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디언>은 지난 24일 자로 교황청 홈페이지에 공개된 교황의 권고문에 대해 "불평등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경제적 문제"라면서 "세계적인 저명인사가 이 사실을 지적하기까지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게 놀라울 뿐"이라고 촌평했다.
한국에서는 만일 이 권고문이 박창신 신부처럼 국내의 어느 신부가 쓴 것이라면, 분명히 '종북좌파'이며 '국가의 적'으로 규정될 만한 내용이라는 반응까지 얻고 있다. 교황의 권고문 중 자본주의 체제에서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경제불평등을 질타한 52~58 항까지를 소개한다. <편집자>
▲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불평등이 현대판 살인자와 마찬가지라면서, 정치지도자들에게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개혁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사진은 교황이 지난 14일 취임 후 처음으로 조르주 나폴리타노 이탈리아 대통령과 만난 장면. ⓒAP=연합뉴스 |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몇가지 도전
52. 이 시대 인류는 수많은 분야에서 이루고 있는 성취에서 보듯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고 있다. 건강, 교육 그리고 통신 같은 분야에서 사람들의 복지 개선에 취해지는 조치들에 찬사를 아낄 이유가 없다.
동시에 대다수가 하루 하루 연명하기도 급급한 끔찍한 현실이 도래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많은 질병들이 퍼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은 공포와 절망의 포로가 되어 있다. 이른바 부자나라들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삶의 기쁨은 빈번히 사그러들고, 타인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고, 폭력이 늘고 있다. 그리고 불평등은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생존 투쟁, 그것도 종종 최소한의 존엄도 유지하지 못하는 생존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질과 양, 속도과 규모 면에서 엄청난 진보가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일어나고, 즉각적으로 자연과 생명 분야의 다양한 곳에 적용되는 신기원의 변화가 진행돼 왔다.
우리는 지식과 정보 시대에 살고 있는데, 이 사회는 새롭고, 종종 정체를 알 수 없는 권력들을 탄생시켰다.
배제의 경제는 안된다
53.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은 인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분명한 규제였던 것처럼, 오늘날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에 대해 "그래서는 안돼"라고 말해야 한다. 이런 경제는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나이 들고 집 없는 사람이 노숙을 하다가 죽었다는 것이 뉴스가 되지 않는 반면, 주가지수가 2포인트 떨어졌다는 것이 뉴스가 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이것은 배제의 사회다.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음식이 버려지는 상황을 계속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있나? 이것은 불평등의 사회다. 오늘날 경쟁과 적자생존의 법칙 아래에 모든 것이 지배되고 있다. 힘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착취하며 살고 있는 사회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배제되고 비참한 존재가 되고 있다. 그들은 일자리도 없고, 미래도 없고, 탈출할 수단도 없다.
인간 자체가 쓰고 버려지는 소비재로 간주되고 있다. 인간이 쓰고 버려지는 존재가 된 문화를 우리가 만들었고, 확산되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착취와 억압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새로운 차원의 문제다.
배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떨어져나가는 문제와 관계가 있다. 배제된 사람들은 더 이상 사회의 밑바닥이나 주변에 속한다거나, 권리가 박탈됐다는 정도가 아니다. 그 사회의 일원도 아니라는 것이다. 배제된 사람들은 착취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것이며, 잉여가 된 것이다.
54.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낙수효과 이론을 옹호하고 있다. 낙수효과는 자유시장 체제로 경제성장을 촉진하면 세상에 더 큰 정의와 통합을 가져오는 성공적인 효과가 발휘된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은 사실로 확인된 적이 없다. 이 가설은 경제적 지배권력의 선의와 지배적인 경제체제의 신성화 작업에 대한 막연하고 순진한 신뢰를 표현한 것이다.
배제된 사람들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는 삶의 양식 또는 이기적인 이상에 대한 열정을 유지하기 위해 무관심은 세계로 확산됐다. 거의 알아채지도 못한 사이에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대해 고통을 함께 느끼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슬퍼하고, 그들을 도와야한다고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마치 이런 문제들이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지 우리의 책임은 아니라는 것처럼.
풍요의 문화는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고 있다. 시장에 새로 살 만한 신제품이 나오면 우리는 흥분한다. 하지만 기회 부족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그저 낯설은 구경거리가 될 뿐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존재들이 아니다.
돈을 숭배하는 새로운 우상은 안돼
55. 이런 상황이 초래된 원인 중 하나는 돈에 대해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에 있다. 우리는 돈이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 금융위기가 심각한 인간사회의 위기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바로 인간이 주인이라는 것을 부정했다는 것이 금융위기의 근원이다.
우리는 새로운 우상들을 창조했다. 고대 황금 송아지에 대한 숭배(출애굽기 32:1-35 참조)가 돈이라는 우상과 인간을 위한 진정한 목적이 결여된 비인격적인 경제 독재라는 새롭고 잔인한 형태로 변신했다.
세계적으로 금융과 경제에 닥친 위기는 불균형과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결여된 사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다양한 욕구를 지닌 인간은 하나의 욕구를 가진 존재로 축소됐다. 바로 소비다.
56. 소수의 소득은 확대되고, 행운의 소수들이 누리는 풍요로움에서 다수를 멀어지게 하는 간극도 확대되고 있다. 이런 불균형은 시장의 절대적 자율과 금융투기를 옹호하는 이념의 결과로 초래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런 이념들은 국가가 공공선을 위해 어떤 형태의 통제를 행사할 권리를 거부한다. 이렇게 해서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종종 가상적이라고 할 새로운 독재가 등장했다. 일방적이고 쉼없이 자신의 법과 규칙을 강요하는 독재다.
부채와 부채에 대한 이자가 늘어나는 나라들은 그들 경제의 잠재력을 깨닫고, 국민이 진정한 구매력을 누리도록 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여기에 전세계를 무대로 벌어지는 부패와 자기 잇속만 차리는 탈세가 가세하고 있다.
권력과 소유에 대한 갈망은 한계를 모른다. 이런 체제는 이익 증대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익 증대에 방해가 된다면, 환경처럼 망가지기 쉬운 모든 것들이 유일한 규칙이 된 신성화된 시장의 이익 앞에서 무력화된다.
봉사보다 군림하는 금융체제는 안돼
57. 이런 태도 뒤에는 윤리와 신에 대한 거부가 도사리고 있다. 윤리는 조롱받고 경멸을 받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윤리는 돈과 권력을 절대적으로 추구할 가치가 아니라고 깨우치기 때문에, 비생산적이고 너무 인간적인 요소로 취급된다. 인간에 대한 조작과 존엄을 무시하는 행위를 비난하기 때문에 윤리는 위협적인 요소로 취급된다.
사실 윤리는 시장의 영역 밖에서 진지한 응답을 촉구하는 신으로 연결된다. 시장이 절대화될 때 신은 통제가 안되고, 관리가 안되고, 심지어 위험한 존재로 여겨진다. 신은 인간이 자신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하고 모든 형태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존재가 되길 요구하기 때문이다.
윤리 -이념과 관계없는 윤리- 는 균형 있고 보다 인간적인 사회질서를 가져오게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금융 전문가와 정치지도자들이 고대 현자 중 한 분의 말씀을 심사숙고하길 바란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에게서 훔친 것이며 그들의 삶을 빼앗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재산은 내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다".
58. 윤리를 고려한 금융개혁은 정치지도자들이 접근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꿀 것을 요구한다. 나는 정치지도자들에게 촉구한다. 결연한 의지와 미래에 대한 통찰을 갖고 이 도전에 나서달라고. 물론 사안 별로 특수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해야 할 것이다.
돈은 봉사의 수단이지 지배자가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교황은 모든 사람들 사랑한다. 그가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똑같이 사랑한다. 하지만 교황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반드시 돕고, 존중하고, 격려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울 의무가 있다.
나는 그들에게 관대한 연대와 인간을 위한 윤리에 바탕을 둔 경제와 금융으로 복귀할 것을 권고한다.
(번역: 이승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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