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보수'라면 괜찮다!"

[철학자의 서재] 〈맹자,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길〉

<프레시안>은 창간 7주년을 맞아 특별한 연재를 선보인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이 연재는 바로 '철학자의 서재'이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한다. 이 연재를 통해 독자들의 책 고르는 안목이 더욱 깊고 넓어지리라 기대한다. <편집자>

<맹자>의 '새로운' 얼굴

▲ <맹자,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길>(이혜경 지음, 그린비 펴냄). ⓒ프레시안
책을 볼 때 첫 눈에 띄는 단어는 책에 대해 강한 인상을 주기 마련이다. 이름만 떠올려도 아주 극심한 혼란 시대였던 '전국(戰國)' 시대를 살았던 사상가 맹자, 그는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공자를 계승하여 만인의 평등한 본성을 긍정하고, 이에 바탕을 둔 인의의 기치를 내건 사람이다. 또 그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주장했고, 이러한 논리에 바탕을 두고 왕도 정치를 실행하지 못하는 부덕한 군주는 혁명을 통해 퇴출할 수 있다는 혁명 이론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를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는 책이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새롭다.

이런 새로움은 책의 구성을 보면 더욱 확연해 진다. 전체 4부로 이루어진 이 책은 먼저 맹자의 시대와 맹자 자신을 다룬 다음, '자신으로 사는 삶'과 '세상의 주인 되기' 그리고 '우리 시대의 <맹자> 읽기'로 이어지면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보수주의자, 스스로의 원리에 의해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로서 인간을 이해하였던 맹자의 새로운 얼굴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맹자,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길>(이혜경 지음, 그린비 펴냄)은 기존에 접근되었던 맹자와는 분명 다른 얼굴의 <맹자>라 할 수 있겠다.

더구나 저자는 딱딱한 학술적 글쓰기로 '보수주의자 맹자'와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독자들의 삶의 눈높이와 시선을 상당히 고려하면서 일상적 삶의 경험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한 사상가로 소개하고 있다. <맹자,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길>이란 책은 선진 고전 <맹자> 사상을 오늘날의 삶의 관점에서 친근하게 재해석하여 소개하면서, 더불어 그에게 보수주의자라는 새로운 '이름표'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맹자,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길>은 주목을 끌만한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보수주의자 맹자'라는 말은 참으로 내게 당혹스러웠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보수라는 말은 극과 극을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중·동'이라는 언론 매체를 통해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백범 김구 선생을 한국 보수의 모델이라 하면서 몽양 여운형 선생과 죽산 조봉암을 한국 진보의 모델로 제시한다. 또 어떤 경제학자는 '박정희식 민주주의'와 '성장 우선주의' 그리고 '실용적 미국숭배'가 결합된 것이 한국적 보수 이념의 원형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의 일상에서 낯설지 않은 언어와 은유, 수사와 통찰력으로 우리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이해 가능한 언어로 <맹자>의 언설을 되살려내고 있으나, 과연 그러한 맹자가 '보수주의자'라고 불리는 까닭은 수긍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책을 덮는 순간 나는 적어도 이 주장에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충분하게 저자가 들려주는 보수주의자 맹자의 언설과 주장이 분명 '보수주의'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작은 씨앗이 나무가 되기까지

유학의 창시자 공자는, 스스로에 대해 '전하기만 할 뿐 만들어내지는 않는다'(述而不作)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옛 것을 충분히 이해함으로써 앎 자체가 새로워진다'(溫故而知新)고 말하기도 했다. 저자가 소개하는 '보수주의자 맹자' 또한 이와 유사한 평가가 가능할 듯하다. 낯설고 추상적인 용어 대신 일상적으로 알아듣기 쉬운 삶의 경험, 눈이나 귀로 관찰하고 체험할 수 있는 인간적 삶의 언어를 통해 설명되는 맹자라서, 억지로 꾸미지 않았으되 옛 것이 새로워진 그런 맹자이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맹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자연스러운 선한 본성을 키워 스스로 우뚝 서는 자율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여기까지는 그간의 해석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저자는 그간의 해석과 달리 맹자의 성선설을 추상적이고 딱딱한 형이상학적 언어나 도덕적 명령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맹자의 논리는 '나무 키우기'에 비유될 수 있다. 맹자가 말하는 선한 본성으로서 사단(四端)은 신유학에서 말하는 천리(天理)나 리(理)가 아니라 작은 싹과 같은 어떤 것이다.

그래서 그의 '본성 기르기'는 작은 씨앗이 발아하여 커다란 나무로 자라게 하는 '나무 키우기'가 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공감의 능력에서 비롯되는 도덕적 감정이 인의라는 덕으로 성장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러한 성장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마치 나무에 적당한 수분과 햇볕 그리고 주변의 잡초를 제거해야 가능한 것과 같이 도덕적 감성이 덕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의 과정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맹자의 '본성 기르기'는 일종의 '나무 키우기'이고, "순간순간 발동하는 (…) 측은지심을 키워 울창한 나무가 되었을 때 (…) 덕이 된다."(82쪽)고 하듯이 결국 '덕 키우기'로 이어지는 것이다.

맹자는 인간 가치의 근원이 마음에 있다고 생각하였고, 감정을 통해 반응하는 마음은 일종의 자극에 대한 반응이므로 측은지심과 같은 선한 마음을 보다 예민하도록 키워내어 이를 가족에서 친구, 타자에게까지 확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맹자의 도덕적 전략이라고 한다. 이러한 맹자의 생각을 저자는 식물적이고 생물학적 유비를 통해 서술하거나 또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경험을 예로 들며 소개하기에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 때문에 저자가 보여주는 맹자는 기존의 해설보다 훨씬 '맹자답게' <맹자>를 되살려 내고 있다.

서구 철학에 충격 받아 고원한 형이상학의 논리 속에 심성론을 '도덕 형이상학적 언어' 안에 가둠으로써 살아 있는 정치적, 사회적 실천의 논의로까지 나아가지 못한 현대 신유가적인 논의에 비한다면, 저자가 보여주는 맹자는 훨씬 맹자다우면서 현대적이다. 형이상학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율적이면서 자유로운 인간, 품위를 잃지 않는 인간이 되는 길이 어떻게 가족에서 친구, 타자의 세계로까지 확충되어 나아갈 수 있는지가 명료하게 진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맹자다운, 그러나 근대적인 '맹자'

물론 어색한 부분도 있다. 제3부에서 저자는, 맹자 스스로를 차별화했던 논리 즉 양주와 묵적을 물리쳐야 할 두 가지 극단적 사상으로 지목하며 그 중도를 가고자 했던 맹자의 입장을 통해 평등애를 주장한 공동체주의 묵가는 인(仁)을 무시하고 사회를 거부하는 양주의 개인주의는 의(義)를 무시한 것이라고 표제를 내건다. 우리의 시각에서 너무나 친숙한 이런 용어들로 이루어진 규정들이 과연 고대 중국의 현실에서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까? 즉 맹자 당시의 사회에 대해 우리는 오늘날과 같은 개인주의/공동체주의와 같은 틀을 적용할 수 있는지는 조금 의문스럽기는 하다.

저자는 "양주와 묵적을 비판하면서 자아의 실현과 공동체의 평화라는 두 가지 목표를 한 자리에 설정하고, 공동체의 평화에 이바지하는 행위를 완전히 자발적으로 실천하도록 하는 구조를 제공했다"(190쪽)라고 평가한다. 실상 철저하게 <맹자>에 논거를 두고 서술이 흘러가지만, 마음에서 주체를 세우고 다시 이를 가족과 친구, 타자로 넓혀가는 이러한 논리적 구도나, 개인과 사회 혹은 공동체를 세우는 구도는 맹자의 사상을 지극히 '근대적'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물론 한 사상가를 철학적으로 소개하는 작업은, 일정한 체계화와 형식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비록 기존의 현대 신유가처럼 모호하고 현란한 형이상학의 언어 대신 맹자 자신의 은유와 유비, 인간의 보편적 경험 현실을 통해 현재의 우리 삶과 소통할 수 있는 맹자를 그려내고 있는 공로만으로도 저자의 책은 높은 평가를 받을만하다. 그래서 그렇게 형상화된 <맹자>의 얼굴이 고대 중국의 사투리와 문화적 취향을 가지긴 했어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양복 입은 신사처럼 느껴지는 것이 어색하긴 하지만 반가운 일이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그는 나와 악수하면서, 군신간의 의리를 말하고 공직에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말하고 심지어 혁명의 정당성과 근거까지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존엄을 말하고 품위 있는 인간이 되고자,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사회의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할 줄 아는 이른바 '근대적 주체'로서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는 이름을 가졌다. 물론 이런 점에서는 정치와 행정, 국가의 대사를 늘 논의했던 맹자에게 이러한 설명은 잘 어울린다.

반가운 보수주의자, 이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최근 우리에게 잘 알려진 논의 가운데 '이기적 유전자 대 이타적 인간'에 관한 과학 담론이 있다. 리처드 도킨스에 따르면 인간의 유전자는 자기 복제라는 사명에 충실하도록 이기적이다. 하지만 개체로서의 인간은 이러한 유전자의 이기적 목적에 부응하기 위해 오히려 '이타적 행위'를 할 줄 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인간은 스스로의 내부에 이기적 유전자를 갖고 있으나 이타적 본성을 갖는 모순된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이기적인 존재일까, 이타적인 존재일까?

철학적으로도 의미 있는 이 논쟁은 실상 '본성 대 양육'이라는 차원에서 논의된다. 하지만 실제 논의의 방향은 '본성이냐 양육이냐'가 아니라 '양육을 통한 본성(nature via nurture)'이다. 여기서 본성이란 결정되어 있는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라 본성과 양육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면서 그 근본적인 테두리는 본성의 가능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냐 이타적이냐 하는 물음은 생산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결국 인간의 사회적 문제를 모두 본성으로 환원하여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가 새롭게 선보인 <맹자,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길>에서 형상화된 '맹자'의 모습은,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인간의 논의와는 상황이 반대이다. 분명 사단이라는 공감의 능력을 통해 이타적 본성을 갖는 인간이 현실에서는 서로 훔치고 싸우고 갈등하는 이기적 인간들의 전쟁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저자 또한 이 점을 의식하면서 "개인의 감정에서 시작된 덕을 사회의 윤리로 삼기에는 세상이 너무 크고 복잡해졌다. (…) 필요한 것은 세상에 대한 정보이며 세상을 파악하는 객관적 법칙이다. 또한 인간 사이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덕이 아니라 법과 같은 객관적인 규범이다"(253쪽)라고 고뇌한다.

저자는 비록 맹자와 같은 유학 사상으로 현실 정치를 할 수는 없으나 진보 관념을 부정하면서 전통을 존중하고, 개인주의를 반대하면서 가족과 공동체를 중시했던 에드먼드 버크와 같이, 유학 사상은 동아시아의 보수주의로서 유학은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국가주의와 개인주의를 부정하고 전통과 공동체를 살리고자 했던 맹자의 유학은 '진정한 보수주의'의 모델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름은 실제의 손님"이라 하지 않았던가!

나는 진정한 보수주의자 맹자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가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어떤 처방을 내렸을까? 아마도 이기적 개인을 비판하고 권위적 국가를 비판하지 않았을까? 부국강병의 성장주의보다 사회안전망의 복지를 중시하지 않았을까? 또 국민의 건강주권을 지키는 건강보험의 민영화는 반대하고, 식수도 사먹어야 하는 나라에서 대운하를 건설하려는 사람은 비판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보수주의자'라도 좋다. 아니 차라리 그런 보수주의자라면 반갑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을 통해 이 땅의 보다 많은 사람이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맹자,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길>을 쓴 이혜경은…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박사(동양철학 전공) 과정을 수료, 일본 교토대학교 중국철학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연구교수이며, <천하관과 근대화론 : 양계초를 중심으로>, <량 치차오 : 문명과 유학에 얽힌 애증의 서사> 등의 저서와 <송명유학사상사>(공역), <역사 속에 살아 있는 중국 사상>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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