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통역사가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사귀는 거, 네 부모님께 말할 생각은 없어?
나는 말한다: 레즈비언인 걸 알게 되면 더는 나를 보려 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 부모님께 두 번이나 거절당하는 건 내가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아.
내 통역사가 말한다: 그분들이 너를 거부하진 않을 거야. 그럴 권리도 없고. 만약 네 언니들 중 한 명이 레즈비언이라고 털어놓는다면 모를까, 너한테까지 똑같은 기준을 들이대진 못할 거야. (본문 109쪽)
한국계 덴마크 작가 리 랑그바드(46)의 신작 <나의 통역사>(리 랑그바드 지음, 손화수 옮김, 푸른숲 펴냄)는 어린 시절 덴마크로 입양된 한 여성이 친생가족을 만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면서 겪는 언어와 정체성의 균열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 책은 덴마크의 권위 있는 문학상 '몬타나상'을 수상했다.
주인공 '나'는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고, 한국의 가족들은 덴마크어를 모른다. 이들을 이어주는 유일한 존재가 덴마크계 한국인 여성 '통역사'다. 그런데 통역사는 단순한 언어 전달자가 아니다. '나'와 수년간 만남을 이어온 동성 연인이기도 하다. 통역사는 나와 가족의 관계를 이어주는 동시에, 내가 가족에게 두 번이나 거절당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존재다. 언니들의 남편과 조카들에게조차 존재 자체가 비밀에 부쳐진 '나'는, 자신이 레즈비언이며 곁의 통역사가 동성 연인이라는 진실을 밝힐 엄두를 내지 못한다.
대사와 지문, 그리고 빈칸으로 구현된 '침묵의 언어'
내 통역사가 말한다: .
어머니가 말한다: . (99쪽)
국제입양인들은 자신의 의지나 선택과는 무관하게 일어난 입양을 통해 친생가족과 이별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이 태어난 가족만이 아니라 태어난 사회, 언어, 문화로부터도 유리된다. 혈연으로 맺어졌음에도 통역 없이는 단 한 마디도 소통할 수 없는 비극적 현실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로 이 책은 형식 면에서도 기존 서사 구조를 탈피했다.
소설은 나와 통역사, 친가족이 주고받는 대화와 지문만으로 전개된다. 작가는 인물들의 대화 일부를 의도적으로 거대한 빈칸으로 남겨두었다. 저자는 "한국어뿐만 아니라 문화, 역사까지 모든 것을 상실한 입양인들의 상실감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 즉 '침묵의 언어'를 만들어내야 했다"고 설명했다. 이 빈칸은 입양인이 친가족과 소통할 때 겪는 긴 침묵과 간극을 시각화한 것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트라우마와 감정으로 가득 찬 '존재로서의 침묵'이다.
자전적 경험이 투영된 기록, 입양인의 삶에 대한 증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생후 2개월 만에 덴마크로 입양된 리 랑그바드는, 자신의 정체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입양 제도의 모순을 고발하는 작품을 꾸준히 써왔다. 2006년 입양과 민족주의, 인종차별을 격렬하게 비판한 시집 <덴마크인 홀게르 씨를 찾아라>로 데뷔했고, 국제입양을 용인하는 사회 구조에 대한 분노와 비판을 담은 <그 여자는 화가 난다>에 이어 입양인과 친생가족의 재회에 대한 신작 <나의 통역사>를 내게 됐다. 그는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서울에 거주하며 친생가족과 재회한 바 있다.
지난 16일 있었던 출판기념회에서 저자는 "이 책에 등장하는 내용의 50% 정도는 허구이며, 실제 입양인들이 공감하고 겪었을 법한 이야기를 위주로 상황을 재구성했다"며 자전적 배경을 가진 소설이라고 밝혔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 많이 변모했으며, 그 과정 자체가 커다란 치유였다고 고백한다. 아울러 "해외 입양이 감소 추세인 만큼, 100년이 지나면 입양인이 더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며 "작가로서 초국가적 입양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입양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문학으로 남기고 싶다"고 밝혔다.
내 통역사가 말한다: 만약 네가 한국어로 썼다면, 가족에 대해 그렇게 쓸 수 있었을까?
나는 말한다: 맞아, 내가 덴마크어로 글을 쓴다는 사실이 분명히 도움이 됐어. 바로 그것 때문에 일종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거든.
내 통역사가 말한다: 그들을 배반할 자유.
나는 말한다: 때로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누군가를 배반해야 하기도 해.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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