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한 386, 청년으로 돌아가라!

[서가 속 청춘] 게오르그 루카치의 <청년 헤겔>

그 책을 왜 샀나요? 사놓고 내버려 둔 이유는요? '프레시안 books'는 '사놓고 읽지 않은(못한) 책'이란 주제로 열두 명의 필자에게 글을 청했습니다. 책등만 닳도록 봐 온 책에 대한 필자들의 추억과 항변은 각각의 '자서전'이나 '독서론'이 되었습니다. 읽은 책에 대한 서평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하여 말하는 법'이 더 흥미로운 까닭입니다.

장면 하나

며칠 전 일이다. 경제 민주화와 재벌개혁, 사회적 대타협에 관한 공개 토론회가 있었고, 나는 그곳에 토론자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 토론회의 주최자는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과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이었고, 발표자들 역시 대체로 그 분들과 행동과 의견을 함께해온 분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지난 15년간 한국 사회의 여론과 담론 형성에서, 특히 개혁과 진보를 주장하는 층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해온 분들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사람들이었다.

모든 발표자와 토론자들(나를 포함한)이 한국 경제와 사회의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 민주화와 재벌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더구나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재벌들이 시장담합이나 골목상권 진출 등을 통해 손쉽게 돈을 버는 이권 추구(rent-seeking) 행동에 대해서는 이구동성으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렇지만 의견 차이가 여전히 심각했다. 노동조합과 공공부문(공무원을 포함한) 역시 재벌과 마찬가지로 '이권 추구 집단'으로 보아야 하며, 같은 논리적 맥락에서 한진중공업의 정리 해고자들을 돕기 위해 작년 벌어진 '희망버스 운동'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그 토론회에서 거리낌 없이 제기되었다.

여기까지는 종종 들어온 이야기이니 속으로 그러려니 했다. 자칭·타칭 '좌파 신자유주의자'인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이 그런 유의 발언을 이미 자주 했고, 김기원 방송통신대 교수도 비슷했다. 더구나 백낙청 선생처럼 존경받는 원로와 그 주변의 유명 인사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새삼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 토론회에서 내가 새삼스럽게 주목한 사실은 조지 스티글러(George Joseph Stigler)나 고든 털록(Gordon Tullock)과 같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의 사고방식과 경제사상이 거의 무비판적으로 개혁·진보 쪽 논객들 사이에서 수용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스티글러는 194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시카고 대학에서 밀턴 프리드먼과 함께 이른바 시카고학파를 만들어 신자유주의의 정신적, 사상적 기초를 놓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털록 역시 이른바 '공공선택 이론'을 통해 미국 내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의 만연에 기여한 인물이며, 레이건-부시 정부가 추진한 '큰 시장, 작은 정부'의 논리, 즉 대규모 감세 조치와 복지 국가 파괴, 연방정부 축소, 노동조합 파괴 등을 위한 논리적 기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그것도 개혁과 진보의 편에 서있다고 공언하는 유명 인사들 사이에서조차, 재벌과 노동조합, 공무원(공공부문) 등이 누리는 이권 경제 즉 그들의 특권과 특혜를 없애기 위해서는 스티글러와 털록의 사고방식이 매우 '유용하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오는 기막힌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재벌 등 이권 경제를 때려잡는다는 순결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사상이건 뭐건 '도구 또는 수단'으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런 식의 재벌개혁, 노동개혁, 공공부문 개혁 과정에서 신자유주의 사조가 범람하고 결국은 지배적 지위를 차지해도 무방하다? 실제 이런 생각이 기가 찰 정도로 실현된 것이 김대중·노무현 정부 하에서 진행된 이른바 '시장 개혁'이었으며, '시장 주도형' 경제의 확립이었다. 수단이 목적이 되고, 목적이 수단이 되는 전도(顚倒) 현상, 즉 철학자 헤겔이 '역사의 변증법'이라고 말한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장면 둘

▲ <청년 헤겔>(게오르그 루카치 지음, 서유석·이춘길 옮김, 동녘 펴냄). ⓒ동녘
지금 나는 게오르그 루카치가 쓴 <청년 헤겔>(서유석·이춘길 옮김, 동녘 펴냄)이라는 책을 책장에서 뽑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다. 철학 책을 손에 집은 것은 실로 이십여 년만의 일이다. 1980년대 말 이후 처음이기 때문이다. 마음 한 구석에 뭔지 모를 아련한 그리움과 서글픔이 밀려온다.

아직 나는 <청년 헤겔>을 읽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해 <청년 헤겔>이라는 책이 내 책장에 있다는 것도 까맣게 있고 있었고, 더구나 그 책의 저자가 루카치라는 것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의 책장에는 독일어판 헤겔 전집과 칸트 전집 수십 권이 꽂혀있고, 그 옆에는 한글로 번역된 헤겔의 책들과 헤겔 관련 철학 책들이 수십 권 꽂혀있다. 그 한글 책들 중에 읽은 것이 3분의 2 가량 되는 것 같은데, 루카치의 <청년 헤겔>은 읽은 기억이 없다. 독일어판 헤겔과 칸트 전집은 독일 유학 중 헌책방에서 구입한 후 지금껏 손 댄 적이 없다. 1990년대 초반 유학을 떠난 이후 지금까지 20여 년간 오로지 정치경제학 책들만 읽어댔기 때문이다. 나에게 철학 책을 읽는다는 것은, 더구나 헤겔과 루카치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청년 시절로 되돌아간다는 것, 그리우면서도 서글펐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헤겔 책을 가장 많이 읽은 것은 1년 3개월간 투옥됐던 1983년이었다. 교도소 당국의 엄격한 서적 검열로 인해 마땅한 읽을거리가 없던 상황에서, 나는 때마침 번역 출간된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을 읽었다. 함께 투옥된 동료들과 교도소 복도 끝의 연탄 창고에 모여 함께 책을 읽으며 철학과 정치경제학 강독회를 갖기도 했다.

당시 전국의 교도소에서는 데모하다 투옥된 나 같은 대학생들이 넘쳐났고, 교도소 당국은 이들을 통제하지 못하여 골치를 썩었다. 교소도 당국과 타협하여 우리는 단식투쟁 같은 '말썽'을 일으키는 대신 복도 끝 연탄 창고에 모여 우리끼리 공부하는 것을 허용해주는 '특권'을 '비공식적으로' 따냈다. 그리하여 나에게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에 대한 기억은 교도소 연탄 창고의 냄새와 함께 연상되는 20대 초반 청춘의 일부다.

내 공식 서류나 이력서에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고 나와 있다. 그렇지만 실제 물리학을 공부한 건 신입생 시절 일 년에 불과했고 그것도 찔끔 흉내만 냈을 뿐이다. 고3 시절에 물리학과 수학의 심오함에 심취한 나머지 대학에 들어가면 반드시 과학철학을 병행하여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대학 입학과 동시에 내 발로 찾아 들어간 곳이 철학 서클이었다. '고전 연구회'라는 멋진 이름의 동아리였는데, 니체와 플라톤, 노자와 장자 등의 철학 고전들을 읽고 토론하는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통기타 치며 노래하는 낭만에도 흠뻑 취했다.

그렇지만 나에게 니체와 플라톤, 통기타 낭만의 시대는 1년도 채 못 되어 끝났다. 대학에 입학한 지 8달 만에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죽었고, 곧 이어 12.12 쿠데타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권을 장악했다. 서울 한남동의 육군참모총장 공관이 먼발치에서 보이는 곳에 살던 나는, 그 공관을 점령하러 나선 공수부대 군인들의 기관총 소리를 멀리서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남녘땅 광주에서 수천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총칼에 죽어갔다는 이야기에 눈물을 흘렸다.

본래 불교 철학과 노장 사상을 읽고 토론하는 소박한 모임으로 출발한 우리 철학 동아리의 동료와 선후배들은 격변 속에 마음이 뒤흔들렸고, 더 이상 한가하게 니체나 노자를 읽고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읽는 책은 어느새 68혁명을 정신적으로 이끌었던 장 폴 사르트르와 허버트 마르쿠제, 에리히 프롬 등으로 옮겨갔고, 그와 함께 루카치의 책들도 목록에 올라왔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마오쩌둥, 체 게바라 같은 좌파 사상가들에 대한 정신적 터부도 서서히 깨져 나갔다.

그런데 1987년 반독재 민주 항쟁의 승리 이후에야 비로소 마르크스의 저작들이 대거 번역되었고, 따라서 1980년대 초중반만 하더라도 마르크스의 저작들 중 한글로 번역된 것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꿩 대신 닭이라고, 대신(?) 읽힌 책들 중의 하나가 루카치의 책들이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루카치의 <청년 헤겔> 역시 1986년에 출간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90년대 이후 절판되었는지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정보가 없다.

장면 셋

앞에서 말한 공개 토론회가 끝나고 발표자와 토론자, 방청객 등이 함께 식사하면서 담소를 나누다 보니, 그 중에 문재인 또는 안철수 캠프를 돕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특히나 앞서 스티글러와 털록을 인용하며 재벌과 노조, 공공부문에 집중된 이권 경제를 해체해야 한다고 말한 분은 이미 그 캠프의 하나에서 자원 봉사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분과 대화를 하던 중, 나의 기억은 물론이요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한동안 잊혀졌던 이름이 튀어 나왔다. 바로 노무현 정부에서 국정홍보처장을 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좌파 신자유주의면 어때?"라고 했던 고 노무현 대통령의 대통령직 수행 당시의 언행을 시종일관 정당화하고 합리화했던 인물이다. 5년이 지난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새 대통령과 함께 차기 정부에서 중요한 권력을 행사할 것을 생각하니, 이 나라의 앞날이 어두워 보인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80년대 초반 그 인물은 이른바 '운동권'에서 명성이 꽤 높았다. 그는 철학과 출신이었고,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공부했으며,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대해 박사논문을 썼다. 누군가는 그가 레닌 같은 대단한 인물이 될 거라고도 했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 또는 국군보안사가 대학 캠퍼스를 철통같이 감시하던 그 엄혹한 죽음의 시절에 누군가가 마르크스를 공부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였고, 따라서 그 사람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존경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나의 이런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르크스 또는 마르크스주의가 옳은가 틀린가의 차원, 즉 '진리' 여부의 차원을 떠나, 죽음을 각오한 한 인간의 사상적 용기와 결단, 즉 인간의 존엄성과 양심의 자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20대의 젊은 시절 혁명과 마르크스를 외치며 존경받던 인물들이 이제 와서는 양심의 가책도 없이 뉴라이트 운동에 동참하거나 아니면 "좌파 신자유주의면 어때?"라며 '대세'를 추종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리고 '인간은 존엄하다'는 명제를 과연 그들의 영혼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든다.

물론 그들도 반박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재벌이, 그리고 노동조합과 공공부문(공무원) 등이 특권과 특혜를 누리는 이권 집단이라는 것은 '진리'이고 '진실'이 아니냐고? 따라서 그들의 특권과 특혜를 철폐하여 '공정한 시장질서'(즉 경제 민주화)를 구축하는 일이 (루카치와 마르크스가 말한 바) '자본주의적 시장질서' 그 자체를 뒤엎어 버리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며 그것이 훨씬 더 '진리'에 가깝지 않느냐고?

무엇이 '진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 사회 전체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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