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나 미국에서까지도 주역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은 많으나, 물론이지만 그들 가운데 한국의 정역을 이 대전환기에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주역을 읽고 공부했다고 인정할 수 없다.
역은 본디부터 생성과 변화와 전환의 학(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역은 아직까지도 물론 배울 점이 많으나 현대와 같은 오만 년 후천개벽기의 파천황의 대전변을 예측, 설명, 전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역은 분명 제 안에 후천개벽기에 이르러 정역이 출현할 것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孔子)가 썼다는 계사(繫辭) 안에
"만물이 끝나고 만물이 새로이 시작하는 때에 간방보다 그 이치에 있어 더 번성할 곳이 없다(終萬物 始萬物 莫盛乎艮)"고 한 것이 그것이다.
간방(艮方)은 바로 한반도다.
그리고 만물이 끝나고 만물이 새로이 시작할 때는 다름 아닌 오늘날과 같은 후천개벽(後天開闢)의 때다.
정역 따위는 역학 축에도 못 든다고 경멸하는 주역 중독자, 중국학 중독자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오늘날의 대혼돈(大混沌)까지도 후천이라고 부를 수 없는 별 것 아닌 선천(先天)의 한 변화 과정에 불과하다고 강변한다.
그들은 문왕역(文王易)이 복희역(伏羲易)의 승계과정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복희역이 동이(東夷)족 문화의 산물임은 철저히 부정하며 성리학(性理學)의 출산지인 남송(南宋)에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선후(先後)를 의도적으로 뒤집고 화엄 불교 컴플레스를 못 이겨 화엄(華嚴)을 불이(不移)로 뒤바꾸며 은허(殷墟)와 상문(商文)에서 동이의 자취를 지우기에 바브다.
그들이 한민족의 기원을 억지로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에 두는 것이나 중국인들이 고구려 역사 강탈의 동북공정을 요하(遼河)문명, 홍산(紅山)문화 독점에로까지 확대하는 짓이 다 똑같은 것이니 지금 정역을 멸시하는 것은 당시 인구 100~200백만에 불과했던 고구려 침략에 정규군 백만을 동원하는 수당(隨唐)의 졸병(拙兵)과 마찬가지로 한민족문화의 신령한 탁월함에 대한 질투와 공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한민족 내의 주역 중독자들의 역학적 지혜가 회복되기를 바란다. 중심만 분명해진다면 주역은 그 나름으로 좋은 참고서가 될 수 있을 터이다. 그렇지 않다면 주역 중독은 맞지도 않는 엉터리 점쟁이 차원을 넘어설 수가 없다.
주역으로 '촛불'이 해석되는가?
물론 꾼들이 최근에 촛불을 위장하고 나오는 시커먼 숯불이나 시뻘건 횃불은 얼마든지 설명할 것이다. 손오(孫吳)병법과 다름없는 이성의 간지(奸智)에 접근할 수밖에 없는 것이 때를 넘긴 역술(易術) 차원의 주역중독의 운명일 테니까.
주역으로 지구자전축의 북극이동과 북극을 형성하는 지리극(地理極)-자기극(磁氣極) 상호 이탈과 관계 재편성, 그리고 북극에 얼음이 녹는데 적도에는 눈이 내리는 현상이 설명되는가?
문왕 팔괘 자체가 남북위를 빼고는 이젠 낡은 방위다.
심지어 1885년 현재의 정역팔괘까지도 동서위 이외에는 상당한 변동을 전제해야 할 형편이다.
그만큼 최근의 우주와 지구와 인류와 생명계가 거대한 변동과 혼돈에 휩싸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주역은 인간 삶의 세세한 이치를 밝히는 데에 있어 따를 자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 또한 역학(易學)의 한 원리니까. 그 원리가 정역과 정역 이후의 대역학 변동 과정에서도 후천 중심의 선천 재평가·재구성 원칙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역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주역으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국·유럽 금융위기를 중심으로 하는 전 세계 자본주의 시장 대변동 및 그로 인한 인류문명사 전체의 개벽적 사태가 설명되는가?
특히, 생활하는 시민, 민중의 삶의 '대황락(大荒落)'이 설명되는가? 그것도 섬세하게 말이다.
거기에 생태계 및 생명계 자체의 괴변, 온갖 종(種)의 멸종, 변종, 변질 이외에도 죽지 않는 생명체의 출현과 재진화(re-evolution) 사태가 설명되는가?
한 발만 더 나가자.
주역으로 수많은 자살자의 급증 현상, 기괴한 피로감과 절망, 도착증세의 만연, 정신병리학 따위로는 접근도 못하는 이상심리의 만연, 극단적인 추(醜), 악(惡), 분열의 예술들이 판치는 신세대 문화가 설명되는가?
미안하지만, 동·서양 문화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던 미학 양식 변동 과정에 전혀 그 진행이 나타난 적이 없는 참으로 희극적인 '그로테스크'의 출현이다. 주역을 금과옥조로 하는 한·중·일 동아시아와 이것을 흉내 내는 서방의 짝퉁 문화사·미학이론들에 묻는 것이다. 혹은 이것을 빌미로 도리어 진정한 새 미학을 창안할 생각은 없는가, 그것을 또한 묻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모든 현상의 상징적 첫 징표가 '촛불'임을 인정한다면 (역학적 지혜의 첫째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 둘째는 그럼에도 절대 불변이 있으니 그것은 모든 것이 예외 없이 변한다는 그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셋째는 그것을 간단히 키포인트 중심으로 표시한다는 것- 그러나 그 '간이(簡易)'는 역학이론 체계나 개념 역시도 지켜야 할 원칙인 것이다. 더욱이 촛불의 주역인 디지털 세대의 문화원칙이 바로 이 '간이'라는 것) 주역 전문가, 주역 중독자, 주역 숭배자, 주역 동경자는 즉시 정역부터 공부해야 할 것이다. 정역을 공부하면서 그 원칙에 따라 세상과 삶을 살피는 바른 눈으로 다시 주역을 읽고 참고한다면 그때에야말로 참다운 후천개벽을 깨닫게 될 것이다.
후천개벽은 후천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그 중심에 기초해서 선천을 해체·재구성·재평가하는 (기우뚱한 균형의) 선후천 결합과정이기 때문이다. 역의 경우도 똑같다. 그 첫 징후가 '하도-낙서', '복희-문왕' 사이에서 이미 약하지만 뚜렷하게 나타난 바 있지 않은가! 나는 이 글의 목적을 바로 그런 정역 공부의 권장, 그래서 참으로 '촛불'과 촛불 관련의 생활, 생태, 생명, 생존과 생계, 그리고 영적인 교육, 사회경제적 대변동과 지구·우주의 대 개벽을 개인 개인의 내면적 그늘과 빛의 연관 속에서까지 새롭게 해석하고 그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새 시대의 새로운 살아있는 역을 전개함으로써 문명사 변동을 가져오는 전 세계 문화 대혁명을 불 지르라는 메시지에 두고 있다.
지금의 대혼돈은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 모두를 다 같이 거룩한 우주 공동주체로 드높이는 '모시는' 문화와 생활의 대 변혁에 의해서만 극복된다. 문제는 '모심'이다.
정역은 아직까지도 모심의 힘, 모심의 선(禪)과 역(易)에 이르지 못한 채 아직도 주역 단계의 생성·변화에 머문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모심'에 의한 역학의 요구를 잠재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모심'에 의해서만 지금의 개벽은 설명되고 '모심'에 의해서만 그 진행 방향이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모심'에 의해서만 그 뒷날의 우주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심'에 의해서만 전 세계, 전 우주와 개인 개인의 영적 소통, 신령한 생명 네트워킹, 이른바 '대화엄'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역 공부를 극력 권장하면서, 새 시대, 새 세대, 디지털 네트워킹의 촛불 세대에 의해 정역 인식이 초과 달성될 때에만 내가 바라는 '화엄개벽'의 절대 조건인 '오역(五易)' 시대가 열리고 그에 의해 '천부(天符) 네트워킹' 시대가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오역' 시대란 정역 공부에서 '촛불'을 비롯한 현재의 전 생명계와 우주적 대변동의 참된 인식과 밝은 해명의 길이 촉발되면서 그 과정에 한민족 전통적인 우주생명학 '천부경(天符經)'의 기본 토대 위에서 복희역, 문왕역, 정역과 그리고 정역에 대한 부분적 수정을 포함한 정역-천부역 사이의 과정 역학인 필자 본인의 등탑팔괘(燈塔八卦) 또는 등탑역(燈塔易) 등 사역(四易)의 기능, 역할과 그 해석 방법이 총괄, 재편성되는 시대를 말한다.
이때에 비로소 '오역'의 풍요한 수리체계와 그 광활한 지혜에 연속해 미국의 뇌과학이 꿈꾸는 '신경-정신-신령 컴퓨터'와 일본의 창조적 정보학이 목말라 하는 '우주적 콘셉터'의 창조가 가능할 것이며, 이때에 비로소 동아시아의 방대한 우주 수리학의 집성인 유효군(兪曉群)의 '술수탐비(術數探秘)' 류의 '8수 세계'와 유럽의 근대 우주 수학을 헤겔·칸트 류의 객관적 관념론에 연결해 무한 확장 해석하겠다는 빗토리오 횟쓸레 류의 우주적 관념 수학을 총괄해 화엄개벽에 연속시키는 작업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우선 정역 공부에 천부경 해석을 동반하는 일일 것이다.
천부경 수학의 구조는 첫째, '1,0'의 무(無)를 바탕한 복잡화(複雜化) 수리인 '1,0,10,1'과 '1,10,0,1'의 구조와 둘째 '9+9=18'의 구조와 셋째 '9x9=81'의 구조에 기본이 있으며 마지막 셋째의 '81'은 동아시아 신비수학의 첫 번째 샘물이자 생명수학의 기초다. 그리고 이 '81'이 세 번 곱해지면 영 또는 마음과 관념의 수라는 '531,441'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초보단계에 불과하다. 만약 미국의 정보화와 일본의 창조화, 즉 컴퓨터와 콘셉터 연구열을 함께 '연결, 앙양시키려 한다면 천부경을 토대로 한 오역(五易) 수학의 총괄 과정에서 유효군의 '술수탐비' 류의 이른바 상수(常數), 천수(天數), 예수(禮數) 등 동아시아 신비수, 우주수와 사라센 이후 이슬람의 우주 수리학과 빗토리오 횟쓸레가 겨냥하는 유럽의 우주적 관념수학의 대 총괄이 필요하다.
그러나 만약 그 첫 출발에서 정역의 우주 및 영적 생명계 대 개벽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급변하는 세계에서 그 옛날 수리가 그대로 정확성을 가질 리가 없을 것이요, 그 기능, 역할, 의미 또한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의 경락학자 김봉한(金鳳漢)에 의하면 근대에 들어오면서 인간 몸 안에는 이전에 보이지 않던 혼돈혈(混沌穴)이 나타나 수십 가지가 새로이 활동하고 예전엔 그리 높이 평가 안 되던 (선천시대의 윤리나 과학의 한계이기도 하다) 회음혈(會陰穴)의 활동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경락, 기혈, 단전 등은 정신을 동반한 기(氣) 활동이다. 미국 디지털 과학 쪽의 용어로 '비트'에 일본 정보학 쪽 콘셉터 용어로는 '창조적 발상량(創造的 發想量)'이 결합된 문제 영역이니 거대한 사건이 된다.
유럽의 경우, '혼돈에 빠져들어가면서 동시에 혼돈에서 빠져나오는 혼돈 그 나름의 질서를 발견하려는' 질 들뢰즈 류의 혼돈학을 포함한 포스트모더니즘 모험을 일체적으로 격하시키고 굳어질 대로 굳어져 거의 쓸모없는 철학의 미이라인 헤겔·칸트의 관념론 위에 '객관성'이란 면죄부를 씌우고 그것을 절대시공간론 차원에서 못 벗어난 뉴턴·데카르트 류의 우주 수학만으로 이 후천개벽이라는 '대혼돈(Big Chaos)'에 대해 대답은커녕 한마디 정확한 해명이나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피타고라스인가?
그것은 마치 여율(呂律), 즉 혼돈적 우주 소리에 의해서만 비로소 빛을 발할 수밖에 없는 율려(律呂)의 운명과 같은 것이겠다. 그러니 여기에서 우리는 중국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그들은 지난 올림픽 전야에 공자 사상으로 중국은 물론 세계를 통일하겠다고 공언했다. 공자를 앞에 세운 것은 밑에 주역으로 뒷받침한다는 이야기인데, 그 보도를 들은 내 마음의 첫 반응은 이것이었다.
'꿈도 야무져라!'
그들은 앞으로 무지무지한 고뇌와 시행착오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후천개벽 시대의 역(易) 또는 수(數)의 문제는 천부역 중심의 '오역'과 신령 컴퓨터 및 우주콘셉터 그리고 화엄개벽사상일 터인데 그 근거요 출발이 후천개벽의 역학적 인식인 정역공부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련은 나의 체험으로는 수운동학의 주문 38자 수련에 있다. 그 안에 이 모든 복잡한 내역이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수련의 첫 조건은 다함없는 전력투구의 '모심' 또는 '모심선(侍禪)'에 있고 또 그 첫걸음은 '텅빈 영원한 푸른 하늘' 즉 '한' 또는 '한울님'을 내 몸 안에 '모심'(동학의 侍天主)이다. 그리고 그 '모심'이 곧 수억천만 년 우주 진화의 기본 동력이자 혼돈적 질서이니 또한 미구의 화엄개벽의 동력이고 그 동력의 기초가 바로 '텅빈 무궁의 신령성'이라는 점을 먼저 애써 인정하고 실천하는 데 있다.
정역(正易)의 저자 김항(金恒)은 1826년(순조 26년)에서 1898년(고종 36년)에 걸쳐 충청도 연산(連山) 땅 인내강변에서 살던 역의 대가로서 자는 도심(道心)이고 호는 일부(一夫)다.
일찍이 당대의 일대 기인(奇人)인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圭) 선생 밑에서 동학의 최제우, 남학(南學)의 김광화(金光華)와 함께 공부하며 그로부터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연담선생은 최제우에게 선도(仙道)의 부활을, 김광화에게 불교의 혁신을, 그리고 김일부에게는 크게 천시(天時)를 받들어 역(易)을 새로이 정하라 하고,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影動天心月)'란 화두를 줬다.
선생은 이 화두를 들고 19년의 노력 끝에 '정역'을 깨우쳤으니 수양방법은 '서경(書經)'의 거듭된 독서와 '영가무도(詠歌舞蹈)'의 춤과 노래에 의한 수련이었다.
그는 허공에서 수년간 거듭 새로운 팔괘를 보고 이것을 '정역팔괘(正易八卦)'로 획정, 설명하면서 1881년 공자의 환영과 함께 '대역서(大易書)'를 계시 받는다. 그리하여 1885년 공식적으로 '정역'을 공표한다.
이후의 후계 공식화 과정은 대중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직계 자손이 있고 제자들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역을 학문으로 공식 연구한 사람으로는 충남대의 유남상(劉南相), 송재국(宋在國) 교수들과 아세아문화사에서 다섯 권의 전문적 연구서를 출간한 이정호(李正浩) 선생, 그리고 전(前) 정신문화연구원장 유승국(柳承國) 선생 정도다. 일반적으로 정역연구서로 통용되는 것은 이정호 선생의 저작들이다. 그러나 주역과의 관련 부분에서 지나치게 주역에 투항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저작들을 물론 참고하면서도 우선은 '촛불' 등 현실의 문명과 지구대변동에 연결된 정역의 원리 및 가치를 가능한 한 원전의 표현과 의미 그대로 소개, 해설하면서 이것을 계기로 이제부터 오늘 새 시새, 새 세대의 새로운 '생명 평화'와 '혼돈적 질서', 그리고 '여성 중심의 문명 전환' 등의 후천개벽관에 의해 광범위한 연구, 실천열이 불붙기를 기대하겠다.
기위친정(己位親政)
정역은 후천개벽이 '기위친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기위(己位)'는 우주의 12간지(干支) 중 여섯 번째인 '대황락위(大荒落位)'로 '저주받은 꼬래비 위상'이다. 이 저주받은 위상에 떨어져 있던 지구자전축이 '친정(親政)' 즉 임금 위치를 회복한다는 뜻이니 이때가 후천개벽, 우주 대변동의 때라는 것이다.
정역은 동양의 경우 주(周)나라 성립 전후한 2800여년 또는 3000년 전에 북극 중심에 있던 지구 자전축과 그에 따른 북방 천공의 성운군이나 북두칠성, 북극성, 북쪽 은하 등이 다 함께 서남방(西南方)으로 45° 정도의 각도로 크게 경사(傾斜)되었다가 때가 되면 본디의 제 자리인 북극의 정위(正位)에로 복귀 이동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지구자전축이 '기위'에서 북극 중심으로 복귀('친정위치')하면 그때 후천개벽이 본격화한다는 말이다.
실제로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2004년 '쓰나미'다.
2004년 대해일 사태로 인도네시아에서 26만 명이 한꺼번에 죽는 일이 있었다. 서구 과학계는 그 원인을 지구의 대륙판(大陸坂)과 해양판(海洋坂)이 크게 충돌한 것으로 봤고, 또 그 충돌의 원인을 지구 자전축 이동으로 보았다. 두 판의 충돌은 인정하면서도 자전축 이동을 인정 못하는 주류 과학계의 유보사태와 뒤이은 논쟁으로 이후 4년 동안 라틴어 학명이 정식으로 붙여지지 못한 채 오늘까지 그저도 일본어 신문 용어인 '쓰나미'로 남겨져 있다.
중요한 것은 정역이다.
지구 자전축의 북극 복귀, '기위친정'이 실현되면 바로 그때 북극에는 파천황의 변화 등이 나타난다는 지적을 하고 있는 점이다.
2005년 신문들은 북극을 구성하는 두 가지 축인 지구 내부 수렴적 에너지 시스템의 극점이 아닌 '지리극(地理極·geographic pole)'과 지구와 외계에로의 확산적 에너지 시스템 사이의 연결 고리인 '자기극(磁氣極·magnetic pole)'의 상호 이탈과 뒤이은 관계 재형성 과정을 일제히 보도했다.
연이어 이제까지는 완만한 속도를 보이던 대빙산의 해빙이 급격한 속도를 나타내고 광범위한 시베리아 동토대 밑에 묻혀 있던 메탄층이 대규모로 녹아 폭발하면서 북극 전체가 현저히 따뜻해져 금년도 하반기부터는 뱃길이 열릴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적도에는 눈이 내리고 케냐에 얼음이 어는 사태가 나타나며 뜨거운 해류와 차가운 해류가 복잡화 운동을 하면서 남반구 해수면이 이전과는 비교되지 않는 대대적인 초과 상승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되고 있다.
남반구 해수면 초과 상승은 이미 정역에 사실 그대로 기사화되어 있는 정도다.
지난 번 발리 환경회의는 '온난화(warming)'라는 환경개념을 '기후변화(climate change)'로 바꿨다.
앞으로 온난화 사이사이에 짧은 빙하기인 간빙기(間氷期)가 교차 생성하여 더위, 추위가 겹치리라는 예상 때문이다.
이 점 역시 정역에 이미 지적되고 있으며 지진, 해일, 화산, 침강, 융기, 폭풍, 토네이도와 산불 등의 재해가 접종(接踵)한다고 강조돼 있다.
악질만세(惡疾滿世)
'악질만세.' '악성적인 질병이 세상에 가득 찬다.'
이것은 정역의 용어는 아니다. 동학의 수운 최제우 선생의 후천개벽 시 질병관이다.
또 이 경우를 강증산 선생은 '대병겁(大病劫)'이라 불러 전 인류의 3분의 2가 병으로 죽는다고 예언한다.
정역 역시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삼자를 결합해 해설한다.
극도의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갈마들고 북극이 더워지고 적도가 추워지며 온난화와 간빙기가 섞여든다면 결과는 '악질만세'요 '대병겁'이요 '대전염병 창궐시대'뿐이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고 생명계에 괴변이 일어나며 지구·우주 전체에 대혼돈이 온다는 것이다. 이 때 정신계엔 거대한 변화가 오는데 이에 대해 정역은 동아시아적 철학과 신화, 종교 등의 독특한 개념, 은유, 잠언 등과 역학과 술수(術數) 용어 등으로 다양하게, 그리고 매우 풍요하게 후천개벽 시대의 우주적 생명 문화의 콘텐츠 등을 암시한다. 이것은 다음 기회에 본격적으로 자상한 분석, 해명이 시도돼야 할 것이다.
정역은 이 때 암시적으로 영적 생명력의 파격적인 새로운 치유 효과가 출현할 것을 예언한다. 연담 이운규 선생이 김일부 선생에게 준 화두,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影動天心月)'의 바로 그 '그늘'과 관계가 있다. 그것은 버림받은 어둠과 그늘로부터 온다고 암시한다. 그것은 곧 율려의 전복인 '여율'이요 '그늘(影)'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 역시 다음 기회로 미룬다. 이미 이 글의 전반에 제기한 것과 같이 여러 가지 방면의 연결과 심도 있는 연구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금화정역(金火正易)이라는 중심 원리 등이 주역과의 정당한 연속성 속에서 정리되어야만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것이고 이 때 반드시 해방 직후 정역 연구의 귀재(鬼才)인 한동석(韓東錫)의 '우주 변화의 원리'와 함께 '경락학(經絡學), 단전학(丹田學), 참동계(參同契), 황제내경(黃帝內經), 동의보감(東醫寶鑑),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김봉한(金鳳漢), 기타 '오역(五易)'과 기철학(氣哲學)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몇몇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어려우니 이 글이 바라건대 한 촉발력을 발휘하여 부디 정역 연구 열풍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또한 중국의 '서경(署經)' 이후의 공자, 노자 등의 고대 중국의 정치사상과 동학, 고대 화백, 화엄불교, 당취 정치사상 등과 관련 또한 중요할 것이니 이 역시 극복해야 될 부분이다.
십일일언(十一一言)
정역은 '기위친정'이 우주에서 현실화할 때는 인간사회, 더욱이 맨 먼저 우리 민족 속에서 '십일일언'이라 명제화한 정치현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이것이 무엇일까?
'기위친정'은 그동안(3000년 동안) 내내 '꼬래비' 즉 '저주받은 위치(大荒落位)'에 떨어져 소외받았던 힘(지구 자전축)이 임금의 위치(본디의 자기 자리-북극)를 되찾는다는 것이다. 북극이다.
스티븐 호킹은 전 우주적으로 물과 생명이 태어난 곳은 오직 지구의 북극뿐이라고 했다. 우주 진화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물과 생명의 탄생지가 최고 가치의 지점이니 우주 정치의 임금 자리라 하겠다.
'십일일언'의 십(十)과 일(一)은 합하면 '흙(土)'이니 우주의 중앙이고 밑바닥 민중의 메타포가 된다.
그렇다면 그 누가 바로 이 우주와 지구와 생명과 문명의 중심(親政)에 들어선다는 것일까?
꼬래비(己位)가 누구인가?
정역은 '십일일언'을 이렇게 해설한다.
'이십 세 미만의 어린이, 미성년과 여성이 현실 정치의 중심에 나선다.'
길고 긴 선천(先天)시대 모든 동서양 고전에서(예: 구약) 어디에나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 있다.
내우외환(內憂外患)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감당(정치 주체)하는 것은 중년 남성전문집단과 그를 밑받침하는 힘센 남성청년들이다. 그리고 그 주체들이 그때마다 늘 걱정하는 피보호대상은 예외 없이 '어린이, 미성년과 여성들'이다.
이들이 곧 '꼬래비'요 신약에서 예수의 산상수훈의 대상인 '저주받은 자(네페쉬 하야)'들이다. 이들은 상징적, 은유적, 신화적, 전설적, 영성적 표현 영역의 예외 이외엔 고대정치시대 이후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정치 주체가 된 적이 없다.
올해 초 5월과 6월 시청 앞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인 광장에 켜진 촛불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더욱이 그들이 들고 나온 정치 아젠다는 전문 정치 집단들의 그것들과는 거리가 먼 먹을거리, 물, 가스, 생태, 운하 공사, 생계와 교육 같은 구체적인 생활자치, 생동하는 생명정치의 아젠다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정치 형식은 주모자도 조직도 동원 체계도 책임자도 없는 고대의 '화백(和白)'과 같은 직접민주주의였으니 다름 아닌 네오 르네상스, 후천개벽의 다른 말인 '고대회복(古代回復)'이었고 그들의 정치 양식은 철저히 문화적이고 비폭력 평화와 해학, 풍자, 사랑, 화해, 상생, 친화력, 혼돈성, 개체성, 우연성, 자발성, 창발성과 춤과 노래였으니 '풍류(風流)'였고 또 가장자리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호혜시장(互惠市場)인 낮은 단계의 '신시(神市)'까지 나타났었다.
특히 유모차 부대 엄마들을 앞장으로 하는 과천(果川) '지역통화'와 '품앗이 패 여성들'과 여러 '생명운동 여성들'의 적극적 역할은 고대 모권제 사회의 여성정치의 창조적 부활을 예감시켰다. '촛불'은 노자의 고대정치 '무위이화(無爲而化)' 즉 '선각자, 지도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민중 스스로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하는 태양의 정치(我無爲而民自化)'의 부활이었고 '하느님은 창조하고 민중은 진화하는(동학 '進化' 즉 '창조적 진화'의 내용이 바로 '무위이화(無爲而化)'이니 곧 內有神靈 外有氣化)' 창조적 진화론에 입각한 '모심의 정치'의 출현이었다.
또한 온라인과 오프라인 전 과정에서의 무수한 개체 네티즌들의 불꽃 튀는 쌍방향 소통에서 저마다 제 나름의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창조적 의견들의 무한 무궁한 '시끄러운 야단법석'에 의해 도달한 '살아 생동하는 개체-융합(identity-fusion)의 자기 조직화(self-organization) 자체로서의 또 하나의 내부공생(endosymbiosis)의 실현인 '집단지성(集團知性)' 현상은 무수한 보살들이 그물코마다 모두 일어나 저마다 저 나름의 깨달음을 시끄럽게 떠들어댐으로써 고요한 온 우주 그물의 비로자나 부처의 말없는 합의(寂寂惺惺)에 이르는 '화엄개벽'(동학의 모심의 내용인(一世之人 各知不移, 또는 萬事知의 구체적 내용인 數之孝가 知基道而受基知하는 후천개벽의 대 해탈)의 광활한 대규모 문명 전환 운동의 발단이었다. 이것을 후천개벽이라고 하지 않으면 무엇이라 이를 것인가?
이것이 곧 4월 29일에서 6월 9일에 이르는 첫 촛불의 십일일언이니 바로 그 뒤에 붙는 '일언(一言)', 한 마디야말로 이제껏 설명한 내용이다.
십오일언(十五一言)
정역은 말한다.
바로 이때 선각자, 지식인, 종교인, 정치가들은 한 발 뒤로 물러나 교육, 문화, 제사, 사상, 그리고 십일일언의 그 직접민주주의 정치를 간접적으로 도와주는 배합적인 대의 민주주의로 자신의 '함이 없음(無爲)'을 세워야 하고 결국 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학 주문에서의 '조화에 일치함(造化定)'이니 조화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무위이화(無爲而化)' 즉 '민중의 고대적 직접정치'라 할 때 이른바 '첫 촛불'이겠는데, '일치함' 즉 '定'의 뜻은 '그 현실행동에 일치하면서도 물러나 마음을 비운다(合其德 定其心)'는 뜻이므로, 지식인, 시민운동, 종교집단, 정치인은 제 이익을 욕심내서 그 촛불을 숯불이나 횃불로 휘저어 버리려고 뛰어들어 설치지 말고 마땅히 뒤로 물러나 촛불을 보호하고 돕고 지원하되 반드시 마음을 비우고 후퇴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곧 6월 30일과 7월 4일의 천주교사제단과 불교승가회 스님들의 '새 촛불'이겠다.
바로 이 '첫 촛불'과 '새 촛불'의 상관관계가 십일일언과 십오일언의 연관이며 이때의 두 가지 '일언(一言)' 즉 '한 마디'가 다름 아닌 '기위친정'이니 후천개벽이고 기독교 쪽에서 말하지만, '네페쉬 하야'에 대한 예수의 산상수훈이요 그것의 예루살렘 입성(기위친정)을 위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는 또 하나의 촛불, '빠스카', 즉 '흰 그늘'이겠으며 불교식으로 본다면 '중생에 대한 자비심'의 실천으로서 텅 빈 마음으로 '중생과 함께 귀명(歸命)'함이겠다.
'첫 촛불'과 '새 촛불' 사이에 지식인, 정치인, 시민운동의 개입, 위장, 이용, 변질, 오염과정이 있다.
동학에서 보자면 모심도 살림도 깨침도 아니요, 비움도 무위이화의 조화에 돕고 일치하되 뒤로 물러나는 '조화정'도 아니다.
그것은 전혀 선천적 관행(先天的 慣行)에 불과했으니 (아니, 그것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철저히 반(反) 개벽적이고 '기위친정'에 대한 파괴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참으로 못난, 꾀죄죄한 짓들이다.
그것은 원만한 후천적 개벽도 아니지만 선천적으로 보아도 당당한 혁명 행위하고도 거리가 아득히 멀다.
내가 파악하는 바로는 '십오일언'은 옛 '화백'에서와 같이 그 숱한 밤들의 시청 앞 광장에서 단하(壇下)의 시끄러운 직접(直接) 군중의 십일일언에 대해 단상(壇上)의 조용한 대의(代議) 지식인의 십오일언 사이의 옛 마고(麻姑) 시대의 '혼돈적 질서', '생명평화'였던 '팔여사율(八呂四律) 구조의 화백 현장에서 역동적, 현실적으로 드러난 것 같다.
그것은 참으로 당당하고 의젓하고 아름다웠다. 거기에 비해 몽땅 말아 먹으려고 촛불을 위장하는 시커먼 숯불이나 시뻘건 횃불은 참으로 추잡하고 촌스럽고 정치성 자체도 별 볼일 없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나 그 속내를 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간태합덕(艮兌合德)
촛불의 직접적 계기는 분명 미국산 미친 쇠고기 수입 문제다.
물론이지만, 나는 미국을 그리 예쁘게만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역은 후천개벽 과정에서 새 시대, 새 세상을 활짝 열고 나가려면 반드시 '간태합덕(艮兌合德)'이라는 대전략을 세우고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산(艮)'인 정동(正東)의 한국과 못(兌)인 정서(正西)의 미국이 창조적 파트너십을 건설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자칭 좌빠는 욕을 할 것이고, 어떤 자칭 우빠는 표정이 어두워질 것이다. 당연하다. 그러나 그 당연해 보이는 반응은 전혀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망상 수준에 불과하다.
어째서 그러한가?
좌빠의 경우, 그의 사상적 동지일 것이 분명한 평양과 워싱턴이 이제 곧 대사관을 교환설립하고 대규모 경제지원을 주고받으며 주체사상을 수정하여 타자관(他者觀)을 보완하여 미국이라는 친구를 철학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거의 마찬가지로 세습독재의 수령관 수정과 선군(先君) 일변도의 군사주의를 정치국지배의 정치경제주의로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그 좌빠의 설 자리는 없다.
우빠는 왜 우울한가?
북미관계가 파산하고 김정일이 사망하면 미중관계에서 불리한 북한 독점 군부가 내전을 시도할 때 남한 우빠는 흡수통일로 막대한 이익을 얻든가, 내전을 틈탄 호재(好材)를 획득하리란 계산이 물 건너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북미관계 개선은 남한의 친미 우빠의 독점적 위치를 불안하게 만든다. 뉴라이트 소동, 국경일 소동, 교과서 소동, 경제정책의 조삼모사(朝三暮四) 등 온갖 혼란은 바로 그 초조감과 연결돼 있다.
도대체 미국이라는 제 조국과 유럽이라는 제 친척집이 금융위기란 이름의 실질적 공황에 빠져 들고 신자유주의자 민영화 마니아인 우빠에게 국유화니 국가 개입 같은 케인즈주의에 의한 중도적 시장 문명은 거의 파산선고와 다름없다. 그래서 우빠는 일본 극우파에 찰싹 달라붙기 시작했다. 일본 극우파는 최근 매일 밤 코냑을 들고 '또 다시 100년을!' 외친단다. 그 100년의 시작이 1910년 한일합방이라니 소름 끼친다.
그러나 '아소 다로' 극우 일당 저희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지금 미국, 유럽으로부터 아시아 쪽으로 대규모 자본이동과 함께 불고 있는 바람은 서툰 문자로 중도(中道) 자본주의이지만, 그 실은 아시아에서 새롭게 창조될 아시아 문명의 예감 단계에 잇닿아 있을 뿐이다.
아시아에로서의 문명이동은 이미 상식이다. 그렇다면 아시아에서 그 첫 발자국인 동아시아에서의 새로운 경제적 후천개벽의 성격은 도대체 무엇일 것인가?
우빠가 이 이야기 들으면 기절초풍할 것이다. 그러나 좌빠가 이 소리를 들으면 자살 충동을 느낄 것이다.
그 성격과 내용과 방향이 한 마디로 한미 간 신문명 파트너십을 뜻하는 바로 '간태합덕' 네 글자 안에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아시아 문명의 경제사회적 방향은 고대 신시(神市)의 현대적 전개에 있다.
신시는 곧 호혜시장(互惠市場)인데 그것은 또 아시아 고대를 지배했던 경제인 '호혜, 교환, 획기적 재분배'의 시장이고 사회인 것이다. 물론 현대적 요구와 조건 안에서의 현대적 전개일 터이다. 이것은 이미 상식 수준이다.
그것의 메타포가 무엇일까?
'산 위에 못이 있음이여!'이다.
수운 최제우 선생의 시 구절이다.
이것이 또 무엇인가?
주역에서 '산과 못이 기운을 통한다(山澤通氣)'의 경지이다.
이것이 또 무엇인가?
옛 아시아에서의 '유목 중심의 정착' 시장을 말하며 그 구체적 내용이 바로 '산 위의 못가에서 벌어지던 바자르'다.
그것이 바로 동학의 해월 최시형 선생의 이른바 '비단 깔린 장바닥'이니 '사랑인 호혜와 현실인 교환과 이상인 획기적 재분배'의 현대판 '성스러운 시장' 곧 '신시(神市)'다.
문명의 역사의 진화 과정, 즉 지금은 '서방엔 공포가 지배하고 동방엔 희망의 별이 든다'라거나 '세계적 자본 이동은 지금 지정학적 변형과정에 있다' 같은 서방의 전문경제연구소의 코멘트가 전혀 우연이 아니다. 그 진화과정은 네오 르네상스, 고대 회복, 다시 말하면 후천개벽과정이니 아시아로부터 시작된 세계 문명사의 귀결은 아시아 고대 시장의 아시아에서의 새로운 부활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다름 아닌 '촛불'의 메타포이니 곧 '기위친정'이다.
맑스, 막스 베버, 토인비, 케인스, 월러스틴 등에 의해서 극도로 천대받던 (기위, 대황락위) '꼬래비' 아시아가 주인 자리, 임금 자리를 되찾는 과정이기 때문인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산 위의 못', 역(易)의 '산택통기(山澤通氣)'가 내용이 되는 한미 간 동아시아 태평양 생명 평화의 신문명의 창조적 파트너십을 뜻하는 '간태합덕'이야말로 '기위친정'과 '후천개벽'의 길이다.
한반도는 대서양 문명의 화살촉인 미국 자본이 아시아 잠재시장 개척의 길로 나아가는 경제 교두보다. 그러니 중국 일본과 철군 타협 아래 6자 회담으로 북한 핵과 김정일 선군 지배의 강성체제만 제거, 완화한다면 동북아 집단 안보 체제 보장으로 그 교두보의 평화적 운용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한반도 미국 주둔의 항구적 지속은 중국과 일본, 러시아의 군비 증강의 구실이다.
미군 헤드쿼터는 이제 머지않아 하와이로 빠질 것이다.
그래서 전시작전권을 넘긴 것이고 그래서 최근 다시금 한반도 공동방위 약속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미국의 대외전략의 특징 중 하나는 왼쪽으로 갈 작정을 할 땐 반드시 오른쪽으로 간다고 선언하는 법이니까.
김정일은 죽은 것인가?
하느님 말고 누가 그걸 알겠는가?
내일쯤은 알게 될 것이다.
그가 사망했다 해도, 군부지배든 정치국 집단 지배든 후계 세습이든 '간태합덕'은 안 바뀐다. 도리어 서서히 수령체제의 수정과 타자관 보완, 정신주의 일변도의 고행(苦行) 강요체제의 근본적 제거 등 방향으로 주체노선은 서서히, 그러나 근본적으로 수정되면서 후천개벽 방향의 동학 사상 등을 흡수하려 할 것이다.
'간태합덕'에 반드시 수반되는 정역의 조건부가 잇다. '진손보필(震巽補弼)'이다.
'우레와 바람이 간태합덕을 옆에서 돕는다'의 뜻이다.
정역에서는 우레가 중국이고 바람이 일본이다. 그러나 나의 등탑역(燈塔易)에서는 그와 정반대다. 왜 그러한가?
간태합덕에 관한 한, 일본의 우레가 훨씬 더 적극적이고 중국의 바람은 훨씬 더 소극적, 아니 나아가 부정적이며 방해적이다.
물론 일본은 경계하면서도 접근해야 한다. 중국은 적대는 하지 말아야 하지만, 당분간은 멀리해야 한다. 그것이 '진손보필'이다. 우레와 바람에 관한 역(易)의 지혜를 잘 살펴야 한다.
문제는 미국이다.
미국 때문에도 우레와 바람에 관한 100여 년 전의 정역의 현실 동북아 관에 위상 변동이 오는 것이다.
문제는 한일 역사와 '문화유통'(이것은 앞으로 매우 중요해진다), 한중 역사와 '문화 관계'(이것은 앞으로 더욱더 중요해진다.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라!)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이다.
'촛불'의 직접적 계기는 분명 미국산 미친 쇠고기 수입이다.
물론이지만 나는 미국을 그리 예쁘게만 보지는 않는다.
정역은 여기에 대답한다.
'제도 삼천 가지의 개혁과 우주적 문명관의 통일(禮三千而義一)'
미국은 간태합덕의 조건으로 먼저 자기 내부의 제도 삼천 가지를 철저히 개혁해야 한다. 미친 쇠고기 얘기도 여기에 포함된다. 은행 국유화, 케인즈 등장이 그 첫 시작이다. 그것은 연쇄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의 우주적 문명관의 통일은 어찌될 것인가?
이제부터다.
새로운 아시아 시장이 함축한 후천개벽, 기위친정의 필연성이 납득되려면 그들의 지금의 시장 파탄이 더욱더 혹독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들은 (일본과 유럽까지도, 또 어쩌면 중국까지도) 한국(남북 모두)과 아시아의 무수한 '꼬래비'들의 '십일일언'에 대해 가능한 한 '십오일언'의 입장을 수긍할 것이다.
아시아, 동아시아에 수많은 유누스의 그라민 은행들, 사회적 기업들, 공정 무역들, 지역 통화들, 품앗이와 계(契)들이 유행한다. 하나의 조짐들이다.
동학은 말한다.
'한울님이 뜻을 두면 금수 같은 세상사람 얼푸시 알아내네!
그 무수한 호혜장사들이 새로운 아시아 경제 사회, 새로운 후천개벽, 대문명사 전환의 예감들이다.
조금은 낙관이 가능한 시절이다.
확신이 안 서더라도, 이제 '촛불'을 경험하고 '기위친정'을 신문에서 확인한 지금은 지속적으로 '모심'으로서 그 혼돈적 질서를 참으로 후천개벽 '기위친정의 기독교도들처럼 앞으로 나아가며 희망하고 투신하라!'
유리세계(琉璃世界)
후천개벽, 문명의 대변동에서 기후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영국의 주식 변동과 그 관찰 분석 기능은 매우 날카롭다. 그 안테나는 아시아와 기후 변동에로 바삐 움직인다. 온난화와 간빙기가 교차하고 북극의 얼음이 녹고 적도에 눈이 내리는, 이 극도의 추위와 극도의 더위 사이에서 온갖 해괴한 질병과 바이러스들의 닥쳐오는 대공격, 대창궐 앞에서 대규모 주거 이동이 다만 캠핑카의 유목민들뿐이겠는가?
아마도 전 인류의 잠재적 대규모 이주는 필연일 것이다. 다만, 그만큼 여름엔 서늘하고 겨울엔 온화한 곳이 있느냐는 것이 문제일 분이겠다.
그런데 정역은 이런 경우 귀가 번쩍 뜨이는 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미 누누이 열거한 바 있는 후천개벽의 대혼돈, 대병겁(大病劫)으로 수많은 생명이 죽거나 타격을 받는 과정에서, 지구 날씨에 어마어마한 변동이 온다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동지(冬至)나 하지(夏至) 같은 극도의 추위와 극도의 더위가 축을 이룬 그런 지구 기후가 전혀 아니라 춘분(春分)과 추분(秋分) 중심의, 여름엔 서늘하고 겨울엔 온화한, 그리하여 모든 곡식과 채소와 과일과 식물·동물이 다 평화롭고 건강하게 잘 자라며, 이 온유한 날씨 및 풍요로 인해 사람들도 모두 성인(聖人)처럼 인자하고 너그러워 참으로 태평한 시절, 4천 년 유리세계(琉璃世界)가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바로 기위친정에 있다는 것이니 온난화와 간빙기의 교차 생성, 북극에서 얼음이 녹고 적도에서는 얼음이 어는 더위와 추위의 극단적인 상극(相剋) 대결 구조로부터 점차 두 극단 사이의 조화, 상생(相生)적, 음(陰) 위주의 새로운 세계질서, 우주 질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정역은 그에 연관된 해와 달과 간지(干支)의 변동, 우주 변화를 들어 매우 아름답게 설명하고 있다.
나는 재작년, 2006년 매우 긴 시간 아시아 대륙의 여기저기를 기행(紀行)했다.
그 중 하바로프스크와 오호츠크 해(海)와 캄차카 반도, 그리고 바이칼 호수와 이르크츠크 등지를 지나며 매우 이상한 발견을 했다.
물론 일반화된 현상은 아니지만 몇 년 간격으로 참으로 기이한 기후 현상이 그 지역을 찾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겨울엔 춥기로 유명하고 여름엔 덥기로 유명한 그곳들이다.
몇 해씩 건너 겨울엔 최저 영하 5도, 여름엔 최고 섭씨 15도의 온화하고 서늘한 날씨가 찾아와 참으로 기이한 평화로움을 맛보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괴변일까?
그 이전 내가 카자흐, 키르키스, 우즈베키 등 알타이, 텐샨, 파미르 근처를 돌아다닐 때 그곳 지식인들로부터도 그 내륙의 위도(緯度)와 산지(山地)와 고원(高原) 등으로 인해 바로 바이칼이나 오호츠크 해 등과 같은 서늘하고 온화한 날씨가 장차 그곳에도 찾아오리라는 과학적 전망이 퍼지고 있다는 낙관적인 예측을 들은 적이 있었다.
정역에도 희미하지만 그와 연관된 예언이 있다.
이것은 무슨 괴변인가?
절대 다수의 세계 인구가 대규모로 아시아 내륙 이동을 하는 날이 오려는 것인가?
얼핏 스쳐가는 이야기였지만, 몽골의 성산(聖山) 토토 텡그리에 매년 모이는 57개국 영성전문가, 명상가들이 바이칼의 알혼섬과 연계하여 옛 최남선(崔南善) 선생이 오는 '불함(不咸)문화'라고 일컬었던 고대 한민족의 문화 '부르한'의 우주론으로 새로운 지구 구상을 매번 논의하는데, 그 과정에서 몽골 등의 아시아 내륙의 기후가 미래에 바로 그와 같은 서늘하고 온화한 낙원으로 변한다는 신비한 예언과 전망을 내어 놓았다고 한다.
믿을 수 없다.
그러나 희망한다.
유리세계.
나는 젊어서부터 유토피아라는 것을 혐오해 왔다. 아마도 마르크스의 '도이췌 이데올로기'에 대한 구역질 때문이었던 것 같다.
유리세계.
그러나 이것은 유토피아라기보다는 인류의 마음 속 그늘로부터 솟는 간절한 흰 빛 소망인 듯하다.
바로 유리(琉璃)란 '흰 그늘'이 아닌가! 그러매 유리는 하나의 '촛불'이 아닐 것인가!
'기위친정'은 인간까지 포함한 우주 만물의 컴컴한 저주 받은 몸 속으로부터 솟아오르는 타는 목마름이요 애절한 기도가 아니겠는가!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圭) 선생이 김일부 선생에게 주었다는 화두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影動天心月)'에서 그늘은 바로 이 슬픈 기도가 아닐까?
그리고 그 우주라 번역한 '천심월(天心月)'은 다름 아닌 '한울님의 마음'이니 곧 정역은 한울님께 올리는 슬픈 기도요 흰 그늘이니 바로 '촛불'이 아닐까!
그렇다.
바로 그 기도에 대한 우주의 현실적 대답이 다름 아닌 2004년의 지구자전축의 북극 이동이 아니었는가!
우리에게 남은 것은 어쩌면 간절한 기도뿐.
흰 그늘의 촛불뿐인지도 모른다.
정역 공부와 실천은 촛불이요 촛불에 대한 빈 마음으로 드리는 간절한 '모심'일 것 같다.
이제 정역 공부를 모시자!
그리하여 그것을 모심으로써 매일매일에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생활적으로 실천하자!
'기위친정'은 이미 상식이 돼버린 '생명과 평화의 길'이요 이미 낡은 구호가 돼버린 참다운 '해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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