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 하는가?

[4.19 기념기고]'한국 민주주의의 영원한 대헌장'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맺힌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되살아 피어나리라

  
  4.19탑에 쓰여져 있는 이 글은 다분히 애상적이다.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참가했던 한 여학생은 1심 법정에서 이 시를 울면서 읊는 것으로 그의 최후 진술을 시작하여 방청석의 사람들을 울렸다. 비슷한 시기, 군산 제일고등학교의 몇몇 뜻 있는 교사들은 4.19와 같은 역사적인 날에 달력에는 왜 기념일 표지가 없느냐고 울분을 토로하면서, 소나무 아래서 4.19영령에게 술 한 잔 올리고 그것을 나누어 마셨다. 그것이 국가보안법 상의 반국가단체 구성죄를 뒤집어쓰는 빌미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오송회(五松會) 사건이다.
  
  1970년대, 아직은 열혈청년이었던 백기완은 "4.19 영령들이여, 너희들에게 혼백이 있다면 돌아와 탑을 부수라"고 울부짖었다. 4.19 영령들은 결코 수유리 산골짜기에 유폐되어 산새나 진달래와 벗하고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 탑을 부수고 나와 광화문 네거리에서 두 눈 부릅뜨고 유신독재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적어도 80년대까지만 해도, 4.19는 한편에게는 그 말만 들어도 무엇인가 가슴에 벅차오르게 하는 날이 되어 있었고, 다른 한편에게는 금기의 날이었다. 전자의 사람들에게는 4.19란 말만 들어도 무엇인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게,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을 주는 말이었다. 그들에게 4.19는 우리 모두 거기로 돌아가야 할, 그리하여 거기서부터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해야 할 어떤 고향이랄까, 원점 같이 여겨지는 날이었다. 사진으로 치면 원판 같은 역할을 하는 그런 날이었던 것이다.
  
  4.19가 과연 무엇이길래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말만 들어도 가슴을 설레게 했는가. 4.19는, 비록 글로 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나라 민주주의의 대헌장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마그나 카르타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4.19인 것이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국민이 인간답게,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을 가지고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삶의 정치적 조건을 말한다. 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국민이 원하지 아니하는 정치권력을 폐지할 수 있는 국민의 혁명권을 담보로 하여 존립한다. 4.19는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민이 혁명권을 발동하여 국민이 원하지 아니하는 정치권력을 폐지시킨 장엄한 국민혁명이었다. 피로 쓴 역사만큼 장엄한 헌장은 없다. 4.19가 바로 그 헌장이요, 기념비인 것이다.
  
  4.19는 또한 나이어린 초등학생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 온 국민이 참여해서 성공시킨 국민혁명의 원전이라 할 수가 있다. 4.19는 온 국민의 애국심이 결집해서 만들어 낸 위대한 역사였다. 그때 한 초등학교 여학생은 이렇게 썼다.
  
  (…)
  
  아침 하늘과 저녁노을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

  
  나는 알아요
  엄마, 아빠가 아무 말 안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

  
  한 여대생 아버지가 그의 딸에게 쓴 편지는 더욱 감동적이다.
  
  "그 숱한 젊은이들 가운데 내 딸이 끼어있지 않다는 사실(…) 내가 네게 바라는 것은 '비굴한 행복'보다 '당당한 불행'을 사랑할 줄 하는 여성이 되어지이다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 서글픈 일이다 분한 일이다. (…) 총탄에 넘어진 아들, 딸을 가진 부모들의 비통함보다 털끝하나 옷자락 하나 찢기지 않은 너를 딸로 가진 이 애비의 괴로움이 더 크고 깊구나."
  
  4.19는 과연 애국심의 요람이었다. 4.19는 세계와 인류 앞에 한국민의 긍지와 자존심을 드러내 보여준 그 원천이었다. 그때까지 세계가 한국을 어떻게 보았는지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란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꽃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한 한 외국 언론의 표현이 잘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4.19는 그와 같은 세계인의 조롱을 한 방에 날려 보냈다. 4.19 이후 우리 국민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을 처음으로 보람과 긍지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87년의 민주화는 그 만큼 극적이지는 못했던 것이다.
  
  4.19가 있은 지 꼭 1년 만에 4.19는 5.16에 의해 강도질 당했다. 그리하여 4.19혁명이 피로써 이룩하고 제시한 역사의 방향과는 정반대의 역주행이 30여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한국 국민이 겪었던 인적, 정신적, 물질적 고통이 무릇 얼마였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겪은 군사독재 30년의 역정이 잘 말해주고 있다. 군사독재와의 고난에 찬 민주화투쟁을 통하여, 4.19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자유와 민주의 나무는 시민의 손으로 심어지고, 시민의 피로 양육되며, 시민의 칼로 수호되지 않으면 열매 맺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30년 군사독재를 마침내 무너뜨리면서 우리가 얻은 교훈은 역사는 그 올바른 진행은 잠시 멈추거나 거꾸로 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영원히 거꾸로 가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우여와 곡절은 있지만, 긴 눈으로 보아 정의는 마침내 승리하고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다는 것이었다.
  
  4.19 당시 시인 조지훈은 "양심의 눈물만이/ 불순한 피를 정화할 수 있느니라/ 죄지은 자여/ 사흘 밤 사흘 낮을/ 통곡하지 않고는 말하지 말라"고 외쳤다. 최근 30여 년의 군사독재에 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때를 미화하거나 그 때에 향수를 가진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결코 역사는 거꾸로 되돌아가지도 않고, 되돌아 갈 수도 없다. 잘못된 과거가 떠들썩하게 들추어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지난날의 잘못을 계속 어둠 속에 가두어 두려는 책동은 더욱 나쁘다.
  
  누군가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할 수 없다고 말했다지만, 거기에 빗대서 4.19를 맞은 참에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군사독재가 판치는 조국의 현실을 붙들고 한번쯤 울어보지 않은 사람은 감히 조국의 내일을 얘기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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