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을 공정하다 여기는 감각은 어떻게 길러지나
2019.11.24 00:58:50
[프레시안books] <특권>

'부모 잘 만나는 것도 능력'이라는 말에 분노한다.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입시 과정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에도 분노한다. 정규직 교사가 되고 싶다는 기간제 교사의 외침에는 냉소를 던진다. 상시지속업무를 하고 있으니 직접고용을 해달라는 간접고용 노동자의 바람에도 냉소를 던진다.

한국사회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위와 같은 태도는 셰이머스 라만 칸 콜롬비아대 사회학과 교수가 <특권>(강예은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에서 묘사한 미국 신엘리트의 태도와 일치한다. 익숙한 태도인 만큼 이 태도를 뒷받침하는 생각도 우리에게 익숙하다. 성공은 재능 있고, 열심히 노력하는 개인에게 따라붙는 것이며, 실패는 개인의 내적 결함 때문이라는 것이다.


칸의 <특권>은 미국 명문사립기숙학교인 세인트폴 고등학교에 대한 연구를 통해 미국 신엘리트를 교육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따른 불평등은 공정한 것"이라는 생각이 어떻게 자리잡는지와 그로 인한 사회적 결과를 보여주는 책이다. 


▲ 세인트폴 고등학교의 옛 건물. 출처 : geograph


"개인의 능력을 강조하는 가운데 길러지는 엘리트 집안 출신 엘리트들"

세인트폴 고등학교 학생의 2/3는 연간 4만 달러의 학비를 감당할 수 있는 가정 출신이다. 졸업생이 가장 많이 가는 대학은 하버드다. 졸업생 중 30%는 아이비리그에 진학한다. 이 학교가 1년에 한 학생에게 지출하는 경비는 8만 달러 이상이다. 미국의 평균적 공립고등학교가 한 학생에게 지출하는 비용의 10배에 달한다.

세인트폴 학생들은 가족 등 소속집단으로부터 오는 특권의식을 경멸한다는 점에서 구엘리트와 구별된다. 에벗이라는 학생은 세인트폴에 다녔던 누나로부터 들은 학교에 대한 지식을 이야기하고 다녔다는 이유로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다. 에벗 자신의 경험과 노력을 통해 얻은 지식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동시에 세인트폴 학생들은 자신이 이 학교에 오게 된 이유를 "자신이 해낸 일"로 설명한다. 학교생활 중에도 끊임없이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정당화한다. 이에 따라 경제적 배경, 그리고 명문사립학교를 다니며 얻은 이익은 학생들의 의식 속에서 은폐된다.

저자는 학생과 교사의 성취를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전제하면서도, 때로는 학생 스스로의 자기기만, 때로는 학생과 교사의 상호적 자기기만을 통해 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대한 강조가 학생들의 자의식 속에서 강화되는 장면을 포착한다.

일례로, 스탠이라는 학생은 자신의 진급에 대해 "모두가 이렇게 되는 건, 이렇게 높이 올라올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라고 이야기한다. 스탠에게 진급은 고생스러운 경험을 노력과 능력으로 극복한 결과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인트폴에서 교과과정을 끝마치지 못하는 학생은 극소수다.

다른 한편, 세인트폴에서 인문학 교사 아이반 레임은 과제는 엄청나게 많은데 학점은 지독히 짜게 주는 교사로 알려져 있다. 학생들은 대개 레임의 수업을 듣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의 수업을 통과하는 것은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서 대단한 성취로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의 수강생 중 80퍼센트는 우등 성적을 받는다.

여기에 더해 세인트폴에 여성, 아시아인, 흑인과 같이 이전에는 배제됐던 집단 출신 학생들이 다니고 있다는 사실도 "개인의 노력을 통한 출세"라는 미국적 이야기를 완성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물론 세인트폴에서 여성이나 아시아인, 흑인 학생들은 백인 남성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이에 더해 <베오울프>와 같은 고급문학뿐 아니라 <조스>와 같은 대중문화까지 향유하도록 하는 교육과정은 학생들의 머릿속에 편협한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대중문화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의식을 만든다.


이와 같이 길러진 미국 신엘리트의 자의식을 칸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엘리트층은) 자신들을 일관된 집단, 특정한 역사와 취향을 가진 계급으로 보던 데서 벗어나, 미국에서 가장 재능 있고 가장 열심히 노력하는 개인들의 집합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제 불평등은 평등한 시민들이 수행한 경쟁의 결과물로 보인다. 세인트폴 학생들은 자신의 가족적 배경이나, 명문사립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이 아닌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서 성공의 이유를 찾는다. 그에 따라 미국 신엘리트는불평등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감각을 갖는다.

"불평등은 언제 어디나 존재하지만, 엘리트들은 이제 그것을 공정하다고 여긴다."


▲ 미국 신엘리트는 계층 구조를 날 때부터 있을 곳이 정해진 피라미드가 아닌 개인의 능력에 따라 오르내릴 수 있는 사다리로 여긴다. 출처 : pixabay


개인의 노력과 능력 이야기의 승리와 그 결과

칸은 미국 신엘리트의 불평등에 대한 인식이 허구라고 강변한다. 여전히 불평등은 개인의 자질이나 됨됨이가 아 인종, 젠더, 계급 등의 집단적 정체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것(개인의 승리에 대한 엘리트 이야기)은 신화다. 학교에서 아무리 더 잘해도, 여성은 여전히 남성보다 수입이 적고, 흑인은 백인보다 수입이 적으며, 세인트폴 학생들은 비엘리트 학교 학생들보다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  중요한 것은 부가 아니라 노력이요, 혈통이 아니라 재능이라고 주장할 때 엘리트들은 허구 속에 있다."


그럼에도 개인의 노력과 능력 이야기는 승리를 거뒀다. 그로 인해 약자들은 숫자와 조직화라는 무기를 빼앗겼고, 인종, 젠더, 계급 등에 기초한 집단주의 정치는 종말을 맞았다. 칸에 따르면, 미국 사회의 경우 그 결과는 "인종과 소득 불평등의 강고한 결합"이었다. 흑인과 백인 간의 임금 격차가 줄어드는 추세는 1980년대 이후 사라졌다.

한국 사회에서도 개인의 노력과 능력 이야기는 승리를 거둔 듯 보인다. "정규직/비정규직과 소득 불평등의 강고한 결합"이 그 증거일 수도 있겠다. 개인의 노력과 능력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는 사람이 늘어나는 한 이 불평등은 점점 강화될 것이고, 다수는 점점 불행해질 것이다.


이 불평등을 극복하려면 능력주의가 아닌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사람을 둘러싼 관계 및 정체성과 불평등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칸의 말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다. 평등한 개인의 경쟁 이야기를 믿으며, 과정의 공정에만 눈길을 주는 일이 불충분한 이유이기도 하다.


▲ <특권> (셰이머스 라만 칸 지음, 강예은 옮김)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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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기자
ama@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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