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극에서 마당굿으로!

[김지하의 '촛불을 생각한다'] 춧불과 탈춤 (하)

새 마당굿은 이미 지적하였지만 '그늘'을 가장 중요한 핵심적 미학원리들의 하나로 강조해야 하는데 (판소리에서는 더욱 중요하다) 깊은 한(恨)의 작동 원리이며 그것의 수련과 표현을 위한 '삭힘', 즉 '시김새'라는 이름의 미의식, 미학으로서 그것을 원천적으로 중요시해야 한다.

'그늘'은 근본적으로 우리 민족, 민중의 불행한 역사 속에서, 밖으로는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외침(外侵)과 안으로는 포악하고 무능한 지배세력의 폭정에 시달리며 살아온 한국 민중이 '쌓이고 쌓인 자기의 한을 끊임없이 삭이면서 동시에 맑은 신명의 삶을 열어가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늘의 요청적 생명미학의 본질은 '흰 그늘'인 것이다. 그것은 미와 추, 가난함과 넉넉함, 밝음과 어둠, 중력과 초월, 유희와 노동, 이승적인 것과 저승적인 것, 해학과 비장, 익살과 청승 사이의 '역설적이면서도 상사(相似)적인 꾸준한 인욕정진(忍辱精進), 즉 모든 신산고초를 참고 이겨내는 침전과정의 산물인 것이다.

이것은 부정적 속성과 긍정적 속성을 함께 가진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미학원리다. 예술가적 수련으로서는 목에서 피를 몇 대접이고 토해내면서도 어두운 한(恨)과 눈부신 신명(神明)의 통합적 표현 양식인 수리성(독수리 같이 걸걸한 목소리)을 터득하는 한 원리를 뜻하기도 한다.

이 그늘은 판소리에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탈춤에도 적용되는 것이니 춤과 재담과 노래와 동작 속에 어떻게 한과 그 한의 어둠으로부터 서서히 신명의 첫 빛이 일어나는가를 표현할 수 있는 오묘한 원리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것은 그림에도 영화에도 적용된다. 앞으로의 예술들은 바로 이 그늘과 그늘로부터 배어 나오는 흰 빛의 이미지를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현실이 한 마디로 혼돈이요 혼돈으로부터 빠져나가려면 단순한 빛과 질서가 아닌 혼돈 그 나름의 질서와 흰 그늘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 ⓒ프레시안

이 그늘은 모차르트론에 적용된 카를 융의 그림자(Schatten) 원리에 대응한다. 그러나 그늘은 그림자와는 또 다르다. 나의 미학적 사유에서는 신명, 신기, 신바람, 신내림의 기능을 어둡고 깊은 한과의 탁월한 통합의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는 '숭고'와 '심오'의 그윽한 영성적 세계로 드높이고 심화시키는 흰 그늘의 전체적인 기본원리로서 매우 중요시된다.

'흰 그늘'은 또한 미래파 등의 기괴하고 추하고 병적이며 어둡고 혼돈으로 가득 찬 시예술 등이 번뜩이는 귀신불 같은 전환기 미학인 '추(醜')의 미학' '질병(疾病)의 미학' '혼돈의 질서' 그리고 모순어법과 이중성, 반대 일치와 역설, 요설과 괴기 및 공, 무, 허 등 텅 빈 틈 따위를 포함한 새 시대의 새로운 '규범미학(normative Aesthetik)'의 중심원리가 된다.

중국기록에 의하면 우리 민족은 본디 고대 축제였던 영고(迎鼓), 무천(舞天), 동맹(東盟)이나 고려 때의 팔관(八關, 빛그늘) 때에까지도 사흘낮 사흘밤을 춤추고 노래 부르며 연이어 신시(神市)와 화백(和白)의 호혜경제와 직접민주정치를 열고 결국 다시금 대풍류(大風流)로 생활적, 이성적 합의뿐 아니라 영적, 감성적으로까지 완전 전원일치에 이르러 높고 드넓은 차원에서 축제를 마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976회의 계속적인 외국침략을 받는 사이, 전면적으로 그 신명과 신바람, 신기가 억압되어 깊고 어두운 한(恨), 즉 그늘로 침전되었다. 이것이 또한 김소월의 시적 정서의 기초적 경우처럼 슬픈 예술원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체로서 온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흥(興), 신바람 하나로 기쁜 예술원리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온전할 수는 없다.

이러한 일면성이 결정적으로 2002년의 월드컵, 붉은 악마의 '유월개벽'에서 뒤집어졌다. '아니다, 그렇다' 사이를 왕래하던 한의 밑바닥에 기인 세월 숨어 있던 신명이 위로 드러나 분출하고 현현하며 주동적으로 한을 완전히 새롭게 '아니다, 그렇다'로 흔들어 움직이는 새로운 생명미학의 시대를 열고 말았다. 그 절정의 한 모습이 올해의 '촛불'이다.

영화의 한 양식으로서는 '왕의 남자'나 '주먹이 운다' 등이다. 물론 '한과 신명은 서로 반대되지만 동시에 그것은 상호보완적이다. 조동일 교수가 한과 신명을 본디 하나라고 보는 규범적 판단 안에는 그런 내용이 이미 들어 있다. 새로운 예술의 시대, 한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탈춤, 판소리를 위시한 민족전통예술과 마당굿 원리를 섬세하게 재검토함으로써 '바다와 촛불과 굿의 미학'을 창조하여 영생불패의 '한류'를 만들어 내야 한다. 나는 이제 바로 그 미학의 이름을 혼돈의 질서에 바탕을 둔 '흰 그늘의 미학'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우리는 새 마당굿에서 근대 이후의 지속적인 피해의식, 열등감, 패배주의와 수동성을 이제는 마침내 크게 넘어설 때가 되었다. 우리 스스로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우리는 마당굿과 판소리를 앞장으로 하여 후천개벽의 대문명사전환을 이룩하면서 일반적으로 전 인류의 정신, 생명 치유와 생태계 혼돈의 해방을 향하여 새 시대의 신시, 화백 그리고 풍류를 한반도만 아니라 전세계 오대양육대주의 해양과 대륙과 섬들, 섬들 위에 그들 민족 자신들이 자기들 나름나름으로 건설해 나가도록 새 시대의 팔관, '빛그늘', 즉 '흰 그늘의 문화'인 촛불을 켜나가야 한다.

시간. 선적(線的) 시간의 망상은 이제 끝났다. 프랑스의 미셸 셰르는 기욤 아뽀리네에르의 저 유명한 시구절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를 무식한 소리라고 일거에 뒤집어 엎었다. 아마도 '흐르고'라는 불어의 뜻이 산에서 바다로 향해 선적(線的)으로 흐르는 이동을 표시하는 듯하다. 왈,

"아뽀리네에르는 세느강을 모른다. 물론 눈으로 얼른 보기에 세느강은 분명 산 쪽에서 바다 쪽으로 선적으로 흐른다. 그러나 강물은 표면만이 전부가 아니다. 선적으로 흐르는 듯이 보이는 표면 바로 아래에서 역류(逆流)가 흐르고 폭발이 있고 선회가 있고 또 물줄기가 서로 충돌하여 울며 소리치기도 한다"

이제까지의 동서양과 전세계 인류의 문화적 원형질은 제사양식에 있고 또 그것은 눈앞의 저쪽 벽에다 멧밥과 신위(지방)를 갖다 놓고 온갖 음식을 그 앞에 차린 뒤에 이쪽에서 상제는 엎드려 고개 숙이고 절하는 '향벽설위(向壁設位)'뿐이었다. 오직 그것뿐이었다.

조상도 귀신도 하느님도 천국도 미래의 낙원과 유토피아도, 모든 의미 있는 성취와 함께 비통한 기원인 이른바 '그날'도 모두 다 하나같이 벽 저쪽에 있는 것이었다. 즉 선적인 목적론, 역사주의와 종말론, 상승주의와 미래주의였다. 아니면 고대 삼황오제(三皇五帝) 같은 신화적 성인들이 만든 낙원으로 들어가자는 중국식 순환관 역시 다른 형태로 휘어놓은 선적 시간관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승전결의 드라마투르기 역시 이 같은 향벽설위에 불과한 것이다. 그 웅변적 압축이 서양 연극사다. 이제는 서양에서까지도 선적 시간관은 목적론적 역사주의나 유토피아 집착의 허망한 거품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1895년 갑오혁명 실패 직후 경기도 이천군 설성면 영산동에 숨어 있으면서 4월 5일 수운 선생 득도일, 만물생명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대낮 정오에 벽에 놓인 멧밥과 신위를 번쩍 들어 제사 지내는 주체인 나, 즉 상제(喪制) 앞에 갖다놓고 자심자배(自心自拜), 내가 내 마음에다 절을 하고 빌기 시작한다.

이른바 '나를 향한 제사(向我設位)'의 시작이다. 그리고 나서 말씀하기를 '앞으로 5만 년 동안 바꿀 수 없는 법을 오늘 내가 지었노라. 만약 조상이나 한울님의 신령이 살아있다면 어째서 생명 없는 저 벽 근처에 내리겠느냐. 마땅히 살아 있는 지금 여기 내 마음과 몸 안에 오시지 않겠느냐. 이로써 우주 억천만 생명과 수수억 천만년의 세월과 모든 물건과 모든 생각과 간 사람과 올 사람과 생명 일체가 지금 여기 내 안에 살아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향아설위'에서 탈춤의 본디 시간관의 원형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지금 여기 나로부터 시작해서 끊임없이 지금 여기 나에게로 질적 차원 변화와 함께 되돌아오는 시간, 마치 카를 융의 정신치료의 확충법처럼, 또는 참선법처럼 밖으로 나아가고 다시금 돌아오고 또 나아가고 돌아오며 반복·확장·수렴하는 근원적인 산 시간을 발견하게 된다.

노동 또한 그러하니 지금 여기 내가 지은 밥 한 그릇이 끊임없이 지금 여기 나에게로 돌아오고 되돌아오는 원리가 또한 향아설위 안에서 가능한 것 아닐까! 채희완 교수가 '고리' 즉 '반지(環)'라고 부르는 시간과 역사와 '판'의 원리가 이것 아닐까!

새 마당굿은 이제부터 참으로 나아가고 돌아오고, 숨고 드러나고, 역동성과 균형으로 닫히고 열리면서 비록 낮은 차원, 제한된 범위에서라도 지금 여기에서 질적인 차원변화를 이루며 과거와 미래를 함께 지금 여기 내 안에 함께 끌어들이며 성큼성큼 변화하는 이 시간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오늘'이 곧, '그날'인 것이다.

공간. 마당은 사방팔방 상하시방으로 활짝 열린 것이다. 우선 이것은 서두에 밝힌 바 있는 브레히트와 장 루이 바로의 타는 목마름에 대한 한 바가지의 막걸리 같은 대답이다. 이 탁월한 열린 마당은 이제껏 세계 연극사에서 감춰져 있었다. 희랍 원형극장마저도 마당처럼 완벽하게 열려있지는 못했다.

우선 열린다는 것은 비운다는 것이다. 마당공간이 비어있지 않으면 참 연행인 '판'의 살아 생동하는 눈부심이 폭발할 수 없다. 그것은 이를테면 큰 '틈'이다. 틈이 없으면 삶도 없다. 이것은 동아시아 예술 일반의 상식이다.

빈틈을 못 견딘다는 유럽 연극은 막간에서도 막간극을 하고 무대를 잠시도 비워두지를 못한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고 그림 또한 그렇다. 그들은 남종산수화에서 허공과 같은 거대한 여백의 존재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꽉 들어차 빈틈 없는 것, 그것은 바로 죽음의 시작이다.

생명의 기초는 무(無)다. 무가 전제되지 않으면 마당의 우주적 열림은 불가능하고 '여백에 의한 생동성'의 역설적인 미학이 이해되지 않으면 '투르기 없는 판'의 우월성도 모르게 된다. 광대와 빈 공간, 광대와 광대 사이, 재담 사이사이, 춤과 노래들 사이사이에 무시로 돌아오는 침묵과 텅 빈 바람 소리를 느끼지 못한다면 살아 있는 세계의 실재를 알 수 없다.

탈춤이든 마당극이든 마당굿이든 어수룩한 못난이 아니면 마음은 비울 수 없고 마음 안 비우면 슬픔에서만 꽃피는 참 익살 없고, 익살의 풀밭 아니면 풍자의 꽃 안 피고 그것 없으면 혼돈한 우주를 움직일 참 예술이 안 나온다. 아쟁이 연주 도중 툭 하고 끊어지거나 '도둑걸음질' 하는 것을 모르는 이는 동아시아의 율려(律呂), 더욱이 한국의 여율(呂律)을 알 수가 없다.

하물며 '농현(弄絃)'을 알겠는가' '농현'은 '음(音)의 흔들림'이니 태초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진화하는 우주의 거대한 폭발들, 블랙홀들이 홀로그램처럼 인간의 뇌, 그것도 전신두뇌 속에 복사하는 현상이지 단순한 기교의 차원이 아니다.

'여율'은 우주 혼돈 질서의 음악적 반영이라고 했다. 혼돈 질서가 지배하는 현대, 촛불의 시대, 아고라의 '집단지성'이 휩쓰는 이 세월에, 신경 컴퓨터를 넘어 신령 컴퓨터까지 나올 것이라고 하고 유비쿼터스 양식이 '월인천강(月印千江)'의 화엄경을 현실적으로 예감시키는 이 세월에 농현은 이미 쌍방향 소통이나 채팅만큼 일상적인 것 아니던가!
▲ ⓒ프레시안

마당은 어떤 카리스마의 세뇌 과정이나 수직적 주입이나 감성적 독재, 선동선전 따위 유치한 계몽이 먹혀들지 않는 우주 자체, 즉 소태산의 이른바 '일원상(一圓相)' 같은 것이다. 마당의 일원상 안에서는 변증법 같은 것은 없다. 있다 해도 없다. '아니다, 그렇다', '표면과 이면', '안과 밖', '숨음과 드러남', '닫힘과 열림', 천지인 3축과 음양 2축, 그리고 '3축과 2축'에 의해 문득문득 드러나는 '한' 그 '영원한 푸른 하늘'의 예감들뿐이다.

꽉 차고 빽빽해서 답답하기 그지없는 자연주의적 사실주의, 전체주의적 획일성이나 감성적 파시즘을 아예 몰아내고 솎아내야 한다. 텅 비거나 듬성듬성 틈이 나지 않으면 상상력이 작동하지 않는 법이다. 프랑스 68혁명의 구호는 재미있다. '상상력이 정권을 잡아라!' 새 마당의 주권은 '개체-융합에 의한 자기조직화(自己組織化)'의 상상력이 잡아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마당에 촛불을 켜야 한다. 그러나 촛불이 완성형은 아니다. 다만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었다.

첫째 촛불은 광장, 즉 큰 마당에 앉아서도 사방팔방 상하시방으로 우주적인 개방을 하지 않고 청와대와 중앙청을 향하여 앉아있었고 연단을 향하여 말을 쏟았다.

둘째 한 방향으로 구호 행동과 문화제를 집중함으로써 참다운 화백이 아닌 서푼짜리 직접민주정치를 했다. 바로 이 같은 일방집중의 한계 때문에 다만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라고 했다.

셋째 아고라 전체가 지닌 한계다. 그것은 희랍의 아고라 이상을 넘지 못했다. '한나 아렌트'의 연구에서 그 한계가 스스로 드러난다. 화엄경에서처럼 그물코 하나하나마다에서 법문하는 수천수만 수십 수백만 보살들이 저마다 제 말을 하지만 그 말 하나하나 안에는 전체 우주그물의 기막힌 보석빛, 영롱한 영적 지혜가 저마다 모두들 제 나름의 해와 달과 별처럼 번쩍이는 것이니 아고라에서 이제 화백마당으로 그 이름부터 바꿔야 한다. 하나의 긴급 제안이다.

새 마당굿은 우선 '촛불'이라는 작품, 지난 촛불의 두 달을 걸러내기 식으로 작품화하는 과정에서 아고라를 화백마당으로 수정하는 것이 어떤가! 우주 정치극, 생명정치굿을 한 번 시도해 보는 것이다. 이제 그것 할 만한 때도 되지 않았는가!

6월 29일에 절정에 달한 '까쇠(파괴자, 난동자)'들의 양극단 폭력의 악순환의 원인은 그처럼 아름답고 영적이고 평화로웠던 어린이, 청소년과 여성들과 쓸쓸한 외톨이 비정규를 암시하는 중년 사람들의 문화제가 청와대 방향으로 정치적(정치 목표나 요구나 구호 때문이 아니다. 정치를 청와대가 모두 한다고 생각한 아직은 덜 정치적인 유치증에서 시작된 방향 감각이어서 문제다. 그들의 노래 '헌법 제1조'처럼 분명 정치는 국민이 한다. 그렇다면 방향은 사방, 팔방, 상하시방으로 열려야 하고 메니페스토와 어젠다 구호는 우주를 향했었어야 한다. 운하문제의 산천초목과 '소'라는 비인격 생명체에 관한 요구는 국민과 우주와 세계(인류와 지구)를 향했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이제 촛불의 직접민주주의는 우주적 사이버 화백정치를 지향할 때가 되었다. 서구 녹색당보다 몇 걸음 더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방향집중을 해놓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까쇠'들에게 '자기모방'충동(미메시스)을 불러일으켜 한쪽에서는 군사 파시즘의 마타도어나 군대 진입의 계엄령 명분쌓기를, 다른 쪽에는 6.10 항쟁의 반복 이미지를 촉발했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새 마당굿은 우선 바로 이 지점에 논의와 공부를 집중해야 할 듯하다. '공간의 민주주의'라는 책이 나와서 한 번 사봤으나 별 내용이 없었다. 바로 이런 점들이 전혀 반성되지 않았다. 마당굿은 이제 집단 연행예술로서 이러한 집단지성과 광장정치행동의 문제점이나 오류를 스스로 비판하는 마당이요 판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탈출 춤사위에서 가장 중요한 춤사위가 '사방치기'이고 재담 중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양식이 '사방뿌리기'일 것이다. 왜 그런가? 깊이 생각해보자. 역시 또 화엄경과의 비교공부의 필요성이다. 또 있다. 탈춤에는 이런 가능성이 농후하게 무르익고 있음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만약 광대가 어느 날 가자기 즉흥의 형태로 '김지하 개새끼를 당장 죽이러 가자!'고 소리친다고 하자. 나의 희망사항만이 아니라 실제로 객석에서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게 십중팔구다.

'너나 죽여라!'

또 나온다.

'그 가난뱅이 죽이면 돈이 나와?'

왜? 그것이 곧 탈춤이요 그것이 곧 열린 마당이니 거기서 살아나오는 판은 자연히 바로 그러한 관객의 감수성, 즉 '감동하면서 비판하고 비판하면서 감동하는 비판적 감동'을 양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레히트가 내내 성공하지 못하면서도 끝끝내 추구했던 '감정이입과 그 이입을 차단하는 소격효과(V-Affekt)의 결합'이 탈춤과 마당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은 크게는 열린 마당 때문이겠다.

공간과 연결된 시작에도 원인은 있다. 마당에 둘러앉은 관객의 시각은 일방집중이 아니다. 좌우 양쪽과 마당 건너편의 관객들, 그 뒤의 밤하늘, 산 그림자, 별과 달들에로 크게 열려 있다.

이런 조건에서는 일방적 비판이나 일방적 감동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다른 관객의 시각과 자연스럽게 연대되어 '협동적 시각' 또는 '시각의 씨너지'가 이루어진다. 바로 이런 조건에서는 시각 자체도 쌍방향 내지 전방향 소통, 이른바 화엄적 감각이 나타난다.

이런 경우 미적 인식은 단순히 몰두나 집중에서만 온다고 정의되는 미적 황홀 같은 것과는 다른 오감 또는 육감과 좌뇌, 우뇌 등의 집합적 인식이 총체화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성, 개체성은 절대적으로 중요시된다. 개체적 인식이 아닌 미적 활동은 이미 허무다. 무가치에 가깝다. 역시 일컬어 '화엄적 인식'인 것이다.

또 있다. 이런 때에는 카를 융이 인간정신의 초비상 사태에 내외 인간육체 전면에서 활짝 열린다는 네 개의 눈(방상씨(方相氏)나 치우(蚩尤)의 네 개의 눈 또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신비적인 눈그림) 또는 앞뒤에 함께 열린다는 네 개의 눈의 총체적 인식차원이 열리는 것 같다.

수운 선생 시에 다음 두 구절이 있다.

'달 앞에 서서 뒤돌아보니 그 또한 달 앞이라'
(月前顧後每是前)

'거울이 만리만상을 비추매 눈동자가 이를 먼저 깨닫는다'
(鏡投萬里眸先覺)

먼젓 시는 '전선두뇌설, 전후총체시각' 이야기인데, 아직껏 인류과학은 여기에 이르지 못할고 있을 뿐, 탈춤은 도리어 이 육체적 영의 주체성을 자각시키는 오리엔테이션 과정은 아닐까!

다음 시는 미적 인식론인데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비판적 리얼리즘(칸트적 주관주의와 헤겔식 객관주의의 비판적 극복종합론)과 직결된다. 하르트만에서는 미적 인식은 대상과 주관 양측의 상호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대상의 드러난 측면인 소여(所與)가 주관의 일차적 인식인 지각(知覺)에 주어졌을 때 그 객관적 소여의 뒤에 숨어 있는 차원인 형상(形相)을 주관의 총괄적 인식인 통각(統覺)이 직관한다는 이론이다.

수운의 이 시는 바로 이 때 통각 즉 눈동자가 형상 즉 만리만상을 '먼저' 또는 '미리' 깨닫는다(先覺)는 것이다. 이리하여 마당에서 진행되는 '아니다, 그렇다'의 판 앞에서 앞뒤 눈 네 개가 총동원되고 여러 사람의 전방위적으로 열린 협동적 시각이 우주적 개방 속에서 인식하는 과정은 곧 판 안에 숨은 차원인 어떤 새 세계를 관객이 '먼저' '미리' 꿰뚫어 깨닫게 된다는 마당굿 미학의 탁월한 차원을 나는 '화엄적 감각' '화엄적 인식'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다.

길놀이에서의 다소곳한 '모심'이 열두 마당 뒤의 뒤풀이에서 그 신나고 활활발발하면서도 지극히 평화롭게 하나의 굿거리 장단에 수십수백가지 서로 다른 춤사위에 따라 '얼쑤얼쑤' '좋다' '잘한다' 하며 온갖 제 추임새와 함께 춤추고 노래 부르는 풍류경, 신시와 화백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화엄개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동학주문의 마지막 '만사지(萬事知)'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모심'과 '살림' 뒤에 숨은 차원이 드러나는 신인합발(神人合發)의 마당굿 그것이 바로 '깨침' 아닌가!

시간과 공간과 시각의 이러한 살아 있는 특징들이 만들어내는 탈춤과 마당굿의 구조가 이두현 교수가 '옴니버스'라, 조동일 교수가 '부분의 독자성'이라 부르는 '연산(連山)'구조다. 이 구조는 탈춤에서 필연적이고 요청적이다. 누누이 말해온 바와 같은 '개체-융합(各知不移, 화엄)에 의한 자기조직화' 원리로 이른바 '병풍양식'이겠다.

'연산'은 풍수지리용어로 화성(火星), 즉 산봉우리들이 용(龍), 즉 산맥들의 이어짐과는 달리 뚝뚝 떨어진 채 독립적으로 우뚝우뚝 서있는 것, 그럼에도 '떨어진 채 이어져 있는 것'을 말한다. 마당굿은 이러한 시간, 공간, 시각과 구조의 특징을 이 전환점에서 결정적으로 회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최근 어떤 일본 문예평론가 가라사대 '마당극 역시 가부끼가 노(能)의 근대화인 것 비슷하게 탈춤의 현대화이겠는데 솔직해 말해서 가부끼보다 못하다'

치욕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미 말한 대로다. 분발하자. 솔직히 말해서 서구 연극과 중국의 경극(京劇)은 물론이고 노(能)나 가부끼 따위가 감히 어떻게 탈춤과 마당굿에 비교 경쟁하려 한다는 말인가!

그런 멍텅구리들 욕하기 이전에 먼저 원인을 우리 자신에게서 찾자. 본디 이 강의 또는 글은 마당굿은 '시간, 공간, 인간, 시각, 몸, 탈, 춤' 등 큰 주제를 중심으로 하기로 돼있었다. 그러나 쓰다보니 양이 너무 넘친다. 넘치지만 소책자로 만들어 함께 검토하고 필요하면 공부 자료로 활용하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몸, 탈, 춤'의 주제는 이미 부산 민족미학연구소의 연속강의록인 '탈춤의 민족미학(실천문학사 간)'에 자세히 진술되어 있으니 함께 참고로 하면 될 것이다. 나머지는 '인간' 부분에 관한 의견과 메모지에 남아 있는 기타 사항들만 사족으로 붙이는 정도, 그것으로 그만 끝낼까 한다.

인간. 이제 이렇게 촛불의 충격 밑에서 마당굿을 비롯한 한국 예술문화 문제 전반에 대한 나의 미학적 산견(散見)을 늘어놓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나머지 가장 절실한 문제는 굿의 표현 주체로서의 광대와 기획 주체로서의 문화운동가들의 '인간' 문제다.

고대 천부경(天符經)에서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통일돼 있다(人中天地一)'고 했다. 시간은 하늘이기도 하고 공간은 땅이기도 하다. 지금 문제시하는 '인간', 즉 운동과 표현주체는 자기 안에서 통합하고 해결해야 할 하늘과 땅, 즉 시공간 문제 안에 그 방향, 방법들이 대강은 들어있는 듯하다. 거기에 '탈춤의 민족미학' 안에 있는 '몸, 탈, 춤, 불(조명), 신(진화)' 부분의 내용을 참작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이제껏 양주 산대의 '도끼, 도끼누이' 등 캐릭터와 이전 친일파, 정부 끄나풀, 건달 등 기획주체 이야기나 미얄할미, 소무, 들머리집 등 힘없는 여성 등등 그늘진 곳(숨은 차원)에 초점을 맞추었다.

어떤 이들은 투덜댈 것이다. 탈춤의 핵심은 여전히 '말뚝이-양반', '취발이-노장'인데 왜 그들간의 계급적, 신분적 갈등(드러난 차원)이 무시되거나 소홀시 될 수 있다는 거냐고!

오해 없기 바란다. 무시도 소홀시도 아니다. 다만 너무 잘 아는 이야기에다 누구나 소상히 이해하고 있는 영역이니 초점이 안 되었을 뿐이다. 여전히 그런 영역은 중요하고 또 그런 캐릭터들은 등장해야겠다.

그러나 그 인간 행동과 전형성에 대한 해석은 새로워져야 한다. 이미 이 방면 전문이론가인 조동일 교수 역시 '생극론(生克論)'이라는 철학원리의 개진 과정에서 '상극이 상극만이 아니고 상생이 상생만이 아니라'는 새로운 역(易) 해석과 새로운 기(氣) 철학을 나누고 있다.

이미 조동일 교수는 북경대 특강에서 '모택동의 모순론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면서 변증법 비판을 시도한 바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아도르노 역시 해겔과 마르크스의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을 비판하면서 '정반반(正反反)의 부정의 변증법'을 제출하였다.

한국 공산주의 최고 이론가로서 유명한 알마티의 박일(朴一) 선생은 10여년 전 대만 강의에서 왈,

'인류사상사에서 아직까지도 변증법을 극복한 새 철학은 나오지 않았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으니 역철학(易哲學)이다. 그러나 조건은 그것을 현대화하는 과정에 역사사회우주현실에 맞게 재해석,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자 역학의 거두인 덴마크 귀족 '닐스 보어'는 자기 왼쪽 가슴에 가문(家紋) 삼아 태극문양을 붙이고 다니며 그 밑에 음약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붙였다.

'모든 반대되는 것은 상호보완적이다'

상극이 곧 상생이라는 조동일 교수의 '생극론'과 같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문명사가 '루이스 멈포드'의 경우는 자기의 서구문명 비판서인 '인간의 조건'에서 현대 서구문명사 최대의 약점을 양(陽), 즉 생산력, 역동성, 남성성만이 일방적,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음(陰), 즉 분배, 균형, 여성성이 현저히 약화되어 총체적 분열과 균형상실에서 보고 그 대안으로서 '음과 양 사이의 상극과 상생의 상호보완성' 즉, '역동적 균형(Dynamic Equilibrium)'을 제안한 바 있다.

동학의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와 '숨은 차원, 드러난 차원'의 생명논리, 그리고 불교의 중도(中道,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 또는 가장자리를 버리되 가운데도 아니다, 離邊非中)와 공자의 '시중(時中, 중도·균형은 대전제이지만 때에 따라 중심이 어느 쪽에 더 기우는 경우를 함께 생각할 철학·'기우뚱한 균형'론)' 또는 기독교의 '원수사랑', '죽음과 부활'에서 해석되는'Between and Beyond'의 신학, 그레고리 베이트슨 (동학의 불연기연론과 똑같다)의 생물학과 데이비드 보옴의 물리학 사상 등이 그 이전의 베르그송이나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no-yes'의 생명철학과 함께, 그리고 현재의 디지털 세대의 'no-yes, on-off'의 이진법 등이 다름 아닌 변증법의 대안으로 제시돼 있다. 거기에 혼돈적 질서, 닫힘과 열림, '천지인-음양-한'이라는 풍류사상 등이 현대세계의 생명학이다.

이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자는 것이다. 모택동의 이른바 '모순의 투쟁성은 항구적이고 모순의 통일성은 잠정적이다'는 현대의 올바른 철학이 아니다. 우리는 철저히 생명과 평화의 사상과 문화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전형성과 캐릭터의 선택과 해석도 그 방향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과연 그렇게 해석했을 때 도리어 '말뚝이와 양반사이'에 일어나는 칼부림이 아닌 '해학-풍자'의 평화로운 갈등(가령 말뚝이가 양반에게 '마나님이 날더러 방에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가 함께 하고하고 또 했습니다' 하니까 양반 형제들이 함께 춤추며 노래하듯 '하고하고 또 했다네~'와 같은 대목을 검토해 보자), 취발이와 노장 사이에 일어나는 쓸쓸한 웃음, 그리고 취발이-소무-새로 태어난 아이 사이의 쓸쓸하고 슬픈 행복이 제대로 해석되는 것이다.

탈춤의 미학, 그 밑에 깔려 있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 세계관과 철학은 오히려 오늘 우리 마당굿이 현대-초현대적인 새 예술을 탁월하고 갈등적으로 창출할 수 있는 적합성을 물려주고 있다.

시대는 변했다. 촛불에 나타난 주역들을 보라! 어린이, 청년, 여성과 비정규직 근처의 쓸쓸한 대중들이다. 전투적 노조, 고속도로를 흔히 점거하는 조직 농민들, 그리고 혁명을 교육철학으로 삼는 전교조는 여전히 중요하긴 하되 그들의 '아니다, 그렇다'의 날카로운 경제사회적 대결은 이미 문화적 선봉 즉 촛불에서는 배합 세력이 되고 있다.

무시나 소홀시와는 다르다. 질 들뢰즈가 이미 지적했듯이 현대의 민중개념은 근대와 다르다. 산업 프롤레타리아 등이 아니라 카오스 민중, 두뇌민중, 대중적 민중, 잡계급 연합적 민중 복합으로 바뀌었다. 중요한 것은 문화요 문화의 창조적 유동성인 것이다. 변화, 생성, 질서는 무섭다. 숨은 차원이 드러난 차원으로 올라오면 두 차원 사이의 관계 역시 '아니다, 그렇다'가 된다.

이제 초점은 도리어 '미얄할미'가 되고 취발이의 쓸쓸한 새 어린이가 되고 이름 없고 대사없는 소무, 들머리집, 거리의 떡장사들 같은 비정규직 근처의 쓸쓸한 유랑인들이 되는 것이다.

촛불은 숨은 차원의 드러남이다. 어째서 해서탈춤과 같이 별신계, 오광대, 야유계통의 농촌탈춤보다 훨씬 진화된 탈춤에서 바로 이 같은 유랑 끝에 남편에게 맞아죽는 할미나 성 노리개 취급당하는 소무나 길거리 장바닥의 술장수, 떡장수, 나그네 같은 '그늘진 삶'이 맨 앞으로 슬며시 드러나는 건가?

이것이 오늘 어린이, 청소년, 여성, 그리고 비정규직 등 쓸쓸한 대중이 주체가 되는 비폭력 평화의 촛불시대, 새 마당굿에서 자기 변화와 미학 혁신의 중요한 문제로 되는지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기획주체 역시 단선적이고 정치 야심은 버리는 것이 좋다. 혁명가나 투사는 차라리 진보신당이나 노조 쪽에서 활동하는 것이 훨씬 좋다. 자신을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도 훨씬 더 효력이 있다.

그들이 뛰어난 예술적 재능이 있는 경우만은 다른 대응이 필요하겠다. 투지와 야망으로 마당을 기획하는 짓은 이제 그만두어야 할 때다. 아니면 자기의 과거 지향을 바꿔야 한다. 숨은 질서가 드러난 질서로 바뀌면서 차원이 변화하고 '아니다, 그렇다'의 질이 바뀐 것이다.

표현주체든 기획주체든 이제부터는 새 공부를 해야 한다. 탈춤도 동학도 불교도 내 수련과 공부의 결론으로는 그 기본이 참선법에 있다. 동학의 '모심(侍天主)' 수련, 그 다음 탈춤과 직결돼 있는 '살림(살림)' 실천, 마지막 화엄불교와 일치돼 있는 '깨침(萬事知)'의 전과정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촛불들 역시 공부를 해야 한다. 바로 이것을 조건으로 해서만 옛 마당극이 아닌 새 마당굿은 눈부신 차원으로 재창조된다. 온 인류의 분열, 생태계의 깊은 오염과 기후 대혼돈, 세계 시장의 괴기한 침체, 인간파탄, 제도적 문화의 상실, 도처의 폭력과 전쟁, 압제세력의 등장 등을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후천개벽'의 예감으로서의 새 마당굿을 창조할 수 있는 바로 그 멋진 날들을 끌어당기는 유일한 선행 조건이다.

이 모든 진술들은 마당굿만 아니라, 판소리를 비롯한 문학과 그림, 음악, 춤과 기타 엔터테인먼트 아트에서까지, 전통과 퓨전, 크로스 오버 등에 있어서까지, 창작과 감상 및 미학 및 예술학, 현장 비평이론들에서까지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예컨대 '중력과 초월' '한과 신명' '풀이와 시김새' '모순어법과 공(空)의 텍스트 개입', 3음보 4음보에 의한 고리 질서, 5·7조, 7·5조에 의한 영성적 우주 지향의 새로운 혼돈적 질서의 창조로 현재의 줄글을 극복하는 것, '우로보로스 반지(고리)의 원형시간과 여성적 악마성에 대한 서구 기독교문화의 저주의 문제' '오스카 쿨만 류의 복음의 사방확산의 새로운 시간관' '크로노스, 아이온, 혼돈의 시간, 무·공의 차이-향아설위, 탈춤의 시간을 중심으로'

그리고 어째서 탈춤이 모심(참선) - 살림(중도적 실천으로서의 유불선과 고대 회복) - 깨침(세계 문화혁명확산에 의한 화엄개벽)의 겹치기 구조를 고려해야 하는지. 원불교의 일원상(一圓相), 법신불(法身佛)과 마당의 관계, 동학의 혼돈한 근원의 한 기운(혼돈적 질서, 태극궁궁(太極弓弓), 촛불 등의 관계)과 태극사상, 인의예지, 천지부모 동포, 법률 등 현실의 '테트락티스(四位体)' 구조와 만다라, 일원상 혹은 화엄과의 관계.

한울님은 텅 빈 터다. 마음을 비워야 생명력이 살아 생동하고 텅 비워야 모심의 참선이 가능하다. 이 혼돈 속에 빠져 들어가면서 동시에 빠져나와야 마당굿과 현대 예술을 창조한다. 그러자면 혼돈 나름의 질서를 수련하고 실천해야 한다.

슬플 정도로 자기를 비우면 못난이가 되고 못난이가 되어 어수룩해져야 해학이 꽃핀다. 해학의 밭에서만 풍자의 꽃이 핀다. 그리고 그 밭에서만 오늘의 숭고와 심오의 지극한 예술이 창조된다. 우주를 움직여 조정할 수 있는 최고 예술은 동편제 판소리의 '귀신울음소리(鬼哭聲)'으로부터 비로소 솟아오르는 '귀신 웃음소리(鬼笑聲)'인 것이다.

어째서 주체들은 수련 공부와 연행 실천 과정에서 마음 밑바탕을 텅 비워야 하는지, '모심'은 곧 '마음 낮추기(下心)'이고, 그것이 곧 진정한 마당에서의 '관객과의 소통'의 조건이 되는지.

이른바 '미래파 신드롬'의 '줄글(무음보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과 불교적 정신주의, 생태예술과의 창조적 방향으로의 생산적 관계는 무엇인지, 그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혼돈과 괴기의 미학, 추의 미학, 질병의 미학, 죽음의 미학의 과정적 필요성에 대한 인식의 기준은 무엇인지, 그것 모두 생명혼란과 대정신병, 생명파탄, 집단 영의 붕괴, 생식력 상실 등의 근본처방은 무엇인지.

이 모든 것이 논의의 초점이 되고 마당굿의 주제요 명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당굿은 모심, 살림, 깨침에 의한 자기 치유와 문화혁명이며 촛불과 똑같은 또 하나의 화백(한민족 스타일의 직접민주주의)에 의한 개벽이기 때문이다.

맨 마지막으로 숙제 하나를 던진다. 나는 19세기 후천개벽 역철학서인 김일부의 정역(正易)에서 후천개벽이 시작될 바로 그 때에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는 지적을 발견했다고 이미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 기고문 '줄탁을 생각한다'에서 말한 바 있다.

세 마디다.

"꼬래비로 천대받던 것들이 도리어 정치, 주체가 된다(己位親政)

'이십 미만의 청소년 및 어린이와 천덕꾸러기 여성들이 정치에 직접 나선다(十一一言)'

'이 때에 기성 지식인, 선각자, 종교가 또는 기성 정치인들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서 교육, 문화, 제의에만 몰두해야 하는 것이다(十五一言)'

이상이다. 숙제는 세 가지다. '十一一言'에서 '十과 一'은 '금·목·수·화·토 오행(五行) 중의 흙인 土'로서 우주조화의 중심이다. 이것은 이 시대에 어린이, 청소년, 여성, 쓸쓸한 대중이 직접민주정치 전면에 나서는 일과 그 광장이 어째서 우주의 정 중심의 상징과 연관되는가?'

'광장의 촛불과 연관되고 원불교 소태산의 가르침의 핵심이며 화엄사상과의 연관 속에 있는 일원상(一圓相)은 마당과 일치한다. 이것은 앞으로 마당굿의 인식 실천과 그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영향관계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十一一言과 十五一言에서 다 같이 붙어 있는 것이 한마디 즉 '一言'이다. 과연 이 '一言'은 무엇을 뜻하는가? 기성지식인, 또는 종교가, 정치인들까지도 '一言'즉 '한 마디 말'을 통해 '十一一言'의 젊은이, 여성, 쓸쓸한 대중에게 어떤 가르침, 교훈, 사상, 영성, 도움, 지지와 보호 등 보필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예컨대 대의민주주의 같은 보완 역할 같은 것과 연관되는 듯한데 과연 그 '한 마디, 一言'의 말, 즉 그 '이치'의 내용은 무엇인가?

만약 그것이 우리가 내내 이야기해 온 '화엄개벽의 모심'이라면 똑같은 '十五 기능'이면서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 '十一 주체'일 수도 있는 마당굿쟁이들, 판소리꾼들, 환쟁이, 글쟁이, 춤쟁이, 놀이꾼 등등 그 스스로의 '한 마디'는 무엇이며 어떻게 표현되고 갈음되어야 하는 것인지.

촛불과 마당은 개벽의 중요한 두 흐름인 문예부흥과 문화대혁명의 첨단 전위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운하에서 바다로!
횃불에서 촛불로!
마당극에서 마당굿으로!

우리의 슬로건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제안하고 싶다. 영남은 판소리가 약하고 호남은 탈춤이 약하다. 나는 새 시대 문화개벽운동에서 판소리와 탈춤을 두 개의 큰 기둥이라고 본다. 영남 판소리와 호남 탈춤을 발전시키기 위해 영호남 생명평화문화 연대를 시작하는 것이 어떠한가?

우선 목포와 부산 문화팀들이 화개장터에서 '영호남 문화 못난이 대회'를 올 가을, 10월 중순에 여는 것이 어떠한가? 거기엔 영남의 최고 못난 판소리요 호남의 최고 못난 탈춤이 출현해서 지지리도 못난 춤과 노래를 겨룬다.

그 중에도 가장 못난 자를 크게 상주는 대회다. 출연자는 물론 술 마시면 안된다. 그러나 관중과 심사위원과 기획팀은 모두 곤드레만드레로 취해야 한다. <난장판>을 열자는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떨까? 거기서부터 영호남의 새 문화 운동을 시작한다. 기획, 구상, 토의, 약속을 그 자리에서 한다. 맨 앞엔 신경림 시인이 나와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즐겁다'를 낭송하고 조영남은 '화개장터'를 부른다. 어떤가?

이것이 점차 '북상'하면서 주변국가로 확산한다면! 브랜드는 '촛불마당' 어떤가?

부디 공부 많이 하고 술 많이 하고 토론 많이 하고 건강하시라! 끝끝내 이 시대를 희망하고 투신하면서 늠름히 살아가시라.

無子年 여름
2008년 7월 25일
일산에서,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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