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배신'에 맞선 김승환, 함께 싸우자"

[기고] "누리과정 문제, 이제 정치로 풀자"

병 주고 공짜로 약을 줘도 억울함이 쉽게 풀리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병 준 사람이 약을 외상으로 내주며 빚을 내서라도 약값을 갚으라고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병을 줬으면 약이라도 거저 주는 게 마땅한데 약값까지 물려서 빚쟁이로 만들겠다니 고약한 놀부 심보가 아닐 수 없다. 비유하자면 어린이집 누리과정 재정소요를 빚을 내서 전액 부담하도록 대통령(명)령으로 내몰린 교육감들의 심사가 바로 이럴 것 같다.

누리과정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의 3,4,5세 아동에게 제공되는 국가수준의 보육·유아교육 공통과정을 의미한다. 누리과정의 3~5세 무상 실시는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의 공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차원의 누리과정 무상 실시에 소요되는 막대한 규모의 예산, 특히 어린이집누리과정 예산을 공약으로 재미 본 대통령의 중앙정부나 어린이집 관할권자인 시도지사에게는 한 푼도 부담시키지 않고 어린이집 관할권조차 없는 교육감에게 전액 부담시킨 것이 누리과정 예산 문제의 핵심이다.

유치원 1년 과정만 무상 실시하던 2014년과 달리, 2015년부터 누리과정 3년 무상 실시하는 데 추가적으로 드는 돈은 대략 연간 3조7000억 원. 기존의 지방교육재정에서 추가재원을 마련하려면 700만 유초중고 학생1인당 연간 50만 원 넘게 떼어내야 한다. 교육감에게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을 전액 부담하라는 영유아법시행령은 형·누나의 학교 교육비를 그만큼 빼내서 동생 누리과정비로 돌리라는 대통령의 명령이다. 분명히 하자. 이건 완벽한 제로섬 게임일 뿐이다. 시행령을 폐기하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는 교육청들이 모두 해마다 지방채 발행을 통해서 누리과정예산 소요를 충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시도교육청은 완벽한 빚더미에 올라앉을 것이고 교육감은 교육정책에 필요한 재정충당을 봉쇄당할 것이다. 물론 이것이 박근혜 정권의 정치적 노림수다.

이런 사정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교육감들이 누리과정 예산편성을 못 하겠다고 버틴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랬더니 정부는 어린이집누리과정 예산확보에 필요하면 지방채 발행을 허용하겠다고 얼러댔다. 국회는 여야합의로 필요한 입법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이집 운영자와 보육교사, 학부모의 집요한 예산편성요구에 직면한 교육감들은 현실과 타협한다. 지방채 발행에 의한 어린이집누리과정 예산편성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오직 김승환 교육감 혼자서 이런 상황에서도 100일이 넘게 버텼다. 급기야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지난 23일 전주로 내려가 김 교육감을 만나고 "우리 당이 해야 할 일을 김승환 교육감이 해 왔다. 이제 우리 당과 내가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갈등 해소와 대안 마련을 위해 팔을 걷어붙인 문 대표의 행보가 모처럼 돋보인 하루였다.

사실 누리과정 재정 문제는 전북의 지역현안이 아니라 누리과정을 실시하는 17개 시도교육청 모두에 공통적인 전국 사안이다. 김승환 교육감을 한편으로, 전북 어린이집과 지역의원들을 다른 한편으로 전개된 전북 내부의 갈등은 본질이 아니고 현상일 뿐이었다. 본질은 법률도 아닌 대통령령으로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전액을 지방교육 재정에 전가한 대통령의 횡포에 맞서 초중등특수교육예산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는 교육감들의 투쟁이다. 진보교육감 죽이기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정치권력의 폭거에 맞서 유초중등특수교육재정을 지키려는 투쟁이다.

그 바탕에는 무상급식에 대한 보수정권의 보복심리가 깔려있다. 어린이집 지원 예산 부담 때문에 유초중고 예산이 부실해지면 무상급식 예산부터 줄이면 된다는 무상급식 죽이기다. 나아가서 시도교육청 재정압박으로 혁신적인 교육정책들에 타격을 줘서 진보교육감을 고사시키겠다는 다단계 정치술수다.

다행히 김승환 교육감은 지난 23일 문재인 대표와 공동합의 도출로 새로운 정치전선이 형성되었다는 판단 아래 금년에 한해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을 편성하기로 대승적인 차원의 결단을 내렸다. 한마디로 문 대표의 개입과 김 교육감의 결단으로 누리과정 예산 문제를 둘러싼 싸움은 정치적으로 새 국면을 맞았다.

사실 그동안에도 몇 차례의 정치적 기회가 없진 않았으나 전부 놓쳤었다. 예를 들면 야당은 지방채 발행 입법에 동조해줘선 안 되었다. 교육감들은 지방채 발행에 의한 재정파탄의 길에 동의해줘선 안 되었다. 김승환 교육감처럼 원칙을 고수했어야 했다. 정부가 지방채 발행을 압박할 때 병 주는 것도 모자라 외상 약을 주는 게 말이 되느냐고 대차게 싸웠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정부도 함부로 밀어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5월 29일 서울, 경기, 인천, 광주교육감이 누리과정예산조달용 지방채 발행 거부를 결의했지만 해당지역 어린이집 학부모들이 용수철 튀듯 반발하는 대신 지켜보고 있는 데서 읽을 수 있듯이 얼마나 용감하게 버텨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교육감이 어린이집 예산편성을 거부하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될 게 없다. 어린이집에 대해서 교육감은 법적으로 관할권도 감독권도 없기 때문이다. 본래 우리 법은 보육과 교육을 엄격하게 구별해서 이원적으로 규율해 왔다.

어린이집은 보육기관으로 영유아보육법의 적용을 받으며 보건복지부와 시도지사의 책임이다. 유치원은 유아교육법을 적용받으며 교육부와 교육청의 책임이다. 따라서 보육과 교육의 오랜 경계를 허물고 통합하려면 관계 법률들을 먼저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시행령을 한두 개 뚝딱 고쳐서 해결하고자 했던 정권편의주의가 시행령 사태의 발단이다. 여야 간에 타협과 조정이 불가피한 법률개정과정 대신 대통령의 뜻이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대통령령 개정경로를 선택한 이유는 물론 진보교육감 숨통 조이기라는 정치적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서다.

법률 개정을 시도할 경우 야당과 타협하려면 최소한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재정분담원칙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교육감 압박 효과가 줄어들게 된다. 교육감에게 누리과정 재정 전부를 떠넘긴 영유아보육법시행령 개정은 법률의 근거가 없어 위법하고 이런 정치적 계산이 관철된 산물이라 부당하다.


▲김승환 전라북도 교육감. ⓒ프레시안(최형락)

김승환 교육감이 혼자서 지방채 발행을 거부하며 누리과정예산 편성을 거부해온 행위는 헌법원칙과 민주주의는 물론 초중고특수학교 예산을 수호하기 위한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만약 김 교육감이 대정부투쟁의 불씨를 살려놓지 않았더라면, 향후 누리과정 재정 분담 원칙을 올바르게 세우는 데 필요한 입법, 재정, 정치투쟁에 앞장서겠다는 문재인 대표의 다짐도 받아내지 못한 채 초중등특수교육 재정만 매년 지방채 발행으로 골병들 뻔했다. 교육부는 내년 예산안을 편성하면서 작년과 마찬가지로 누리과정예산을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 교육부의 예산안이 국회로 넘어가는 9월이 오면 다시 교육감과 대통령간의 일대 투쟁이 예고돼 있다.

법적으로 국회나 교육감은 헌법재판소에 대통령을 상대로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대통령이 모법에 근거가 없는 대통령령을 제정했는지 그리하여 국회의 입법권한을 침해했는지, 또는 대통령이 모법에 근거가 없는 대통령령으로 교육감의 예산편성권한을 침해했는지는 헌법재판소가 판단권한을 갖는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다. 물론 대통령과 국회라는 헌법기관 간의 분쟁이나 대통령과 교육감이라는 선출직 행정기관의 분쟁을 자체적, 정치적으로 해소하지 못하고 제3자인 헌재로 쪼르르 달려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더욱이 지금의 '박근혜표 헌재'는 얼마든지 시간을 끌면서 현상유지에 손을 들어줄 수 있다. 헌재의 결정이 늦어질수록 문제의 대통령령의 목숨이 자동 연장되는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헌재를 통한 사법적 방식보다는 입법이나 타협을 통한 정치적 해결이 더 바람직한 경우가 많은 이유다.

국회의 시행령 수정 요구에 대한 행정부의 성실답변 의무를 규정한 국회법 개정안이 결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봉착했다. 여야합의로 통과된 개정법률안이 폐기될 운명에 처했다. 대통령의 제왕적 행태와 월권적 행태를 바로잡는 건 야당의 몫이다. 누리과정 예산 문제야말로 국회의 입법권을 침해하는 행정부의 월권이다. '당선된 후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의 표본이다. 실제로 대통령은 누리과정은 전국공통이라 중앙정부의 예산지원이 필요하다고 교육감들 앞에서 공언한 바 있다. 영유아보육법 시행령이 국회법개정시 손볼 시행령 제1호로 올라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교육감들의 정당한 문제제기를 거부하고 초중고특수학교 아이들의 교육비 복원을 거부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무상급식 못하게 하려고 무상보육 떠넘기는 통에 교육감과 문 대표가 단일대오를 형성해서 치열하게 싸우지 않으면 초중등교육이 말라죽게 생겼다.

오랫동안 헌법적 가치를 파기하는 중앙정부의 횡포에 맞서 왔던 김승환 교육감은 전국 시도교육청이 다함께 전진하기 위한 결단을 내렸다. 문재인 대표도 누리과정 문제를 거대 제1야당의 중요한 현안으로 받아 안음으로써 전국시도교육감들과 힘찬 공동전선의 첫걸음을 만들어냈다. 대통령의 일방적 폭거에 제대로 저항할 수 있는 정치적 전선이 비로소 형성된 셈이다. 이제 17개 전국 시도교육감과 야당이 강력하게 연대하여 시행령을 실질적으로 폐기하는 내용으로 관련 법률들을 개정함으로써 법과 국회의 권위를 살려내는 것은 물론 유초중고 교육과 영유아 보육을 동시에 정상화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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