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조 쟁여둔 10대 재벌 금고 안을 보면…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10대 재벌 사내 유보금을 해부한다 <1>

실로 오랜만에 돌아왔다. 좀 더 일찍 올 수 있었지만, 2주간의 감기 몸살에 발목이 잡혔다. 하지만 사건에는 항상 여러 측면이 있는 법이다. '인사이드 경제'가 오랜 침묵을 깨고 독자들을 만나는 게 늦춰진 면도 있지만, 2주가 지난 탓에 오히려 그전보다 명확하게 보이는 것들도 있다.

이번에 '인사이드 경제'가 들고 온 건 낡은 소재이다. 재벌들의 사내 유보금 문제. 이 문제를 파고들어 봐야지 하고 마음을 먹은 건 꽤 오래되었다. 이를테면 매년 언론에 "한국 10대 재벌 사내 유보금이 ○○○조를 돌파"했다는 기사가 뜰 때마다 그 출처가 항상 '재벌닷컴' 또는 'CEO스코어'라는 전문 웹 사이트로 나오기 때문이다.

아니, 이런 중요한 의제에 대해 데이터를 제공하는 게 노동 관련 연구소나 연구자들이 아니었단 말인가? 게다가 위 사이트에 접속해서 자세한 자료를 구하려는 순간, '인사이드 경제'가 세상에서 제일 혐오하는 '회원 가입', '로그인'과 같은 장벽에 가로막힌다.

안타깝지만 지금 민주노총을 비롯해 이른바 노동계 또는 진보 세력이 사용하는 재벌 사내 유보금 관련 수치와 데이터는 모조리 언론 기사에만 의존하고 있는 상태이다. 자신만의 분석이나 추가적인 추적 조사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러다보니 각 웹 사이트마다 수치가 조금씩 다르게 나오고 있는데도 그걸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마음을 굳혀왔다. 상장 기업들이 감사보고서를 제출하는 3월 말, 4월 초를 기점으로 10대 재벌 상장사 감사보고서를 전수조사 한 번 해보자고 말이다. 비록 '인사이드 경제'가 비전문가이긴 하지만, 그래도 무식한 놈이 용감한 법이라고 넉넉잡고 3박 4일 날을 꼬박 새우면 해결되지 않겠는가!

그냥 무식하게 해보면…알게 된다

그런데 초장부터 벽에 부딪혔다. 도대체 10대 재벌 상장사 리스트를 어디서 구할 수 있지? 언론 기사 검색을 해봐도 10대 재벌 상장사 수가 96개니 86개니 하는 얘기만 있을 뿐, 회사들 리스트는 전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동안 금융감독원의 전자공시시스템(DART)만 믿고 있었던 터라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시스템에선 각각의 회사를 일일이 검색해 봐야만 상장 기업 여부를 알 수 있다. 게다가 상장사 리스트는커녕 재벌 계열사 전체 리스트도 어떻게 구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던 상황이었다. 계열사 전체 리스트를 구하더라도 그걸 일일이 어떻게 대조해본단 말인가. 이거 뭐 10대 재벌 상장사 리스트 구하는 데에만 꼬박 3박 4일이 걸릴 판이었다.

포털과 검색 엔진을 바꿔가며 검색에 검색을 거듭한 결과, 한국거래소에도 전자공시시스템(KIND)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차피 '재벌'이란 단어는 공식 용어가 아니어서 '기업집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키워드로 검색을 거듭한 결과였다.

이곳에서는 기업집단별로 계열사들에 대한 세부 정보를 살펴볼 수 있도록 검색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아, 정말 행운의 여신을 만난 기분이었다. 게다가 사이트 이름조차 참으로 친절(KIND)하지 않은가! 그럭저럭 10대 재벌의 상장사들을 하나씩 찾아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 보니 곳곳에서 판단해야 할 요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상장사들 중에 금융 계열사들이 있던데, 이들의 감사보고서까지 전수조사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사내 유보금 중 자본잉여금은 자본거래를 통해서만 형성되는 것이어서, 실제 국민 정서에 맞는 사내 유보금 개념은 이익잉여금에 가까운데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인사이드 경제' 스타일로!

그럴 때엔 가장 편한 답이 있다. 내 식대로! 특히나 이런 작업을 하는 주체가 극소수인 상황에서는 먼저 길을 가본 놈이 나름의 스타일을 만들어 놓아야 후발자들이 발전을 시킬 수 있는 법이다. 그래서 '인사이드 경제'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이들 자료를 재해석하기로 했다.

우선 주요 회계 수치를 비교함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금융 계열사는 제외하기로 했다. '인사이드 경제'의 철학 자체가 '금융은 가치를 만드는 재주를 갖고 있지 않다'이기 때문에, 제조업과 서비스업 중심으로 데이터를 구성해볼 생각이다. (물론 금융 계열사가 내는 이윤들은 엄밀히 말하면 제조업·서비스업에서 발생한 이윤이 금융 부문으로 이전된 것에 불과하지만, 뭐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니 그냥 금융 계열사는 배제하는 걸로 하자.)

아울러 사내 유보금 개념에서도 자본잉여금이 아니라 이익잉여금을 중심으로 데이터를 구성할 예정이다. 기업이 영업·비영업활동에서 벌어들인 돈이라는 국민 상식에 맞는 개념은 이익잉여금이기 때문이다. 자본잉여금은 특수한 자본거래에서만 발생하는 항목이다. (사내 유보금 = 이익잉여금 + 자본잉여금)

다만 재벌닷컴 등이 10대 재벌 상장 계열사 전체의 사내 유보금 데이터를 산출한 결과가 있기 때문에, '인사이드 경제'도 객기를 좀 부려서 사내 유보금 수치만큼은 금융 계열사를 포함한 전체 상장사 데이터를 뽑아보기로 했다. 수치가 엇비슷하기라도 한지 맞춰는 봐야지 않겠는가. (당연히 상장 계열사 전체의 사내 유보금을 논할 때의 사내 유보금은 이익잉여금과 자본잉여금을 모두 합산한 수치를 뜻한다.)

ⓒ오민규


금융감독원과 증권거래소의 전자공시시스템(DART, KIND)을 통해 '인사이드 경제'가 찾아낸 민간 10대 재벌의 상장 계열사 리스트는 위 표와 같다. 총 97개인데 이 중 붉은 글씨로 표현되어 있는 금융 계열사는 10개이다(즉, 비금융 상장사 수는 총 87개).

음, 그런데 여기서부터 벌써 재벌닷컴과 차이가 나타난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10대 재벌 상장 계열사 총수는 96개라고 한다. 각 재벌들의 계열사 총수를 비교해보면 위 표와 딱 한 곳에서 달라진다. 바로 SK 그룹인데 재벌닷컴은 SK그룹의 상장 계열사가 16개라고 발표한 반면, 직접 전자공시시스템을 뒤지며 조사했던 '인사이드 경제'는 17개로 계산했다.

이유가 뭔지는 알 수가 없다. 재벌닷컴 측은 재벌들의 상장 계열사 총수만 공개할 뿐, 리스트는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사이드 경제'는 오직 자신의 직접 조사만을 믿기에, 다른 반증이 없는 한 위의 표를 기초로 데이터를 구성하기로 하겠다.

10대 그룹의 2012년, 2013년, 2014년 사내 유보금 규모는 얼마?

자, 그럼 이제 남은 순서는 3박 4일간 뜬눈으로 '노가다'를 하는 것이다. 97개의 상장사들에 대한 재무제표와 감사보고서들을 전수조사 하는 것. 게다가 조사할 기간을 2012년부터 2014년까지로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 감사보고서는 하나의 업체당 2개씩 조사해야 했다. 아, 이것 때문에 감기 몸살이 습격을 했을까?

여하튼 긴 얘기 뒤로하고 결론만 얘기하자면, 2014년 말 현재 10대 재벌 상장사 97개 기업의 사내 유보금(이익잉여금+자본잉여금) 총액은 '인사이드 경제'의 계산상으로는 507조5400억이라는 수치가 나왔다. 2013년 말 기준으로는 470조800억, 2012년 말 기준으로는 433조3300억 규모였다. 매년 무려 37조 원 규모로 10대 재벌의 사내 유보금 총액이 늘어났다는 얘기이다. (아래 표 참조)

ⓒ오민규


규모 자체가 참으로 천문학적이지 않은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영업·비영업활동을 통해 쌓아놓은 유보금의 규모가 10대 재벌만 500조를 넘는다니! 아, 여기서 '쌓아놓은'이라는 표현에 쌍심지를 켜실 분이 좀 계실 텐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자세히 설명할 예정이니 한 템포만 참으시길.

전체 기업들 속에서 10대 재벌 쏠림 현상도 크지만, 10대 재벌 안에서도 상위권 재벌 쏠림 현상이 매우 강하게 느껴진다. 우선 1, 2위 그룹인 삼성과 현대차그룹의 사내 유보금 규모가 전체의 60퍼센트에 육박하며, 여기에 3, 4위권인 SK와 LG그룹을 합하면 전체의 80퍼센트를 차지한다.

5위권부터는 롯데·포스코·현대중공업·한화 그룹이 작년에 비해 사내 유보금이 오히려 줄어들었다. 현대중공업을 제외하면 나머지 3개 그룹은 재작년에도 사내 유보금이 줄었던 것으로 나온다. 매년 순이익을 내지 못하고 손실을 기록하며 사내 유보금을 까먹고 있다는 뜻이다. 위 표를 그래프로 나타내보면 다음과 같다. 그래프로 보면 쏠림 현상을 훨씬 명확하게 발견할 수 있다.

ⓒ오민규


참고로, 재벌닷컴의 계산에 따르면 10대 재벌 96개 상장사의 사내 유보금 총액은 504조9000억으로, '인사이드 경제'의 계산과 약 2.64조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2.64조 원이면 수십만 실업자를 구제할 수 있는 금액이지만, 오차라는 수치 개념으로만 보면 큰 차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쨌건 근사치까지는 갔다는 뜻이렸다!

여기까지가 10대 재벌 사내 유보금을 해부하기 위한 장벽을 제거해온 스토리이다. 왜 이런 스토리를 주저리주저리 적어놓느냐고? 오랜만에 컴백하려니 '사설'을 좀 달아둬야 할 것도 같고 해서이다. 그리고 돌아가신 우리 모친이 말씀하신 "얘야, 글을 쓰건 무엇을 만들건 언제든 이것이 유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만들거라", 이런 얘기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감기 몸살을 심하게 앓다보니 그랬을까?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써보자는 의미라기보다, 그저 남들이 분석해놓은 것을 무조건 수용해서 사용하는 노동계와 진보 진영에 촉구하기 위해서이다. '인사이드 경제' 같은 비전문가가 생업에 종사하면서 과외로 이 정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그래도 연구소 같은 곳에선 이제 눈을 좀 돌리지 않을까?

어찌되었건 내가 수차례 부딪힌 난관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넘어섰는지를 주저리주저리 얘길 늘어놓아야만, 나중에 누군가 이 작업을 마음먹고 하려 할 때 중요한 길잡이가 되지 않겠냐 이 말이다. '인사이드 경제'가 앞으로 이 주제를 다루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이 주제를 다루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얘기를 적어두는 게 필요하다고 봤다. 이런 정보야말로 '물'과 '공기'처럼 자유롭게 공유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로그인과 회원 가입 없이도 말이다.

자, 3박 4일 생업을 뒤로하고 날밤을 새우며 감기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면서 알아냈던 중요한 분석 정보들은 이제 '인사이드 경제'의 다음 편부터 구체적으로 실리게 될 것이다. 독자 여러분, 감기 조심하시고 다양한 의견 제시와 소통을 해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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