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月 수입 5000만 원, '레진'은 축복이다!"

['레진'은 어떻게 성공했나·上] "작가에게 퍼줘라"

잘 익은 종기가 툭 터지듯, 대박이 나버렸다. 대학에 다닌 적도, 취업을 한 적도 없었던 청년. 돈벌이 경험이라곤, 일본 맥도날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가끔 기고를 한 게 전부다.

하지만 그에겐 강력한 재산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팬덤'. '레진'이라는 이름으로 그가 운영하던 블로그는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한번 찾으면, 계속 찾게 된다. 만화 '덕후'들에겐 꽤 알려진 이름이다.

2013년 4월 어느 날, 레진이 만화 연재 계약서 40장을 들고 나타났다. 모인 이들은 7명. IT 개발자, 디자이너 등 다양한 이력을 지닌 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레진도 그날 처음 봤다. 다만, 온라인으로만 교류하던 사이였다.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모임에 나왔다는 이들은, 한순간 의기투합했다. 레진이 갖고 온 계약서에 서명한 이들은, 확고한 팬덤을 지닌 만화 작가들이었다. '이런 작가들이 연재를 한다면….'

그리고 2년이 지나는 사이, 이들이 거둔 성공은 한마디로 '만화 같다'. 유료 만화 플랫폼 '레진코믹스'를 만들었는데, 서비스 첫날부터 흑자였다. 첫날 하루 매출이 1000만 원을 넘겼다. 지난해 매출은 103억 원이다. 서비스를 시작할 무렵, 류중희 퓨처플레이 대표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지난해 3월에는 엔씨소프트가 50억 원을 투자했다. 미국 진출을 준비 중이고, 일본에선 서비스를 시작했다.

"'소수 취향' 콘텐츠로 먹고살 수 있을까?"

'만난 게 그 때문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지난 14일, '레진코믹스'를 운영하는 '레진엔터테인먼트'를 찾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기자 역시 '레진코믹스'에 연재하는 몇몇 작가의 열성 팬이기 때문이다. 이들 작가의 작품이 올라왔나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날락한다. 다른 이유가 더 중요한데, 기자가 다니는 직장이 먹고살 길을 찾는데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있었다.

<프레시안>을 포함한 언론 역시, 따지고 보면 콘텐츠 기업이다. 좋은 콘텐츠를 많이 생산해서 널리 퍼뜨리려 한다.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이들에게 적절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다. 새로운 필자, 작가들을 계속 찾아내려 하고, 그들이 좋은 글을 쓰게끔 돕고자 한다. 대개의 언론, 콘텐츠 기업이 비슷한 생각이다.

그런데, 그게 어렵다. 다들 아는 이야기다. '네이버', '다음' 등 포털 사이트가 핵심 변수다. 대부분의 콘텐츠는 온라인으로 유통된다. 온라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포털)는 한두 업체가 장악하고 있다. 그러니까 입구가 미어터진다. 자극적이거나, 아니면 모두를 만족시키는 뻔한 취향의 콘텐츠가 몸싸움에서 유리하다.

포털과 콘텐츠 업체 사이엔 공통점도 있다. 대부분 광고로 먹고 산다. 그러니까 방문자 수가 중요하다. 소수 취향이거나 진지한 콘텐츠는 갈수록 불리해진다.

언론은 '검색어'를 의식한 기사를 쏟아낸다. 진영 논리에 기대는 경향도 심해진다. 그러면 전부는 못 먹어도, 절반은 챙길 수 있으니까. 양대 진영이 모두 싫어하는 이야기는, 지면에서 점점 사라진다. 정직한 기사를 쓰는 기자는 위축되고, 심지어 쫓겨난다. 이런 경향을 거스르는 매체는 폐간 위기 앞에서 오락가락한다.

만화도 비슷하다. 2000년대 들어 웹툰 시장이 만개했다. 역시 포털 덕분이다. 만화를 보는 사람의 숫자는 늘어났을 텐데, 탄탄한 이야기 구조와 섬세한 그림체를 갖춘 좋은 만화는 오히려 줄어든 느낌이다. 반면, 좋은 만화를 연재할 지면은 자꾸 줄어든다.

작가를 발굴하고 키우던 만화 잡지들은 대부분 죽었다. 1980~1990년대 만화 독자들이라면, 기억할 게다. 잡지가 망하면서, 연재가 끊긴 만화가 얼마나 많았던지. 김진 작가의 <바람의 나라>는 1992년 잡지 <댕기>에서 연재를 시작했는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작가의 사정도 있지만, 연재할 지면이 불안했던 탓도 크다. <댕기>가 폐간된 이후, 다양한 매체를 거쳤고, 그때마다 연재 흐름이 끊겼다.

▲ '레진코믹스'에서 유료만화를 보는 방식. 연재 앞부분은 대부분 무료다. 이어진 내용을 보려면, 정해진 기간까지 기다리거나 돈을 내야 한다. 기다리면 '무료'로 풀리는 걸 알면서도, 유료로 결제하는 독자가 많다. ⓒ레진코믹스

플랫폼이 콘텐츠 성격을 바꾼다

레진엔터테인먼트 창업 멤버인 이성업 이사는 "잠재돼 있던 수요"라는 말을 썼다. 단행본, 잡지 등으로 만화를 즐기던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웹툰 문화에 불만을 갖고 있다. 예컨대 탄탄한 이야기 구성 능력을 갖춘 작가들도 포털에 연재할 때는 호흡이 짧아진다. 방문자 수(트래픽)에 따라 경제적 보상이 달라지는 구조 탓이다. 마니아 사이에서 실력을 인정받던 한 작가는 지금 연재 중인 '네이버 웹툰'에서 개성을 확 죽였다. 전부터 이 작가를 아끼던 이들에겐 슬픈 일이다. '레진코믹스'가 겨냥한 수요가 이 대목이다.

'레진' 한희성 대표를 비롯한 레진엔터테인먼트 임직원들은 전부 만화 마니아다. 그래서 포털 웹툰에 대한 만화 마니아들의 불만을 잘 알고 있다. 마니아들은 작가를 사랑하고, 작가들이 '트래픽의 노예'가 되는 꼴을 못 견딘다. 좋은 작품을 위해서라면, 자기 주머니를 열 자세가 돼 있다. 잘 익은 종기 같은 수요. '레진코믹스'는 바늘로 콕 따내기만 하면 됐다.

회원 수가 100만 명을 넘기까지 1년쯤 걸렸는데, 그동안 광고를 한 적이 없다. '레진코믹스'에 연재하는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로 홍보한 게 먹혔다. 마니아들은 작가의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레진코믹스'를 알게 됐고, 서비스 첫날부터 돈을 냈다.

"알바 끊고 작품에 전념할 수준"의 원고료

'레진코믹스'로 만화를 보는 값은 비싸다. 연재 한 회분을 보는 값이 2~4코인인데, 1코인은 140~180원이다. 한 회분에 280~720원이니, 만화 가게에서 한 권씩 빌리는 가격과 비교해도 한참 비싼 편이다. 물론, 작품에 따라 한 회분 분량이 꽤 긴 경우도 있다. 그래도 한 권 분량에는 턱없이 못 미치니까, 확실히 비싸다. "너무 비싸죠?"라는 질문에 이성업 이사는 씩 웃었다. 부정하지 못하는 게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비슷한 반응이 많다.

그래도 큰 불만으로까지 번지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레진코믹스'가 지난해 거둔 매출 103억 원 가운데 63억 원이 작가들에게 돌아갔다. 이걸 아니까, 독자들이 비싼 값을 치르는 것이다. '레진코믹스'에 연재 중이거나 완간된 작품은 690개쯤 된다. 그런데 '레진코믹스' 연재를 통해 얻은 수익이 월 1000만 원 이상인 작가가 30~40명이다. 월 5000만 원 이상을 받아가는 작가도 있다. 연봉으로 치면, 수억 원대다.

'팬덤'이 없는 신인 작가는 어떡하나. 그간 '레진코믹스'를 통해 데뷔한 신인 작가가 180명쯤 된다. 이들에겐 고정 고료가 지급된다. "작품에 전념할 수 있는 수준"이 기준이다.

'들개이빨' 작가가 '레진코믹스'에 연재 중인 작품 <먹는 존재>는 작가 지망생들의 삶을 잘 그려냈다. 주인공 '유양'은 회사를 관둔 뒤, 과외 아르바이트로 연명한다. 연재 시작 전까지, 작가도 비슷하게 살았다고 한다. 다른 신인 작가 역시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으로 시간과 열정을 소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을 막겠다는 게 '레진코믹스' 측의 입장이다. '들개이빨'은 '레진코믹스' 연재를 계기로 안정적인 작가 궤도에 올랐다. <먹는 존재>는 단행본으로 출간됐고, 웹드라마로도 제작 중이다.
▲<먹는 존재> ⓒ들개이빨

요컨대 독자들이 결제한 금액이 일정 수준을 넘는 작가는 '수익 배분(RS) 계약'에 따라 매출에 비례하는 돈을 받는다. 그 수준이 안 되는 작가는 월급과 같은 고정 고료를 받는다. 일부 작품은 전부 무료로 공개돼 있다. 작품 성격상 유료 결제 가능성이 낮은 경우인데, 이 역시 고정 고료를 받는다. 작품이 완결되면, 다른 작품 독자에게 추천 만화로 노출된다.

무료로 연재됐던 작품도 완결 이후엔 유료로 전환된다. 작가 입장에선 인기 있는 완결 작품이 몇 개 있으면, 두고두고 수입을 얻을 수 있다. 실력이 있고 운이 따르면 의사, 변호사 못지 않은 수입도 기대할 수 있다. '레진코믹스' 모델이 성공하면서, 만화 작가의 경제적 위상도 달라지는 분위기다.

대치동에 만화 학원 성업 중인 까닭?

'대치동 엄마'들은 벌써 냄새를 맡았다. 사교육 1번지, 서울 강남구 대치동엔 만화 입시 전문 학원이 성업 중이다. 한 만화학과 교수는 "많은 신입생들이 '레진코믹스'에서 연재하는 게 꿈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학부모들의 반응도 달라졌다. 만화 작가에 대한 나쁜 편견은 꽤 사라졌다.

억대 연봉 만화 작가의 등장이 새로운 일은 아니다. '네이버', '다음' 등에 연재하는 작가들도 트래픽이 많은 경우엔 수억 원대 연봉을 받는다. 웹툰 아래에 붙은 광고로 발생하는 이익을 작가가 나눠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성공을 모두가 누리는 건 아니다. 나머지는 전형적인 '워킹푸어'다.

'레진코믹스' 모델의 성공이 고무적인 건 이 대목이다. 무명 작가도 데뷔만 하면 최소한의 안전망은 제공된다. 자식이 만화 작가가 되겠다고 할 때, 부모가 예전보다는 안심하게 되는 이유다.

여유 있게 창작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트래픽이 관건인 탓에, 포털 웹툰은 연재 주기가 짧다. 반면, '레진코믹스' 연재는 주기가 상대적으로 넉넉한 편이다. 짧은 주기에 맞추느라 작품 질이 떨어져서, 팬덤이 깨지면 모두가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작가 정체성을 제대로 유지하기에 유리한 구조다. 만화학과 학생들의 호의적인 반응은 이런 맥락이다.

광고 수익에 기대지 않고서 돈을 벌고, 작가를 키운다. 언론을 포함한 거의 모든 콘텐츠 업체의 꿈이다. '레진코믹스'처럼 작가들에게 퍼주는 시스템을 만들기만 하면, 이 꿈은 실현되는 걸까. <프레시안>은 다음 회에서 차근차근 따져볼 예정이다.

▲ 이원식, 박형준 작가가 '레진코믹스'에 연재 중인 <몸에 좋은 남자>.ⓒ레진코믹스
▲ '레진코믹스' 사무실 벽면. 연재 중인 만화 이미지들이 걸려 있다. ⓒ프레시안(성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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