이 불편한 심기를 거침없이 쏟아내는 것은 참으로 보기 드문 광경이다.

기초연금 파동, 공무원연금 파동, 누리 과정 예산 파동 등을 겪으면서 국민들은 국가에 대한 불신을 더욱 키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세월호 사태와 메르스 사태는 숱한 의혹과 논란이 있지만 그것은 아무튼 사고였다. 그러나 대통령을 당선시켜 준 핵심 공약이라 할 수 있는 복지 공약들을 줄줄이 파기하고 변칙적인 방법으로 시행하는 마당에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여당 원내대표를 압박하는 것은 유신 정치의 그림자를 떠올리게 한다.

약속을 파기하는 정치가 정당화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어떤 기대를 가질 수 없다. 이념적으로 시대적으로 적절한 목표를 달성하거나 도입하겠다는 약속들을 구시대적인 방법으로 그것도 반복적으로 무력화시킨다면,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아주 기본적인 도덕성이나 상식적인 원칙들마저 증발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와 사회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을 회복하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단순히 어느 정파가 권력을 잡느냐 누가 승리하고 누가 지느냐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존립의 문제로 봐야 한다.

저출산으로 인구가 줄어들고 그 결과 고령 인구 비율이 급증하고 있다. 게다가 젊은 세대의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 하며 실제로 떠나고 있다. 허위와 기만이 판치고 극소수 특권층을 빼고는 먹고 살기 너무 힘든 나라는 중환자와 같다. 대대적인 수술이냐, 죽음이냐?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 우리 역사는 너무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다가 급격하게 진보했으며 그 보다 더욱 급속하게 후퇴해 왔다. 이제 다시 전진해야 할 시점이다. 역사가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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