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남북, 커지는 증오

[김근식의 남북관계 중년부부론] <4> 분단체제와 정전체제의 결합

힘의 관점에서 정의되는 남북관계, 즉 일방이 상대방을 흡수하려 하고 반대로 상대는 결단코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는 역관계가 바로 남북관계의 본질임은 결국 갈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남북관계는 힘의 우위와 열세의 딜레마 속에서 상호 갈등을 내재적 속성으로 갖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같은 남북의 길항성(rivalry)을 구조화하고 재생산하는 토대는 바로 분단체제와 정전체제라는 시스템이다.

한반도가 갈등의 씨앗을 배태하고 있음은 바로 정전체제라는 군사적 대치 상황이 극적으로 입증한다. 남북은 전쟁을 공식종료하지 않고 일시 중단하고 있는 상태다. 따라서 정전체제 하에서는 언제라도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고 국지전이 재개될 수 있다.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남북의 군사적 충돌과 북의 도발 역시 정전체제의 불안정성에서 비롯된다. 서해교전과 연평해전,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 등은 사실상 전투행위였다.

김대중 정부 시기부터 이른바 '정경분리' 원칙을 내세워 정치·군사적 갈등과 상관없이 경제협력을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진행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군사적 긴장과 충돌은 남북관계를 교착시키고 경제협력을 방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2013년 봄의 개성공단 중단사태가 극적으로 입증한다. 대결 상황에서도 온전하게 지켜질 것이라 믿었던 개성공단마저도 군사분계선 입·출경 제한이라는 간단한 조치만으로 폐쇄 위기를 맞게 됐다는 점은 곧 정전체제 하에서 정경분리는 사실상 불가능함을 깨닫게 해줬다. 정전체제의 군사적 대치가 남북관계의 진전을 가로막는 구조적 장애물인 것이다.

남북은 서로 원치 않는 분단을 겪었고 따라서 상대방은 결코 태어나서는 안될 정부였다. 즉, 상대방의 정치적 부인에 기초해서 각각의 정부가 출범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은 유엔이 승인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시 한반도의 유일 정통성을 자처하고 있다. 강요된 분단으로 탄생한 남과 북인 만큼 상대방을 정치적으로 부정하고 향후 통일은 반드시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진행돼야만 했다. 적화통일과 흡수통일은 각각 상대방을 정치적으로 소거하는 통일 노선일 수밖에 없었다. 분단체제하의 남북관계는 결국 남과 북의 정치적 적대와 대립을 구조적 토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무현 정부 동안 북한이 제기했던 4대 근본문제는 남북관계가 아무리 진전되어도 해결하기 어려운 정치적 숙제들이었다. 국가보안법 폐지, 한미군사훈련 중단, NLL 재설정 등은 원래 어려운 이슈라 치더라도 북이 제기한 4대 근본문제 중 그나마 상대적으로 용이한 이슈였던 참관지 제한 철폐마저도 사실은 남북의 오랜 정치적 적대관계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남북 간 경협이 가속화되고 사회문화 교류가 증대되어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는 여전히 남북관계에서 풀기 힘든 장애물이다. 상대방을 정치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근본적 구조하에서 남북 간 경제와 사회문화는 진전될 수 있을지언정 정치적으로 화해하고 협력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북을 정치적으로 부인한 토대에서 탄생한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평양에 있는 혁명렬사릉과 애국렬사릉, 금수산기념궁전 참관을 허용할 수 있겠나?

정전체제의 군사적 대치와 분단체제의 정치적 갈등은 결국 남북관계의 불균등 발전이라는 절름발이 현상을 낳게 됐다. 대북 포용정책의 시기에 남북관계의 현상적 문제점으로 매번 지적되었던 영역별 불균등 발전의 문제, 즉 정치·군사적 차원의 진전은 부진한 반면 경제와 사회문화 분야의 관계개선은 상대적으로 활발한 것도 바로 이러한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상호 윈-윈하는 경제협력과 상호 필요에 의한 일회성 교류는 그나마 진행될 수 있었지만, 본격적인 관계개선을 위한 정치적 화해협력과 군사적 긴장해소는 힘과 힘이 부딪치는 남북관계의 속성상 여전히 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그런데 정전체제와 분단체제라는 정치·군사적 대립은 분단을 지속해오면서 개선되기보다는 더욱 악화되고 말았다. 전쟁을 종료하지 못한 정전체제가 남북관계에 악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는 최대의 요인은 바로 북·미 적대관계의 산물인 북핵 문제의 악화이다.

한국전쟁 당시 교전 당사자였던 북한과 미국은 정전체제에 머물러 있는 조건에서 상호 적대관계를 지속하고 있고 북·미 적대관계의 최악의 발현이 바로 북핵 문제로 드러난 것이다. 북한은 적대관계의 해소를 요구하며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에 대한 자위적 억제력으로서 핵무기 보유를 정당화하고 있고, 반대로 미국은 북한의 핵실험과 핵 보유 때문에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가 불가능하다는 줄다리기가 바로 북핵 문제의 본질이다.

그 북핵 문제가 이제는 북한의 사실상 핵무기 실전배치와 미사일 능력의 고도화로 치닫고 있고 이에 대해 한국과 미국은 킬체인과 한국형 미사일 방어도 모자라 사드 도입까지 논의하고 있다. 정전체제가 북핵 문제를 낳고 그 북핵 문제로 인해 지금 한반도는 사상 최대의 군비경쟁 모드에 돌입하고 있다, 상대의 군비증강과 자신의 군비증강이 상호 악순환되는 이른바 '안보딜레마'의 덫에 빠져들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관계가 잘 풀릴 수 없음은 당연하다.

정전체제가 북핵 문제로 곪아 터지듯이 분단체제 역시 '역적패당'과 '종북몰이'라는 각기 최고조의 정치적 증오와 대결로 심화되고 구조화되고 있다. 북한을 원수로 간주하고 타도와 적대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정치적 적대성은 이제 북한도 모자라서 한국 내부의 특정 세력마저도 종북과 친북으로 끈질기게 연결시키고 있다. 상대를 부정해야만 하는 분단체제의 정치적 대결이 북에 대한 증오를 넘어 이젠 우리 사회 안에서 종북몰이와 마녀사냥이 일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석기 사건과 통진당 사태 이후 진보 진영과 야당까지도 이제는 종북의 흔적을 의심받게 된다.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아줌마의 평양방문 경험담도 종북을 때려잡는 사냥꾼에겐 좋은 먹잇감이 되고 만다. 자폐적 운동권 인사의 개인적 돌출행위도 배후의 종북 세력 운운하며 더 많은 종북 마녀를 사냥해야만 한다. 대한민국에서 북한을 인정하거나 동조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있는 그대로 이해하자는 주장도 정치적 사냥에 당하기 십상이다.

북한 역시 남북관계 악화를 거치면서 남쪽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가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남한 대통령을 도저히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비하하고 폄하하는 것은 이제 그리 놀랍지도 않다. 식량 지원과 인도적 지원이 중단된 이후로 북한 주민들까지도 남쪽에 대해서는 원망을 넘어 적개심이 충만하다. 눈곱 만큼 쥐어 주면서 온갖 멸시와 모욕감을 주었다는 게 최근 북한 주민들의 심정이다.

지금 남북관계는 정치적 대결이 상호 증오의 수준으로 확산되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대북전단 문제야말로 정치적 대결이라는 분단체제와 군사적 대치라는 정전체제가 상호 결합되어 남북관계의 개선이 얼마나 힘든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라 할 것이다.

상대체제를 타도하고야 말겠다는 전단살포 측의 살기 어린 대북 적개심과 살포 즉시 '추호의 주저함도 없이 원점 타격하겠다'는 북한 군부의 날 선 경고야말로 군사적 대치와 정치적 대결이라는 남북관계의 구조적 딜레마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정치·군사적 적대성을 근본적으로 완화시키지 못하는 한 남북관계는 구조적 딜레마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남북관계 개선이 결코 쉽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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