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진보정당, 전혀 새롭지 않아 보이는 이유

[민교협의 정치시평] 새정치연합은 새누리당의 2중대? 진보정당은?

영국이 시끄럽다. 작년 9월에는 스코틀랜드 독립을 둘러싸고 큰 홍역을 치렀었다. 올해는 5년 만에 치러진 총선에서 보수당이 과반을 15석 넘긴 다수당으로 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보수당 정부 아래서 재정지출 삭감이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고 불만이 쌓여서 박빙의 승부가 될 것이라는 여론 조사결과로 열기가 달아올랐지만, 결과는 허무했다. 2010년 총선에서 과반을 넘기지 못한 보수당의 연정 파트너였던 자유민주당은 고작 8석(2010년에는 57석)을 얻어서 군소정당으로 몰락했고 노동당은 232석(2010년에는 258석)을 얻는 데 그쳤다.
자민당의 몰락은 스스로 가지고 있었던 선명야당, 인권과 평화를 기치로 내건 민주주의 정당이라는 색깔이 보수당과의 연정을 통해 사라져 버린 것의 결과였다. 독이 든 잔을 마셔 버린 것이다. 노동당의 참패에는 보다 복합적인 원인이 작동했다. 표면적으로는 스코틀랜드민족당(독립당, Scottish National Party)의 약진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스코틀랜드는 보수당이 발붙일 수 없는 노동당의 아성이었다. 하지만 민족주의라는 수식어와는 어울리지 않게 사회민주주의적인 스코틀랜드민족당이 56석을 획득함으로써 노동당은 치명상을 입었다. 이것은 단순히 독립을 둘러싼 논쟁에 의해 강화된 스코틀랜드의 민족적 정서로 돌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노동당이 보수당의 프레임, 더 길게는 대처-블레어주의라고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적 합의를 깨고 나가지 못한 것이 더 큰 문제였다.
토니 블레어(Tony Blair)와 고든 브라운(Gordon Brown)이 이끈 13년 동안의 신노동당 정부가 남긴 유산은 대처가 시작했던 신자유주의를 중도좌파의 이름으로 완성한 것이었다. 형식적으로 그 전의 보수당 18년보다 재정지출을 늘리고 복지를 확대했지만, 내용상으로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생활 곳곳에까지 시장의 원리를 전파시켜 대처주의를 완성시키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급기야 미국에 동조해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것에서 시작된 노동당 지지자들의 환멸과, 블레어를 흉내 내기 시작한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의 보수당 현대화 전략으로 차별성을 잃게 됨에 따라 2010년 총선에서 패배하게 된다. 노동당은 이에 대응해 블레어-브라운의 노선에서 비켜있었던 에드 밀리반드(Ed Mliband)를 당수로 밀어 올린다. 그는 빨갱이 에드(Red Ed)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노동당 당권파들이 즐겨 사용하는 전형적인 노동당 정치였다. 당의 위기 상황에서 중도 좌파를 내세워 위기를 무마하는 것 말이다. 당의 변화를 모색하기 보다는 낡은 틀을 유지하기 위한, 오히려 더 오른쪽으로 이동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의 성격이 강했다. 출발부터 빨갱이 에드는 노동당 기성정치의 포로였다.
좌파 이론가 마이클 러스틴(Michael Rustin)은 2015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철저하게 보수당의 프레임에 갇혀 있었다고 비판한다. 보수당은 현재 경제위기의 원인이 신노동당정부의 방만한 재정운영 탓이라는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노동당은 이에 대해, 즉 위기의 원인에 대해 논쟁하거나 경제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을 밀고 나갈 수 없었다. 여전히 대처-블레어가 주조한 신자유주의적 역사블록(neo-liberal historic bloc)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보수당-노동당이 공모해서 유지하고 있는 '헌정적' 질서에 머무는 한 보수당을 이기기 어려웠다. 하지만 노동당은 그 '헌정적' 질서를 깨고 나갈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이제 정치는 정책 대결이 장이 아니게 되었다. 정치는 마케팅일 뿐이었다. 대중적 토론과 동원이 아니라 제한된 공간에서 정치라는 상품을 판매하는 마케팅 말이다. 합리적인 토론보다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내고 서로를 물어뜯는 미디어 정치가 있을 뿐이다. 보수당 수상 캐머런은 에드 밀리반드의 맞대결을 교묘하게 피하면서 모든 책임을 노동당으로 돌리는 선거 전략을 선택했지만 노동당은 이에 맞서기 위한 대중적 동원과 토론을 주도할 계획도 의지도 없었던 것이다. 이미 고인이 된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의 '(시장 말고는)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는 외침이 맴 돈다. 노동당은 보수당의 재정지출 삭감, 복지 축소에 반대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은 없다. 자본주의적 질서를 넘어서는 계획을 머릿속에 담는 것도, 그것을 위해 대중의 불만에 호소하고 행동을 요구하는 것도 이미 '불가능해진' 대안일 뿐이다.
이 정도의 어정쩡한 주장으로 민족주의가 사회민주주의 노선과 결합되어 있는 스코틀랜드민족당과 경쟁해서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당기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오히려 좌파가 있어야 할 장소를 비어 두면서 극우민족주의 정서가 득세하도록 방조하고 말았다. 보수당의 지지층을 뺏어 와야 한다는, 중도를 향한 '환상'은 전통적인 노동당 지지층을 와해시켜 버렸다. 토니 블레어는 여전히 충분히 가운데로 가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말이다. 노동당의 우경화는 왼쪽에 빈 공백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1위 득표자만 당선되는 완벽한 소선거구제가 가지는 비민주적 성격은 비판적 소수정당이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렸다. 대처-블레어주의에 의해 고통 받는 민중은 자신들을 대변할 정치세력을 찾지 못한다. 종종 극우 민족주의의 선동에 마음이 쏠린다. 나의 일자리를 뺏어가는 외국인들에 대한 적대감이 굳어진다. 그리고 이런 우경화의 과실을 따 먹는 것은 보수당이다.
블레어는 대처가 전후 복지국가의 합의를 파괴할 때 사용했던 경쟁과 성취의 이데올로기를, 영국사회를 신자유주의적으로 개조하는 데 그대로 투영했다. 그래서 대처-블레어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캐머런은 당원의 굳건한 지지가 아니라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에 의존하는 블레어 스타일을 학습했다. 그리고 이제 양당은 왼쪽은 지리멸렬한 군소 좌파들에게 남겨 두고 오른쪽에서 만나 동맹을 구축한다. 서로를 좌파로, 그리고 우파로 불러주어 좌우파 놀이를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복지국가 시절에 가졌던 안정된 미래를 상실한 대중의 불만을 먹고서는 극우파들이 번식한다.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 전혀 새롭지가 않다
영국 총선 결과를 보면서 한국정치를 돌아본다. 우리도 오른쪽에 모여 있는 두 정당의 좌우파 놀이에 정치적 왼편이 공동화되는 현상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차이는 있다. 한국의 좌우파 놀이는 두 개의 정당이 아니라 세 개의 정치세력에 의해 '공연'된다는 것이다. 이 세 번째 세력은 불행히도 분열되어 있는 진보정당들이다.
필자는 넉 달 전 진보세력 통합을 기치로 출범한 국민모임에 우려와 동시에 기대를 표명한 적이 있다. 지금까지 보여준 진보세력의 모습은 신뢰를 얻기 힘든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에 동참해야만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리고 지난 4월 보궐선거에서 보여준 진보정당'들'의 모습은 우려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진보정당이 보여주어야 하는 '새로움'이나 '신선함'은 찾아 볼 수 없었고 기존 정당들보다 더 구태의연한 모습에 화가 나기도 했다. 길고 험난한 진보정당 '건설'을 과제로 하기보다는 유명 인사를 앞세워 인지도를 높이려는 질 수밖에 없는 길을 가려 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이 현실 정치를 모르는 순진한 발상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것이라면 굳이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하겠다면서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말고 차라리 새정치민주연합의 품으로 투항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그리고 이제 노동당, 노동정치연대, 국민모임, 정의당이 4자연대를 선언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을 새누리당의 2중대라고 선언하고 대안적인 정당으로서의 진보정당을 건설하겠다고 천명했다. 네 개 단체의 대표들 명의로 발표된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공동 선언'은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고 자유・평등・생태・평화・연대의 가치가 실현되는 노동존중의 대안사회 건설"을 추구하겠다고 선언했다. "보수정치세력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발전 노선을 견지"하겠다고도 했다. "최저임금 1만원으로의 인상과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 노동 존중 사회 실현," "공공보육・공공의료・공공교육 등 보편복지 확대와 이를 위한 조세정의 실현" 등도 내세웠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 등 분단체제 극복과 평화체제 구축 "과 "핵발전소 단계적 폐지"도 주장했다. 모두 중요한 의제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새롭지 않다. 진보정당 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라면 수도 없이 들었을 이야기다. 진보정당들이 당연한 주장, 반드시 실현되어야 할 주장마저도 식상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건설 운동을 의심의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이유는 진보세력이 반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새정치민주연합으로 대표되는 시장자유주의 세력에게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 반성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새누리당의 2중대라고 힐난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새정치민주연합의 2중대 역할을 했던 것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는다. 말로 새정치민주연합을 비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새정치민주연합도 말로는 새누리당을 비판하고 있지 않은가?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어 의회에 진출하고서부터 진보정당은 저항해서 깨트려야할 지배 이데올로기인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재생산하는데 앞장섰다. 낡은 '그들만의' 정치를 넓혀내고 민주주의를 급진화하기보다 국회의 갇힌 소수의 정치를 앞장서서 옹호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기존 정치세력과 대결해서 넘어서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표를 얻기 위해 '그들'을 닮아 가는 것. 이제 근본적 질문에 직면한다. 이럴 거라면 진보정당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동안 극우파(보수가 아니다)는 시장자유주의자들을 좌파라고 불렀고 그래서 자신들이 공감했던(어쩌면 앞장서서 추진했던)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빈부격차의 확대를 좌파의 실패라고 불렀다. 희대의 사기극이었다. 국민을 상대로 한 이 사기극의 또 다른 주인공은 좌파로 낙인찍힌 세력이다. 시장자유주의자들은 좌파라고 불리는 것을 적극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믿고 싶었던 사람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이 좌우파 놀이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때 좌파는 무엇을 했나? 허구적(사기에 다름 아닌) 좌파-우파 논쟁에 의해서 공백지대로 남았던 '왼쪽'을 개척하려고 하기 보다는 현실에 안주함으로써 좌우파 놀이가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데 일조했다. 신자유주의에 따른 경제정책의 실패에 '좌파'의 낙인이 찍혔지만 이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대안적인 정치를 말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추상적인 구호 외치기 말고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들은 (허구적으로 만들어진) 좌파(시장자유주의자들)에 대해서 신물이 났다. 그들이 외쳤던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짜증이 났다. 민주주의가 가져다 준 것은 팍팍한 살림살이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어도 돈만 잘 벌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쯤 되면 진보정당은 지금은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간판을 걸고 있는 시장자유주의자들의 2중대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 것이다. 새누리당과 비교하면 새정치민주연합이 진보적이라고 믿(고 싶)었던 시민운동과 손잡고 '저들'이 벌려놓은 놀이판에 허용된 작은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좌파는 스스로 지배이데올로기가 그어 놓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수용했다. 정치를 엘리트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낡고 고루한 생각을 앞장서 재생산했다. 자신들만이 진정한 좌파라고 생각하고 민주노동당을 깨고 나왔던 진보신당의 지역구에 내걸렸던 현수막에 써진 말은 "제2의 노회찬, 심상정을 만들어 주십시오"였을 뿐이었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가진 것도 많지 않은 진보정당 내부의 갈등은 국민들을 실망시켰다. 흔히들 이념 논쟁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념 논쟁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권력을 두고 벌인 이권 투쟁이었을 뿐이다. 한편에서는 자신들의 보수적 성격을 숨기기 위해 낡은 냉전시대의 의상과 전투구호를 빌려온 집단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자신들의 실력 없음을 상대편에 전가함으로써 무능을 감추려 했던 집단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 무능은 민주노동당을 깨고 나오면 절반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계산'에서 정점을 찍었다.

새로운 진보정당을 만들겠다고 나선 그 어떤 세력도 이러한 잘못에 대해서 반성하지 않았다. 오류는 상대방 때문이고 조건 탓일 뿐이다. 그리고는 이제 다를 것이라고 얘기한다. 믿어달라고 얘기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4자 연대가 여전히 '적'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새로운 진보정당, 뿌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4자 연대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질 새로운 진보정당은 조급하지 말아야 한다. 진보정당이 갈 길은 멀고 험하다. 긴 싸움이 앞에 기다리고 있다. 망가진 좌파를 정치적으로 복원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역에서부터, 뿌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미 존재하는 거대한 나무뿌리에 기생하려는 잘못을 또 다시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풀뿌리의 지역 정치는 완성된 모습으로 좌파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 그것은 오랜 시간을 통해 만들어져야 하는 목표인 것이다.
풀뿌리의 정치는 추상적 구호로 성취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충족되지 못한 필요가 있는 곳에 함께 있어야 한다. 충족되지 못한 필요를 체험 할 때 사람들은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이데올로기와 엇나감을 체험한다. 그러나 이런 탈구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래서 진보정당은 탈구'들'을 개별적 경험으로부터 집합적인 경험으로 이끌어 내어 저항으로 발전시키고 그것을 대안적인 정치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 탈구'들'이 발생하는 수많은 곳에서 '다르게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불가능'의 경계는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강요한 허구라는 사실을 체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진보정당은 민족과 국가라는 '적대 없는 연대'를 강요하는 지배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워야 한다.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이데올로기를 넘어 '적대를 통한 연대'를 구성해야 한다. '저들'과 '우리'를 가르는 적대가 없이 진보정당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정치적 연대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풀뿌리로부터 '적대를 통한 연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선거정치에 일희일비 하지 말아야한다. 선거정치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풀뿌리로부터 시작하는 '적대를 통한 연대'의 결과로 얻어져야 하는 것이지 목표가 아니다. 선거를 위해 모든 것을 투입하는 정치는 '저들'의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두는 자살행위다. 제도정치 바깥의 저항 에너지를 제도 안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수많은 작은 길을 만들고 그 힘으로 제도정치 안의 빈틈을 헤집고 들어가 그것을 변형하는 정치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저들'의 주장처럼 게임의 규칙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정치주체를 형성하는 원리이며 지속적인 변형의 원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진보정당은 대의하는 정당이 아니라 정치적 주체를 만드는 정당이어야 한다. 정책을 개발하되 일상의 충족되지 않는 필요들을 드러내고 그것을 논쟁거리로 만들어 고립된 개인으로서의 시민이 집합적 (정치적)주체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정책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윤곽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지배이데올로기의 노예다. 지배이데올로기가 가능하다고 허용하는 것만 본다. 그래서 지금 존재하는 시장과 국가를 변형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할 수 있는 것은 시장과 국가가 조금 더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꼴을 갖추게 하는 것뿐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지배이데올로기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쳐다보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 대해서 상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에 그어진 허구적 경계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자본의 지배와 권력의 지배를 옹호하는 집단들을 결코 이길 수 없다. 대처-블레어 노선이 만들어낸 '시장에 대안은 없다'는 선언과 극우파-시장자유주의의 공모에 의해 만들어진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은 닮았다. 블레어가 했던 것을 김대중과 노무현이 했던 것이다. 이제 진보정당은 이 공모를 부수고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해서 혹독해야 한다. 그럴 용기가 없다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진보대통합을 통해 만들어질 새로운 진보정당은 그런 용기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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