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은 생전 처음, 하지만 케이블카는…"

[현장] "장애인 위해 북한산에 케이블카를? 그래서 우리가 왔다"

"산에 올라서 너무 좋지만, 케이블카가 장애인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평소 정부가 장애인 이동권을 위한 작은 노력만 했어도 그 진정성을 의심하진 않을텐데…개발의 구실로 장애인 문제를 이용하는 건 아닌지…."

난생 처음 산에 올라와봤다는 지체장애인 정상혁(36) 씨는 처음 맛보는 등산의 즐거움에 들떠있으면서도, 북한산 케이블카 설치에 대해선 난색을 표했다. 환경단체의 반발이 거센 국립공원 케이블카 설치에 대해, 정부 측에선 "노약자와 장애인의 접근을 위한 것"이라고 공언한 터였다.

정부 주장처럼 케이블카가 들어선다면 정 씨 같은 장애인도 좀 더 손쉽게 등산을 할 수 있겠지만, 그는 "장애인들이 산 자체에 접근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케이블카가 설치되더라도 장애인 이동권이 보장되기는커녕 오히려 자연만 파괴할 것"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 4일 오후, 20여 명의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북한산 케이블카 설치에 반대하며 조금은 '특별한' 산행을 진행했다. ⓒ녹색연합

"장애인을 위해 케이블카를? 그래서 장애인들이 산에 왔다"

4일 오후 서울 은평구 진관동 북한산성 초입. 20명 남짓의 사람들이 조금은 '특별한' 산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북한산 케이블카 반대'라는 몸자보를 붙인 환경단체 회원들부터 은평구 지역 주민, 그리고 전동휠체어에 앉은 다섯 명의 장애인도 함께였다.

이들이 '북한산 생태 산행'을 시작한 까닭은 북한산에 들어서는 케이블카 때문. 지난 9월, 정부가 국립공원 내 케이블카 설치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내용의 자연공원법 시행령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함에 따라, 북한산을 비롯한 설악산·지리산·한라산 등 국립공원 20곳 가운데 절반가량인 9곳의 케이블카 건설이 급물살을 타게 됐다. 북한산의 경우 북한산성 주차장~의상봉~보현봉을 연결하는 4.2㎞ 구간에서 이미 장거리 케이블카 설치가 추진되고 있다.

ⓒ프레시안(선명수)
정부는 노약자와 장애인 등 교통약자를 배려하고, 기존 등산로로 몰리는 탐방객을 케이블카로 분산해 산을 보호하겠다는 입장이지만, 환경단체들은 "결국 국립공원의 난개발만 낳을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녹색연합을 비롯한 40여 개 환경단체들이 '자연공원 내 관광용 케이블카 반대 전국대책위원회'를 결성해 북한산과 설악산 등지에서 1000일 동안 '산상 시위'를 벌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산허리에 9m에 이르는 철심을 박고 5층 높이의 정류장을 세우면서 '환경 보호'라고 주장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여기에 4대강 사업을 추진하며 장애인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장애인의 손과 발 역할을 했던 활동보조인도 축소한 정부가, 갑작스럽게 케이블카 추진 명분으로 '장애인 접근권'을 들고 있으니 장애인 당사자 역시 마냥 반길 수만은 없는 일이다.

"집 밖에 나가는 것조차 '모험'인데…평소 교통약자 배려에 진정성 보여야"

'교통약자의 접근권'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3호선 구파발역에 모여 출발한 일행은 1시간 20분을 꼬박 걸어서야 북한산성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상버스가 운행 중이라고 하지만 한창 탑승객이 붐비는 시간엔 전동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이용하기가 녹록치 않은 일이고, 여기에 장애인 전용 콜벤을 부를 형편이 여의치 않을 경우 산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나긴 '대장정'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산 초입부에서도 '난관'은 계속됐다. 곳곳의 보도블록 공사 때문에 비장애인이 6명이 전동휠체어를 번쩍 들고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장애인 혼자라면 지나가지 못하거나 돌아가야 하는 길이다. 한 참가자의 입에서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모험'인데, 평소에 장애인 이동권이나 신경 써 놓고 케이블카 얘기를 해야지…"라는 탄식이 흘러 나왔다.

▲ 정부가 말하는 '장애인 이동권'은 수시로 삐걱거렸다. 등산로 초입 보도블록 공사로 휠체어가 지나가지 못해 참가자들이 휠체어를 들어올렸다. ⓒ프레시안(선명수)

3호선 구파발역에 모여 출발한 일행은 1시간 20분을 꼬박 걸어서야 북한산성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프레시안(선명수)

그러나 누군가에겐 익숙한 산행이, 다른 누군가에겐 '난생 처음 맛보는 기쁨'이 되기도 한다. 비교적 가파르지 않은 등산로를 따라 북한산에 오르는 길. 생태해설가인 에코플랜연구센터 김지석 부소장이 산길 여기저기에 핀 풀과 나무, 들꽃에 대해 설명하자 참가자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김 부소장이 누리장나뭇잎을 건네자, 곳곳에서 "콩고물 냄새가 난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신기해했다.

지체장애인 이기호(50) 씨는 "케이블카가 건설되면 좀 더 편리할 수는 있겠지만, 한 번 올라갔다 바로 내려오는 것보다는 이렇게 풀과 나무, 흙을 만지면서 산행하는 것이 기쁜 일인 것 같다. 장애인들에게도 똑같이 산에 올라가는 과정이 중요한 것 아니겠느냐"며 미소를 지었다.

'케이블카 반대'가 장애인 전체의 입장으로 비춰질까봐 망설였다는 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 김동수 소장도 "금방 올라가서 금방 내려오는 케이블카가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되지 않을뿐더러, 그게 진짜 장애인을 위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환경도 보호하면서 장애인도 산에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대안들이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생태해설가인 김지석 부소장이 산길 여기저기에 핀 풀과 나무, 들꽃에 대해 설명하자, 참가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돋보기로 나뭇잎의 모양을 보여주는 김지석 부소장(왼쪽). ⓒ프레시안(선명수)

"모두가 갖고 있는 욕망, 그러나 누군가에겐 욕망이 권리가 되지 못해"

따지고 보면 케이블카 설치 논쟁에 '교통약자의 이동권' 문제가 추가되면서 '환경 보호'와 '장애인 인권'이 충돌하는 꽤 어려운 문제였다. 참가자들이 각자의 고민을 털어놨다.

"사실 정부가 케이블카 문제를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만들어버린 경향이 있죠. '환경보호'와 '장애인 인권' 두 가치가 부딪히는 문제가 되어버렸으니….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부가 그간 장애인과 노약자의 이동권에 대해 진정성을 갖고 노력했다면, 장애인 이동권 논리가 이렇게 개발을 위한 '생색내기'로 비춰지진 않았을 거란 점입니다." (진보신당녹색위원회 장세명 대외협력국장)

"쉽게 어느 한 쪽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케이블카 건설엔 분명 반대하지만,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사고하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합니다. 이번 산행이 장애-비장애인들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고민하는 출발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지성희 팀장)

장애인 참가자 중 유일하게 걸어서 산행을 한 진보신당장애인위원회 김주현 대외협력국장은 "힘들었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며 "산에 가고 싶은 욕구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기에,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케이블카 문제를 떠나 유독 장애인들에겐 그 '욕구'가 '권리'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 참가자들이 북한산 원효봉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섰다. 붉게 물든 가을 단풍에 탄성이 이어졌다. ⓒ프레시안(선명수)

북한산성 대서문(大西門)을 지나 원효봉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섰다. 산행의 마지막 코스였다. 가을 단풍이 붉게 물든 경관 앞에서 참가자들의 탄성이 이어졌다. 숱하게 산에 올랐던 환경단체 회원들에게도, 난생 처음 힘겨운 산행을 시도한 장애인들에게도, 산은 '똑같이' 아름다웠다.

▲산행의 마지막 코스. 숱하게 산에 올랐던 환경단체 회원들에게도, 난생 처음 힘겨운 산행을 시도한 장애인들에게도, 산은 똑같이 아름다웠다. ⓒ녹색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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