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2018년 들어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김정은의 신년사 및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한은 특사를 교환하면서 10년간의 남북관계 제로 시대의 마감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핵 포기를 포기했던 것처럼 여겨졌던 김정은은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라고 말했다. 10년 만에 한반도 탈냉전을 향한 여정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절망의 끝자리에서 희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남북한의 시계와 세계의 시계는 또다시 엇갈리고 있다. 2018년 들어 남북한의 '탈냉전' 분위기와는 달리 "강대국들 사이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면서 '신냉전'의 징후가 뚜렷해진 것이다.
1989년에 끝났다던 냉전이 약 30년 만에 진짜로 다시 시작될지는 알 수 없다. 신냉전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2000년 이후로 이 표현의 빈도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냉전 시대의 핵심적인 특징이 미국과 소련 사이의 핵군비경쟁에 있었다면, 오늘날 신냉전의 기운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2의 핵 시대가 한반도와 핵무기를 보유한 인도와 파키스탄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남아시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 사이에서도 고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강대국들의 '제2의 핵 시대'
오늘날 강대국들 사이의 관계를 신냉전으로 표현할 수 있느냐의 1차적인 관건은 상대방의 전략적 의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를 통해 중국과 러시아를 "갈림길에 선 국가들"로 표현한 바 있다.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순응하느냐, 아니면 이에 도전하느냐는 기로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판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는 2017년 12월에 발표한 NSS에서 이들 나라를 "국제질서의 현상 변경을 추구하는 수정주의 국가들"로 규정하면서 "최강의 군사력 구축을 통해 힘에 의한 평화"를 이루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2018년 1월 공개된 국방전략보고서에선 북한이나 테러리즘보다 "강대국들과의 경쟁에 대응하는 것이 미국의 최우선순위"라고 천명했다.
2월 발표한 핵 태세검토(NPR) 보고서에선 러시아와 중국의 도전에 맞서기 위해 최강의 핵 능력을 확보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러시아에 대해서 "미국의 지도에 잘 따랐고 전략핵무기도 대폭적으로 감축했지만", 오늘날에는 핵전력을 대폭적으로 현대화하고 "제한적인 선제 핵공격 전략"을 채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러시아 정부가 발끈하고 나섰다. "대결적이고 반(反)러시아적 성격이 명백하다"며, "이는 깊은 실망감을 불러일으킨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3월 1일 국정연설에서 신형 전략무기를 대거 공개했다. 최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사르맛', 핵추진 순항 미사일, 핵탄두와 재래식 탄두 겸용이 가능한 수중 드론, 극초음속 미사일 등이 이에 해당된다.
푸틴을 이들 무기를 "무적"이라고 자랑하면서 그 이유를 미국 주도의 미사일 방어체제(MD)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이 자국은 물론 동유럽의 루마니아와 폴란드에 MD 시스템을 배치하고, 일본과 한국으로도 이를 확장하려 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전략무기 개발은 MD를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악순환적 작용-반작용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트럼프 행정부는 3월 말에 탄도미사일 방어검토(BMDR) 보고서 발표를 예정하고 있는데, MD 증강의 사유로 러시아와 중국의 위협을 명시하는 방안을 검토 중에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3월 2자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 행정부가 "유럽과 아시아와 같은 지역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급증하는 미사일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지금까지 공식적으로는 미국 주도의 MD는 북한과 이란의 위협 대응용이지 러시아 및 중국과의 전략적 균형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주장해왔었다. 그런데 곧 발표될 보고서에서 이들 나라를 직접 거론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트럼프 행정부가 러시아와 중국을 "수정주의 세력"이라고 부르고 "강대국들과의 경쟁"이 재연되고 있다고 판단한 만큼, 이들 나라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창(핵)과 방패(MD) 구축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움직임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움직임을 '강대국들의 제2의 핵 시대'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중국도 국가안보에 있어서 핵무기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냉전 시대를 상징한, 그래서 "냉전 시대의 유물"로 불렸던 비전략 핵무기, 즉 전술핵의 재등장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NPR에서 "효과적으로 핵전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냉전 시대의 유산을 재편해야 한다"며 "비전략 핵무기"를 재등장시키기로 했다. 여기에는 F-35 전투기에 장착될 예정인 공대지 핵폭탄 B61-12, 저강도 핵탄두를 장착하는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 그리고 해상발사 순항미사일(SLCM)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뒤질세라 푸틴도 극초음속 미사일과 핵추진 순항 미사일 개발·배치 방침을 천명했다. 이렇게 되면 1987년 체결된 중거리핵미사일폐기협정(INF)도 그 운명을 다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셋째, MD 경쟁의 본격화이다. MD 구축을 자제해 전략적 균형을 유지키로 했던 1972년 ABM 조약은 냉전 시대를 그나마 핵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지 않았던 초석이었다. 하지만 2002년 미국은 이 조약을 파기하면서 신냉전과 강대국 간 제2의 핵시대는 잉태되고 말았다.
그 이후 미국은 북한 위협을 앞세워 거침없는 질주를 해왔고, 이제는 러시아와 중국의 위협도 공식 거명하려고 한다. 미국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러시아와 중국도 MD 구축에 나서고 있다. 신냉전이 방패의 경쟁이 억제되었던 냉전 시대보다 더 위험할 수 있는 까닭이다.
트럼프의 MD 정책에서 주목할 점은 또 있다. 이전 미국 정부가 발표한 보고서의 공식 명칭은 '탄도미사일방어검토(Ballistic Missile Defense Review, BMDR)이었다. 그런데 트럼프는 3월말에 발표할 예정인 보고서에서 '탄도(B)'를 빼기로 했다. 중국과 러시아의 순항 및 극초음속 미사일 위협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순항 미사일은 탄도미사일보다는 속도가 느리지만 저고도로 비행하기 때문에 레이더를 회피하기가 더 용이하다. 극초음속 미사일은 탄도미사일보다 훨씬 속도가 빠르다. 이에 따라 트럼프 행정부는 보고서 명칭에서 B를 빼고 탄도미사일뿐만 아니라 순항 및 극초음속 미사일도 요격할 수 있는 MD 시스템을 구축키로 했다. 냉전 시대에 버금가거나 어떤 측면에서는 이를 뛰어넘는 전략무기 개발 경쟁이 예고되고 있는 셈이다.
넷째, 미러 간의 핵 군축 협상 시도 자체가 실종됐다는 점이다. 미소 냉전 종식 이후 트럼프 행정부 이전의 모든 미국 행정부들은 러시아와 '전략핵무기감축협정(START)'을 중심으로 핵군축 협상에 임했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취임 1년이 지나도록 핵군축 협상 개시는 고사하고 그 계획조차 밝히지 않고 있다. 푸틴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반도의 운명은?
이렇듯 2018년 들어 뚜렷해진 한반도의 시계와 세계의 시계 사이의 엇갈림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강대국들이 제2의 핵 시대의 문을 노크하고 있는 현실은 한반도 문제 해결의 거대한 구조적 제약으로 다가올 공산이 크다.
일례로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과 러시아의 핵전력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MD의 '눈'에 해당하는 레이더의 기능 향상을 추구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는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문제와 직결된 사안이다. 미국이 이러한 방침을 정하면 경북 성주에 배치된 X-밴드 레이더도 중국 및 러시아의 미사일 추적용으로 이용하고 싶은 욕구가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1990년 이후 미국의 대북정책은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 시도와 북한위협론을 군사패권 강화의 빌미로 삼고자 하는 유혹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팡질팡해왔다. 안타깝게도 지난 시기에는 후자 쪽이 우세했다. MD 구실 찾기가 대표적이었다. 트럼프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역대급 국방비를 책정하고 냉전 종식 이후 가장 강력한 핵전력 및 MD 구축 의사를 밝히고 있는 것이 커다란 불안 요인으로 다가온다.
하여 한반도 탈냉전 프로세스는 강대국들 사이의 신냉전 움직임도 날카롭게 주시하면서 추진되어야 한다. 너무나도 어려운 주문일 수 있지만, 이게 바로 우리의 운명이다. 그 출발점은 한반도 '비핵화'를 넘어 한반도를, 더 나아가 일본까지 포괄하는 '비핵지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에 두어야 한다. 65년째를 맞이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려는 노력과 병행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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