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아메리카나 vs. 대동아공영권, 충돌은 불가피했다
2019.04.27 10:31:41
[전쟁국가 미국·2강-④] 미국의 2차 대전 참전 : 겉모습과 실제 (중)
진주만 기습은 일본의 사악한 전쟁 음모가 아니었다. 세계 정복이라는 거창한 야망의 시도도 아니었다. 대공황 이후 미국과 일본 두 나라의 국가이익이 충돌한 필연적 결과였다. '미국을 모델로 전 세계를 재조직'하려는 루스벨트의 구상(One-Worldism)과 중국에서 동남아에 이르는 지역을 '일본 주도의 자급자족적 제국'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전략(대동아공영권)은 양립할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됐다는 점이다. 이로써 일본은 '침략자'로 규정됐고, 미국은 정당한 방어 전쟁이라는 명분을 갖게 됐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했을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미국이 완전한 굴복, 아니면 전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만주 침략에서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본다.

미국은 스페인전쟁 이후(1899년) '문호개방'의 원칙에 따라 세계 전체를 자신의 시장으로 만들려 했다. 미국 경제는 이미 1890년대부터 세계 최강이었다. 끝없이 생산되는 농산물과 공산품을 처분하기 위해서는 세계 전체가 필요했다. 반면 일본은 기존 식민지 조선과 대만에 중국과 동남아를 더해 자신의 독점적 경제권을 만들려 했다. 대공황을 맞아 자본주의 열강이 자유무역을 포기하고 자신만의 배타적 경제권 형성을 통해 각자도생을 도모하는 상황에서 대동아공영권은 일본의 유일한 활로였다. 즉 중국과 동남아는 미국에도 일본에도 핵심적 지역이었다.

사실 2차 대전은 대공황으로 영국 주도의 국제 자유무역 질서가 무너진 이후 미국, 독일, 일본 등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시장쟁탈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독일과 일본이 각각 유라시아의 서부와 동부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려 했던 데 비해 미국은 전 세계를 자신이 주도하는 단일한 경제권으로 묶으려 했다는 점이다. 독일과 일본이 군사력에 의한 특정 지역의 영토적 지배를 추구한 반면, 미국은 압도적 생산력을 바탕으로 세계 전체에 대한 경제적 지배를 지향했다.

당초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형님(senior partner)' 노릇을 했다. 미국은 일본을 개항시켰고(1854년), 러일전쟁 당시 영국과 함께 전쟁 비용의 60%를 지원했으며, 러시아와의 휴전 협상을 중재했다. 또한 태프트-가쓰라 조약을 통해 일본의 조선 병합을 인정했다(1905년).

미일 충돌의 서막, 일본의 만주 침략

긴밀했던 미일 관계가 틀어지게 된 계기는 1931년 9월 일본의 만주 침략이었다. 일본은 대공황 극복을 위해 만주에 괴뢰국가를 세우고 경제 침탈에 나섰다. 1931년 일본의 수출은 대공황이 시작된 1929년 대비 43%나 감소했다. 특히 일본이 직접 통치하는 조선, 대만에의 수출은 급증한 반면 그 밖의 지역에 대한 수출은 급감했다. 결국 일본에게는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경제 영토의 추가 확보가 절실했다. 그 결과가 만주 침략이다.

그러나 영국, 미국 등은 반대였다. 일본의 만주 침략 이전까지 자본주의 열강의 중국 경제 진출은 중국의 주권 존중(영토 보전)과 기회 균등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이다. 열강은 중국 정부가 국내 치안을 유지할 정도로 강하면서도 열강의 경제적 요구를 물리치지 못할 만큼 약하기를 원했다. 또한 열강의 중국 진출 기회는 공평해야 한다는 묵계가 있었다.

일본의 만주 침략은 이러한 열강들 간의 묵계를 깨고 중국 일부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문호개방 원칙에도 어긋난다. 미국은 스팀슨 독트린에 따라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았고, 국제연맹은 현지 조사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비난하고 철수를 요구했으나 이는 쇠귀에 경 읽기일 뿐이었다. 일본의 만주 점령을 철회시킬 수는 없었다. 원자재와 시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일본에게 만주 지배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핵심 국익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19세기 후반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진출은 궁극적으로 중국 시장을 노린 것이었다. 일본의 개항, 필리핀의 식민지화, 문호개방 원칙의 선언 등도 모두 중국을 겨냥한 것이었다. 세계 최대의 인구를 가진 중국은 곧 세계 최대 시장이 될 잠재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미국과 영국이 일본을 지원한 것은 러시아의 동아시아 제패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동진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하면서 미영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끝난 이후 일본은 미영의 라이벌로 부상한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 것은 미영의 그늘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의 맹주가 되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의 만주 침략은 미국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었다. 미국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사태 전개였다. 일본의 만주 침략은 미국과 일본의 국가 이익이 정면충돌하는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경제제재나 군사력을 동원한 강경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만주 침략 당시 국무장관 스팀슨은 국제연맹을 통한 경제제재를 추진했으나 후버 대통령의 반대로 무산됐다. 경제제재가 전쟁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대공황에 따른 국내 상황의 급박함도 영향을 미쳤다.

▲ 만주에 진출한 일본군들 ⓒWorld War II Database


중일전쟁 이후 미국은 군비 확장, 일본은 동아시아 제패 구상

일본은 만주 침략에서 그치지 않고 1937년 7월 중국 침략에 나섰다. 중국 전체를 독식하겠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론 불가피한 대응의 측면도 있었다. 일본의 만주 침략이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공동 항일전쟁(2차 국공합작)을 촉발함으로써 만주국의 안정이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다. 군사적으로 중국을 굴복시켜 일본의 만주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해야 했다. 일본은 1937년 12월 난징에서 약 30만 명의 중국인을 학살하고 이듬해 난징에 친일 괴뢰정부를 세웠다. 중일전쟁의 시작으로 미국과 일본은 정면충돌에 한 발 더 다가섰다.

1938년 루스벨트는 군비 확장에 시동을 걸었다. 세계 최강의 해군 건설을 목표로 10년간 11억 달러를 투입하는 '해군법'을 제정했고, 괌에 군사기지 건설을 시작했다. 중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미국 업체의 일본에 대한 항공기 및 항공기 부품의 자율적 수출 규제를 실시했다.

한편 일본은 동아시아 신질서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1938년 11월 3일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장개석 정부는 중국을 대표하지 않는다면서 일본 스스로의 조건에 맞게 중국을 재건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일본, 만주국, 중국...이 세 나라가 새로운 문화를 만들 것이며 동아시아의 긴밀한 경제 통합을 이룰 것"이라는 것이다. 1940년 8월 공식화되는 대동아공영권의 시작이다.

일본의 전략 목표는 만주를 포함한 중국 북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중일전쟁을 조속히 마무리 짓는 것이 급선무였다. 일본 병력의 절반이 중국과의 전쟁에 투입된 데다, 1937년이 되면 무역 적자를 메우기 위해 금 보유고의 절반 가까이를 탕진할 정도로 일본의 곤경은 심각했다.

일본은 만주 지배권에 대한 미국의 인정과 지원을 기대했다. 일본이 원하는 조건대로 중국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국이 중재해줄 것을 바랐다. 이를 위해 일본은 중국 남부는 미국과 영국에 양보할 용의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기대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미국의 최대 목표는 세계 전체에 대한 문호개방의 관철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선결과제는 중국으로부터 일본 군사력의 철수였다. 이후 미일 협상에서 미국은 언제나 일본 군대의 중국 철수를 최우선 조건으로 제시했다.

일본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10년 가까이 피땀 흘려 쟁취한 기득권을 전면 포기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미국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대동아공영권을 완성하려 했으나 이를 달성할 방법은 없었다. 석유와 기계류 등 핵심 군수물자의 조달을 미국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전쟁 역량은 미국과의 교역 여부에 달려있었다.

딜레마에 빠진 일본

이러한 일본의 근본적 취약점에 대해 당시 일본의 마르크스 경제학자 나와 도이치는 일본의 군사주의는 덫에 걸려들었다고 지적했다. 수출 의존적 경제 구조를 가진 일본이 군수물자 생산을 늘릴수록 민수 물자 생산과 대외 수출은 줄어들 것이며 이에 따라 서방으로부터 석유, 기계류 등 핵심물자를 사들일 재원도 부족해진다는 것이다. 석유와 기계류는 군사용이기도 하지만 산업화와 미래의 자급자족을 위한 필수 물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본은 중국 침략과 자체 산업화를 동시에 추진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나와는 일본의 중국 침략은 이러한 일본의 근본 모순을 악화시킬 뿐이라고 경고했다.

일본의 선택은 미국의 요구대로 중국 정복을 포기하고 삼류 국가라는 초라한 미래에 안주하든지, 아니면 근본적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자급자족적 제국을 위해 대미 공격에 나서든지 둘 중에 하나뿐이었다. 조선을 병합할 때처럼 미국의 축복 속에 중국을 정복할 수는 없었다. 중국은 미국에도 너무나도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통파 역사학자 조나단 어틀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 정부 관리들은 (일본과 중국에) 타협안을 제시함으로써 전쟁을 끝낼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두 나라가 전쟁을 계속함으로써 일본 군국주의자들을 군사적 파탄으로 몰아넣는 것이 더 좋은 방책이라고 결론 내렸다." <일본과의 전쟁(1937-1941)>(Going to War with Japan)

'하나의 세계' vs. '대동아공영권'

중일전쟁 이후 1941년 12월 7일 미일 개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하나의 세계' 구상과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전략은 끝내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과의 전쟁 없이, 즉 미국의 양해 아래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하려 했던 일본은 결국 대미 전쟁이라는 자멸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39년 7월 초 일본은 장개석 정부가 있는 충칭을 폭격했다. 7월 26일 미국은 1911년 체결된 미일 무역조약의 파기를 선언했다. 파기는 6개월 후 발효됐는데, 이로써 미국은 일본에 대한 경제 제재가 가능해졌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데 이어 1940년 5-6월에는 프랑스, 네덜란드까지 단 6주 만에 서유럽을 제패했다. 2차 대전이 본격화되면서 미국과 일본은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미국은 태평양함대와 공군력 증강에 나서는 한편 미 역사상 최초의 평시 징집법을 제정했다. 1940년 5월, 루스벨트는 일본의 만주 침략 당시 국무장관을 지낸 재계의 거물 헨리 스팀슨을 전쟁부 장관으로 발탁했고, 7월에는 의회에 군사비 40억 달러 증액을 요청했다. 스팀슨 발탁은 총력전에 대비해 미 산업계의 협력을 얻기 위한 조치였다. 실제로 스팀슨 취임 이후 미국은 항공기 등 대대적 군수물자 생산에 돌입한다.

또한 국가방위법도 통과됐다. 대통령 재량으로 미 방위에 필요한 군수물자의 수출을 제한할 수 있게 한 법이다. 이에 따라 항공기와 공작기계 등 40개 품목의 대일본 수출이 통제됐다. 일본 경제에 대한 목조르기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주일 대사였던 조셉 그루는 미국의 경제 제재가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일본의 머리 위에 대롱거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일본의 오산 : 3국 동맹으로 미국 견제?

한편 전격전으로 순식간에 유럽대륙을 제패한 독일의 파죽지세에 고무받은 일본은 동아시아 제패를 추진한다. 요체는 중국의 저항을 평정하고 석유 등 자원의 보고인 동남아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미영 등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자신이 주도하는, 아시아인에 의한 신동아시아 질서의 구축을 천명한다.

1940년 7월 2차 고노에 내각이 성립, 외무상에 친독일 성향의 마쓰오카 요스케, 국방상에 도조 히데키가 기용됐다. 고노에 내각은 취임 직후 모든 정당을 해산했다. 전쟁을 반대하는 정치세력을 말살한 것이다. 8월 1일에는 마쓰오카 외상이 대동아공영권 추진을 공식 천명했다. (7월 30일 작성된 비밀문서에 따르면 마쓰오카는 장래 일본의 세력권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영국령 말라야,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보르네오, 태국, 버마, 인도, 호주, 뉴질랜드를 포함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반루스벨트 성향의 고립주의자 해밀턴 피시 의원은 대동아공영권에 대해 '일본판 먼로 독트린'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이 중남미에 대해 배타적 통제권을 가졌듯이 일본도 중국 및 동남아에 대해 독점적 우위를 누리려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평가로 말미암아 일본은 대미 타협의 가능성을 높게 보았을 수도 있다.

1940년 9월 22일 일본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에 진입했다. 이어 9월 27일에는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3국 동맹을 맺었다.

인도차이나 진입은 독일의 프랑스 정복으로 가능해졌다. 일본은 중국 봉쇄와 함께 동남아 진출을 노렸다. 우선은 버마를 통한 중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지원을 차단하면서 때가 되면 동남아 전역을 정복하겠다는 심산이었다(일본의 남진은 1941년 7월 단행된다).

일본은 3국 동맹을 통해 유럽과 아시아에 각각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이 주도하는 신질서를 건설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속셈은 미국을 겁주기 위한 것이었다. 즉 일본이 독일과 손을 잡으면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 두 곳에서의 전쟁이라는 모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상에서 나온 책략이었다.

일본이 세게 나오면 미국이 일중 화해를 주선할 것이며, 일본이 원하는 조건으로 중일전쟁을 끝내고 동남아 정복에 나선다는 계산이었다. 즉 미일전쟁을 하지 않고도 동남아를 먹을 수 있다는 속셈이었지만 이는 치명적 오산이었다. 미국은 중국과 동남아를 일본에 양보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속셈 : 그랜드 에어리어와 일본

미국의 목표는 미국이 지배하는 단일한 세계경제의 건설이었다. 당초 미국은 나치 독일이 지배하는 유럽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통합을 목표로 했다. 이른바 그랜드 에어리어(Grand Area)가 그것이다. 독일이 욱일승천 하던 1940년까지 독일 세력권을 넘볼 수는 없었다. 소련이 독일의 침공을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해진 1941년 가을 이후 그랜드 에어리어는 세계 전체로 확대된다.

2차 대전 발발 직후인 1939년 9월 12일 미 외교협회(CFR)의 제안으로 12월 출범한 '전쟁과 평화 연구'는 미국 경제의 활로를 위해서는 기존 세력권인 서반구 외에 중국과 동남아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과 정확히 겹친다. 특히 영국령 말라야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가 일본 손에 넘어간다면 유럽의 대독일 전쟁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이 지역의 석유, 주석, 고무 등은 영국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한 핵심 군수물자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동남아에 대한 일본의 팽창주의는 비독일지역에서의 미국의 우세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 위협은 "가능하다면 평화적으로, 안 되면 무력으로라도 진압되어야 했다" ('전쟁과 평화 연구' Memorandum E-B 19 1940. 10. 19)

'전쟁과 평화 연구'의 경제.금융 그룹은 11월 23일, 독일이 패권을 차지하지 않은 지역에 대한 미국의 무제한적이고 자유로운 접근을 방해하는 일본에 맞서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미국은 1940년 7월부터 일본이 만주국을 비롯한 중국 내 일본 군사력을 철수하지 않는 한 전쟁은 불가피하며, 동남아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식민지를 공격한다면 이 역시 개전의 이유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본군의 인도차이나 진입 직후인 1940년 9월 26일 미국산 고철의 대일본 수출을 금지함으로써 일본의 무기 생산에 차질을 주었다. 한편 중국에 대한 지원을 본격화해 이 해 1억 2500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했다. 나아가 1941년 1월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 강화, 영국 등과 함께 동남아 방어, 일본에 대한 일부 전쟁물자의 공급 차단 등을 공식 정책으로 택했다.

▲ 1940년 베트남 동당으로 진입하는 일본군 ⓒ위키미디어 커먼스


루스벨트는 "(미국은) 무력으로 지배되는 세계의 외로운 섬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미 상공회의소도 미국 기업의 중국에서의 동등한 사업 및 무역 기회를 위해 정부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중국과 동남아를 일본의 독점적 세력권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얘기다.

1940년 9월 인도차이나 북부에 진입한 일본군이 10개월이 지난 1941년 7월 말에야 인도차이나 남부로 진격한 것은 소련의 기습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일본은 1939년 5월 노몬한 전투에서 소련군에 대패한 바 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40년 만의 패배였다. 남진에 앞서 북쪽 전선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1941년 3월과 4월 마쓰오카 외상이 독일과 소련을 방문했다. 당시 일본과 독일은 서로 다른 속셈을 갖고 있었다. 마쓰오카는 소련을 3국 동맹에 끌어들이려 한 반면 독일은 소련 침공을 추진 중이었다. 마쓰오카의 독일 방문에서 양측은 각자의 속셈을 드러내지 않았다. 4월 13일 마쓰오카는 스탈린과 일소 중립조약을 체결했다. 어느 일방이 타국의 침공을 받을 경우 엄격한 중립을 지킨다는 내용이었다. 조약 시한은 5년이었다.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이 조약을 무시하고 일본을 공격한다.)

미국은 경악했다. 중국에 대한 무기 임대(렌드리스)를 시작하는 한편 미 공군 조종사들을 퇴역시켜 의용군 '플라잉 타이거즈'를 결성, 중국의 대일 항전을 돕게 했다. 나아가 저명한 동아시아 전문가인 오웬 라티모어 존스홉킨스대 교수를 정치고문으로 중국에 파견했다.

미일 교섭, 핵심은 일본군의 중국 철수

한편 4월부터 코델 헐 국무장관과 노무라 기치사부로 주미 대사간에 비밀협상이 시작됐다. 미국의 요구는 중국에서의 일본군 철수, 군사 정복의 포기, 문호 개방의 준수였다.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그런데 이때까지도 노무라 대사는 '미국이 만주국을 인정할 것'이라는 오판을 하고 있었다. '문호 개방'에 대한 미국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점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6월 22일 독일의 450만 대군이 소련을 침공했다. 독일의 소련 침공은 2차 대전의 분수령이다.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 등 동유럽을 분할 점령했던 소련이 2년도 채 안 돼 독일의 적국이 된 것이다. 유럽에서 소련이라는 군사적 우방을 얻은 미국의 입장은 강경해진 반면 일본은 혼란에 빠졌다.

마쓰오카 외상은 자신이 일소 중립조약을 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침공하자고 주장해 일본 지도부를 경악케 한다. 마쓰오카의 주장은 1주일간의 내부 격론 끝에 기각되고(당시 시베리아에서 소련의 군사력은 일본의 2배였다) 7월 2일 인도차이나 남부로의 진격이 결정된다. 이른바 남방옵션이다. 마침내 7월 21일 일본은 남부로 진입했다.

영국 역사가 노먼 데이비스는 1930년대 후반에서 1945년까지를 국제적 조직폭력배의 전성기라고 지적했는데, 마쓰오카의 행태가 바로 이에 해당된다. 사실 1933년 미국의 소련 승인에서(일본의 만주 침략에 대한 대응) 1941년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한 독일의 소련 침공, 전통적 우방이었던 미국에 대한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이르기까지 열강의 행태는 조직폭력배와 다름없었다. 국익을 위해 야합과 배신을 서슴지 않았다.

일본의 인도차이나 점령, 미국의 강력한 대일 경제 봉쇄


일본의 인도차이나 남부 진격에 대해 루스벨트는 미국 내 일본 자산의 동결과 석유, 철, 고철의 전면 수출 금지로 맞섰다. 당시 미국은 일본 석유의 60%를 공급하고 있었다. 미국의 경제 제재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7월 27일 '전쟁에 가장 가까운 극단적인 공격'이며 중국에 대한 일본의 기득권을 무효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평가했다.

또한 미 해군 작전본부장 리치몬드 켈리 제독은 대일 석유 금수 조치의 영향에 관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미국산 석유의 일본 수출 금지 조치는 즉각 일본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대한 침략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 석유 금수 조치는 미국에 대한 일본의 심리적 저항감에 즉각적이고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일본의 권력자들이 현재의 행동 방침을 계속 밀고 나가게 할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일본이 영국 및 네덜란드에 대해 군사 조치를 취한다면 필리핀에 대해서도 군사행동에 나설 것이 분명하며 이로써 미국은 태평양전쟁에 말려들게 될 것이다."

1941년 8월 초에 이르면 일본은 모든 전략적 원자재에 대한 거의 완벽한 통상 금지 상황에 직면한다. 여기에 일본 선박의 파나마 운하 통행까지 금지해 11월이 되면 일본 수입의 75%가 감소한다. 미국은 일본과의 전면적인 경제전쟁에 돌입했으며 그 결과 일본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한편 루스벨트는 1937년 예편한 맥아더를 복귀시켜 극동사령부를 창설한다. 미국과 일본은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일본은 8월 초부터 호놀룰루에서 고노에 총리와 루스벨트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추진한다. 중국에서의 일본군 철수를 반대하는 강경 입장의 군부를 우회해 직접 담판하겠다는 취지였다. 일본은 중일전쟁이 마무리되면 인도차이나 주둔 일본 군대를 철수하는 대신 미국이 인도차이나에 대한 일본의 특수지위를 인정하고 미일 무역관계가 복원하기를 원했다.

한편 8월 9일부터 1주일간 대서양에서 처칠과 회담을 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17일 만일 일본이 무력을 사용한다면 미국은 스스로의 "권리와 이익, 안전과 안보를" 지키기 위해 즉각 "필요한 모든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미영의 대일 전쟁 방침은 사실상 이때 결정됐다.

9월 25일 노무라 대사가 일본 측 협상안을 헐 국무장관에 전달했다. 일본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평화를 원하며, 미국이 유럽전쟁에 참여한다면 일본은 3국 동맹을 "완전히 독립적으로 해석하겠다"(즉 독일을 돕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일본이 원하는 조건으로 중일 평화를 이루기 위한 중재 역할을 미국이 해주고, 중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중단한다면 일본은 중국과 공평하게 교역할 것이며 미국도 일본과의 정상적 무역관계를 복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일본군은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할 것이며 이로써 동남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군사부담이 완화될 것이라는 게 일본의 논리였다.

10월 2일 헐 장관이 미국 측 입장을 노무라 대사에게 전달했다. 문호개방 4원칙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영토 보전, 내정 불간섭, 공평한 통상의 보장, 태평양지역 질서의 평화적 방식에 의한 변화가 그것이다. 역시 핵심은 일본군의 중국 철수였다. 정상회담은 불발됐다.

10월 16일 고노에 내각이 붕괴하고 도조 내각이 성립됐다. 11월에 이르면 미국이 일으킨 경제전쟁은 이미 일본을 결사적인 국면으로 몰아넣었다. 일본의 수입이 75%나 감소한 것이다. 물자 부족으로 설탕, 휘발유, 고무 등은 1년 이상 배급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도고 시게노리 신임 외상은 조셉 그루 대사에게 "이러한 종류의 경제적 압박은 실제 전쟁보다도 더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11월 20일 일본이 최후의 제안을 내놓았다. 1941년 7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자, 즉 인도차이나 남부로 진격한 일본군을 철수시킬 테니 미국의 경제제재를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11월 26일 미국의 답변(Hull Note)은 "중국 및 인도차이나로부터 일본의 모든 군사력 및 경찰력을 철수"한 이후에야 일본과의 교역 및 석유 수출을 재개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일본은 12월 1일 어전회의를 통해 미국에 대한 공격을 최종 결정한다. 기습 함대는 이미 11월 26일 일본을 떠나 하와이로 가고 있는 상태였다.

일본은 이미 9월 6일의 어전회의를 통해 10월까지 협상에 총력을 기울이되 안 되면 전쟁이라는 방침을 세워두고 있었다. 7월 미국의 석유 금수 조치로 일본의 석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갈될 터였다. 시간은 일본 편이 아니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11월 26일 일반에 공개된 미국의 최후통첩은 7월 이후 일본의 모든 제안을(특히 11월 20일의 잠정 협정 제안)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것이었다. 미국이 7월의 경제 봉쇄 이후 4개월이 지난 11월 26일에야 최후통첩을 보낸 것은 유럽의 전황과 관련이 있다. 동부전선에서 소련이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12월 5일 소련은 최초의 반격에 나선다). 당초 독일의 전격전에 의해 짧으면 6주, 길어야 3개월 안에 굴복하리라던 소련이 5개월 이상 버티면서 미국은 두 개의 전쟁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1941년 11월 말까지도 "워싱턴과의 협상이 결렬되지 않고 지속되도록 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던 도조 수상은 12월 1일 미일의 잠정적 공존을(modus vivendi) 위한 어떤 대화도 더 이상 "무용"하다는 결론을 내리며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미국은 중국으로부터의 완벽하고 무조건적인 철군, 난징의 (1938년 일본이 세운 친일) 중국 정부에 대한 인정의 철회, 그리고 삼국동맹의 사문화를 요구했다. 이것은 우리 제국의 위엄을 무시하고 우리가 중국 사태의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것도 불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제국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외교를 통해서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해졌다."

10월 하순 이후 미일 교섭을 이끌었던 도고 시게노리 외상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의 일본에 대한 정책은 일관되게 우리의 변함없는 정책인 동아시아의 신질서 수립을 위협하는 것이었다고 믿는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제국의 국제적인 위치는 만주사태 이전보다 더 낮아질 것이고 우리의 생존이 위협받는 것은 불가피하다"

도고 외상은 임진왜란 때 납치된 조선인 도공의 후손으로 1939년 소련 대사 당시 노몬한 전투 이후 일소 휴전을 성사시킨 인물이다. 그는 3국 동맹으로 미국을 견제하겠다는 마쓰오카의 책략에 회의적이었으며 일본의 군사 행동은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전후 A급 전범으로 20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사망한(1950년 7월 23일) 그는 옥중 수기를(한국어판 <격동의 세계사를 말한다>) 통해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고했다.

"(미일) 교섭을 성사시키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미국의 요구를 전부 수용하는 데 있었다. 말하자면 만주사변 이전부터 여러 해에 걸친 희생을 전부 수포로 돌리는 일이었음은 물론 대륙에서 전면적인 퇴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바꿔 말해 패전 후 오늘날과 같은 지위에 둘 각오로 머리를 조아리는 데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 이러한 것을 시행할 상황이 아니었음은 매우 명백하다. 어쨌든 당시 전면적인 퇴각까지 단행해야 한다는 생각은 정부나 민간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른바 자유주의 진영에서조차도 또 원로대신 층에서도 미국의 제안을 그대로 수락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또 "미국은 (1941년) 8월 이후 전쟁을 예정"하고 있었고, "일본이 미국의 요구를 전부 수용하지 않는 한 전쟁이며, 일본이 모든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예측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일본이 미국의 문호 개방 요구에 전면 굴복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일본은 전쟁을 통해 미국에 전면 굴복하게 된다. (5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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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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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