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마저 대통령 편? "못살겠다" 호소, 국민 울렸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02> 조봉암과 진보당, 열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 번째 이야기 주제는 조봉암과 진보당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이야기 마당 4253] 5.16쿠데타

[이야기 마당 5462] 제3공화국


프레시안 : 조봉암은 1952년에 이어 1956년에도 대선에 출마한다. 1956년 대통령 선거는 현대사에서 결정적인 대선 중 하나로 꼽힌다.


서중석 : 1956년 5월 15일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여서 5.15대선이라고 불린다. 1956년 대선은 1971년 대선, 2002년 대선과 함께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멋지다고 할까, 중요했던 대선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세 선거에서는 모두 그전에는 볼 수 없던 참신한 선거 공약, 다양한 선거 운동 방식 같은 것이 출현했다. 그런 점에서도 민주주의가 상당히 살아나고 꽃을 피우는 면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이 세 선거는 박빙이었다. 누가 대통령이 될지 알기가 어려웠다. 예컨대 1971년에 박정희 후보가 당선될지, 김대중 후보가 당선될지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쉽게 알 수가 없었다. 2002년에도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 중 누가 될지 그야말로 선거 당일까지도 모르지 않았나. 1956년 선거 때는 '신익희가 살아 있었으면 신익희가 꼭 됐을 거다', 이런 소문이 많이 돌았고 '조봉암도 이승만과 박빙이었다'는 주장도 많다. 그런 점에서도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한 선거였다. 선거가 좀 그런 맛이 있어야 하지 않나. 이런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 우리 현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선거였다고 볼 수 있다.

민주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신익희가 나왔다. 조병옥이 대통령이나 부통령 후보로 나오려고 했지만, 장면을 미는 새로운 세력이 강했다. 이 세력이 나중에 민주당 신파가 되는데, 어쨌든 부통령 후보로 장면을 내세웠다. 진보당 추진위원회, 이제는 그냥 진보당이라고만 부를 텐데, 여기서는 대통령 후보로 조봉암, 부통령 후보로 서상일을 결정했다. 그러나 서상일이 반발하고 고사해서 부통령 후보가 박기출로 바뀌었다.

희대의 웃음거리 '우의마의 소동'과 800만 민의 동원

프레시안 : 이 선거에서도 관제 민의가 기승을 부렸다. 구체적으로 어떠했나.

서중석 : 이 선거에서는 시작하기 전부터 1952년 8.5 정부통령 선거 때 보였던, 있을 수 없는 방식의 사전 선거라고 할 수 있는 선거 운동이 이뤄졌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이라는 게 어떤 식으로 된 건지는 모두 알고 있었던 것 아닌가. 그걸 통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한다'고 해놨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1956년 3월 5일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유시(諭示)를 발표했다. 자유당에서 이날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추대했으니 이승만 대통령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건데도 그랬다. 유시라는 말도 참 기분 나쁜 말로 볼 수 있다. 국민들을 타일러서 국민들에게 알려준다는 뜻 아닌가. 이승만 대통령은 유시를 많이 발표했는데 이때도 유시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출마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러면 민의가 가만있을 수 없는 것 아닌가. 대한노총, 국민회, 부인회, 어민회, 참전전우회, 애련(애국단체연합회) 같은 단체들이 방방곡곡에서 앞다퉈 민의 출동을 했다. 제발 출마해달라며 궐기 대회를 열고 경무대(오늘날 청와대)에 쳐들어갔다. 이 대통령은 3월 10일 외국 기자한테 '국민이 강청하면 출마를 고려할 수 있다'는 뜻으로 얘기하면서 "나는 그들(국민)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생각으로서 자살을 원한다면 자살이라도 하겠다"고 했다. 세상에, 이런 발언을 하는 것도 참 어떻게 있을 수가 있나 싶은데, 이 민의 발동에서 제일 사람들을 웃긴 유명한 사건인 우의마의(牛意馬意) 소동까지 벌어졌다.

프레시안 : 속이 뻔히 보이는 방식으로 관제 민의 발동이 이뤄지고 현직 대통령은 자살을 운운하는 모습은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서중석 : 1950년대에는 우의마의, 사사오입, 그리고 이 대통령이 방귀를 뀌자 그 옆에서 한 각료가 이야기했다는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이 세 말이 참 인기를 끌었다. 우의마의 소동이 뭐냐 하면 대한노총에 소속된 우마차조합에서 3월 12일 우마차 800대를 동원해 시위를 벌인 것이다. 소하고 말조차 이 대통령의 출마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써 붙이고 다녔다. 그래서 서울 시내가 온통 소똥, 말똥으로 가득 차고 그 냄새가 지독했는데 정말 기가 막힌 일이었다.

이렇게 우의마의 소동을 벌이니까 전차도 가만있을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다음 날(3월 13일), 기계인 전차도 민의를 발동했다. 그래서 또 교통을 혼잡하게 만들었다. 3월 14일에는 마사회에서 마상 시위를 벌이고, 선거권이 없는 남녀 중·고등학생들도 비를 흠뻑 맞으면서 시위를 했다. 3월 15일에는 영화인·무대예술인협회 회원들과 댄서까지 막 동원돼 민의 발동을 했다. 이런 식으로 발동된 민의 시위 참가자가 500만 명으로 집계됐다.

그러자 마음 약한 이승만 대통령이 3월 20일 이런 발표를 했다. "보름이나 되도록 우설(雨雪)을 무릅쓰고 불철주야로 경무대 앞에 와서 호소하고 있어, 이를 보고 나로서는 견딜 수가 없으니, 지금부터는 이렇게 하지 말고 각각 글로 써서 보내주기 바란다." 그럼 이제 사람들은 연판장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연판 운동으로 300만 명 이상의 민의가 들어온 걸로 돼 있다. 탄원서, 혈서 같은 형태로 300만 이상이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이 대통령은 "내가 이에 불응하면 민중들이 다시 몰려올 것 같아서 민의에 양보하여 재출마하기로 결정하였다"는 성명을 생일 3일 전인 3월 23일에 발표했다. 재출마 담화를 발표할 때 이 양반은 또 기이한 소리를 했다. '대통령 후보 한 사람의 선거 비용으로 100만 환 이상 쓰지 못하도록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 이렇게 나온 것이다. 당시 100만 환이면 약간 큰돈이긴 하지만 그렇게 큰돈은 아니었는데, 간단히 얘기하면 다른 당 후보들은 돈을 못 쓰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프레시안 : 예전에 우의마의 소동에 관한 자료를 읽으며, 말 못하는 짐승들까지 그 덕을 흠모해 영웅을 도왔다는 식의 고대 신화들을 떠올린 적이 있다. 이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이 그런 것까지 생각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고대 신화의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일이 20세기 한국의 수도에서 벌어졌다는 건 여러모로 씁쓸한 일이다.

아울러 선거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관제 민의를 대규모 발동하는 것은 그러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조차 훼손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동원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승만을 찍지 않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서중석 : 민의 발동을 통해 동원한 800만(민의 시위 500만, 연판 운동 300만) 명은 당시 유권자의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대선에서 이승만이 실제로 득표한 504만 표보다도 대략 300만이나 더 많은 것이었다. 형식상으로 따지면, 민의 발동을 했으면 그 사람은 당연히 이승만을 찍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승만 대통령이 나오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망한다. 큰일 난다'고까지 주장하면서 민의 발동에 나섰던 것 아닌가. 그런데도 결과가 그랬다.

문제는 이런 선거 방식이 있을 수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건 1960년 3.15 부정 선거와 또 다르게 정말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사전 선거 운동이라는 것만으로도 얘기할 수 없는 수준이다. 사전 선거 정도가 아니라 이건 사람들을 동원해 그들로 하여금 찍도록 만들어버리는 것 아닌가. 국력도 참 많이 낭비하는 것이었다. 이건 아주 나쁜, 최악의 선거 운동 방식 아닌가. 그걸 1952년에 하더니만 1956년에 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고는 1960년에 가서는 다른 방식을 택하게 된다.

3월 28일, 정부는 5월 15일에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다음 날(3월 29일), 이 대통령 81회 탄생 경축식이 서울운동장에서 대대적으로 열렸다. 이 양반, 나이도 참 많이 자셨는데 이때 그런 행사가 열렸다. 남녀 고교생 수만 명이 참가해서 '우리 대통령', '대통령 찬가' 같은 노래를 하고 매스 게임을 했다. 서울뿐만 아니라 각 지방에서도 경축 행사를 했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사전 선거 운동이다. 다른 때와 달리 선거가 있는 때였으니까 이런 건 자제했어야 할 일인데, 이렇게 대대적으로 벌이는 걸 볼 수 있다.

▲ 자유당 대통령 후보 이승만과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선거 홍보물(1956년 4월 28일). ⓒ연합뉴스

후보 단일화를 둘러싼 줄다리기와 조봉암이 사퇴하지 않은 이유

프레시안 : 1956년 대선은 야권 후보 단일화가 핵심 사안으로 떠오른 대표적인 대선 중 하나다. 야권 후보 단일화 논의는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나.

서중석 : 정부통령 후보 등록 마감일인 4월 7일부터 선거에 돌입하게 된다. 선거에 돌입하기 전부터 이미 '야당은 단일화돼야 한다. 한 명이 나와야 이승만한테 이긴다', 그런 분위기가 감돌았다.

여기서 야권 단일화를 이야기하기 전에 조봉암이 출마하는 게 어떻게 가능했는가, 이걸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왜냐하면 1954년에는 국회의원 선거 출마조차 봉쇄되지 않았나.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할 수 없었던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을까? 이상하기 짝이 없지 않나.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조봉암이 나오면 신익희 표를 갉아먹을 수 있다. 그러니 이번에는 출마할 수 있게 하겠다', 그런 것 아니었겠나. 그래서 조봉암도 후보 등록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가운데 헌정동지회 쪽에서 '빨리 단일 후보를 세워야 한다'고 밀고 나갔다. 헌정동지회의 주요 인물은 조봉암과 가까웠던 송방용이었다. 조봉암 측은 '3개 원칙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양보하겠다'고 했다. 그 세 원칙은 책임 정치 구현, 수탈 없는 경제 체제 실현, 평화적 방법으로 남북 통일을 이룩할 것이었다.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이 드디어 들어가 있었다. 수탈 없는 경제 체제 실현, 이것은 다른 야당도 많이 주장했던 것이다.

프레시안 : 조봉암 쪽의 제안에 민주당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서중석 : 물론 이걸 민주당이 받아들일 턱이 없었다. 수탈 없는 경제 체제 같은 건 적당히 넘어갈 수 있지만, 다른 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 수 있었다. 민주당은 못 받아들이겠다고 나왔다. 그래서 깨진 것 같았는데 다시 장건상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무조건 연합 전선을 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서 김창숙, 이명룡을 비롯한 원로 18명이 야당의 행동 통일을 호소하고 나섰다. 그러니까 다시 신익희와 조봉암이 비밀리에 만났다. 여기서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핵심은 조봉암이 '내가 양보할 테니까 그 대신 당신이 이러저러한 것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고, 그중 하나가 '부통령 후보는 민주당이 양보해라', 이것이었다.

그런데 부통령 후보 문제는 신익희가 처리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하고 싶어도 안 되는 게 장면을 강력히 옹호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익희, 조봉암, 박기출, 장면 이렇게 네 명이 만나는 4자 회담을 열기로 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장면은 불참했다. 부통령 후보를 그만두지 않겠다는 걸 확실하게 한 것이다. 네 명이 모이기로 했다가 세 명만 모인 때가 4월 27일인데, 여기서 무언의 묵계가 오간 것으로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간단하지 않나. 조봉암이 '언젠가 내가 사퇴하겠다'는 것을 은근한 형태로 신익희한테 암시해줬을 것이다. 그러면서 5월 초에 다시 후보 단일화가 추진됐다. '이제 의견 일치를 보고 있다', 이렇게 신문에 보도되던 상황이었는데 5월 5일 신익희가 죽었다.

프레시안 : 그처럼 사퇴할 생각이 있었다면 일찍 사퇴해 야권 후보 단일화를 명확히 하는 게 더 좋은 방법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을 것 같다. 조봉암은 왜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인가.

서중석 :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건 1987년 6월항쟁 이후 치러진 13대 대선에서 진보 세력이 보인 모습과도 닿아 있다. 그때 백기완 후보가 독자 후보로 나왔다가 들어가지 않나. (당시 민중 후보로 출마한 백기완은 김영삼·김대중에게 야권 후보 단일화를 호소했으나 이뤄지지 않자 후보에서 사퇴했다. '편집자')

그때 그 양반도 바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 이유로 '우리 주장을 국민들에게 충분히 알린 다음에 들어가야 할 것 아니냐', 이런 게 많이 제시되지 않았나. 대선 후보한테는 TV를 통해 그 주장을 전국에 내보낼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1956년 선거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조봉암도 '들어가더라도, 우리 진보당의 입장을 최대한 알리고 나서 들어가야 한다', 이런 생각을 했으리라고 본다. 여기서 진보당의 입장이라는 건 조봉암 자신의 입장이기도 하다.

또 하나는 '내가 일찍 들어가버리면 오히려 신익희 후보한테 중대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차라리 나하고 경쟁하는 상태로 있는 게 신익희한테 도움이 된다', 조봉암이 이렇게 판단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뭐냐 하면, 신익희와 조봉암이 이 선거의 중반까지 선거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건 두 후보가 대립해 야권 표를 분산시킬 것이라고 이승만 쪽에서 봤기 때문이다. 그런 속에서 만약 조봉암이 일찍 사퇴하면 신익희도 선거 운동을 하기가 어려워지게 돼 있었고, 신익희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게 굉장히 어려운 논리이긴 한데, 조봉암이 일찍 사퇴하지 않은 데에는 이런 것이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국민들의 가슴을 울린 "못살겠다 갈아보자"

프레시안 : 선거 운동 기간 중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이 선거의 경우 선거 운동에서도 몇 가지 특징적인 점, 그 후에도 잘 안 나타나고 그 이전에도 없었던 현상이 몇 가지 있게 된다. 신익희가 한강 백사장에서 연설하는 그 유명한 유세가 있었던 5월 3일, 이승만 후보는 '나는 지방 유세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대통령 후보로 나왔으면 유세를 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이분은 사전 선거 운동은 해놓고 유세는 또 안 하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좀 찜찜했던지 논산 훈련소와 7개 역(논산, 대전, 조치원, 천안, 평택, 수원, 안양)의 플랫폼에 연단을 만들어놓고, 꽉 찬 군중 앞에서 계속 연설했다. 이건 유세가 아니라 연설인가 보다.

연설의 핵심은 "일본과 화동하여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발전케 하겠다든가 (…) 하는 것은 다시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겨도 좋다는 것", 이것이었다. "일본과 화동하여"라는 건 일본과 평화적으로 국교 정상화를 하자는 뜻일 터인데 신익희도, 조봉암도 이런 입장이었다. 일본과 불필요한 충돌을 해서는 안 된다, 가능하면 서로 좋은 관계를 맺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두 사람의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이승만 대통령은 주로 신익희를 겨냥해 이야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54년 5.20선거를 앞두고 이 대통령이 친일파에 대한 괴이한 담화를 발표했다고 지난번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러한 이 대통령이 이때는 '지금 일본과 화친하자고 하는 자가 진짜 친일파'라는 식으로 규정한 것이다. 또 이 대통령은 이 연설에서 "공산당과 싸우지 않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하겠다든가 하는 것은 (…) 소련을 조국이라고 하는 류의 언동이다", 이렇게 규정했다. 이건 조봉암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신익희 후보와 조봉암 후보를 색깔로 몰아치는 연설을 이분은 계속하고 담화로도 발표했다.

▲ 1956년 정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벽보(2008년 고려중앙학원 중앙고의 인문학 박물관에 전시된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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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대선에서는 그 후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구호가 탄생하기도 했다.

서중석 : 이 선거에서는 놀랍게도 선거 구호가 큰 영향을 줬다. 민주당에서 내건 "못살겠다 갈아보자", 이게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말처럼 국민들의 가슴을 진심으로 울리는 말이 없었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정말 못살겠다. 그러니 갈아보자', 이 얘기였다. 그야말로 대단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인기를 모았다. 자유당은 이것에 대항해 "갈아봤자 더 못산다", "갈아봤자 별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다" 같은 것들을 비롯한 여러 구호를 정하고, 나름대로 묘안이라고 여겨 각지에 포스터 같은 걸 덕지덕지 붙였다. 하지만 "못살겠다 갈아보자", 이것 앞에서는 아무 효력이 없었다.

자유당은 서울, 부산, 대구 같은 대도시에서 정말 인기가 없었다. 정부통령 선거 운동을 하기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다.

예컨대 서울 같은 경우 4월 16일에 3당 선전부장 합동 정견 발표회가 있었는데 그때 민주당과 진보당의 두 연설자는 만당(滿堂)의 박수를 받았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자유당의 황성수가 등장하자 "우우우" 소리가 터져 나와 말문을 막아버렸다. 이 정도로 대도시에서는 이승만, 이기붕 후보의 인기가 나빴다. 선거 운동을 하기도 힘들고, 자유당 노릇을 하기도 참 이때는 힘들었다.

그와 달리 민주당이 5월 3일 한강 백사장에서 대통령 선거 유세를 했을 때 20만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당시 <동아일보>는 30만이라고 보도했다. 유세장에 이렇게 많이 모인 건 1971년 김대중 후보의 장충단 유세 이전까지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장충단 유세에 와서 이 기록이 깨진다. 그 정도로 신익희 후보는 대단한 인파를 모으며 전국을 흥분시켰다. 그래서 민주당은 '이 기세를 몰아 호남에 가서 또 선거 바람을 일으키자', 이렇게 했는데 5월 5일 새벽 이리(오늘날 익산)에 조금 못 미쳐 함열 부근에서 신익희 이분이 갑자기 사망했다.

진보당도 인기가 좋았다. 4월 14일 서울 수송국민학교에서 조봉암이 정견 발표회를 했을 때는 심지어 <동아일보>조차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얘기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동아일보>는 당시 진보당 쪽에 대해 아주 안 좋게 쓴 경우가 많은데도 그랬다.

"조봉암보다는 이승만", 민주당의 극우 본색

프레시안 : 선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선거 자금 문제다. 각 당의 사정은 어떠했나.

서중석 : 자유당은 막대한 선거 자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와 달리 민주당은 어느 정도만 갖고 있었을 뿐이고 진보당은 거의 없었다. 한 신문은 이렇게 표현했다. "벽보전을 가지고 비유한다면 자유당은 비행기, 민주당은 버스로 하고 다니고 진보당은 지게일지 모른다." 비행기, 버스, 지게로 세 당이 당시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이승만 정부는 4월 15일에 또 이상한 조치를 했다. 정치 자금으로 은행 돈이 나가는 걸 방지한다는 구실로 5월 15일까지 모든 은행 대출을 중단시킨다고 했다. 야당의 자금줄을 봉쇄하려고 그런 조치까지 했다.

어쨌건 신익희가 죽었으니까 이제 야당 후보 단일화는 자동적으로 됐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민주당이 그런 당이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신익희 후보가 죽자 그다음 날 바로 민주당은 "본당 이외의 대통령 후보자는 정치적 행상(行狀)이나 노선으로 보아 그 어느 편도 지지할 수 없다"면서 조봉암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것을 천명했다. 김준연은 심지어 "조봉암을 지지할 수는 도저히 없으므로 이승만 박사를 지지해야 한다"고까지 천명했다. 1952년 8.5 정부통령 선거 때도 이와 비슷한 반응을 민국당이 보이지 않았나.

이런 속에서도 헌정동지회라든가 야당 연합을 주장했던 여러 원로와 정치 세력들은 야당 연합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창숙 같은 분은, 정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조봉암을 지지하겠다"고 했다. 야당 연합을 그런 식으로 제대로 하지 않는 건 말이 안 되고 원칙에 어긋난다면서 김창숙이 그렇게 얘기하는 걸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민주당의 극우 반공적 성격이 이 문제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났다는 생각이 든다. 야권 후보 단일화 문제에 대해 진보당은 민주당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서중석 : 5월 9일 진보당은 박기출을 부통령 후보에서 사퇴시켰다. 발표된 득표 숫자만 놓고 보면 장면은 20만여 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부통령에 당선된다. '20만여 표 차이 승리라는 건 박기출 사퇴 때문에 가능했다', 단적으로 이야기해서 그렇게 볼 수 있다. 박기출이 사퇴함으로써 장면이 당선될 수 있는 중대한 이변,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개표 때 진보당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참관인을 거의 내지 못했고, 참관인으로 들어갔더라도 바로 쫓겨났다. 그러면 민주당이 적어도 조봉암 대통령 후보 표는 지켜줬어야 할 일인데 전혀 지켜주지 않은 것으로 돼 있고, 어떤 글에는 음모론까지 나온다. 자유당과 민주당이 모의를 했다는 주장이다. (박기출은 자유당과 민주당이 부통령 표는 그대로 처리하고 대통령 표는 선거 관리인에게 일임하기로 모의했다고 주장했다. '편집자') 극우적 성향이 있었던 보수 세력들이 얼마만큼 혁신 세력, 진보 세력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이 선거라고 얘기할 수 있다.

신익희가 죽은 직후부터 이 선거는 분위기가 싸늘하게 돌아갔다. 그러면서 조봉암 쪽에서는 선거 운동을 하기가 굉장히 힘들게 됐다. 충남, 강원 같은 데서는 유인물을 뺏기고 테러를 당하고 경찰한테 경고를 받고 쫓겨 오기도 했고, 경북도당 선전부장이 괴한들에게 납치돼 고문, 폭행을 당해 실신하는 일도 벌어진다. 이렇게 되니까 조봉암이 5월 11일경부터 소재를 밝히지 않는 상태에까지 이른다.

조봉암 득표수에 놀란 자유당, 장면 부통령 당선에 그야말로 초상집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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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도 아닌 후보 본인조차 선거 운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은 이승만 정권이 어떤 정권인지를 상징하는 사례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내몰린 속에서도 조봉암은 상당히 많은 표를 모았다. 오늘날까지 어떤 진보 정당 후보도 이 시기 조봉암만큼 많은 득표를 하지 못했다는 점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서중석 : 이 선거 결과는 자유당, 이승만 대통령, 그리고 민주당을 포함한 모든 보수 세력을 그야말로 놀라게 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발표된 선거 결과만 놓고 보면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504만 표, 조봉암은 216만 표를 얻었다. 민주당에서는 조봉암을 지지하지 않고, 지지자들에게 추모 표를 찍으라고 했다. 추모 표는 100퍼센트 무효표다. 한마디로 사표다. 그래서 이 무효표의 대부분은 신익희 지지표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게 역시 많았다. 185만 표로 집계돼 있다. 그래서 조봉암과 신익희의 표를 합치면 이승만 표에 육박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고 그랬다.

더 놀라운 것은 서울의 경우다. 투·개표 부정을 제일 못하는 곳이 서울로 돼 있었는데, 60만 투표자 가운데 이승만 표가 20만 표, 조봉암 표가 11만 표, 신익희를 지지했다고 볼 수 있는 무효표가 28만 표였다. 세상에, 그토록 '위대한 지도자'라는 이승만이 죽은 신익희보다도 많이 떨어진 것이다. 이렇게까지 떨어질 수 있느냐 싶을 정도로 이승만 쪽으로서는 참담한 결과였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이 선거에서 조봉암이 얻은 표와 이승만이 얻은 표가 논란이 많이 된다. 하여튼 이승만은 이 선거를 겪고서, 마치 1971년 선거를 겪고 박정희가 유신 체제로 막 달려간 것과 똑같이 이제는 어떤 식으로 선거에 임할 것인가를 새롭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프레시안 : 이승만 정권을 곤혹스럽게 한 건 조봉암의 선전만이 아니었다. 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이 이기붕을 꺾은 것도 이승만 정권으로선 큰 타격이었다.

서중석 : 장면이 승리하자, 이 대통령도 굉장히 분노가 컸겠지만 자유당은 그야말로 초상집이었다. 사사오입 개헌 때라도 늦게나마 러닝메이트제를 넣었으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사오입 개헌 때 러닝메이트제를 넣었으면 아마도 국민 대다수 그리고 야당까지도 대부분 찬성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러닝메이트제를 그때 넣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이 승계한다'는 것을 사사오입 개헌 때 명문화해버렸다.

아 그런데 노인네 죽는 것하고 가을 날씨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승만은 이때 만 81세였다. 그 당시는 우리나라 전체를 가지고 이야기해도 그 정도로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얼마 안될 때다. 그러니 자유당이 얼마나 강한 위기감을 느꼈겠나. '이거 정말 큰일 났다. 이러다 장면한테 정권을 송두리째 넘기는 것 아니냐' 하는 위기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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