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맹호의 삶에 책이 겹치니 '교양'이 탄생했다!

[현장] 민음사 박맹호 회장 자서전 <책> 출간

'책'이라는 거대한 글자 앞에 체구가 왜소한 노인이 꼿꼿하게 섰다. 그의 목소리는 작았고 말투는 느렸지만, 이야기의 순서는 정확했으며 그 내용은 때로 단호했다.

자서전이라는 형식이 한국에서 얼마나 들러리 같으며 시늉에 불과한지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조차, 민음사 박맹호 회장의 자서전 출간은 궁금한 소식일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일 자체가 동시에 한국 출판계의 반세기를 톺아보게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 자서전의 제목은 '책'이다.

12월 11일 광화문에 위치한 한 식당에서 민음사 박맹호 회장의 자서전 <책>(민음사 펴냄) 출간 기념 기자 간담회가 열렸다. 1966년 서울 청진동 옥탑방 한 칸에서 출판사 민음사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5000종이 넘는 책을 펴내며 한국 최대 단행본 출판사로 키워낸 그의 인생은, 197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는 한국 출판사를 한 눈에 조망하게 되는 소중한 기록이다.

▲ 민음사 박맹호 회장. ⓒ민음사

애초에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 자체를 싫어해서 명사들의 추억담을 싣고자 하는 각계의 요청도 번번이 거절해왔다. 민음사 장은수 대표 말에 따르면, 환갑이나 고희 생일을 맞았을 때에도 잔치를 떠들썩하게 벌이느니 그 돈으로 책을 내자며 고사해왔다고 했다. 하지만 1933년생인 박 회장이 올해로 팔순을 맞이하면서, 주변의 권유는 한층 커졌다. 급변하는 한국 현대사를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드문 상황에서 하나의 선례를 만들어보자는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

<책>을 완성하기까지는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하나하나 메모를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박 회장의 기억에 의존하여 글을 작성한 뒤, 옛 책과 신문들을 일일이 비교 대조하고 등장 인물들과 다시 한 번 팩트에 대한 체크를 거친 끝에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완성했다고 했다. 박 회장은 "늘 위기가 아닌 적이 없"었던 한국 출판의 역사를 통해,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낸 민음사의 역사를 통해 오늘날의 패배주의적인 "출판 위기론"에 대한 통찰을 <책> 속에 담고 싶어했다.

1966년 6월 10일 출판업의 첫 발을 <요가>로 떼었다. 198쪽, 250원의 정가가 매겨진 <요가>는 1만5000권이 팔려나가면서 요즘으로 치면 수십만 권에 해당하는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국내에 처음으로 요가를 소개한 책이었다.

"출판업이 쉬운 거구나, 책으로 돈을 벌 수 있구나 생각되더군요. 두 번째로 유주현 작가의 <장미부인>을 냈는데, 쉽게 만들어 쉽게 접근했더니 박살이 났어요." (웃음)

순식간에 불어난 빚 때문에 허덕이던 박맹호 회장은 일본 책 '리프린트'를 권유받고 일본판 <건축 설계 자료 집성>을 찍어냈다. 외국 책을 번역하지 않고 통째로 들여다가 복제해서 파는 관행을 어쩔 수 없이 따른 것이다. 당시 한국이 저작권 조약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해적 출판에 대한 열등감과 심적 고통 때문에 곧 손을 떼었고, 제대로 된 단행본에 대한 열망으로 1970년대 출판 산업을 새롭게 시작했다. 그 시작은 1973년과 1974년, '세계 시인선'과 '오늘의 시인 총서'부터다.

▲ <책>(박맹호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세계의 시인선' 같은 경우 일본판 중역이거나 불성실한 번역투성이였던 기존의 시집 관행에서 벗어나 원문과 함께 번역문, 역자 주까지 싣는 파격을 선보였다. '오늘의 시인 총서'의 경우 당시로서는 신진 시인이었던 김수영, 김춘수, 고은 등의 시집을 과감하게 출간했다. 데뷔한 지 15년은 지나야 시집을 낼 수 있던 시절이었다. 뿐만 아니라 현재 국내에서 출간되는 시집의 표준 판형인 국판 30절 판형을 개발하고 가로쓰기 편집을 고집함으로써 국내 시 독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또 1970년대 정병규 디자이너를 발탁하여 국내 북 디자인의 놀라운 발전을 이끌어냈고, 1980년 군부 독재 시절 출판인 모임 '수요회'를 결성하여 출판 환경의 개선을 이끌어가는 창구 역할을 했다. 교과서 이외에는 기초 과학 도서나 인문학 도서가 거의 발간되지 않던 시절 대우그룹과 손을 잡고 '대우 학술 총서'를 펴냈고, 2000년대 중반에 들어 독서계의 고전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세계 문학 전집'을 1990년대 중반 처음 기획했으며, 전문 편집자 시스템을 정착시키고 2005년 세계 최대의 도서 박람회인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행사를 진두지휘했다. 이 모든 과정이 <책> 속에 빼곡하게 담겨있다.

"한국의 산업 발전에 발맞춰 출판 규모도 커졌지, 축소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나는 책이 인간을 성숙시키는 DNA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통해 인간은 성장하고 완성돼요. 책은 성장의 역사지, 쇠퇴의 역사가 아닙니다."

박맹호 회장은 일을 그만두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지에 관한 질문에 "세계 문학 전집을 시작했을 땐 한 100권만 낼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306권을 넘어가는 요즈음엔 1000권까지 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세계의 문학을 한국에서 다 수용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라고 답했다. "인문학으로 이만큼 살아 온 만큼 이제는 그 덕을 인문학 발전에 돌려 기회가 닿는 대로 계속 힘들 보태고 싶다"고도 했다. "쉬는 것이 고문"이라며 "아직까지 쉬는 것 자체를 생각해본 적 없다"는 현역 출판인의 포부가 그대로 담겨 있는 일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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