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반미운동의 근원으로 1980년대 말부터 반전반핵 통일운동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미국이 한반도 통일의 걸림돌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 운동은 반미주의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들은 한반도 통일을 추구하고 미국의 내정간섭을 막기 위한 ‘반미 반전반핵 평화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을 다짐했다. 나아가 그들은 해방 50주년 분단 50주년인 1995년까지 적어도 한반도 통일의 첫 단계에 이르기 위해 주한미군 철수를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1990년대 초 시민운동의 발전에 따라 여성운동 단체들도 많이 생겨났는데, 그들의 활동이 여성문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한국의 가장 큰 여성운동 단체인 한국여성단체연합이 1993년 정한 주요 활동목표 가운데 하나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운동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이 단체는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패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평화적 통일을 향한 남북한의 접근을 막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따라서 여성운동 지도자들은 미국의 영향력을 거부하고 미국에 대한 남한의 군사적 종속을 끝내며 남북한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기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아마 1990년대 전반까지 평화와 통일운동과 관련된 한국여성단체연합의 가장 주목할 만한 활동은 군비 및 국방예산 감축을 위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이 단체는 <민주여성>이란 잡지에 한국의 군비증강에 반대하는 글 몇 편을 실었다. 이 가운데는 한국이 수입하는 무기의 85% 이상이 미국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을 지적하며, 한국이 근본적으로 미국의 압력 때문에 군비를 지속적으로 증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1993년 6월 국방예산감축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토론회를 열기도 했는데, 두 명의 회원은 미국이 북한으로부터 남한을 지키기 위한 것보다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패권을 지키기 위해 주한미군을 유지하기 때문에, 필리핀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도 미군기지에 대한 임대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미국에 대한 종속적 자세 때문에 임대료를 받기는커녕 가장 높은 해외 주둔 미군 유지비용을 부담한다는 것이었다.
1990년대까지 가장 강력하고 잘 조직된 민간 통일운동은 남북한 공동의 연례행사였던 범민족대회였다. 다양한 민주화운동 및 통일운동 단체들이 외세의 개입과 지배를 거부하며 민중의 힘으로 한반도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1990년 시작한 것이었다. 이 대회는 미국을 비롯한 외세로부터의 독립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통일운동을 대중화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에 따라 1993년 8월 열린 제 4차 대회에서 미국은 한반도의 평화를 막는 주범으로 정의됐다. 이때 배포된 팸플릿의 한 면엔 미국이 1945년부터 왜, 어떻게 한국 문제에 개입해왔는지 폭로했다. 다른 면엔 이 대회가 사진과 그림 전시회 그리고 노래와 마당극 공연 등을 포함한 다양한 문화 활동과 함께 전개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셋째, 한국인들은 쌀시장을 개방하라는 미국의 압력에 대대적으로 반대했다. 다음 두 가지 일화는 한국인들이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잘 보여준다. 1991년 말 농협이 ‘쌀수입 개방 반대 범국민 서명운동’을 펼쳤는데, 약 40일 만에 한국 전체 인구의 거의 3분의 1에 이르는 1300만 명이 서명했다. 이는 세계적 기록을 보여주는 '기네스북' 1991년판에 "가장 짧은 기간에 얻은 가장 많은 서명"으로 등재됐다.
그리고 1992년 말 대통령선거 운동 기간에 여당의 김영삼 후보는 대통령직을 걸고 쌀시장 개방을 단호하게 막겠다는 선거공약을 발표했다. 그로부터 1년 반 뒤 그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그 공약을 지키지 못하자 많은 한국인들은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며 쌀수입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1993년 3월 다양한 분야의 168개 단체들이 한국의 쌀시장을 지킨다는 목표를 세우고 '우리 쌀 지키기 범국민 대책회의'를 만들었다. 이 모임은 결성식에서 쌀이 한국인들의 주식으로서 "한민족의 피요 살이며 영혼"이라고 선언하며, 미국 정부에 600만 한국 농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쌀시장 개방에 대한 압력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나아가 미국의 압력에 항의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창립대회서는 미국이 1986년 9월부터 주도해온 이른바 '우루과이 라운드 무역자유화 협상'을 통한 미국의 압력에 대처하기 위한 토론회를 열었다. 또한 1993년 6월엔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과 공동으로 미국의 압력에 반대하는 홍보 포스터를 만들어 배포했다.
1993년 7월 전국농민회 총연맹 회원들은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서울 방문을 앞두고 이에 항의하는 단식 연좌농성을 벌이겠다고 발표했다. 쌀시장을 개방하라고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방한할 것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의 한국 방문을 반대하기 위해 문화 활동을 포함한 다양한 대중 집회를 계획하는 한편, 미국 정부가 한국을 미국의 영원한 식량 식민지로 만들려 한다고 비판하며 클린턴 행정부에 항의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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