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정권, '피의 복수' 실패로 거센 후폭풍
2020.01.13 17:05:08
'여객기 격추'한 이란 군부 타격, 협상파 힘 실리나

이란 정권이 미국에 대해 '피의 복수'를 한다면서 감행한 미사일 공격이 결과적으로 자국민에 대한 '피의 보복'을 한 것으로 드러나고, 이를 은폐했다가 들통이 나면서 거센 후폭풍을 맞고 있다. 시위의 자유가 없는 이란에서 수백명의 젊은이들이 '신격화된'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를 비롯한 이란 수뇌부에 대해 공개 성토하는 이례적인 시위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들은 12일(현지시각) 수도 테헤란 아지디(자유) 광장 주변에 몰려들어 "우리의 적은 바로 여기 있다. 그들(정부, 군부)은 미국이 적이라고 거짓말했다", "부끄러운 지도자, 무능한 지도자", "비겁한 군인들", "지도부는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아지디광장은 매년 2월 이란 이슬람혁명 기념일에 최고지도자와 체제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는 곳인데, 최고지도자와 체제를 비판하는 집회장이 된 것이다.

이란 정부가 지난 8일 테헤란 국제공항 이륙 직후 추락한 여객기 사고 원인에 대해 거짓말로 은폐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 이들이 분노에 찬 구호를 외치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 


▲ 이란 군부에 의해 격추된 우크라이나 여객기 잔해를 보여주는 사진을 지난 11일 우크라이나 정부가 공개했다. 이날 이란은 군부의 실수로 여객기를 미사일로 격추했다고 시인했다.ⓒAFP=연합


'피의 복수'로 반전 노린 이란 정권,  여객기 격추 은폐 드러나 궁지


이란 군부는 이날 이라크 미군기지들에 미사일을 발사한 지 몇 시간 뒤 여객기를 미국이 쏜 미사일로 오인해 지대공 미사일을 발사했다. 지대공 미사일은 목표물 앞에서 파편을 쏟아내는 방식으로 타격을 주기 때문에 추락한 여객기 잔해에 촘촘한 구멍이 뚫린 것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 정부는 곧바로 '기계적 결함에 의한 사고'라고 주장하면서 사고 현장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면서 은폐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군사전문가들은 기계적 결함으로 추락한 여객기의 잔해에 있을 수 없는 구멍들이 난 것부터 결정적인 물증이 되기 때문에 은폐 시도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지적한다.

이란 정부는 뚜렷한 물증이 제시되자 불과 3일만에 '인간의 실수'로 여객기를 격추했다고 시인하고, 사고 여객기에 탑승했다가 자국민들이 희생된 국가들에 공식 사과했다. 사고 여객기에 탑승했다가 사망한 176명은 이란 국적 82명 이외에도 캐나다 국적 63명, 우크라이나 국적 11명, 스웨덴 국적 10명 등 다양한 국적을 갖고 있었지만, 대부분 이란계라는 점에서 이란 국민은 '자국민들이 탑승한 여객기를 조국이 격추시킨 사고'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란 군부가 탑승객이 이란인이 대부분인 여객기를 격추시킨 이번 사고는, 1988년 7월 미 해군함정이 이란 민간 여객기를 전투기로 오인하고 미사일을 쏴 290명이 숨진 사건으로 반미감정이 고조됐을 때보다, 어떤 면에서는 이란 국민에게 더 충격적일 수 있다. 


'반미'에서 여객기 격추 사건으로 분열된 민심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이란의 군사영웅 가셈 솔레이마니를 살해한 명분이 흔들리면서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솔레이마니가 미국 대사관 4곳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는 등 '임박한 위협'이 있다고 판단해 솔레이마니를 제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부터 12일(현지시간) CBS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대사관 4곳에 대한 공격을 계획했다는 구체적인 첩보를 접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솔레이마니 살해가 '임박한 위협'을 과장해 저지른 것이라면 국제법적으로 불법이라는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솔레미아니 살해가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대로 '임박한 위협'에 대한 대응이라면 전쟁행위이기 때문에 트럼프 정부는 미국 헌법상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을 가진 의회에 보고했어야 한다. 이에 대해 하원을 장악한 민주당 측은 트럼프 정부로부터 아무런 보고도 받지 못했다고 밝혀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솔레이마니 살해 이후 민심의 반전을 노리던 이란 정권이 받는 타격은 훨씬 크다. 이란의 미사일 보복 공격도 미국과 '짜고친 고스톱'이라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 정부는 미국과의 전면전을 피하면서 '피의 복수'를 원하는 민심을 충족시킬 '내부 정치용 작전'을 성공적으로 해낼 경우 지난해 11월부터 반정부시위로 표출된 경제난 등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외부의 적으로 돌릴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지난해 10월 15일 이란 정부는 미국의 제재로 늘어만 가는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한밤중에 휘발유 가격을 50% 전격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로 촉발된 항의시위가 시간이 지나면서 극심한 빈부격차와 경제난 등에 대한 불만이 더해지면서 반정부시위로 격화됐다. 이란 정부는 반정부 시위에 대해 국제인권단체들은 최소한 수백 명, 미국은 사망자만 1000명이 넘었다고 주장할 정도의 강경진압을 해왔다.

이처럼 극도로 악화된 반정부 민심으로 이란 지도부가 고심하고 있던 차에 미국이 이라크 바그다드 국제공항에서 솔레이마니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란의 민심은 '반미'로 결집됐다. 하지만 여객기 격추 사건으로 민심은 다시 분열됐다.


온건 성향 대미 협상파에 힘이 실릴수도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은 솔레이마니 살해에 대한 이란의 보복 수위가 심각할 경우 전면전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경고를 '스위스 채널'을 통해 이란에 보냈다. 이란은 이라크를 통해 미사일 공격 정보를 흘리고, 추가보복 공격도 없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즉시 스위스 채널을 통해 미국에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지난 8일 이란의 미사일 공격에 대한 대응 방침을 담은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면서 사실상 이란의 보복이 사전에 예고된 것을 의미한 듯 "사상자가 없었다"면서 "이란이 물러서는 것처럼 보이고 이는 세계를 위해 좋은 일"이라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런 과정이 트럼프 대통령이 "군사력 사용은 원하지 않는다"고 물러선 배경이라고 전했다.

트럼프 정부는 이란 정부가 실질적인 '피의 보복'은커녕 자국민이 가득 탄 여객기를 격추한 중대한 과실을 은폐한 것이 드러나면서 궁지에 몰렸다고 판단하고 있다.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은 정치전문매체 <악시오스> 인터뷰에서 "이란이 협상 테이블로 돌아올 가능성이 상당히 커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폭스뉴스> 인터뷰에서도 "이란은 질식당하고 있고 (협상) 테이블로 나오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란에서 정재계에 걸친 실질적인 권력 중심이라는 이란혁명수비대 등 군부가 여객기 격추라는 과오를 저질러 큰 타격을 입으면서 온건 성향의 대미 협상파에 힘이 실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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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선 기자
editor2@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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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입사해 주로 경제와 국제 분야를 넘나들며 일해왔습니다. 현재 기획1팀장을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