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늘어도 행복할 수 없는 거야? 괴상한 역설!

[프레시안 books] 요아힘 바이만 외 <당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

어떤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개개인마다 천차만별의 이유가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공통적이며 중요한 원인은 무엇일까? 이 책 <당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요하임 바이만·안드레아스 크나베·로니 쇱 지음, 강희진 옮김, 미래의창 펴냄)는 그 해답을 줄까? 어쩌나. 그렇지 못할 듯하다.

제목만 보면 요새 유행하는, 슬렁슬렁 읽을 수 있는 행복론인 듯하지만, 또한 그냥 슬렁슬렁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쉽지만, 이 책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꽤나 논쟁이 되고 있는 주제에 대해 하나의 입장을 정하고 상대방을 비판하기 위해 쓰인 책이다. 따라서 맥락을 이해하고 <당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읽어야만 이 책이 성공적으로 상대방을 논파했지를 판단할 수 있다.

▲ <당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요하임 바이만·안드레아스 크나베·로니 쇱 지음, 강희진 옮김, 미래의창 펴냄). ⓒ미래의창
<당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의 저자인 독일의 경제학자 바이만, 크나베, 쇱이 싸움을 걸고 있는 상대는 '행복경제학(Happiness Economics)' 전도자들이다. 따라서 먼저 행복경제학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행복경제학'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행동경제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전통적인 경제학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등장하였다.

행복경제학과 행동경제학 둘 다, 전통적 경제학이 현실의 인간 그 자체보다는 매우 추상화된, 별로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을 가정하고 이론을 구축하는 것에 저항하여 등장한 경제학의 새로운 분파들이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은 합리적'이라는 가정과는 반대로 인간이 자주 타인을 따라 행동한다고 본다. 전통경제학에선 소득의 증가가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가정하지만 행복경제학은 소득이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경제학의 주장 : GDP와 행복 간의 정비례

전통적으로 경제학은 한 개인이나 국가에 있어 소득이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가정하고 있는 듯하다. 직접적으로 그러한 가정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 관심사나 방법론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경제학의 영역을 방법론에 따라 두 분야로 나누는데, 한 국가의 경제 전체를 분석하는 거시경제학(巨視經濟學)은 국민 모두의 소득을 의미하는 총계변수인 GDP, 그리고 그것을 인구로 나눈 1인당 GDP이 얼마인가가 매우 중요한 관심사다. 따라서 소득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소득을 늘리려면 어떤 정책을 펴야 하는가, 내년의 소득이 늘어날지 줄어들지를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를 고민하며 이를 위해 이론을 만들어 내고 경제모형을 만들어낸다.

두 번째는 미시경제학(微視經濟學)이다. 경제학 중에서 특히 개별 인간에 관심을 가지는 시각과 분석 방식을 미시경제학이라 대략 정의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행복과 관련된 개념이 등장한다. 사실 행복의 문제 그 자체는 철학, 사회학 혹은 심리학에서나 깊이 있게 다루어지는 개념이지만 경제학에 그와 비슷한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경제학도 사회과학의 일종이고 인간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 인간이 무엇을 기준으로 경제활동을 하는가에 대한 가정이 있어야 한다. 미시경제학에서 경제학적 인간들은 효용을 극대화하려고 경제활동을 한다고 가정된다. 효용(utility)이란 무엇인가? 어떤 재화나 서비스, 즉 물질적인 것을 소비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만족감 혹은 행복감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미시경제학은 더 나아가 모든 소비자들은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소비 활동을 하는데 소비량이 늘어날수록 효용은 높아진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소득 증가는 소비 지출을 더욱 늘릴 것이므로 효용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행복 대신에 효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물질적인 만족감을 행복이 아니라 효용으로 나타낸 것은, 행복이 물질적 만족감 이상을 의미함을 인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미시경제학은 매우 이기적인 인간을 가정하여 자기의 소비가 증가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소비가 증가하면 다른 사람의 소비가 어떻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물질적인 소비에만 관심이 있어서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이 파괴되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는 매우 이기적인 인간인 것이다.

물론 인간의 특성 중에서 학문의 성격과 관련되는 특징을 끄집어내어 추상적인 인간을 가정한 것은 이해할 만하다. 따라서 그러한 한계를 인정하고 경제학 분석이 주는 결과를 해석하면 괜찮다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경제학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면서 경제학자들이 내리는 판단과 제언들이 한 사회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비현실적인 가정에 근거하였지만 복잡한 수학공식을 통해서 찾아낸 결론과 제언은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제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소득과 소비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인간이 정상적인 경제적 인간이고 남을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하면 보통은 비정상적인 인간이 되는 식이다. 그러나 인간이 실제로 그러한가?

GDP, 1인당 GDP가 가진 물질적 부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적지 않은 경제학자들도 불편하게 생각해 왔다. GDP가 커지면 더욱 행복하고 GDP가 작아지면 더욱 불행해진다는 '성장 신화'로 사람들은 인간의 경제활동의 근본 목적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먹기 위해 사는 것인가, 살기 위해 먹는 것인가?

▲ <사민주의 복지국가와 사회적 경제>(김재훈 지음, 한울 펴냄). ⓒ한울
소득의 증가만을 추구하는 것에 반대한 경제학자들도 있다. 알프레드 먀살은 신고전학파 경제이론의 창시자이다. 그런 그가 영국이 산업혁명을 이룬 만큼 이제 국가는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을 줄이고 기초교육을 받을 권리를 확장해서 노동자들을 '신사(gentlemen)'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그들 신사 시민들은 젊은 시절을 보다 높은, 자유로운 성장을 위해 보내려 할 것이고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내며 여가를 즐길 수 있게 되고, 단지 임금과 물질적 안락함만이 아니라 독립심과 자긍심을 키워가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정중한 존경도 키우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사민주의 복지국가와 사회적 경제>(김재훈 지음, 한울 펴냄)에서 인용)

성장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경제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기도 한다고 주장된다. 끊임없이 성장하기 위해서, 특히 성장률은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는 가정 때문에 무엇보다 생산을 조직하는 기업 간에 생존을 건 경쟁이 끊임없이 진행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경쟁과 투자 확대 과정이 계속되어 생산능력은 확대되지만 자주 과잉 투자로 이어져 기업의 이윤은 하락하고 위기가 발생하게 된다. 결국 위기로 인해 과도하게 축적된 설비들은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구조 조정된다. 이렇게 부질없는 경쟁과 성장 자체를 위한 성장 속에 국민들은 오히려 그 성장의 혜택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위기를 맞게 된다.

GDP 지표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총국민행복 지표

이와 같은 비판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GDP 지표의 한계와 대안적 지표로서의 다양한 총국민행복 지표의 개발이다. GDP를 대체하려는 노력은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 하나는 '생산'과 '소득'의 측정에서 '삶의 질'과 '행복'의 측정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특히 이런 새로운 시도들은 '일정 소득 수준을 달성한 다음부터는 소득이 늘어도 행복은 나아지지 않는다'는 소위 '이스털린의 역설'에서 큰 추진력을 얻었다.

이스털린은 1974년 발표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현상을 밝혀냈다.(Easterlin, Richard(1974). "Does Economic Growth Improve the Human Lot? Some Empirical Evidence". Paul A. David and Melvin W. Reder, eds., , New York: Academic Press) 그는 19개 선진국과 개도국의 사람들의 주관적 삶의 만족도를 측정했는데 개별 국가 내에서 일정 시점 사람들의 삶의 만족도를 비교해 보면 소득이 많아질수록 삶의 만족도는 높았다. 그런데 한 국가를 대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삶의 만족도가 어떻게 되는가를 분석해보니 국민들 전체의 삶의 만족도가 높아지지 않았다. 당시의 대상 국가는 미국이었다. 장기간의 삶의 만족도 자료를 구하기 어려우므로 이런 작업이 모든 국가를 대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바이만 등이 독일에 대해 동일한 분석을 해본 결과 비슷한 현상을 밝혀냈다. 1984년~2010년 간 1인당 GDP는 증가하는데 평균적인 삶의 만족도는 증가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스털린은 그것을 인간의 놀라운 적응력 때문이라고 보았다. 물질적 개선이 주는 기쁨은 금방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감은 잠시뿐이라고 한다. 물론 일정 시점에서 부자가 더욱 행복하다고 나타났지만, 그것은 부자여서라기보다는 부자와 결부되는 사회적 지위가 더 큰 만족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증가한 소득이 주는 행복감은 금방 사라지지만 부와 결부되어 높아진 사회적 지위가 장기간 지속되는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물론 이스털린의 역설은, 소득이 일정 수준 이상 되는 국가들에서 나타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일정 소득 수준'이란 대체로 1인당 GDP 1만 달러이다. 일단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상회하게 되면 이후부터는 소득과 행복은 비례관계에 있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스털린의 연구 결과에 힘을 받아 GDP를 대체하려는 지표들이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대표적인 예만 열거해 보아도, 1972년 노드하우스와 토빈(Nordhaus & Tobin)의 경제후생지표(Measure of Economic Welfare: MEW), 1973년 일본에서 만들어진 순경제적후생지표(Net National Welfare: NNW), 1981년 그리스 학자 졸로타스(Zolotas)가 만들어낸 경제복지지표(Economic Aspects of Welfare index: EAW), 1989년 댈리와 콥(Daly & Cobb)이 만든 지속가능한 경제복지지수(Index of Sustainable Economic Welfare: ISEW), 1990년 UN의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 HDI)가 있다. 2009년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에 의해 위촉된 조지프 스티글리츠를 위원장으로 한 '경제성과 및 사회적 진보 측정위원회'의 임무도 '국민총행복(GNH)'을 높이는 새로운 지수를 찾아내고자 했다. 이러한 지표들은 객관적 삶의 만족도 지표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러한 지표들은 GDP와는 다른 궤적을 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복지지표(EAW)를 1950~1997년 미국에 대해 계산해 보면, GDP의 증가속도에 비해 사회후생이 증가하는 속도는 느려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GDP가 증가해도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속 가능한 경제복지지수(ISEW)를 미국에 적용해 보면 1950~1986년 사이 미국의 GDP는 계속 증가하지만 복지지수는 증가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GDP 규모로 12위가 된다고 하지만 삶의 질 수준에서는 그에 한참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OECD는 11개 영역 20개 세부지표로 구성된 '더 나은 삶의 지수(Better Life Initiative: BLI)'를 발표하고 있는데 2012년 36개국(34개 회원국과 러시아, 브라질)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호주가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선정되었으며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상위권에 포진되어 있는 반면 한국은 24위였다. 이 결과가 상당히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은 나만일까?

행복경제학의 한계

그렇다면 바이만 등은 왜 '행복경제학'을 비판하는가? 이스털린의 연구가 경제학의 패러다임을 바꿀 정도로 참신해 보이지만 그의 연구는 과학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엉성한 이론적 도구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무엇보다 이스털린은 주관적 삶의 만족도를 행복지수로 사용하였는데 주관적 삶의 만족도라는 것이 신뢰하기 매우 어려운 변수라는 것이 핵심 비판이다.

당신이 삶에 만족하는가를 0과 10사이의 점수로 표시해 달라고 요청하여 측정하는 것이 주관적 삶의 만족도인데, 문제는 수많은 요인에 의해 사람들의 삶의 만족감이 매우 달라지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날씨가 조금만 좋거나 나빠도 아니면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도 삶의 만족도는 떨어진다. 또한 주관적 삶의 만족도는 말 그대로 주관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불가능하다. 문화, 종교가 달라도 삶의 만족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행복경제학은 이스털린의 연구에서 비롯되었지만 행복경제학이란 깃발 아래 일단의 학자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시간이 꽤 흐른 199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영국의 앤드류 오스왈드(Andrew Oswald)를 필두로, 소수지만 어쨌든 일단의 경제학자들이 이스털린이 고민했던 문제를 함께 뒤쫓기 시작했다. 1993년 오스왈드는 미국의 동료와 '지난 시대 영국과 미국의 행복'이라는 제목으로 기존의 행복에 관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평가한 최초의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 논문의 뒤를 이어서 여러 논문들을 발표했는데 사람들이 대답한 주관적 삶의 만족도를 기준으로 어떤 요소들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지를 분석하였다.

이들이 발견해 낸 것은 무엇인가? 가장 행복한 사람은 기혼자이며, 좋은 교육을 받았고, 돈을 잘 벌고, 부모가 이혼하지 않은 여자이다. 실업자는 세계 어디서나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다. 두 번째 결혼은 첫 번째 결혼보다 덜 행복하다. 그리고 행복과 삶에 대한 만족감은 일생을 지나는 동안 U자 형태를 그리게 된다.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가장 행복해지는 나이는 23세와 69세라고 한다.

이에 대해 바이만 등은 따져보면 너무나 허점이 많은 발견들이어서 소득을 대체할만한 원인은 안 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좋은 교육을 받으면 행복하다고 했는데 좋은 교육을 단지 교육 연수로만 측정하는 것이 문제라고 비판했다. 교육 연수가 같더라도 어떤 지역과 어떤 대학을 나왔는가가 더욱 의미 있을 것이다.

<당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에서 바이만 등은 이스털린의 역설 또한 실제로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공격한다. 그와 관련하여 8장에서 스티븐슨과 볼퍼스의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제시했다. 그들은 이스털린이 사용한 자료들에 왜곡이 있었다는 점과 주관적 삶의 만족도를 질문하는 방식이 변화한 것이 이스털린의 역설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이들은 왜곡이 없는 자료를 사용하는 경우 대부분의 선진국들에서 소득과 삶의 만족도 사이에 정비례 관계가 수립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왜곡이 없는 자료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벨기에와 미국은 유일하게 소득 증가가 국민들의 삶의 만족도를 개선하지 못한 국가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벨기에의 경우 서로 적대적인 플라망족과 왈론족 사이의 갈등이, 미국의 경우 소득이 전반적으로 증가하는 와중에 분배 구조가 극도로 불평등해져 중산층이 몰락한 것, 그로 인해 중산층의 삶의 만족도가 떨어진 것이 전체 삶의 만족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주관적·객관적 삶의 지표의 조화를 기대하며

그러나 <당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다 읽고 나서도 행복경제학의 기본적 아이디어에 대해 느끼는 서평자의 호감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니, 적어도 서평자에게 있어 이 책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바이만 등은 주관적 삶의 만족도 지표가 신뢰하기 어려운 방법론이라고 비판했지만 그 지표의 결과가 그럴 듯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예를 들어 2011년 12월 한국갤럽이 전 세계 57개국 5만 2287명을 대상으로 "나는 행복하다"고 응답한 국민의 비율을 발표했는데, 우리 나라는 전체 57개국 중 하위권인 34위를 기록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추어진 노르딕 국가의 국민들이 행복 수준이 높게 은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가족의 해체, 삶의 불안정성 증가, 범죄의 급증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 나라가 하위권을 차지한 것도 그럴만한 듯하다. 단지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로 남태평양의 작은 섬 피지와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89퍼센트)인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나라에서 안 살아봤으니 모를 일이다. 국민소득은 낮아도 기본적 삶의 수준은 유지되고 마음이 평안한 걸까?

▲ 2011년 12월 30일 한국갤럽의 '한국인의 행복'(세계 57개국 행복도 비교 조사) 통계. ⓒ한국갤럽

주관적 행복 측정의 또 다른 예로서 어린이·청소년 행복도 조사도 있다. 한국방정환재단과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전국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학생 총 6791명을 대상으로 국제비교 설문조사를 2012년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주관적 행복지수는 69.29점으로 OECD 23개국 가운데 최하점이었다. OECD 평균인 100점보다 무려 30점 이상 낮다. 무한경쟁으로 내몰리는 교육현실을 생각해보면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바이만 등이 지적한 행복경제학의 이론적 엄밀성 부족이 문제가 되는 건 확실하다. 어떤 이론이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엄밀한 방법론이 중요하기 때문에 행복경제학이 학문으로 성공하기 원한다면, 주관적 삶의 만족도의 객관성을 획득하기 위해 행복경제학자들이 더욱 노력할 필요는 있다. 새로운 학문이 등장할 때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만일 이러한 검증 과정을 잘 견뎌낸다면 행복경제학이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바이만 등이 왜 행복경제학에 대해 이렇게 적대적인지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소득이 행복의 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전통경제학이 성장에만 집착하는 경제정책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은 것과 마찬가지로, 소득 수준이 행복을 결정하지 않는 요인이라고 보기 시작하면 소득과 경제성장이 국민들의 삶의 만족도와 거의 무관하다는 결론이 나올 테고, 이에 따라 실업 문제를 단편적인 사회 문제쯤으로 치부해도 좋다는 결론에 도달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행복경제학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 물질적 풍요가 결코 삶의 만족도를 높여 줄 수 없으며 돈을 더 많이 벌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은 저속하기 짝이 없고, 그런 만큼 '세금 폭탄'이라는 수단으로 그러한 행위를 최대한 억제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소비란 물질 숭배를 향해 나아가는 끊임없는 왜곡의 과정일 뿐이고 고성장, 고소득, 민간 지출 증가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이만 등이 우려하는, 이스털린의 역설이 낳은 위험한 발상이다. 이와 관련하여 오스왈드 등 대표적인 행복경제학자들이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으로서 개인적인 측면에만 집중하는 것도 우려스럽다.

주관적 삶의 만족도 지표들이 과학적인 엄밀성을 획득할 정도로 정교화되어, 객관적 삶의 만족도 지표들을 잘 뒷받침함으로써 소득분배가 평등하고 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안정감이 높은 국가의 국민들의 주관적 만족도가 더욱 높다는 결론이 엄밀하게 증명되면 좋을 것 같다. 직관적으로는 그러한데, 그것을 엄밀하게 증명할 방법이 있을까? 어쨌든 전통 경제학과 행복경제학과 이 책이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맥락을 이해하고 <당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읽는다면, 이 책이 훨씬 재미있게 읽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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