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사건이 일어난지 8년만에, 이번에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교내 총기사건이라 불릴만한 사건이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났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망자 수만 33명. 게다가 범인은 한국계로 밝혀졌다. 도대체 이러한 비극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어떻게 총기를 난사해 그 많은 사람을 죽일 행동을 한 것인가? 왜 다른 나라 총기 소유 허가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미국에선 그토록 빈번한 것일까? 혹은, 20세 이상의 남자 성인이라면 누구나 군대에 가 사격술을 훈련 받아야 하고 비공식적인 밀수 총기가 퍼져있다고 하는 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미국에서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
이런 질문들에 대해 100% 만족할 만한 답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한 답변을 주는 영화 두 편을 떠올릴 수 있다. 하나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콜럼바인>이고, 또 하나는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이다. 두 영화 모두 둘 다 1999년 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모티프로 삼고 있는 영화들로, 다큐멘터리인 <볼링 포 콜럼바인>은 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계기로 총기난사 사건을 '부추기는' 미국의 사회 시스템을 분석하고, 극영화인 <엘리펀트>는 외롭고 상처입은 두 10대 소년의 일상을 건조하게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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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펀트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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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펀트>에서 구스 반 산트 감독은 분노와 외로움, 상처로 가득찬 두 소년의 황량한 내면과, 표면적으로는 남들과 별 다를 것 없는 이들의 일상을 그려낸다. 우리는 여전히, <엘리펀트>에서 그 평화롭고 따사롭던 오후에 두 주인공이 친구들을 향해 총질을 시작하는 명시적이고 논리적인 이유를 발견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상처입은 사람들이 모두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을 쏴대지는 않는다. 마이클 무어가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듯, 미국은 개인의 총기 소유를 법적으로 보장하면서도 이에 대한 관리와 규제에는 매우 허술하며 총기 소지가 매우 쉽다. 물론 마이클 무어가 조롱했던 것처럼 은행에 계좌만 개설하면 사은품으로 총기를 주는 수준은 아니지만(이것은 총기 구입이 그만큼 쉽다는 마이클 무어식 비아냥일 뿐, 사실은 아니다.), 버지니아공대 사건의 범인 역시 학교 근처 총기상에서 신분증 세 개를 보이는 것만으로 아주 쉽게 범행 무기를 구입했다고 한다. 사용 용도가 무엇인지 설명하거나 신고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단순히 총기를 쉽게 구할 수 있다고 해서 그만큼 총기 난사 사건도 빈번히 일어나는 것일까? 역시 총기 소지가 법적으로 보장된 캐나다에서 연간 일어나는 총기난사 사건은 미국에 비하면 훨씬 적다. 마이클 무어는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공포를 확대재생산하면서 공격이 최선의 방어임을 설파하는 시스템이라고 분석한다. 빈부의 격차가 크고 양극화된 사회 현상과 이로 인한 사회적 불만과 불안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약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복지와 이로 인한 최소한의 생활 안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미국 외부의 적을 규정하고 적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을 재생산함으로써 사회적 불만을 무마하는 것, 그리하여 미국이라는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 자체를 공포와 분노에 두고 있다는 것, 이른바 '공포로 통치하는 사회'라는 사실이 이러한 비극을 계속 발생케 한다는 것이다.
. 분열되고 파편화된 세상이 문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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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링 포 컬럼바인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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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번 사건이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면 우리는 주인공의 행동에 대한 심리적 개연성이 없다며 비판할 것이고, 혹자들은 하필 범인을 한국인으로 상정한 것에 대해 감독이 혹시 인종차별주의자인지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이것은 영화에 불과하다"며, 더욱이 "바다 건너 먼 나라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며 안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간이란 이성과 논리에 근거에 행동하려 하고,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우리와는 다른 매우 특수한 사람,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 믿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인간 고유의 의지가 아니라 악마가 들려서, 혹은 귀신이 씌여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라는 등등 수많은 바깥의 이유들을 찾고 싶어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일지 모르며 내 자신조차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불신과 공포, 불안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실제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좀더 공포를 느끼지만 그것이 '총기 난사' 사건인 경우, 총기 소지가 법적으로 허용되는 남의 나라 현실이라 믿으며 애써 무관심한 척할 수도 있다. 사실 총기가 엄격히 금지된 한국사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미국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총기난사 사건은 낯설고 두려운,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은 범인이 한국계로 밝혀지고 범행동기가 (누구나 평생 무수히 겪는) 여자친구와의 불화 때문인 듯하다는 잠정 수사결과가 전해지면서, 우리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총기난사 사고'에 무관심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두 번씩은 자신이 저지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탈의 경험을 하고, 이에 대한 죄책감 한두 가지씩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일탈이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범죄'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들은 분명히 있다. 이런 비극은 분명 사람이 저지르는 것이고, 그 사람은 그가 속한 사회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 우리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러한 풍요는 모두에게 주어진 것도 아니며, 물질의 풍요로움이 마음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롭고 힘든, 분절되고 파편화된 세상, 각종 통신수단은 눈부시게 발달했지만 여전히 (혹은 오히려 더욱 심화된)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세상을 견디어나가고 있다. 이 고통을 타인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 탓으로 돌릴 때, 그리고 타인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나와 상관없는 '사물'로 여겨질 때, 그 사회는 위험 수위로 가까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건에 정말로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한국사회를 포함해 전세계 거의 모든 사회가 이미 이런 위험 수위에 다달은 현대사회라는 점을 우리가 알고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오로지 생명을 해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무기가 주변에 널려 있어 누구나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이런 비극은 몇번이고 반복해서 발생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종류의 비극을 보며 지나치게 범인을 동정할 필요도, 그럼에도 그저 정신나간 특정인의 소행으로만 돌리며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건으로 치부하고 무관심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먼 나라에서 벌어진 일일지라도 우리가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김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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