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혁명' 40주년과 청년문화론

[남재희 칼럼] 대항문화의 형성이 발전의 추동력이다

"미국 역사가들은 1968년을 모든 것을 바꿔 놓은 한 해로 평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만큼 1968년이 미국 정치·사회·문화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또는 여성 대통령이 등장할 가능성이 점쳐지는 2008년, '변화'가 대통령 선거의 화두로 떠오른 2008년을 격동의 시기였던 1968년과 비교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모색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2008년 미국에서 1968년 미국의 그림자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68혁명을 촉발시킨 베트남전 대신 그 자리를 이라크전이 차지하고 있다."

서울신문 김균미 워싱턴 특파원의 기획기사(5월 12일)의 도입부다.

또한 조선일보의 강경희 파리 특파원은 '프랑스 68세대와 한국 386세대'라는 칼럼(5월 19일)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1968년, 세계를 바꾼 해' 최근 프랑스 시사주간지 렉스프레스는 이런 표지 제목과 함께 40년 전을 조망하는 특집을 실었다. 미국의 흑인 인권 지도자 마틴 루터 킹의 피살, 이라크 지도자 사담 후세인의 쿠데타, '프라하의 봄'으로 기록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운동과 구소련의 침공, 미국 컬럼비아대 등에서 가열된 베트남전 반전 시위 등 1968년 세계에는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났다. 특히 1968년을 뜨겁게 보낸 나라가 프랑스다. 낭테르 대학의 시위로 촉발된 68년 5월 혁명으로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경찰과 대치하며 투쟁했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기성질서에 도전하는 문화혁명이었다. 68혁명을 계기로 프랑스에서 교육제도가 바뀌고 세대 간의 관계가 달라졌으며, 노동자의 권리가 높아지고, 성(性)의 혁명이 분출했다."

68혁명, 5월 혁명, 5월 학생혁명이라고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이 1968년의 대격동이 40주년을 맞자 세계의, 특히 프랑스의 언론들이 여러 가지 특집보도를 하고 있다. 4·19와 6·3사태를 앞서서 겪은 한국인의 눈으로 볼 때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영국의 보수적인 <이코노미스트>까지 '40주년의 근질근질함'이란 칼럼(1월 5일)을 실어 "좋게든 나쁘게든 그 때는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무드가 있었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1968년은 60년대의 정치적 유산을 형성한 모루(鐵砧, anvil)였다. (미국) 민주당은 전쟁, 성문제 등 모든 면에서 결정적으로 왼쪽으로 편향하여 소수파화되었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맥거번 후보 등이 대선에서 참패하던 때를 말하는 것 같다. 많은 평자들은 68혁명 이후 문화 쪽은 더욱 개방적이 되었지만 정치 쪽은 오히려 보수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공교롭게도 67년, 68년 한때를 신문연수 차 미국 대학에서 지낸 경험이 있기에 그 때가 생생하게 회상된다. 월남전 반대 운동(그 때는 지원제가 아닌 징병제였음을 유의), 흑인차별에 항의하는 민권운동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 대통령 후보로 젊은이들의 기대를 모았던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의 피살……. 그리고 버클리 대학의 자유언론운동, 컬럼비아대학에서 심했던 학생저항운동. '양반' 취급 받던 하버드대에서도 학장실이 점거되고 경찰이 투입되는 일이 있었다.

그 때의 미국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에 '청년문화론'을 소개하는 첫 수입상이 되었었다. <역사비평사>에서 낸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을 보니 거기에 '1970년대 청년문화론'(허수 서울대 강사 집필)이라고 하여 한 항목으로 되어 있다. 그 글에서 인용해 보면…….

"1970년 <세대> 2월호에 실린 남재희의 '청춘문화론'은 이 문제를 최초로 공식 거론한 대표적인 글이다. 여기엔 이후 전개된 청년 문화의 중요 논점이 소박한 형태로나마 망라되어 있다. 이 글에서 그는 한국의 대학생 운동이 부진한 이유를 학생운동이 민주주의나 민족주의와 같은 '통념적 진리'에 기반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런 기반은 한국학생운동이 폭넓은 사회적 지지를 받거나 운동이 범학생적으로 전개되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그 기반으로 인하여 운동이 지나치게 획일화되고, 통념적 진리를 벗어난 것만 비판하는 소극적 운동에 머무르게 된 것은 부정적 면으로 보았다. 선진 외국의 경우 통념적 진리가 사회적으로 거의 실현되었기 때문에 학생운동은 오히려 통념적 진리를 부정하고 새로운 이념을 내세우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그들이 형성하는 문화가 바로 '청춘문화' 혹은 '청년문화'라는 것이다"

68년의 격동을 미국에서 체험하고 그 문화적 측면을 전달하려고 한 것인데, 영어의 adolescent나 youth를 '청년'으로 번역하면 남성만 지칭하는 느낌을 주는 것 같기에 남녀를 모두 포함하는 '청춘'이라는 표현을 한번 썼었으나 곧 '청년'으로 굳어지게 되어 '청년문화'라 하게 된 것이다.
▲ ⓒ뉴시스

허수 씨의 글에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지만 청년문화론은 첫 수입상을 거쳐 동아일보 문화부의 김병익(金炳翼) 씨에 의해 발전되고, 서울대의 한완상(韓完相) 교수에 의해 <현대사회와 청년문화>라고 책으로까지 나오게 되었다.

청년문화론을 전개하니 주변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는 학생운동에 혼선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도 하였다. '통념적 진리' 이상의 이념을 젊은 세대는 지향해야 한다는 것인데 '통념적 진리'에도 훨씬 미달인 한국사회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던 차에 <문학과 지성>에서 청탁이 와서 '학생참여의 양식'이란 글을 써서 좁은 뜻의 문화론만이 아니고 광의의 문화에 포함될 수도 있는 학생운동론을 폈다. 청년문화에서 '비참여'(uncommitted)와 '참여(committed)'를 나누어 보기도 하는데 '참여' 쪽을 서술한 것이다. 비참여 쪽이 주가 되는 '청년문화론'과 참여 쪽인 '학생참여의 양식'은 둘 다 현암사가 낸 <청년문화론>이란 책에 수록되어 있다.

그 후 여러 대학의 신문에서 글 부탁이 줄을 이었다. 같은 이야기일 뿐이라고 사양해도 거듭 써달란다. 약간씩 다르게 써주었지만, 요지는 청년문화의 주류는 대학문화이고 대학문화의 형성·발전에는 대학신문이 중요한 매체이니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대학신문을 편집해보라는 것이었다. 여러 대학 기자들의 수련대회에 가서 강연도 했다. 그랬더니 중앙정보부 남산 지하실에서 몽둥이 찜질이다. 그러한 청년문화론이 학생운동을 격화시킨다는 것이 권력당국의 판단이었던 것 같다.

서울대학의 <대학신문>은 '68혁명 40주년을 찾아'란 사설(5월 5일)에서 "68혁명을 낳는 비판의식과 동력의 주체가 바로 대학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68혁명에 대해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이 "나는 1968년의 장(章)을 문 닫으려 한다"고 공언한 뒤 프랑스에서 논쟁이 활발했던 것 같다. 국내에도 그 내용이 많이 소개되었다. 그 가운데서 "68년은 코르셋을 착용한(경직된 가치에 갇힌) 프랑스를 해방시켰던 자유화 운동이었다"라고 말한 프랑스 의원의 비유적인 이야기가 와 닿는다. 얼마간의 경성(硬性)사회가 더욱 더 연성(軟性)사회로 전환했다고 볼 수도 있다.

혁명인지, 운동인지의 평가를 떠나 68년의 일은 확실히 큰 충격임에 틀림없다. 좌우 모든 기존 권위주의 정치체제에 대한 충격이고, 이른바 '관리 사회'에 대한 저항이며, 경직된 성문화에 대한 반발이다. 철학적으로는 허버트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 같은 책의 영향이 있기도 하였다. 혁명적 낭만주의의 분위기다.

68년의 일은 사회적 일대격동이었다. 그러한 일대격동은 자주 오는 게 아니다. 격동의 사이클은 아주 오랜 간격을 둔다. "프랑스 혁명을 평가하기엔 아직 이르다"고 했다는 주은래(周恩來) 중국 총리의 말을 흔히 인용한다. 우리나라의 이름 있던 문인이자 언론인인 우인 송지영(雨人 宋志英)씨는 "학교에서 프랑스 혁명을 단 몇 시간에 가르쳐 혁명이 쉽게 되는 것인 줄 알고 과오를 범한다"고 젊은이들에게 자주 말했었다. 그는 중국에서 대학공부를 하여 그 느긋한 기질을 체득한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 사회의 급변으로 그러한 사이클의 기간이 단축될 것으로도 보인다.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으로 인터넷 시대가 되었으며 휴대폰이 필수품이 되어 시민들이 가히 디지털 '유목민'처럼 되었다. 거기에 아파트의 전국화도 보태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적당한 계기가 주어지기만 하면 사회적 일대격동은 쉽게 일어날 수 있다. 몇 년 전의 미군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 촛불데모, 탄핵반대 촛불데모, 그리고 요즘의 미국 쇠고기 문제 촛불 데모 등등도 그러한 증좌라 할 수 있다. <진보정치>의 김민웅 교수 칼럼(5월 19일)은 촛불 데모 현장의 청년문화의 단면을 잘 묘사하고 있다.

68년의 일에서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대항(對抗)문화(Counter-Culture, 反文化란 번역도 있다)가 형성되고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청년문화는 아(亞)문화 또는 하위문화(Sub-Culture)이지만 대항문화의 성격도 함께 갖고 있다. 그 대항문화를 좁은 의미의 문화, 사회, 정치의 세 측면에서 나누어 볼 수도 있다.

협의의 문화에서는 역시 매스 미디어가 중추적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 청년 문화론을 소개한 후 '참여(Participatory) 저널리즘'론도 역시 수입하여 <창작과 비평>에 쓴 바 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도 한 '객관성'을 가진 체하지 말고 아예 자기 주관을 실존적으로 투입하여 진실이라 믿는 것을 쓰는 기사 같은 것 말이다. 우리의 지난날에 있어서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뿌리 깊은 나무> 등이 큰일을 하였었다. 문예 분야가 중요함도 물론이다.

사회적 측면에서는 사회단체, 특히 NGO가 중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68혁명이 가속시킨 페미니즘 운동이나 환경운동은 매우 큰 역할을 한다.

정치 측면에서는 운동정치이다. 어느 논자는 정치를 정당정치(Party Politics), 운동정치(Movement Politics), 음모정치(Conspiratorial Politics)로 나누어 말했는데 그 운동정치 이야기다. 그리고 거기에는 결국 협의의 문화와 사회의 대항문화가 모두 합류된다.

이러한 대항문화의 발전과 성숙이 없을 때 68혁명과 같은 대격동이 있어도 그 성과나 파급은 그리 크지 않게 되리라고 본다. 협의의 문화에서의 알찬 대항문화의 뒷받침이 있고 사회운동의 활성화가 있으며 운동정치가 왕성하게 될 때 사회는 '양적 혁명'만이 아닌 '질적 혁명'을 기대할 수 있게 되리라고 본다.

68년 당시 보스턴의 공원에서 젊은이들의 큰 집회가 있어서 가보니 아마추어 연극도 하던 끝에 새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일부 구절을 암송한다. 인상적이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자주 인용되는 이런 구절이 아니었나 싶다.

에스트라콘: 나 이런 생활 계속 못하겠어. (I can't go on like this)
브라디밀: 그런 얘긴 누구나 하지. (That's what you think)
(임성희 번역본)

어떤 면에서 68혁명은 권위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부조리의 드라마 같기도 하였다. 베케트는 곧이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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