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를 계몽 대상으로 보는 당신이 '속물'!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40> '계급 배반'은 정작 누가 하는가

4.29 재보선 이후 지식인 사이의 화두는 '계급 배반 투표'인 것 같다. 아니 그것은 2012년 18대 대선과 작년 세월호 참사 이후 일련의 선거에서 지속적으로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이 주제는 최근 번역 출간된 리처드 솅크먼의 <우리는 왜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에서 '어리석은 유권자'로 변주되고 있었다. 유권자들이 정치꾼들과 미디어의 여론 몰이에 휘말려 감정적인 투표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의 계급 이익에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하곤 한다는 것이다. (관련 기사 : 유권자는 현명하다? 박근혜 대통령 만든 한국은?)

이런 논의를 보다가 문득 광해군을 '혼군(昏君)', 즉 어리석은 임금으로 비난한 조선 시대의 지식인들 생각이 났다. 민주주의 한국의 주권자가 유권자 국민이라면 조선 시대의 주권자는 군주였다. 두 시대의 지식인들이 공히 자신의 주권자가 어리석다는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셈이다. 한 사회의 주인인 주권자가 어리석다니, 이건 그 사회를 위해 정말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조선 시대의 지식인들은 이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군주를 몰아내고 새로운 군주를 세우는 반정(反正)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주권자가 아무리 어리석어도 그를 갈아치울 수 없다. 어떻게 국민 전체를 통째로 갈아엎을 수 있겠는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고, 국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개별 지식인이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했다가 병자호란이라는 벼락을 맞은 조선 시대 지식인의 어리석음이 현대 한국에서는 원천 봉쇄될 수 있으니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대체 불가능한 주인을 가졌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가히 역대 최강의 정치 체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유권자는 정말 어리석은가

문제는 정말 유권자가 어리석은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나 선거 제도에 대해 일말의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선거에서 무책임하고 부패하고 부정직한 정치 세력이 승리하는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스는 선거에서 승리한 뒤 이를 밑천 삼아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도 국민투표에서 승리한 뒤 자행되었다. 2000년에 나온 <우리 안의 파시즘>은 이런 현상을 지적하며 결과적으로 '어리석은 유권자'론을 펼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선거는 이렇듯 종종 정의나 도덕과 어긋나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부도덕한 정권에 권력의 정당성을 선물하기도 한다. 어떤 정치 세력이든 일단 그와 같은 유권자의 지지를 얻게 되면 전제 군주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다. 왕정 시대의 '천명(天命)'이라는 신비주의적 명분보다는 선거 결과에 집약되어 있다고 전제되는 국민의 일반의지가 훨씬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7.30 재보선 이래 선거판을 장악한 집권 세력은 속으로 이렇게 되뇌고 있을 것 같다. '권력 그놈, 참 쉽네!'

이 같은 역사를 볼 때 유권자가 어리석은지는 모르겠으되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에 대한 리처드 솅크먼의 해법은 유권자가 미디어의 선동에 무지한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직시토록 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과 토론의 장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어리석은 국민을 계몽하자는 이야기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역사 속에서 이러한 계몽주의가 소기의 성과를 거둔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서구 사회를 근대로 이끄는 데 한몫한 계몽주의자들의 신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대중을 무지로부터 구출하자. 그들이 몰라서 그렇지, 알기만 하면 들고일어나 세상을 바꿔 놓을 것이다.' 여기서 대중의 무지라는 것은 극소수의 특권층이 종교를 무기로 대중의 눈을 가리고 억압한 데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그러나 계몽주의자들이 신분 질서의 진실을 폭로하고 대중을 계몽하려 무진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때로 봉건 세력의 편에서 계몽주의 지식인들을 탄압하는 데 동조하기도 했다. 대중이 떨쳐 일어난 것은 세상이 잘못되어 있음을 깨달았을 때가 아니라 그 세상에서 도저히 더 이상은 살 수 없을 만큼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할 때였다. 즉 '지식'이 아니라 '이해관계'가 대중을 행동으로 이끈다. 그리고 그들이 일단 일어나면 지식인 따위가 머릿속으로 그려 대는 것과도 비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변화를 실현해 내곤 한다.

그럴 때 대중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지식인은 '인문학'을 무기로 한 계몽주의자가 아니라 대중과 함께하는 '행동하는 지식인'들이었다. 독일농민전쟁에 뛰어들어 이를 주도한 토마스 뮌처, 겁에 질려 이를 반대하고 탄압한 마르틴 루터, 그리고 독일농민전쟁의 계기가 된 종교개혁 자체를 부정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와 토마스 모어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남의 나라 이야기라서 어렵다면 19세기 말 조선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살펴보기만 해도 된다. 당대의 '인문주의적' 지식인들은 개화파와 위정척사파를 막론하고 동학농민군을 동비(東匪)라 혐오하며 너도나도 의병을 일으켜 진압에 나서지 않았던가?

▲ 18대 대선 당시 투표 모습. ⓒ프레시안(최형락)


어리석은 유권자를 탓하는 지식인과 맹자의 '항심론'

그렇다면 계몽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알아서 일어나던 대중이 정작 선거라는 주권 행사의 강력한 무기를 획득하자 왜 그 무기를 엉뚱한 쪽으로 휘두르곤 하는 걸까? 이런 행동 양식 또한 그들의 이해관계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지식인 등 개인이 아닌 총합으로서 국민 대중은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게 자신의 이해관계를 드러낸다. 따라서 선거에는 건강하든 병적이든 한 시대 한 사회의 전반적인 상태가 정확히 반영된다. 이는 계몽된 대중이냐 아니냐의 차원을 넘어선 근본적인 문제이다.

맹자는 '오직 사(士)만이 무항산(無恒産)이라도 유항심(有恒心)'이고 '민(民)은 무항산이면 무항심(無恒心)'이라고 했다. 백성은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갖지 않고 오직 지식인만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늘 올곧을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유교 정치의 핵심을 꿰뚫는 통찰이 담겨 있지만, 정작 그러한 지식인의 '항심'이 민의 '항산'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되고 있다.

오늘날 유권자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는 지식인들의 태도는 바로 저 맹자의 '항심론' 단계에서 머물러 있는 셈이다. 아니, 오히려 그만 못하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어리석은 유권자들은 왜 무항산이라도 유항심하지 않는가'라며 투덜대는 꼴이기 때문이다. 근대적 정신은 이처럼 이해관계를 초탈한 경지에 있다고 착각하는 지식인을 가리키는 적합한 표현을 알고 있으니, 바로 '속물'이다.

'항산'은 꼭 경제적 안정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유권자들은 세상 돌아가는 온갖 양상을 보면서 투표하거나 투표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표출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 편인 정당에 투표하는 것이 어떻게 그들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가 하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에는 주인으로부터 버림받고 싶지 않고 세상이 요동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노예의 이해관계'가 늘 있어 왔다. 그런 이해관계는 세상이 어떻게 되든 크게 신경 안 쓰는 '자유인의 이해관계'보다는 더 강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그리고 특정한 계기에서 폭발력을 발휘하는 '해방 노예의 이해관계'는 오늘날 이른바 유체이탈 상태에 놓여 있다.

물론 선거가 대중의 이해관계를 반영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선거 결과가 왜곡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성립하는 말이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결과를 조작하려고 했을 때 대중이 어떻게 나올지는 이미 4.19혁명 등의 역사적 경험이 충분히 보여 준 바 있다.

대중 탓하기 전에 지식인 자신의 이해관계부터 분명히 해야

오늘날 지식인을 포함한 사회 지도층의 의무는 '어리석은' 대중을 계몽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야말로 어떤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분명히 하는 데 있다. '나는 어떤 계급에 속하는가? 나는 정말 정의와 가난한 자의 편인가, 아니면 그렇게 착각하고 있을 뿐인가?' 링컨의 말마따나 총합으로서 대중은 어떤 거짓 선동에도 속지 않고 그 어떤 개인보다도 더 세상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가졌다.

지난 선거에서 패한 야당의 정치인이나 그들을 지지하는 지식인들을 한 번 보자. 그들이 혁신을 주제로 내놓는 논의들을 보면, 자신들의 정체성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인적 쇄신만 제대로 하면 다시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태도가 엿보인다. 과연 일부 지지자가 아닌 일반 국민의 눈에도 그것이 사실로 다가올까? 기존의 틀에 젊고 참신한 인물을 채워 넣는 것도 좋지만, 이 정당이 과연 자기들 말처럼 서민과 중산층의 편에 서 있는지 그것부터 성찰해야 하는 것 아닐까?

대중은 충분한 계기만 주어지면 당신이 뮌처인지 루터인지 한눈에 알아볼 것이다. 역사가 증명하듯 그때에 이르면 이 '어리석은' 유권자 대중은 상상을 뛰어넘는 힘을 보여 줄 것이 틀림없으니, 일부 '속물' 지식인은 그들을 걱정할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 좋겠다.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역사에 비추어 오늘을 살피는 기획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의 의미를 새겨 보았으나 새해부터는 현대 한국 사회의 현안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되새겨 볼 예정이다. 필자는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사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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