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금이? 그까짓 '창녀' 한 명 죽은 걸 가지고…"

[문학예술 속의 반미] 문민정부 출범과 정치문화의 변화 그리고 반미

VI. 문민정부의 출범과 정치문화의 변화 그리고 반미 (3)

넷째, 미군들의 한국인들에 대한 범죄는 반미감정에 불을 붙였다. 이미 앞에서 얘기했듯 미군들의 범죄는 한국에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2000년대 이전까지 1993년처럼 미군 범죄 때문에 반미감정이 강렬하게 분출된 적이 있을까. 1992년 10월 동두천에서 일어난 이른바 '윤금이 사건' 때문이었다.

미군 전용 클럽에서 일하던 20대 중반의 여성이 자신의 방에서 너무도 잔인하고 처참한 모습의 시체로 발견됐다. 사진에서 보듯, 자궁엔 맥주병과 콜라병이, 항문엔 기다란 우산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입엔 한주먹의 성냥개비가 담겨 있었고, 피투성이가 된 온몸엔 하얀 세제 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사진으로도 차마 눈뜨고는 보기 어려운 끔찍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소름 끼치는 살인에 충격받고 분노한 동두천 시민들은 미군 부대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였고, 택시기사들은 미군 병사들의 탑승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2년 11월 한국의 검찰이 이 사건에 대해 적극적이고 철저하게 수사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자, 전국에 걸쳐 약 50개의 시민단체들이 '주한미군의 윤금이 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위원회는 기자회견을 갖고, 주한미군 당국을 항의 방문해 사과를 요구했다. 학생들은 이 사건에 대해 한국의 사법당국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선전활동과 청원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연좌 단식농성과 항의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993년 3월엔 이 위원회가 주한미군들의 범죄를 근절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공청회를 열면서 조그만 책자를 만들었다. <우리들의 금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는 주한미군과 그들의 범죄에 관한 다양한 기사와 기록 등에 덧붙여 한 편의 시와 수필을 실었다.

안일선은 윤금이에게 바치는 시를 통해 미국 국기가 펄럭이는 식민지에 사는 한국인들은 그녀의 죽음에 대해 복수해야 하고 한국을 미군 없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다. 윤금이의 보호자 역할을 했던 전우섭 목사는 그녀의 삶에 관한 수필에서 그녀의 죽음은 민족의 자주권과 민족의 자존심이 죽은 것이라고 한탄하며 한국인들이 민족 독립과 한반도 통일을 쟁취하기 위해 함께 일떠서자고 호소했다.

1993년 5월 50대의 한국인 여성이 주한미군 사병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반미감정이 더욱 고조되었다. 이에 '주한미군의 윤금이 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1993년 6월 미국 대통령과 주한미국대사 및 주한미군사령관에게 공개 항의서한을 보냈다. 나아가 그러한 범죄에 대한 주한미군의 책임을 공론화하기 위해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했다. 한국인들이 주한미군 당국에 항의전화를 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항의 엽서를 보내자고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1993년 7월 '항의 엽서 보내기운동'이 널리 전개되었다. 엽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주한미군은 한국에서 해마다 2000건 이상의 범죄를 저지릅니다. 각하는 미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주한미군의 범죄행위를 근절하기 위한 구체적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대책은 한미행정협정·주둔군지위협정(SOFA)의 개정을 반드시 포함해야 됩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각하의 군대가 저지르는 범죄들에 맞서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엽서 보내기운동을 통해 각하에게 호소합니다. 이 운동은 적절한 조치가 취해질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한편, 1993년 7월 널리 알려진 배우 김지숙이 서울의 한 극장에서 1인 연극 <로젤> (Rosel)을 공연했다. 사실 1년 전에 많은 관중을 이끌며 이 연극을 공연했던 터였다. ‘주한미군의 윤금이 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의 후원으로 다시 공연하는 극장 입구엔 그녀의 죽음을 선전하는 유인물이 배포되고, 끔찍한 모습의 그녀 시신 사진이 전시되었으며, 위에 소개한 항의엽서가 판매되었다.

원래 이 연극은 독일에서 남자들에게 학대당하는 '로젤'이라는 한 여인의 불행한 삶을 묘사하는 내용이지만, 이는 한국 여성들에 대한 미군들의 범죄로 연결되었다. 공연이 끝난 뒤엔 대책위원회 대표들이 꽉 들어찬 관중들에게 반미감정을 자극하며 그들의 목표를 설명했다. 그리고 공연의 수입금은 주한미군 범죄를 뿌리 뽑기 위한 영구적 단체를 설립하기 위한 기금으로 돌려졌다.

나는 마침 그 무렵 미국에서 공부하다 한국을 방문 중이어서 이 연극을 감상하고 엽서를 구입할 수 있었다. 동두천으로 찾아가 대책위원회 대표로부터 그 당시 상황을 직접 전해 듣고 참혹한 모습의 시신 사진도 얻을 수 있었다. 윤금이의 동료들과 만나 얘기할 기회도 가졌다. 곧 미국에 돌아가 지도교수와 동료 학생들에게 당신네 미국인이 우리 한국인에게 이렇게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며 사진과 엽서를 건넸다. 그들은 충격을 감추지 못하며 깊은 애도와 사과를 표했다. 그리고 엽서 보내기운동에 적극 동참하겠다고 했다.

한편, 1960년대엔 수많은 양공주들이 주한미군에 의해 죽으면 동료들이 미군 부대 정문에 가서 항의시위 한 번 벌이면 그만이었다. 위로금이나 장례비라도 한 푼 받으면 오히려 고맙게 생각했다. 그 무렵 미군 부대 주변의 양공주들은 한국사회에서 경멸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한 세대가 흐른 1990년대엔 다양한 계층의 한국인들이 그들의 불행에 동정하며 그들을 외세의 지배에 의한 '피해자'로 간주하게 되었다. 시민운동의 발전과 민족주의의 부흥 덕분이었다. 미군들은 헤어져야 할 남이지만 양공주들은 우리가 껴안아야 할 동포라는 생각의 새로운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그들이 외국인들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바뀐 셈이랄까.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1992년 윤금이 사건으로 1993년 반미운동이 거세게 전개되자 당시 동두천시장이 '그까짓 창녀 한 명 죽은 걸 가지고 이렇게 난리를 부리느냐'는 투의 망언을 하는 등 여전히 사대 노예 근성을 간직한 지도층 또는 기득권 세력도 건재하긴 했다.

이와 관련하여, 이르면 1980년대 말 늦어도 1990년대 초부터 미군 부대 주변 '기지촌 여성'을 위한 사설 봉사기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동두천의 '다비타의 집', 의정부와 동두천의 '두레방', 송탄의 '참사랑 쉼터', 용산의 '막달레나의 집' 같은 기관들은 그녀들에게 상담을 해주며 쉼터와 음식을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성교육과 직업교육을 시키면서 미군들의 악행과 비행이나 범죄행위에 대처하는 방법도 교육시켰다.

나아가 이러한 기관이나 단체들은 1991년부터 여대생들을 자원봉사자로 받아들였다. 여학생들이 주로 여름방학을 이용해 이른바 '기지촌활동'(기활)을 벌이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학생들은 미군 부대 주변 현실을 조사하고 공부하면서 조심스레 기지촌여성들의 의식을 일깨워주었다. 기지촌활동을 마친 뒤엔 미군 부대 주변의 현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그들이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시나 수필 또는 기사에 담아 책자를 만들어 배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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