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의 양상은 바로 우리 사회-회사의 문화적 배경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바로 회사 문화는 직접적인 괴롭힘의 여러 요소를 이미 품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거칠게 얘기해서 직장 내 괴롭힘의 문화적 뿌리가 '회사 인간' 이외의 인간형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독재'와 맞닿아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다음 기사를 보자.
서울XX지검 형사 2부 김모(33, 사법연수원 41기) 검사가 (2016년 5월) 19일 오전 서울 양천구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날 시신을 수습한 서울 양천경찰서는 자필로 수첩에 쓴 2장 분량의 유서에 "업무 스트레스로 힘들다"는 등 일이 많아서 힘겹다는 내용이 반복해서 나왔다고 밝혔다.
(…) 지난 해 4월 서울XX지검에 부임한 김 검사는 그해 지검에서 마련한 '신임 검사 부모님 초청 행사'에 어머니를 모시고 참여할 정도로 검사에 대한 자부심이 컸던 것으로 전해졌다. (…) 미제 사건이 쌓이고 상사의 업무 지시 등에 스트레스를 받아 주변에 힘겨움을 하소연해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관련 기사 : 2년차 검사 "업무 스트레스로 힘들다" 목매 숨져)
한 젊은 검사의 자살이 말해주는 것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가 나와 같이 2012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해 이제 5년차에 접어 든 젊은 법률가였다는 점 때문에 더욱 안타까운 기분이 든다. 왜 김 검사는 목숨을 버리기 전에 검사직을 때려치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좋은 학부에 이른 사법 시험 합격, 군법무관 복무 후 검사 임용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꿈에 그리던 검찰청에 입성했던 김 검사. 그는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던 전도유망한 법률가였다. 그런데, 불과 1년 남짓한 검사 생활의 끝을 자살로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남들이 보면 사소했을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고인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그는 어쩌면 남들이 보는 자신의 지위와 체면을 깊이 내면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살이라는 끔찍한 결론을 내리기 직전에도 손에 쥔 것-검사직-을 결코 내던지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가 자신이 가진 것을 던지지 못하고 오히려 그 자신을 파괴했던 내면의 풍경은, 김 검사만이 가진 고유의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는 이미 무수히 많은 '김 검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업무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나약하게' 검사를 사직하는 것에 대해 그는 부모님을 비롯하여 친척, 친구들에게 뭐라고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회사를 당장 때려치우면 되는데, 그렇게 하고 나면 자신이 너무 초라해진다. 한편으로, 현재 부여된 과중한 업무는 자신의 역량으로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거대한 벽으로 느껴진다. 업무 스트레스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함 속에 매일 밤 잠 들 수도 없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간 회사(검찰청)에는 거대한 기록 더미가 책상 위에 가득 쌓여 있고, 매일같이 피의자들이 검사실에 쳐들어와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검사가 무소불위의 권한만 갖고 책임지지 않는 권력을 행사한다고 오해하지만, 대한민국 검사 가운데 어느 누가 자신을 스스로 권력자라고 생각하고 일을 할까. 밀린 업무를 허겁지겁 처리하는 그들 일상은 회사원과 99% 일치한다.)
단 하나의 삶의 모델 : 회사 인간
그가 가졌던 고뇌가 많은 회사원의 가슴에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오늘도 '이게 사는 건가'라고 물으며 출근하는 우리들 마음과 닿아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죽음을 앞두고도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걸까?
하나의 가설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오직 단 하나의 삶의 모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20대에 대학을 나와 회사에 취직하고, 30대에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주택 담보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장만하며, 40대에 자녀 교육에 힘쓰고, 허락된다면 조직에서 계속 일하다 50대에 은퇴하여 노후를 보내는 삶 말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스스로 버리는 것은 그렇게 주어진 삶의 궤도를 벗어나는 것이 된다. 저 삶을 관통하는 중심에는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하는 회사 또는 '회사 인간'이 있는 것이므로 이를 벗어난 삶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본 소득이 보장되지 않고, 그 어떤 사회적 안전망도 갖지 못한 한국 사회는, 회사-조직을 벗어난 순간 곧바로 루저(loser)로 전락하는 각자도생의 지옥이다. 학교 졸업 후 회사에 들어가는 선택지 이외에 생존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어렵게 회사에 안착을 했더라도, 어떤 부적응으로 그 순간 회사를 나와야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저 많은 김 검사들은, 자신의 체면 때문에 혹은 경제적 문제 때문에(이제 변호사조차 먹고살기 힘들다) 결코 자발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할 수 없다. 주위의 조언들은 온통 '조금만 더 버텨라', '다른 곳으로 가 봐도 다 똑같다'는 말 뿐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막 회사에 들어간 사회 초년생들은 가끔 비슷한 감정에 집단적으로 빠지곤 한다. 내가 그렇게 들어가고 싶었던 회사에 이제 당당하게 출근하게 되었는데, 아침에 회사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마치 거대한 장벽의 감옥 문을 스스로 여는 것과 같다는 느낌. 목줄에 걸린 사원증은 밖에서 보기엔 자부심의 상징이었지만, 이젠 스스로 떼어내지도 못할 만큼 부담스러운 것이 되었고 나의 노예 신분을 '개목걸이'로 보증하는 것과 같은 느낌, 말이다.
쾌활하고 협조적인 부하만을 원하는 회사
사람을 키운다는 회사는, 겉으로는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자신들의 인재상으로 '혁신, 창조, 창의, 열정, 도전' 등을 이야기 하지만 사실 조직 내에서 필요한 단 하나의 직원상은, 상사의 어떠한 '갈굼'과 '보복'에도 쾌활하고 협조적이며 생글생글 잘 웃는 얼굴들뿐이다. 그러한 문화적 독재에 저항하지 못하는 신입사원은 1년만 지나면 얼굴에 웃음기가 가시게 되고, 시간이 갈수록 충성-샐러리맨의 세계에 자신을 구겨 넣곤, 간절히 주말만을 기다리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다 가끔 '직장 사이코패스'인 상사라도 만나게 되면, 우울증에 빠지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회사를 그만 둘 수도 없고, 그만두지 않을 수도 없다.
회사를 두 번 때려치운 선배로서, 이제 다시 조언한다. 조직-상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기분이 몇 년간 계속된다면, 월요일 출근이 두려워 토요일 밤부터 우울감이 계속되어 수개월 동안 잠들 수 없다면, 당장 사표를 내자. 회사 따위 잠시 쉬어도 상관없다. 나의 젊음과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종속 노동을 본질로 하는 근로 계약
근로 계약을 체결한 사용자와 노동자의 근로 관계는 기본적으로 사용-종속 관계이다. 우리 노동법 역시 근로 관계(근로자성)를 인정하기 위한 중요한 개념 표지로서 '종속 노동성'을 든다. 종속 노동성이란, 사용자가 업무 내용을 정하고 업무 수행 과정에서 사용자의 상당한 지휘 감독권이 인정되며, 이에 노동자가 사용자로부터 근무 시간과 장소에 구속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우리는 근로를 제공하고 사용자로부터 임금을 받는 '종속된 계약자'인 것이다. 그러한 종속 계약 관계가, 우리가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 했던 회사와의 근로 계약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회사 때문에 건강을 잃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심지어 생명에 위협이 되는 순간에는, 바로 그 종속된 근로 계약 관계를 당장 해지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는 사용자와 달리 언제든지 사직의 통고를 할 수 있고, 사용자가 해지의 통고를 받은 날로부터 1월이 경과하면 근로 관계는 소멸한다(민법 제660조). 거꾸로, 사용자는 징계 해고와 정리 해고의 엄격한 요건을 갖출 때에만 정당하게 계약을 해지(해고)할 수 있다. 기억하자,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노동법은 노동자가 아니라 사회적 우위에 있는 사용자를 제약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회법이다.
이제 근로 계약은 해지하면 그만이고, 노동자는 종속 계약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심지어 우리가 신성하게 여기는 결혼조차 계약에 불과하다(물론, 일방적인 해지가 불가능한 가족법상 계약이지만). 하물며 근로 계약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잠시 회사를 그만두고 심호흡을 해보자.
그러나 우리 역시 그렇게 쉽게 회사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할 책임이 있고, '흙수저'로 태어나 노동하지 않으면 먹지 못하게 되는 동물의 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 도저한 한계를 이해한다. 다만,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내면의 퇴사 갈등에도 여전히 갈팡질팡 하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모델이 오직 회사와 관계된 것으로만 구성되어 있기 때문임을 강조하고 싶다. 가히 '회사 인간'만이 우리 사회에서 인정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회사 인간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이 인간형의 독재가 우리에게 어떤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 스스로를 파괴시킨다. 독재의 다른 진술은 다음과 같다.
"도대체 그 좋은 회사 그만두고 뭐 할 건대?" "늦은 나이에 대학원은 왜 들어가니, 공부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장사는 아무나 하나, 밖은 지옥이다." "3, 6, 9년차에는 다 그래, 조금만 더 버텨."
하지만, 저 조언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사실 당장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다(그리고 놀고 싶다!). 퇴사하지 못해 인생이 괴로운 자들이 좁은 사무실에 모여, 사소한 업무적 충돌로도 서로를 지옥으로 몰고 간다. 평등한 관계보다 상하 관계가 더 자연스러운 회사에서 상사의 한마디는 신의 그것과 같다. 부하는 어떠한 지시도 거부할 수 없고, 내 인생에 대한 통제권은 나에게서 완전히 멀어진 것만 같다. 저 갈굼과 핍박은 회사에 있는 한 내가 영원히 견뎌야 할 형벌이 된다.
직장 내 괴롭힘 : 보이지 않는 도착적 폭력
이와 같은 사무실의 내부에서 직장 내 괴롭힘은, 그것을 당하는 피해자 스스로 자신도 모르게 찾아온다. 프랑스 정신과 의사 이리고양은 이를 '도착적 폭력'이라고 이름 붙였다(<보이지 않는 도착적 폭력>(최복현 옮김, 북프렌즈 펴냄)). 그 폭력이 도착적인 것은, 피해자들조차 회사 생활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과정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희생자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회사는 다 그래'). 거꾸로, 가해자들 역시 자신이 폭력을 행사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갈구면서 후배들이 크는 거지').
회사 밖을 생각하기 어려운 한국적 특수성은 가해자의 폭력을 점증시키거나, 피해자로 하여금 끝없이 폭력을 견디게끔 상황을 전도시킨다. 회사 인간이 또 다른 회사 인간에게 가하는 가학-피학의 연결 고리가 도착적 폭력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러한 직장 내 괴롭힘이 기업의 경영 전략과 결합하게 되면, 권고사직 뒤의 조직적인 폭력으로 발전하게 된다. 우리는 이 굴레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다음 편에 권고사직 후 직장 내 괴롭힘의 구체적인 유형과 대응 방법을 차례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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