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는 없다! '하루키 월드'의 노예가 되든가 혹은…

[프레시안 books] <상실의 시대>에서 <1Q84>까지, 당신의 선택은?

1978년 4월, 도쿄의 진구(神宮) 야구장. 29세의 청년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외야에 앉아 야쿠르트와 히로시마의 경기를 관전하며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찰나였다. '소설을 쓰고 싶다'. 그 강렬한 욕구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마치 하늘에서 깃털이 내려와 앉는 것처럼 그의 머릿속에 들어섰다고 한다.

학생 시절 '1968년'을 경험하고 이른 결혼을 한 후엔, 생활비를 벌기 위해 20대의 대부분을 육체노동으로 보내야 했던 그였다. 그때까지 소설가가 될 생각은커녕, 자신에게 소설을 쓸 능력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던 그는, 이듬해 첫 번째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발표하고 '소설가'가 된다. 1979년,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작이었다.

그의 등장은 일본 문학계에 강렬한 신선함과 불편한 이질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하루키에게 군조(群像)신인문학상을 안겨준 일본의 문단은,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가지게 될 질문을 품게 된다. '하루키의 소설은 문학인가'. 한눈에도 미국 문학의 세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는 번역체에 가까운 문체, 일본 문학의 전통을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의 전개, 지극히 사적인 감수성과 세계관은 분명 기존의 '쇼와(昭和) 문학' 혹은 '전후(戰後) 문학'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흔히들 제 소설이 미국의 영향을 지나치게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 미국 소설의 영향을 받으면 왜 안 되는 거지, 싶고요." (무라마키 하루키, 무라카미 류와의 대담집 , 1981년)

그렇게 하루키는, 1976년에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로 등장한 무라카미 류(村上龍), 1980년에 데뷔한 <어쩐지 크리스털>(1980년대 한국에서 여러 종류의 해적판이 출판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의 다나카 야스오(田中康夫) 등과 함께, 일본 근대 문학의 종말을 앞당긴 '새로운 문학 세대'로 분류되며 문단의 주목과 외면을 한 몸에 받게 된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서 하루키는 <1973년의 핀볼>(1980년), <양을 쫓는 모험>(1982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년) 등을 잇따라 발표한다. 문단의 평가는 여전히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 기존의 문학이 유지해온 경계를 거부하는 그의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추럴한' 문장은, 일종의 '서브컬처'적인 세계를 구축하며 충성도 높은 독자층을 꾸준히 확보해갔다.

▲ 무라카미 하루키. ⓒ연합뉴스
그러던 '문제적 작가' 하루키의 소설가로서의 인생은 1980년대 말을 기점으로 크게 변화하게 된다. 1987년, <상실의 시대> 즉 <노르웨이의 숲>이 출간된 것이다. 어떤 의미로든 그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기억될 이 작품은 상, 하권 합쳐 430여만 부가 팔려나갔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 '100% 연애 소설'(당시의 선전 문구였다)의 독특한 이야기 전개와 문체, 그리고 그것들이 뿜어내는 '쿨함'에 열광했다. 너나 할 것 없이 하루키의 책을 끼고 다녔다. 그들에게 그것은 일종의 패션이기도 했다. 하루키라는 이름은 그렇게 문학의 울타리를 넘어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저널리즘'의 세계에 등장했다.

그러나 '하루키 현상'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그 후편(어쩌면 본편)이 예상치 못한 형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한국, 중국, 타이완 등 아시아의 젊은이들이 그의 소설에 열광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하루키 세대'라는 말이 생겨났고 타이완에서는 '비상(非常)무라카미'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무라카미광'이 출현했다.

일본 문학의 틀을 넘어 아시아로 확장된 1990년대의 '하루키 현상'을 보면서, 많은 일본인들은 '그들은 왜 하루키에 열광하는가'를 묻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에서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로 제목을 바꿔 폭발적인 성공을 거둔 것은 아시아에서의 하루키 현상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많은 분석들이 '하루키 현상'의 역사적 맥락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 냉전 체제의 붕괴, 자본주의 시스템의 글로벌화 등에 주목했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는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바뀌거나 사라지거나 무너지던 때였다. 그 안에서 허무와 불안, 상실감을 느낀 젊은 세대가 하루키의 소설이 세련되게 그려내는 이국적인(정확히는 미국적인) 라이프스타일을 동경하고, 국가나 가족이 아닌 오직 '나'로 시작해 '나'로 돌아오는, '타자'도 '외부'도 없는 하루키적 세계에 매료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1990년대를 거쳐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하루키 현상'은 40여 개 언어로 번역되며 일종의 '글로벌'한 성격을 획득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양적인 문제는 아닌 듯하다. 소련이 붕괴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시기에 유럽에서 그의 글이 가장 많이 팔려나간 곳은 러시아와 독일이었다. 하루키에 대해 미국의 젊은 세대가 열광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 역시 '9·11' 이후였다. 즉 'HARUKI MURAKAMI'의 소비는 전 세계적으로 전이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상실감'을 동력으로 하고 있는 문화 현상인 것이다.

"1993년부터 95년 사이만 해도 하루키 씨의 강연이 열린 건 미국 각 대학에 있는 일문학과가 초청한 15~40여 명 정도의 조촐한 모임이었어요. (…) 그랬던 것이 작년(2005년) MIT에서의 강연에서는, 500명 규모 강당이었는데 1300여 명이 되돌아갔어요. 그래서 하버드대에서는 일부러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을 마련했는데, 역시 500여 명이 입장하지 못했죠. 믿기지 않는 변화였어요." (제이 루빈(Jay Rubin), <세계는 하루키를 어떻게 읽는가>, 2006년)

그렇게 20여 년간 세계 곳곳에서 '이즘(ism)'으로, '패션'으로, '라이프스타일'로 소비되어온 하루키의 위상은 다시 일본으로 역수입되었다. 1989년 이후 20년 만에 판매 수입이 2조 엔 아래로 내려앉은 2009년 출판계의 불황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변함없는 '문화 현상'이었다.

옴진리교 지하철 독가스 테러 사건을 테마로 한 <1Q84> 1, 2권은 한 해 동안 224만 부가 팔려 나갔다. 올해 발간된 3권 역시 기록적인 판매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20대부터 50대 이상까지 고르게 분포된 독자층은 그에게 '국민 작가'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30년 전, 이전에 없던 이질감을 안겨주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탈일본화'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제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HARUKI MURAKAMI'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지금 일본인 작가로서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동아시아와 유럽=미국, 양 문화권을 이어줄 수 있는 연결 지점 같은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 한 사람의 일본인 작가로서 주어진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들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몽키 비즈니스>, 2009년)

오랫동안, 한국과 마찬가지로, '좋아하는 작가는 하루키'라는 말은 일본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금기어'에 가까웠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하루키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을 수는 있어도 그 세계관에 공감할 수 없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그것은 어쩌면 '하루키의 소설은 문학인가'라는 질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30년 전 던져진 그 질문은, 단순히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기성 문학계가 새내기 젊은 작가에게 던진 꼴사나운 질문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문학의 본질에 관한 질문이자 문학이 가지는 사회와의 관계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하루키의 소설이 그 문학의 경계 밖으로 내밀리지도, 안으로 끌어당겨지지도 않은 채 '방치'되어 온 것 역시 사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HARUKI MURAKAMI'가 되고, '문제적 작가'에서 '국민적 작가'로 '격상'되는 사이에 일어난 변화 중 하나는, 하루키의 소설과 '대면'하는 비평가들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비아냥거림이 아닌 신랄한 비판이, 어정쩡한 외면이 아닌 성실한 비판이 하루키를 읽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움직임은 2000년대 이후에 특히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일본 문학자 고모리 요이치(小森陽一)가 소설 <해변의 카프카>를 "상처받은 자들에 대한 치유와 재생이 아닌 독자들의 사고를 정지시켜 버리는 역사 은폐"라고 정면으로 비판한 것은 짧은 감상평이 아닌 성실한 한 권의 '무라카미 하루키론'을 통해서였다. 대표적인 하루키 비평가인 가토 노리히로(加藤典洋)나 카와무라 미나토(川村湊)와 같이 하루키의 작품 세계를 꼼꼼히 분석하고 비판하는 비평가 역시 늘고 있다.

"이러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적 태도를 '일본적(문학적) 스노비즘(snobbism : 속물근성)'이라고 부르는 건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본질적인 갈등이나 대립, 대결은 배제된 채, '공허한 형식적 게임'으로서의 이야기 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1990년대 세계의 글로벌라이제이션 경제와 함께 무라카미 하루키가 세계적인 붐을 불러일으킨 건, 이러한 '공허한 형식적 게임'으로서의 글로벌 시장 경제가 세계를 석권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카와무라 미나토(川村湊), <무라카미 하루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2006년)

▲ <1Q84>(전3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1Q84>가 출간된 2009년, 한 인터뷰에서 하루키는, "작가의 역할이란, 원리주의나 신화성 같은 것들에 대항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며 "지금과 같은 시대이기 때문에 더더욱 이야기가 힘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1995년에 일어난 옴진리교 사건에 충격을 받은 그는, 1년 9개월간 사건의 피해자와 관계자 62명의 인터뷰를 토대로 완성한 논픽션 <언더그라운드>(1997년)와 교단의 신자 8명의 이야기를 담은 논픽션 <약속된 장소에서>(1998년)를 엮어 냈었다. 그 경험들을 녹여낸 <1Q84>는, 현실에 존재하는 (역시 그의 표현을 빌리면) '압도적인 폭력'에 대한 하루키식 대항인 셈이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일본 근대 문학은 죽었다"고 지목한 1980년대는 '하루키의 시대'가 시작된 그 80년대였다. 30년. '무라카미 하루키'가 'HARUKI MURAKAMI'가 되는 사이 그도 변했고 세상은 더 많이 변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람들은 '하루키의 소설은 문학인가'를 두고 고민하고,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답하고 있다.

일본의 문학은 하루키에 의해 죽었고, 하루키에 의해 여전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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