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공황이 온다…우린 정말 재수 없는 세대"

[강연] 정승일, '한국 경제와 복지국가' 강좌에서 김상조 등 정면 비판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이종태 <시사IN> 기자와 함께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쓴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이 김상조 한성대 교수를 비롯한 경제 민주화론자들을 다시 정면 비판했다. 최근 <프레시안>에서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저자들과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이병천 강원대 교수 등의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정 연구위원은 23일 저녁 '세계 금융 위기, 왜 발생했고 왜 계속되는가'라는 주제로 서울 마포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교육실에서 강연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서 주최하는 연속 강좌 '한국 경제와 복지국가' 중 첫 번째 강연이었다.

이날 정 연구위원은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 1997년 말 한국을 강타한 외환위기, 그리고 최근 국제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그리스 문제 등을 비교하며 한국 경제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정 연구위원은 "인류가 경험한 가장 큰 경제 위기는 대공황이며, 그 후 최악(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정말 재수 없는 세대"라고 말했다.

이번 위기에 대해 정 연구위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이제 2단계로 넘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정 연구위원은 "대공황이 시작된 건 1929년이지만, 본격적으로 전개된 건 (그로부터 4년 후인) 1933년"이라며 지금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타격을 입었던 세계 경제가 안정되는 듯하다가, 최근 그리스 문제가 전면에 부각되면서 다시 출렁이는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 연구위원은 "그리스 사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가 유로존에 남든 아니면 유로존에서 탈퇴하든 반드시 크게 터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와 관련, 정 연구위원은 그리스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스페인까지 흔들리는 상황을 우려했다. 1997년 타이부터 한국까지 연달아 무너지며 동아시아 금융 위기가 발생한 것처럼, 유럽에서도 만약 이탈리아와 스페인까지 그리스 같은 상황이 된다면 큰일이 터질 것이라는 말이다.

정 연구위원은 "쓸데없이 공무원이 많고 복지가 과다하고, 그래서 망한 것 아니냐는 식으로 그리스를 비난하는 여론이 많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런 이야기를 유럽연합과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공개적으로 하고 있다"며 "이것은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사실상 그리스 국채를 사지 말라고 이야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를 도와줘야 한다는 건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같은 비상시국에서는 독일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단 그리스의 불부터 꺼주고, 그 다음에 장기적으로 구조 개혁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 정 연구위원의 판단이다.

▲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 ⓒ프레시안(최형락)

"외환위기 책임, 재벌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이와 관련, 정 연구위원은 1990년대 한국의 경험을 반추했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 미국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가 국제통화기금을 비판했다. 삭스는 개발도상국을 위해 일하는 진보적인 학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자다. 그런 삭스조차 금융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당시 삭스는 국제통화기금을 향해 '너희가 해야 할 건 불난 집에 가서 불이야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소방수 역할이다'라고 비판했다. 극장에서 불이 났을 때 조용히, 차분하게 끄는 게 아니라 불이야라고 소리부터 지르면 수백 명이 압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1997년에도 국제통화기금 뒤에 있는 미국이 조용히 400억 달러를 한국 정부에 꿔줬으면 (외환위기 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정 연구위원은 "(역사적으로) 금융 위기의 패턴은 같다"고 진단했다. 금융 시장을 대폭 개방하면 흥청망청 달러 자금이 들어오고 그 결과 거품이 생기는 식이라는 것이다.

"박정희는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하면서 첫 번째로 은행을 국유화했다. 대통령 산하 은행을 만든 것이다. 그러다 김영삼 정부 들어 은행이 본격적으로 민영화됐다. (…) 김영삼 정부는 외환시장에 대한 통제를 풀어버렸다. 그러자 한국의 은행들이 뉴욕이나 런던에 지점을 만들고 외국에서 (대규모로) 돈을 꿔오기 시작했다. 박정희 때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은행들은 그때 봉이 김선달 식으로 장사를 했다. 외국에서 싸게(금리 3퍼센트 수준) 돈을 꿔서 한국에서 높은 금리(대출 금리 10%대)로 빌려줬다. 은행뿐만 아니라 종합금융사들도 그렇게 했다. 그 결과 외채가 급증했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 400억 달러 수준이던 것이 말기에는 1400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 중 400억 달러를 막지 못하면서 국가 부도가 난 것이다."

정 연구위원은 이 대목에서 "외환위기의 원인은 금융 시장을 마구 개방한 것이며, 그 책임을 재벌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IMF 위기가 터진 후 재벌의 탐욕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삼성, 대우 등 재벌들의 모럴 해저드(moral hazard) 때문에 금융 위기가 터진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게 바로 자유주의 경제학이다. 탐욕의 과잉을 하느님, 즉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이 처벌한 것이라고 보는 방식이다. 그런데 (IMF 위기가) 재벌의 탐욕이 넘쳐서, 혹은 관료가 정경유착을 해서였다면 이승만, 박정희 때는 왜 안 터졌나."

정 연구위원은 "요즘 그리스에 대해 복지 과잉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듯이, IMF 위기 때 한국에서는 복지가 없었으니 재벌과 관료의 탐욕을 비난했던 것"이라며 경제 문제를 도덕 이론으로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정 연구위원은 금융 위기를 막으려면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는 주먹, 즉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부 개입에 부정적인 주류경제학자들을 비판했다. 아울러 금융 시장에 대한 통제,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규제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박정희 정권 때) 은행들의 외환 도입을 통제하던 경제기획원이 (김영삼 정부 출범 후) 없어졌다. 그 후 해외에서 돈을 꿔오는 걸 아무도 관리하지 않았다. 100퍼센트 확신한다. 만약 김영삼 정부가 '세계화', '박정희 체제 타도'라는 명분으로 경제기획원을 없애지 않았다면, 그리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지 않고 금융시장도 (대폭) 열지 않았다면 1997년에 외환위기가 터지지 않았을 것이다."

정 연구위원은 "(한국이) 박정희 때로 돌아가면 안 되지만, 그 시기에 잘했던 요소들은 채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체제를 연상시키는 것들은 모두 폐기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지 말자는 것이다.

경제 민주화론자들 비판…"이게 무슨 진보인가"

정 연구위원은 1997년 외환위기의 경험을 돌아보며 경제 민주화론자들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정 연구위원은 김상조 교수,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 교수, 전성인 홍익대 교수 등 "정운찬의 제자들"을 거명하며 정면으로 비판했다.

"외환위기가 터진 후 한국 정부는 자본을 투입해 은행을 사실상 국유화했다. 박정희 때로 돌아간 것이다. 이때 경실련과 참여연대 사람들 중 상당수는 은행 국유화에 반대했다. 진보 쪽이 원하는 게 관치경제를 철폐하고 박정희 체제를 없애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은행 국유화를 빨리 해소하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당시 정부가 어디에 은행을 팔 수 있었겠나. 그래서 해외 매각을 하게 된 것이다. 막강했던 그 시민단체들은 매각 과정에서 노코멘트(No comment)를 했다. 한 번도 비판한 적이 없다. 이게 무슨 진보인가.

당시 대우도 전체가 국유화됐다. 즉 산업은행 소유가 됐다. 그런데 이걸 매각할 곳이 국내에는 없었다. 그래서 외국에 판 것이다. 대우자동차는 헐값에 GM에 넘어가지 않았나. 쌍용자동차도 중국에 팔리고, 그래서 22명이 숨지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런 걸 가지고 요즘에 경제 민주화 이야기하는 분들이 '쌍용차 봐라. 재벌 때문에 저런 것이다. 그러니 경제 민주화를 해야 한다'라고 하는데, 난 당신들이야말로 쌍용차를 저렇게 만든 것 아니냐고 비판한다."

노무현 정부 초기인 2003년에 터진 '카드 대란'과 관련해서도 정 연구위원은 경제 민주화론자들을 거세게 비판했다.

"노무현 정부는 처음에 (카드사들에) 구제금융을 제공하지 않으려 하다가 나중에 투입했다. 그냥 놔두면 (카드사는 물론) 은행까지 파산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이걸 갖고 (지금의 경제 민주화론자들은) '시장 원리에 어긋나게 왜 카드사들을 살려주느냐. 이건 재벌 도와주기 아니면 관치금융이다'라고 비판했다.

상식에 어긋나는 이야기다. 왜 정부가 불을 끄는 것도 못 하게 하나. 대공황이 터졌을 때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폭풍은 사라지고 불황은 끝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폭풍우는 언젠가 끝날 테니 가만히 있자는 이야기였다. 경제 민주화론자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럴 거면 경제학자들이 왜 존재하나. 어떻게 하면 폭풍우를 뚫고 갈 것인지 길을 찾아야 할 것 아닌가."

'한국 경제와 복지국가' 두 번째 강좌는 '금융자본주의와 주주자본주의, 왜 문제인가'(강사 이종태)라는 주제로 30일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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