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필리핀은 왜 '악마'가 되었나?

[유라시아 견문] 유라시아의 대반전은 계속된다

'유라시아 견문' 1년 6개월째이다. 3년 계획, 반환점을 돈다. 글은 여전히 인도양에 머물러 있지만, 몸은 이미 이슬람 세계 깊숙이 들어왔다. 이란과 터키를 지나 아라비아 반도이다. 이쯤에서 유라시아의 중간 판세와 판도를 점검해 볼까 한다. 남아시아에 주력하는 사이 원체 굵직굵직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중 일부는 현장에서 직접 목도하기도 했다. 그때그때 신속한 논평을 내놓고 싶은 마음을 꾹꾹 담아두었다. 한국에서 먼 곳에서 가까운 쪽으로 하나씩 짚어간다.

영국/유럽

21세기 유럽사는 브렉시트 전과 후로 나뉠 것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에 필적하는 중차대한 사건이다. 동서 분열을 딛고 대통합으로 향하던 유럽의 거대 서사에 급제동이 걸렸다. 유럽연합(EU)에서 이탈하는 국가들이 속출할 것이라는 전망이 없지 않다. 향후 2, 3년이 고비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EU 붕괴는 성급하고 일면적인 진단 같다. EU 상층부도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다. 특히 영국의 이탈을 기다렸다는 듯, 군사 통합 계획을 발표했음을 눈여겨볼 만하다. 브렉시트 직후 열린 6월 28일 EU 정상 회담에서 <유럽의 세계 전략을 모색하는 보고서(EU Global Strategy on Foreign and Security Policy-Shared Vision, Common Action : A Stronger Europe)>가 정식으로 제출되었다.

EU가 독자적인 세계 전략을 입안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2003년 이래 13년 만이다. 그 사이 강산은 크게 변했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분기점이다. 그리스를 비롯 남유럽은 직격탄을 맞았다. 통합 화폐 유로마저 흔들린다. 안보 위협 또한 가중되고 있다. 이라크 전쟁과 '아랍의 봄'은 IS의 탄생으로 귀결되었다. 아랍과 유럽은 이웃지간이다. 난민과 테러가 확산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러시아와의 대립도 격화되었다.

한마디로 총체적인 난국이다. '유로피안 드림'은 궁색해졌다. 이 난세를 타개하는 방편으로 독자적인 세계 전략이 제출된 것이다. 북아프리카, 중동, 러시아, 중앙아시아를 유럽의 안정과 직결된 주변 지역으로 설정했다. 나라면 '서유라시아'라고 했을 것이다. 서유라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달성하기 위하여 EU의 군사 통합을 제안한 것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속사정이 간단치 않다. EU와 NATO의 반목과 갈등은 해묵은 것이다. 특히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더욱 증폭되었다. EU 국가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이민과 난민을 관리하는 것이 유럽 안보의 핵심이라 여겼다. 그러나 NATO는 화력을 엉뚱한 곳으로 쏟았다. 동유럽으로 세력팽창을 거듭하여 러시아와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영미의 군산 복합체의 이익에 복무하는 NATO가 정작 유럽의 안정을 확보해주지 못한다는 불만을 속으로 삭혀왔던 것이다.

아다시피 NATO는 냉전의 산물이다. 바르샤바조약기구에 맞서는 대항 조직이었다. 더불어 전범국 독일을 관리하는 성격도 짙었다. 그래서 미국과 영국이 선봉에 섰다. 문제는 탈냉전 이후에도 그 속성이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체는커녕 더욱 확산되었다. 반면 EU는 탈냉전을 지향하는 조직이다. 태생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그 EU와 NATO를 연결하는 고리, 더 정확하게 말해 EU가 NATO의 우산에서 벗어나는 것을 저지해온 나라가 바로 영국이었다. 즉, 영국을 매개로 미국은 유럽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돌연 '직접 민주주의'의 결과로 브렉시트가 일어난 것이다. EU와 NATO를 결박시켰던 주박이 황망하게 풀려나버렸다.

때를 맞춤하여 독일에서도 신안보 전략 백서가 발표되었다. 지난 7월 13일이다. 독일이 군사안보 백서를 발표한 것 또한 10년만이다. EU의 신세계 전략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다. 독일의 군사력 확대를 통하여 EU의 군사 통합을 주도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독일이 NATO와 무관하게 해외에 파병할 수 있음을 명기하였고, 유럽 전체의 안보를 위하여 해상 방위 활동도 할 수 있음을 공식화했다.

독일은 유럽서도 난민 유입이 가장 많은 나라이다. 최근에는 테러까지 발생했다. 이 모든 사태에 미국의 중동 정책, 이른바 '체제 전환'의 실패가 있다고 여긴다. 백서 작성을 주도한 인물이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이다. 메르켈의 복심으로 통하는 그녀는 사민당 출신이다. NATO를 통제하는 방법은 EU 독자의 군사 통합밖에 없음에 기민당과 사민당이 합의한 꼴이다. 즉 독일의 군사 백서 발간은 1945년 이후 미국의 패권 아래 있었던 독일의 '군사 독립 선언'에 가깝다. 독일 주도 아래 EU의 군사 통합이 실현된다면, 이 또한 미국에 대한 유럽의 '독립선언'에 방불할 것이다.

독일만 독주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프랑스도 장단을 맞추고 있다. 작년(2015년) 11월 파리 테러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올랑드 대통령은 전 유럽을 망라하는 치안 강화책을 제창했다. 그런데 그 안보 정책을 제기한 장소 역시 NATO가 아니라 EU였다. 이참에 살펴보니 유럽의 군사 통합화는 물밑에서 착착 전개되고 있었다.

네덜란드 육군의 상당 부분이 독일 육군과 함께 훈련하고 있다. 독일 해군의 일부 또한 네덜란드 해군에 통합되어 있다. 독일과 폴란드의 군사 통합도 추진되고 있고, 체코도 독일과의 군사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브렉시트를 계기로 유럽의 군사 독립화가 수면 위로 올라왔을 뿐이다. 앞으로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 같다.

다만 EU 사령부를 만드는 것은 현재의 EU 헌법인 리스본 협정에 위배된다. 협정 개정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EU 의회의 외교위원장 입에서 이미 관련 진술이 나왔다. 그것도 브렉시트 직후인 6월 26일이었다. EU 통합참모본부의 모델로 독프합동여단을 제시했다. 독프합동여단은 탈냉전 초기에 만들어진 군사 조직이다. 이를 EU로 확대시킨 유럽합동군(Eurocorps)도 1993년부터 창립되었다. 현재 독일과 프랑스에서 5000명, 양국 이외의 국가에서 1000명을 파견하고 있다. 다만 영미의 군산 복합체가 NATO만으로 충분하다는 유/무형의 압력을 행사했기에, 독프합동여단도 유럽합동군도 실질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EU와 NATO의 분리는 세계사적 획기가 아닐 수 없다. 대문자 "West", 즉 歐美(구미)가 분리되어간다. 유럽과 미주가, 더 구체적으로 서유럽과 북미가 동떨어져간다. NATO가 '북대서양 조약기구'라는 점은 퍽이나 상징적이다. 대서양 연합이 느슨해지는 것이다. 당장 영국의 이탈로 EU는 미국의 의사를 거슬러 러시아 압박과 봉쇄 국면에서 탈피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국제 경제 포럼에 EU 인사가 다수 참가했다. EU 집행위원장을 필두로 이탈리아 총리와 그리스 총리도 얼굴을 내밀었다. 구/미가 느슨해지면서, 장차 유럽의 정체성 또한 재정초될 듯하다. 유럽/아시아, 유라시아의 일원으로서 '오래된 유럽'이 (재)등장할 것이다. 신대륙과는 점점 멀어지고, 구대륙과는 다시 가까워질 것이다. 신/구간의 일대 반전이다.

터키/중동

7월 15일 밤과 16일 새벽은 터키 현대사의 분수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쿠데타가 좌초되었다. 현장에 있었다. 이란 생활을 마치고 막 터키로 옮겨온 차였다. 아침형 인간이다. 10시면 잔다. 글도 아침에만 쓴다. 일찍 잘수록 생산력이 는다. 탓에 격동의 밤을 지켜보지 못했다. 두고두고 아쉽다.

새벽 산책에 나섰다가 길거리의 탱크와 장갑차를 보고 기겁했다. 시민들이 군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붉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제야 스마트 폰을 열었다. 이스탄불 발 뉴스가 쏟아지고 있었다. 생중계되고 있는 알자지라 방송의 특파원 옆을 스쳐 지나갔다. 처음으로 속보를 쓰는 기자들이 부러웠다.

그런데 현장과 보도 사이 낙차가 심했다. 이스탄불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시민들의 힘으로 쿠데타를 저지했다는 자부심이 승했다. 역사를 알아야 한다. 케말 아타튀르크 이래 터키 현대사 또한 군인들이 주도해왔다. 민간 지도자가 군부에 의해 제거되는 역사가 수차례 반복되었다.

처음으로 무력에 의한 정권 전복 시도를 시민들이 막아낸 것이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민간 정부를 국민들이 지켜낸 것이다. 그러나 구미의 보도는 터키인들의 의사와 감정을 전혀 존중하지 않았다. 그들의 판단과 선택을 신뢰하지도 않았다. 판단을 보류하거나 폄하했다. 터키의 자긍심에 상처를 냈다.

CNN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을 "포위된 대통령"으로 묘사했다. NBC의 특파원은 에르도안이 독일로 망명할 것이라는 트위터를 날렸다(가 지웠다). 쿠데타 진압이 완료되자 FOX는 "터키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는 논평을 냈다. BBC 홈페이지는 "터키의 무자비한 대통령"이라는 기사를 하루 종일 메인에 걸었다.

<뉴욕타임스>는 에르도안 지지자들을 '양(sheep)'에 빗대었다. "에르도안의 명령에 따라 거리로 쏟아져 나온 폭력적인 군중"이라는 칼럼까지 실렸다. 자작극이라는 음모설까지 보태었다. 편집 또한 자의적이었다. 혹은 악의적이었다. 에르도안 지지자와 반대자들 간 갈등을 묘사하는(부추기는?) 사진들이 넘쳐났다.

독재자의 탄압과 시민들의 저항이라는 상투적인 이미지가 전시되었다. 내가 두 눈으로 보고 있는 이스탄불과 너무나 달랐다. 내가 만나서 얘기를 나누었던 이스탄불 지식인들과 시민들과도 전혀 달랐다. 재차 <1984>의 빅브라더를 떠올렸다. 다시금 세계의 주류 매체에서 '교조적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근본주의'가 설파되고 있었다. 오리엔탈리즘이 디지털 미디어에서 증폭되고 있었다.

쿠데타 전후 사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아래로도 훑어볼 필요가 있다. 터키의 외교 정책이 크게 변하고 있던 시점이다. 터키의 아래로는 시리아가 있다. 터키의 위에는 러시아가 있다. 시리아 내전에 대한 양국의 접근이 전혀 달랐다. 터키는 미국과 NATO편에 섰다.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다. 이라크의 후세인처럼, 리비아의 카다피처럼 제거하려 했다.

정작 IS 격퇴는 뒷전이었다. 아니 뒷문을 열어 IS 팽창에 일조한 것이 터키였다. IS에 지원하는 이들의 상당수가 터키의 국경을 넘어 시리아로 들어갔다. 미국과 NATO도 묵인했다. '테러와의 전쟁'보다 '체제 전환'에 주력했던 것이다. 그 반대편에 러시아와 이란이 있었다. 두 나라는 아사드 정권을 도와 IS 퇴치에 앞장섰다. 시리아 내전은 일종의 준 '세계 대전'이었고, 터키와 러시아는 적대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내가 즐겨 읽던 러시아 언론들도 몽땅 차단되어 있던 것이다.

이 교착 국면에서 에르도안이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러시아와 이란과 합작하여 시리아 내전 종식에 나서기로 했다. 푸틴과의 정상 회담도 예정되어 있었다. 마침 그때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하다면 이렇게 물어야 한다. 쿠데타가 성공했더라면 누가 이익을 보았을 것인가? 터키는 NATO 가맹국이다.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핵심 국가이다. 미국의 중동 정책을 매개하는 국가였고, 러시아 압박의 최전선에 자리한 나라도 터키였다.

에르도안이 쿠데타의 배후로 미국과 서방을 정조준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위기를 기회로 역전시키고 있다. 이참에 군대, 학교, 언론 등에 근거지를 둔 친서방파 혹은 자유주의파와 세속주의자를 일망타진하고 있다. '외부 세력'과 공모하는 내부자를 발본색원하고 있다. 야당까지 일치단결이다. 51%로 당선된 에르도안의 지지율은 80%까지 치솟았다. '내정 간섭' 혐의가 먹혀든 것이다. 선전과 선동에 능란하다. 100만 명이 운집한 이스탄불 집회는 터키가 '다른 백 년'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풍경이었다. 에르도안은 마치 술탄인양 보였다.

실은 쿠데타 진압 과정부터 무척 인상적이었다. 에르도안이 세속주의의 보루 군부에 맞서 동원했던 것이 바로 이슬람 네트워크였다. 전국에 퍼져있는 모스크를 통해서 쿠데타에 맞서줄 것을 호소했다. 코란의 기도 소리가 흘러나오는 확성기를 통하여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긴급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그 방송을 들은 시민들은 스마트 폰과 인터넷으로 에르도안의 메시지를 전송, 재전송했다. 순식간에 거리로 몰려나온 시민들이 군인들의 진격을 분쇄했다. '디지털 이슬람'이 세속주의 군부를 이긴 것이다. 백 년만의 대역전, 대반전이다.

터키는 오스만제국 붕괴 이래 100년간 서구화를 국책으로 삼았던 나라이다. 이슬람 세계에서 극히 예외적으로 구미 세계의 일원이 되고자 발버둥 쳤다. 10개월간 기껏 고생해서 배운 아랍어가 이스탄불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근대화를 한답시고 아랍어도 버리고 로마자 알파벳을 채용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턱 밑에 자리한 냉전의 파수꾼이자, 미국의 중동 정책을 매개하는 첨병이었다.

에르도안은 이 100년의 실험에 종지부를 찍고 있다. 새천년 집권 이래 탈서구화와 재이슬람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가뜩이나 유로존 위기와 브렉시트로 EU 가입의 매력이 확 떨어지던 차였다. 터키식 '재균형'이고 '신상태'이다. 일각에서는 NATO 탈퇴와 상하이협력기구(SCO) 가입을 전망하기도 한다. 아직은 성급한 판단이다.

다만 더 이상 터키가 신냉전 획책의 졸로 그치지 않을 것임만은 분명하다. 재차 이슬람 문명을 기저로 유라시아의 한 축이 될 것이다.

필리핀/남중국해

7월 12일 남중국해 영토 분쟁에 관한 헤이그 판결이 났다. 처음부터 이상한 재판이었다. 중국과 필리핀이 당사자 간 협의로 해양 분쟁을 해결하기로 한 것이 1995년이다. 20년 가까이 별 문제가 없었다. 별안간 필리핀 단독으로 제소한 것이다. 해양 분쟁 조정은 당사자 전원이 동의하지 않으면 시작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도 절차가 진행되었다.

헤이그 상설 중재 재판소는 국제 사법 재판소가 아닌 고로 상주하는 판사들도 없다. 제소가 들어오면 판결을 내릴 배심원을 선발한다. 즉 중국 입장을 대변할 사람도 없이 판결이 진행된 것이다. 그럼 누가 재판 과정을 주도했는가? 야나이 순지(柳井俊二)이다. 그가 배심원 5명을 선발했다. 야나이는 누구인가? 전직 주미 일본 대사이다. 아베 총리의 최측근이다. 끼리끼리 어울린다. 극우파 인사이다. 헤이그 판결에 가장 환호했던 나라도 미국과 일본이었다. 미국-일본-필리핀의 해양 동맹이 가동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필리핀에서 큰 변화가 생겨났다. 정권이 바뀌었다. 중국과의 협상을 일방으로 거두고 헤이그로 달려갔던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이 물러났다. 그는 임기 중에 자국의 군사 기지를 미국에 재차 내준 인물이다. 그 아키노의 후계자를 500만 표 압도적인 차이로 누르고 정권을 접수한 이가 로드리고 두테르테이다.

선거 직후부터 독자 노선을 천명했다. 더 이상 미국에 의존하지 않겠다고 했다. 본인이 대통령으로 있는 한, 정확한 설명과 보고 없이는 미군이 필리핀 기지를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반면 헤이그 판결과 무관하게 중국과의 직접 협상을 재개할 것이라고 했다. 판결 선고 이틀 후에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을 특사로 파견할 계획까지 밝혔다.

라모스는 1995년 합의를 이끈 장본인이다. 그때처럼 남중국해의 공동 이용, 공동 개발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대신에 중국이 필리핀의 고속철도와 고속도로, 항만 건설 등 인프라 정비를 지원해주는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그 편이 미군의 항공모함이 수빅 만에 돌아오는 것보다 이롭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견해이다. 상식에 부합하는 판단이다.

선거 기간 그에 대한 마타도어가 난무했다. "필리핀의 트럼프"라며 혹평했다. '교조적 민주주의자'들의 교묘한 프레임이다. 두테르테는 트럼프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리얼리티 쇼의 스타가 아니다. 실력으로 검증된 인사이다. 그가 다스렸던 도시가 다바오(Davao)이다. 필리핀 견문 당시 잠시 스쳐 지나갔다.

한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연상시키는 무정부적 도시였다고 한다. 마약에 찌든 범죄자들의 소굴이었다. 그 곳을 필리핀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로 탈바꿈시킨 주인공이 두테르테였다. 마닐라에서 만났던 월든 벨로 또한 두테르테와 친분이 있었다. 미군의 필리핀 재진입과 남중국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 하셨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선거 경쟁에서 한참 뒤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필리핀의 역사를 복기하며 도출한 '속국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식민지와 동맹국으로 100년을 지낸 필리핀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피플 파워'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오판이었다. 반성한다.

두테르테는 자칭 '사회주의자'이다. 필리핀 독립 이후 처음으로 사회주의자가 당선되었다. 최초의 좌파 정부가 탄생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좌/우는 부차적이다. 상/하의 역전, 흙수저의 반란이다. 식민지와 속국에 기생하며 대대손손 호가호위했던 필리핀의 지배 계급에 대한 도전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아래서 지속되었던 가문 정치와 토호 정치, 격차 사회에 대한 시정이 시작되었다. 식민지 근대화와 속국 민주화 100년 동안 민중을 개돼지 취급하며 세습적 지위를 누렸던 엘리트들에 대한 통렬한 복수극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선거 혁명'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터키만큼이나 필리핀에서도 100년만의 대역전이 전개 중이다.

기실 남중국해 문제 또한 100년의 지평에서 조망할 필요가 크다. 필리핀이 미국의 식민지가 된 것이 1898년이다. 당시 미국 해군사관학교의 교장이 알프레도 마한(Alfred Mahan)이었다. 20세기 미 해군 전략의 기초를 작성한 인물이다. 미국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새로운 무역망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시아-태평양에 해군 기지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구상은 미국-스페인 전쟁 승리를 계기로 현실화되었다. 필리핀, 하와이, 괌을 점령하면서 '기지의 제국'이 출발했다.

즉 유럽의 제국주의와 미국의 군사주의는 작금 남중국해 사태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남중국해를 둘러싼 국가들 사이의 국경선과 해양 경계선 또한 대부분 식민모국들이 그어둔 것이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가 현재의 해양 국경으로 갈라진 것은 1529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서이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경계는 1842년 영국과 네덜란드가 그은 것이다. 중국과 베트남 사이의 해양 경계는 1887년 프랑스가 그었다. 필리핀의 해양 경계 또한 1898년 미국과 스페인에 의해서 그어졌다. 필리핀과 말레이시아의 경계는 1930년 미국과 영국에 의해서 그어졌다. 죄다 서세동점의 유산이다.

그러나 독립 이후에도 국경 분쟁을 해소할 수 없었다. 서세가 여전히 드셌기 때문이다. 미/소가 강요하는 냉전 체제에 휘말려 들어갔다. 우파 국가와 좌파 국가로 갈라섰다. 199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협상을 시작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간 비교적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중국과 주변 국가들 간에, 중국과 아세안 간에, 그리고 아세안 내부 국가들 사이에 수많은 공동 개발 사업이 합의되고 이행되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돌연 갈등이 증폭된 것이다. 여기서 재차 '외부 세력'이 등장한다. 중동에서 아시아로 축을 옮기겠다고 한 나라가 있었다. 미국에서 '축의 이동(Pivot to Asia)'이 발표된 것이 2011년이다.

공교롭게도 이듬해(2012년) '동아시아 공동체'를 표방했던 일본의 민주당 정부가 조기에 좌초된다. 아베 신조가 정권을 탈환한다. 곧장 중동의 혼란이 동아시아로 이전되었다. 센카쿠/다오위다오를 둘러싸고 동중국해가 어지러워졌다. 동쪽의 속국 일본이 앞장섰다. 이어서 남중국해도 뜨거워졌다. 남쪽의 속국 필리핀을 부추겼다.

아시아로 축을 옮긴다며 미국이 부가한 조항들이 있었다. 하나는 '더 많은 군사 기지 연결망을 구축할 것',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증진시킬 것'이다. 군사화와 민주화, '속국 민주주의'를 재가동시킨 것이다. 이 모든 작전을 진두지휘한 사람이 있다. 당시 국무부 장관, 힐러리 클린턴이다. 바로 그녀가 올 11월 백악관 입성을 노린다.

다시 백 년 vs. 다른 백 년

7월 말,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된 이스탄불에서 미국 민주당 전당 대회를 지켜보았다. 찬조 연설의 면면이 화려했다. 볼거리가 풍성했다. 그래도 하이라이트는 역시 힐러리의 연설이었다. 불안했다. 섬뜩했다. 오바마보다는 부시 같았다. 클린턴보다는 레이건 같았다. 월가의 장학생이었던 그녀가 군산 복합체의 수호신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Stronger Together"라는 구호조차 불길했다.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라기보다는 전쟁의 여신처럼 보였다. 과연 공화당 주류도 속속 힐러리 지지로 돌아설 낌새이다. 네오콘들도 그녀 곁으로 결집하고 있다.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라는 네오콘의 기획을 힐러리가 승계한다. 그녀를 통하여 '다시 백 년'이 가동되고 있다.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도 예외적인 순간이 있었다. 레온 파네타가 연사로 나섰을 때이다. CIA 국장, 국방부 장관 등을 지낸 거물이다. 남편 클린턴의 비서실장이기도 했다. 힐러리와는 '아시아로의 축의 이동'을 함께 입안했던 인물이다. 그가 트럼프를 비판하자 관중들이 'No More War'를 외치며 파네타를 야유하기 시작했다. 짐작컨대 버니 샌더스 지지자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젊은 식자층이 많다. 그들도 잘 알고 있다. 21세기에도 미국은 전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 100년을 반복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에 폭탄을 쏟아 부은 결과 중동 곳곳이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테러리즘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IS까지도 탄생시켰다. 미국의 후세들에게는 천문학적인 부채도 남겼다. '난세의 전초 기지'이다.

가장 아쉬운 대목은 정작 샌더스이다. 힐러리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 의사를 밝혔다. 안타깝다. 처음부터 나라 밖 사정에는 어두운 순진한 좌파 할아버지라는 인상이 강했다. 크게 틀리지 않은 것 같다. 나라면 결코 힐러리에게 투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선뜻 트럼프를 지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난처함이야말로 수명이 다해가는 근대 민주주의의 곤경이다. 신대륙에서, 아메리카에서, '다른 백 년'을 기대하기 힘들다.

다른 백 년의 기운은 구대륙에서 지핀다. 다시금 무대는 상트페테르부르크다. 또 다른 '축의 이동(Pivot to Asia)'이 모습을 드러냈다. 8월 9일, 푸틴과 에르도안이 회동했다. 시리아 내전 해결에 양국이 의기투합했다. 터키로 돌아온 에르도안을 기다리고 있던 이는 이란의 외교부 장관 자리프였다.

이란은 터키 군부의 쿠데타에 가장 단호하게 비판을 가했던 나라이다. 터키 외교부 장관의 기자 회견이 인상적이다. 한 숨도 자지 못한 그날 밤에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친구'가 자리프였단다. 다섯 차례나 통화했다고 한다. 러시아와 이란의 정보기관이 터키의 민주주의 사수에 긴밀하게 협조했던 것이다.

에르도안은 곧 테헤란도 방문할 예정이다. 러시아-터키-이란을 축으로 삼는 삼국 연합이 부상한 것이다. 곧장 행동으로 이어졌다. 러시아 공군이 이란의 기지에서 출격하여 IS를 공습했다. 지난 백 년, 전례가 없던 일이다. 이들이 미국의 패권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간의 '적대적 공존'을 타개하고 중동에서의 다른 백 년을 추동해갈 것이다. '외부 세력'을 배제해 갈 것이다.

러시아-터키-이란 사이에는 코카서스 지역이 자리한다.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이다. 8월 8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푸틴과 로하니가 만났다. 러시아-이란-아제르바이잔을 잇는 코카서스 경제 회랑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코카서스를 넘어서는 비전도 제출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부터 인도의 콜카타까지 이어지는 장거리 고속철도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푸틴의 회심의 프로젝트, 대유라시아 구상의 일환이다. 그는 마치 몽골세계제국을 경영하던 칸처럼 유라시아의 지도를 거꾸로 뒤 짚어 북에서 남으로 내려다보며 수를 둔다.

이란도 적극 호응하고 있다. 미국에서 정권이 바뀌면 언제 핵 합의를 뒤짚을지 모른다. 지금도 합의 이행에 미온적이다. 전례가 없지 않다. 북조선과의 제네바 합의도 9.19 합의도 미국이 파기시켰다. 자력갱생해야 한다. 그럴수록 이웃과의 연결망 재건이 사활적이다. 페르시아 만부터 흑해까지, 아르메니아서부터 불가리아까지 교통 회랑을 건설하고 있다.

이란의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서남부는 아라비아 반도이다. 북부는 중앙아시아이다. 동부는 남아시아이다. 서쪽으로는 터키와 유럽으로 이어진다. 독일부터 인도까지 가닿는 유라시아 연결망의 허브로 이란을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본디 페르시아제국의 역할이 그러했다. 유럽과 아시아를 페르시아가 이었다.

내친김에 시야를 조금만 더 넓혀보자. 베트남도 몹시 분주하다. 오바마의 베트남 방문을 전후로 베트남이 미국 편에 섰다는 보도가 빗발쳤다. 오보에 가깝다. 지난 10년 베트남의 친미 노선을 추진했던 응우옌 떤 중 총리는 국가주석에 도전했다가 낙마했다. 그는 사이공 출신이다. 남베트남, 즉 미국의 동맹국 출신이었다.

도이모이 30주년을 맞이한 올해 정권을 접수한 세력은 하노이파, 북베트남 세력이다. 그렇다고 친중파도 아니다. 미/중 사이서 균형을 취한다. 러시아에 부쩍 접근하고 있다. 베트남은 지난 5월 소치에서 열린 유라시아 경제 연합에 참석한 유일한 동남아시아 국가였다. '소치 선언'도 발표되었다. EEU와 ASEAN 사이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확인하고 양 지역 간 FTA 논의를 시작했다. 즉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통합을 매개하는 나라가 바로 베트남이다. 이 또한 20세기의 유산이다. 냉전기 사회주의 국제주의가 유라시아의 경제 통합으로 전변되고 있다.

여기에 중국의 일대일로까지 포개진다. 6월 17일 시진핑은 동부 유럽과 중부 유럽을 순방했다. 바르샤바부터 세르비아를 거쳐 베오그라드까지 가는 곳곳 환영받았다. 으레 돈 보따리를 풀어 놓았기 때문이다. 발트해 국가들까지도 신실크로드에 올라타기를 원한다. 상하이에서 베를린까지, 동아시아와 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와 동유럽과 북유럽이 거대하게 엮여가고 있다.

그 한복판에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도 있었다. 6월 23~24일 SCO 정상회의가 열렸다. SCO는 여전히 NATO 같은 군사 동맹 기구가 아니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같은 배타적인 무역 기구도 아니다. 혼종적이고 잡종적이며 융합적이다. 일즉다, 다즉일(unity in diversity)의 원리가 관철된다. 그래서 인도도 이란도 무리 없이 합류했다. 장차 터키까지 합세할 기세이다.

유럽/아시아, 전통/근대, 좌/우, 민주/독재 등 20세기의 온갖 이분법을 돌파하는 거대한 인드라망을 구현해간다. 고로 '문명의 충돌'은 하얗게 잊어도 좋겠다. 충돌이 있다면,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사이, 구대륙과 신대륙 사이, 당사자와 '외부세력' 간에 있을 뿐이다. 최후의 서세가, 마지막 외세가 독선과 아집에 찌든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거듭 간섭질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세와 시류를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서세동점의 말기이다. 서구적 근대의 말세이며, 미국적 세계화의 끝물이다. 그러나 탈근대도 아니요, 반세계화도 아니다. 탈근대는 신좌파의 말놀음이요, 반세계화는 구좌파의 게으름이다. 구미적 근대에서 지구적 근대로 이행하고 있다. 미국적 세계화에서 세계적 세계화로 진입하고 있다. 지구적 근대화와 세계적 세계화의 최전선에 유라시아가 자리한다. 구 제국들은 귀환하고, 옛 문명들은 복원된다. 동서고금이 사통팔달 회통한다.

델리에서 이스탄불에 이르는 지난 반 년간, 책상 앞에 걸어두고 노트북의 메인 화면으로 삼고 있는 지도 한 장이 있다. 18세기 유라시아 지도이다. 오스만제국과 사파비드(페르시아)제국, 무굴제국과 러시아제국, 대청제국이 건재하던 시기이다. 산업 혁명이 일어나기 전, 서세동점이 시작되기 전, 유라시아의 판도를 조감해볼 수 있다.

나로서는 어쩐지 2050년의 미래가 당시의 모습과 흡사할 것만 같다. 18세기의 옛 지도에서 21세기의 청사진을 구한다. 엉뚱한 공상인 것인지, 역사적 영감인 것인지, 두 눈으로 두 발로 직접 확인해 보려한다. 이제 격변하는 이슬람 세계로 진입할 차례이다.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세계를 새로이 보게 되었다.

문명화-근대화-민주화로 '근대인'들을 세뇌시킨 지난 100년의 대서사와는 전혀 다른 역사관과 세계관을 배우고 익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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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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