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역사학자, 전쟁 영웅 '악비'를 깎아내리는 이유는?

[원광대 '한중 관계 브리핑'] 중국 '통일 다민족 국가론'의 허상

중국의 소수 민족들은 엄연히 중국인이지만, 중국인으로서의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현실에 지속적으로 항의를 해왔다. 위구르족, 티베트 등의 독립 요구는 우리에게도 상당히 익숙하다. 요즘에는 소수 민족이 많기로 유명한 귀주성(貴州省)에서도 관광 지구를 건립한답시고 한족(漢族)들이 토착 소수 민족들의 주택을 강제 철거하며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중국의 소수 민족, 그들은 과연 중국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중국의 '통일 다민족 국가론'

중국은 한족(漢族) 외에 55개의 소수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 남부 광서성(廣西省)의 장족(莊族),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回族), 청나라의 만주족(滿洲族)을 필두로 55개의 민족들이 있으며, 이들의 수는 약 1억5000명에 가깝다. 이 안에는 우리 동포인 조선족(朝鮮族)도 포함돼 있으며, 재미있게도 '러시아족'과 같은 민족도 있다. 이렇게 여러 민족이 공존하는 현상을 중국에서는 '통일 다민족 국가(統一多民族國家)'라고 하며, 중국 내 56개 민족을 '중화 민족(中華民族)'이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으로 묶어 두었다.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중국 사람'과 '중국 역사'라고 일컫는 것들은 한족과 그들이 걸어온 발자취이지만, 중국사 5000년에서 소수 민족들의 역사를 뺀다면 커다란 톱니바퀴가 빠지는 꼴이 된다. 특히나 한족과 북방 유목민족의 대립·공존의 역사는 중국사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222~589년) 시기 선비족(鮮卑族)의 북위(北魏, 386~557년), 북주(北周, 557~581년), 북제(北齊, 550~577년)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수당(隋唐, 581~907년)까지, 특히 당은 어찌 보면 유목 민족의 후예가 세운 나라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문제가 하나 있다. 중국 대륙의 역사에 큰 축을 이루던 민족들이 현재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고 있을 경우가 그렇다.

예를 들어 몽골족의 원나라는 엄연히 1세기 가량 중국 전체를 지배했던,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 정통 왕조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문제는 현재 몽골족이 세운 '몽골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이다. 그럼 원나라의 역사와 칭기즈칸이라는 인물은 도대체 어디에 귀속돼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이유 때문에 중국은 역사 방면에서 자신들의 영토 안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모두 자신들의 역사라고 여기는 '속지주의(屬地主義)'를 주장하고 있다. 우리와 갈등을 겪고 있는 고구려, 발해 등도 이 문제 때문이다.

허술한 통일 다민족 국가론

하지만, 중국이 주장하는 통일 다민족 국가론에는 많은 문제점이 존재한다. 현재는 56개 민족이 하나로 묶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이루고 있다고 하지만, 과거 한족과 기타 대다수 소수 민족과의 관계는 매우 적대적이었다. '색로(索虜, 머리 딴 오랑캐, 한족의 유목 민족 비하 단어)'와 '도이(島夷, 원래 본거지인 북방에서 쫓겨나 섬같이 조그만 곳에 사는 오랑캐, 유목 민족의 한족 비하 단어)'라는 말과 '호색한', '치한', '문외한' 등의 '~한(漢)'이라는 말은 대립의 역사 흔적이다. 중국 내에서도 이러한 모순을 인식했는지 최근 들어 독특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중국인들이 치욕으로 여기고 있는 남송(南宋, 1127~1279년)과 여진족(女眞族, 현재의 만주족)의 금(金, 1115~1234년)의 관계와 악비(岳飛, 1103~1142년)를 들 수 있다. 북송(北宋, 960~1127년) 말기, 아골타(阿骨打)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 지방에서 여진족들이 하나로 통합되고 있었다. 거란족(契丹族)의 요(遼)에게 많은 피해를 입었던 북송은 여진족의 금과 손을 잡아 요를 멸망시키려고 하였다. 결국 요는 금에 의해 멸망당하지만, 금은 터무니없는 재물을 요구하는 등 요보다 더욱 가혹하게 북송을 압박하였다.

북송이 이에 응하지 않자 금은 '정강의 치(靖康之恥, 1126~1127년)'를 일으켜 대대적인 침략과 함께 휘종(徽宗, 1082~1135)·흠종(欽宗, 1100~1156년)의 두 부자(父子) 황제, 수십만 명의 사람을 노예로 잡아갔다. 후에 이 황제들은 금에서 갖은 고역을 치르다 객사하게 된다. 이로써 북송은 멸망하였지만, 흠종의 동생이 임안(臨安, 현 절강성 항주(浙江省 杭州))에 수도를 세우고, 자신은 고종(高宗, 1107~1187년)이 되어 남송을 세웠다. 이후 남송은 지속적으로 금의 압박을 받게 되었고, 해마다 막대한 공물을 바쳐야만 했다.

▲ 2013년 중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정충 악비>의 한 장면

이러한 암울한 때에 한족들의 구국 영웅이 등장했는데, 그가 바로 악비이다. 악비는 중국에서 전쟁의 신으로까지 칭송받는 이로 당시 금의 병사들은 악비가 온다는 말만 들어도 도망갈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악비는 남송 조정 내에서 진회(秦檜)를 중심으로 하는 주화파 세력들의 모함으로 젊은 나이에 처형되었다. 훗날 악비는 남송 효종(1127~1194년) 시기에 누명을 벗었고, 현재까지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구국 영웅답게 악비의 사당은 여러 곳에 세워져 있는데, 다 비슷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악비를 죽음으로 몰았던 진회와 그 일당들이 악비 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로 문제가 발생한다. 한족들에게 악비는 분명 나라를 구한 영웅임에 틀림지만, 여진족에게는 어땠을까? 분명히 동족들을 학살한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일 것이다. 이 여진족들은 청나라 때에 만주족으로 개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과연 악비의 존재를 중국 내에서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와 관련, 최근 중국 역사학계에서는 악비에 대한 폄하가 나타나고 있다. 악비가 전설만큼 그렇게 연전연승하지 않았고 패배한 적도 많았다는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역대 최고의 간신으로 평가됐던 진회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역적이었을지 몰라도 현재의 관점으로 보면 '민족 융합'을 이끌어낸 위대한 지도자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볼 때마다 중국만큼 역사를 정치에 잘 쓰는 나라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 역사 속에 악비, 진회와 같은 예는 수없이 많고, 이제 중국은 이러한 영웅과 간신을 자신들이 주장하는 통일 다민족 국가론에 부합하게 재해석해나가고 있다.

소수 민족의 미래와 중국

56개의 민족이 중국이라는 나라를 이루고 있지만, 소수 민족들은 여러모로 홀대받고 있다. 그 이유는 한족(漢族)이 약 13억, 즉 중국 총인구의 92%나 차지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악비와 진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민간에서 '악비=영웅', '진회=간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자연스럽게 언어, 교육, 풍습 등 중국의 대부분 체제들이 한족 위주로 흘러갔고, 소수 민족들은 뒷전으로 밀리게 됐다.

실제로 티베트, 위구르, 연변 등 소수 민족 자치구에는 이제 한족들이 더 많이 살고 있어 토착민들이 고향에서 오히려 외지인 취급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상술에도 능한 한족들은 이 지역의 자원 등을 헐값에 사들여 막대한 돈을 벌면서 토착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물론 중국 정부에서도 표면적으로 소수 민족들의 보호를 위해 몇 가지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족 학교에 가면 가산점을 준다든지, 산아 제한 정책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주는 등의 조치가 있다. 하지만 고위급 관리직에 소수 민족 출신이 거의 없다는 것만 봐도 이런 정책들이 무용지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앞서 얘기한 가산점에서는 중국 정부의 무서운 점도 보인다. 우리만큼 입시 경쟁이 치열한 중국에서는 많은 소수 민족들이 가산점을 위해 민족 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한족 학교에 진학한다. 이러다 보니 갈수록 많은 소수 민족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고 '한화(漢化)'되어 가고, 또 고향을 떠나 한족들과 통혼하며 대도시에 정착한다. 우리 조선족의 예가 대표적일 것이다. 필자가 아는 동포도 아들을 같은 민족 며느리에게 장가보냈다며 한없이 기뻐하시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현재 연변 조선족 자치구는 말만 조선족 자치구일 뿐 인구 구성에서 한족들이 이미 59%를 넘어섰다.

중국 내 소수 민족의 불만은 중국 사회를 위협하는 커다란 불안 요소다. 이들의 마땅한 권한과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된 중국이 강대국으로 거듭나는 중요한 전제 조건이 될 것이다. 안정과 번영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씌워 소수민족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없애버리는 것은 중국이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주변국과 다투는 것보다 더욱 시급히 개선해야 할 문제다.

(임상훈 교수는 현재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역사문화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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