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체제와 포용정책 2.0

[한반도평화아카데미] <8강·끝> 백낙청 한반도평화포럼 공동이사장

한반도평화포럼, 인제대학교, 프레시안이 공동 주최한 제2기 한반도평화아카데미의 마지막 강의가 지난 1일 서울 중구 저동 인제대학원대학교에서 진행됐다.

이날은 한반도평화포럼 공동이사장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2013년 체제와 포용정책2.0'이란 주제로 강의했다. 백낙청 이사장은 이날 자신이 개념화한 '포용정책2.0'과 '2013년 체제'를 상세히 설명했다.

백 이사장은 특히 이명박 정부에 의해 중단된 포용정책을 2013년 이후 회복시킨 뒤 새로운 단계의 포용정책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매듭 중 하나가 천안함 진실 규명이라고 말했다.

천안함 문제에도 불구하고 포용정책의 기조를 복원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천안함 진실찾기를 병행함으로써 과거 포용정책으로의 단순 회귀가 아닌 '1953년 체제'를 넘는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천안함의 진실은 곧 이명박 정부 혹은 북측 김정일 정권의 진면목을 알 수 있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2013년 체제와 한반도 평화전략'이라는 큰 주제로 열린 2기 아카데미는 이로써 끝을 맺었다. 한반도평화포럼은 대북 화해·협력정책을 지지하는 연구자, 종교·시민사회 관계자, 전직 공직자들이 모여 만든 단체다. 제1기 한반도평화아카데미는 지난해 10~11월 5회에 걸쳐 진행됐다. 다음은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 백낙청 한반도평화포럼 공동이사장 ⓒ프레시안 자료사진
2013년 체제와 포용정책2.0

주최측에서 강의 제목을 '2013년 체제와 한반도 평화전략'으로 정해줬는데 '2013년 체제와 포용정책2.0'으로 바꿨다. 포용정책2.0은 한반도 평화전략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계간 <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에 '포용정책2.0을 향하여'란 글을 발표했는데, 다음 단계의 포용정책은 단순한 대북·통일 정책이 아니라 한국사회 자체의 총체적 개혁을 수반하는, 그와 조율이 된 남북관계에 관한 정책이 되어야 하고, 남쪽과 북쪽이 함께 변함으로써 한반도의 분단체제가 변혁되는 걸 지향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사회 총체적 개혁을 수반하는 범한반도적 분단체제 변혁 전략이란 걸 좀 더 뚜렷이 하는 개념이 포용정책2.0이다.

작년 포용정책2.0에 관한 글을 쓸 때는 '2013년 체제'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포용정책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한국사회 전체가 바뀌어야한다는 생각은 포용정책2.0 개념 속에 이미 담겨 있었다. 작년 초만 해도 천안함 사건이 나기 전이고 남북 정상회담 얘기도 있어서 상당히 낙관적인 분위기였지만, 설혹 정상회담이 되더라도 포용정책2.0 단계까지는 못 갈 거라고 나름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지금 지나고 보면 2.0으로 가기는커녕 1.0도 완전히 누더기가 됐다. 그래서 지금은 포용정책2.0이란 것이 우리가 2013년 이후 정말 새로운 시대를 열 때만 가능하다는 점이 더 확고해졌다.

요즘 자본주의4.0 얘기가 나오니까 '자본주의는 버전이 4.0까지 나갔는데 포용정책2.0은 초라하지 않느냐? 포용정책도 3.0, 4.0 붙여야 하지 않느냐?'는 말을 들었다. 덮어놓고 버전의 숫자만 높다고 좋은 게 아니다. 또 원래 미국이 'engagement policy'를 할 때는 소련, 중국 같은 대(對)공산권 정책에서 봉쇄가 아니라 포용하고 관여하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통일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개념이었다. 한반도에서 포용정책은 어디까지나 통일을 지향하는 개념이다. 통일로 안 가고 포용정책 숫자만 높아지면 그건 포용정책이 제대로 안 돌아간다는 증거밖에 안 된다. 따라서 포용정책은 2.0으로 족하고, 그 다음부터는 어떤 식으로건 통일 단계로 들어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2013년 체제론에 관해

2013년 2월이면 현 정부의 임기가 끝난다.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일단 '포스트 MB' 시대다. 그때 가서 덜 형편없는 대통령을 모신다든가, 아니면 정권을 아예 교체하는 선에서 만족하지 말고 더 큰 꿈을 꾸어야 한다. 1987년 국민들은 6월 민주항쟁을 일으켜 전두환 정권뿐 아니라 사실은 60년대 초부터 이어져온 군사독재를 끝냈다. 그 직후 당선된 대통령이 군부 출신이긴 했지만 전혀 다른 헌법 아래서 직선제로 당선됐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적어도 그 정도의 변화를 2013년에 만들어 내자, 방법은 다르겠지만, 그런 뜻이다.

흔히 6월항쟁 이후 시대를 통칭해 87년 체제라는 말을 많이 쓴다. 87년 체제는 지금 와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긴 하지만 그 앞의 시대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다. 민주화가 어느 정도 됐고, 경제적으로도 7~8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이 어느 정도 우리 사회의 주체로 인정받았다. 국가와의 관계에서 완전히 눌려 있었던 기업인들도 자유를 누리게 됐다. 남북관계에서는 90년대 초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만들었고, 김대중 대통령이 6.15 공동선언, 노무현 대통령이 10.4 선언을 했다. 동북아 전체를 봐도, 중요한 6개국이 2005년 9.19 공동성명을 만들었다. 이 지역에서 그런 다자간의 성명이나마 나온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그게 다 87년 체제 아래서 이뤄졌다.

그런데 87년 체제가 제때에 한 단계 도약을 못하다 보니 여러 가지 혼란상이 나오게 됐고, 이미 노무현 정부 중반 이후에는 혼란기에 돌입했다. 그런 혼란을 정리하고 선진화 시대를 열겠다고 나온 게 이명박 정부인데 2008년 이래 우리 사회는 선진화로 도약은커녕 온갖 퇴행과 대혼란을 경험했다. 그리고 포용정책은 1.0 버전마저도 거의 파탄에 직면하게 됐다. 그런데 지금의 이 혼란상이 모두 이명박 정부의 잘못 때문은 아니다. 87년 체제가 말기 국면에 도달했고 그걸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시기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와서 더 어지럽게 만든 것이지, 모든 원인이 이명박 정부에만 있는 건 아니다. 87년 체제는 여러 가지 긍정적 가능성과 한계를 갖고 출범했는데 세월이 갈수록 긍정적인 동력은 떨어지고 부정적인 면이 더 많이 드러나게 됐다.

그걸 어떻게 극복하느냐고 할 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됐지만 그건 분단 한반도의 남쪽에 국한됐었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 그 때문에 발생한 우리 민주주의와 사회 발전에 가해지는 여러 제약을 시원하게 털어내지 못했다. 다시 말해 87년 체제를 통해 군사독재를 허물면서도 그 토대를 이루는 53년 체제 즉, 한국전쟁의 참화를 겪고 나서 통일도 안 되고 평화도 이룩하지 못한 채 휴전 상태로 60년이 지났는데, 그 분단체제를 6월항쟁이 흔들기는 했지만 다른 체제로 대체하지는 못했다. 53년 체제의 토대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는 87년 체제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2013년 체제와 평화전략을 함께 얘기하는 이유는, 2013년 체제를 얘기할 때는 평화문제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 중에서 유독 남북관계나 평화 문제만 특별하다는 주장이 아니다. 87년 체제가 53년 체제라는 토대 위에 세워지다 보니 결국은 긍정적인 동력, 민주화의 동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교착, 혼란, 퇴행 상태에 빠졌다. 그걸 넘어서려면 결국 53년 체제 즉, 분단체제를 좀 더 획기적으로 바꿔 나가야한다는 이유 때문에 평화문제가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당신은 통일운동 하는 사람이니까 통일·평화문제만 유독 제일 중요하다고 하고 다른 문제는 무시한다고 말하는 건 87년 체제의 기본 성격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이 모자란 것이다. 표면에 나타난 문제만 보지 그 근저에 53년 체제가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탓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냥 한국사회가 분단됐다는 걸 잊어버리고 자기 얘기만 하는 사람들이 많다. 진보적인 학자 중에도 그런 분들 꽤 있다. 그런 사람들한테 분단체제를 말해봤자 먹히지 않는다. 그래서 심통이 나서 내가 말을 하나 만들었다. 우리 학계에 후천성 분단인식 결핍 증후군이 있다. 심한 경우에 그렇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사회 분석을 하면서 더 깊이 있게 가지 못하고 87년 체제의 본질적인 문제가 어디 있는지를 간과하고 있다.


포용정책1.0의 훼손 이후

포용정책2.0을 말하는 이유는 포용정책을 업그레이드해야 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불행히도 포용정책1.0마저 그대로 적용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버렸기 때문이다. 이 정부가 실천을 안 하다 보니까 포용정책1.0의 전제였던 현실이 많이 바뀌었다. 따라서 포용정책1.0을 단순히 복원해서는 현실에 대응할 수 없게 되어 있다.

포용정책1.0을 훼손하다 보니 남북관계 긴장도 높아지고 연평도 포격 사건도 일어나고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졌다. 따라서 우선 1.0에서 강조하던 북쪽과의 대화, 교류, 협력을 한다는 기조를 복원하는 게 시급하다. 이 점에 대해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있고, 2.0을 말하는 나도 동의한다.

그런데 지난 4년간 진행된 대대적인 훼손 과정으로 인해 본래 상태로 복원 불가능한 것들이 있다. 북핵 문제가 대표적이다. 북핵 해결을 위한 기본 문서는 2005년 9.19 공동성명인데, 당시는 북이 핵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핵무장을 어떻게 방지하느냐에 대한 합의였다. 그런데 지금은 북이 핵실험을 2회나 했고, 우라늄 농축까지 하고 있다. 9.19 공동성명에는 플루토늄만 거론됐지 우라늄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북은 우라늄 농축은 평화적 에너지 사용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필요하면 언제든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어쨌든 2005년에 비해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해져 있다.

북미 간에도 불신이 더 깊어져 있다. 남쪽이 포용정책1.0을 깨버리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도 있지만 역으로 북이 그 쪽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미국이나 한국인들 사이에 북에 대한 불신이 더 커졌고, 정치가들이 문제를 풀기 더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특히 미국 정부의 경우 한반도 문제에 큰 관심이 없고 핵문제에나 관심이 있는데 전체적으로 우선순위가 높지 않다. 북이라고 하면 싫어하고, 멸시하고, 협상을 뒤집는 존재라고 여긴다. 미국 사람들은 체질적으로 자기들이 잘못한 건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합의를 북이 뒤집었고 그쪽만이 나쁘다고 한다. 이걸 풀려면 엄청난 정치적 결단과 정치력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미국 정부는 그렇게 나가기 힘든 것 같다.

핵문제에만 매달리면 안 풀리게 되어 있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어렵다. 비핵화 협상은 그것대로 진행하고, 평화협정 체결도 그것대로 진행하고, 한반도 평화만이 아니라 동북아 평화 구축 프로그램에도 시동을 걸고, 경제적 지원도 하고, 북미·북일 관계를 개선하는 교섭도 시작하는 등 여러 방면에 걸친 의제들을 정교하게 조율하면서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그런데 그걸 위한 동력과 지혜가 어디서 나올지 현재로서는 안 보인다. 미국과 한국이 이제는 첨예한 대결을 추구하는 정책을 조금 수정하는 것 같지만 북한이 먼저 비핵화를 해야 한다고 하면 한계가 분명하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한 가지 확실히 가르쳐준 게 있다. 미국이 아무리 초강대국이고 중국이 아무리 새로 떠오르는 강국이라 해도 한반도 문제에서는 한국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이 열쇠 즉, 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이명박 정부가 역설적이지만 보여줬다. 물론 북한·미국·중국 모두 그 나름의 결정권을 갖고 있지만, 북은 체제 유지라는 절체절명의 기준으로 매사를 판단하는 한에서 수동적인 처지라 할 수 있고, 중국 또한 '한반도의 안정'이라는 소극적 목표에 치중하는 입장이다. 미국은 여전히 초강대국이지만 국가적 의제 중에서 한반도의 우선순위가 높지 않고 축적된 전문 지식도 많은 편이 아니다.

따라서 한반도 문제에서는 한국 정부의 주도력이 크게 마련인데, 정부가 이를 건설적으로 행사하지 않을 때 정부의 정책 또는 정부 자체를 교체할 수 있는 것은 한국 국민뿐이다. 그 점에서 남한의 민간 사회라는 '제3당사자'가 열쇠를 쥔 셈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부터 우리 남쪽의 민간사회가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제3의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창해 왔다. 남북 양쪽 당국이 있고, 양쪽 당국과 모두 거리를 두는 제3당사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한반도식 통일의 특성 : 단계적 진행과 시민참여형

제3당사자란 게 말은 좋은데 민간이 통일문제에 얼마나 개입할 수 있느냐고 회의적으로 보는 분들이 많다. 물론 통일문제에 대한 결정은 정부가 한다. 그렇긴 한데 다른 나라의 통일 과정에 비해 한반도 통일에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고 본다. 한반도식 통일의 특성은 첫째 단계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고, 둘째 시민참여형이라는 것이다.

한반도가 아직도 분단국으로 남아 있는 점도 특이하지만, 통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중간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이룩하기로 쌍방의 정상이 합의했다는 사실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베트남은 전쟁으로 통일됐고, 독일은 통일에 대한 합의 없이 상당히 급속하게 동독이 서독에 편입됐다. 예멘의 경우는 일종의 담합통일을 했는데, 남예멘·북예멘 지도부가 갈라먹기 통일을 했다가 합의가 삐끗해서 전쟁이 났고, 그 후 북예멘이 남예멘을 통일했다.

그러나 우리는 10여년 전인 2000년 6.15 선언에서 남북 정상이 통일을 당장 하지 않고 천천히 하는데, 남측의 연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 사이에 공통점이 있으니 그 방향으로 하자고 했다. 외교적인 지혜를 발휘한 절충안인데, 거기서 명백한 건 당장 완전 통일을 하는 게 아니라 일단은 그런 1차 단계를 향해 노력하자고 합의한 것이다. 그게 한반도식 통일의 특별한 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합의한 순간부터 시작하는 통일의 과정, 평화 프로세스는 정부 당국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일이 빨리 진행된다거나 원샷으로 통일하면 민간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러나 천천히 하고, 낮은 단계의 국가연합을 먼저 하자고 하면 민간이 끼어들 여지가 생긴다. 그런 여지가 생기면 한국 사람들은, 적어도 남한 시민들은 그걸 활용하려고 하지, 당국이 알아서 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북쪽 사람들은 지금 워낙 살기 힘들고 정치적으로 봉쇄되어 있지만 그런 사정이 달라지면 남쪽 사람들 못지않게 그 과정에 참여하고 창의성을 발휘하리라 믿는다.

그게 바로 시민참여형 통일이다. 포용정책2.0 단계에 가면 그걸 우리가 더 의식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2013년 체제가 성립하면 그런 시민의 역량이 획기적으로 진전되리라고 본다. 2013년 체제가 되면 분단문제가 민주주의의 발목 잡는 걸 넘어서는 동시에, 역으로 반민주 수구세력이 남북관계 발전의 발목 잡는 일이 없는 시대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남한 내 각종 정치 개혁과 제도 쇄신이 당연히 요구되지만 남북 사이에도 새로운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우리가 흔히 남북관계를 잘 풀어나가려면 정경분리를 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너무 정치에 매달리지 말고, 갈등이 있어도 경제협력은 따로 꾸준히 추진하자, 경제 교류가 많아지다 보면 정치문제도 자연히 풀린다는 얘기다. 그때그때 어려움을 뛰어 넘는 하나의 방편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타결이 없으면 경제 교류에도 한계가 있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이래 경제 교류를 계속 해왔지만, 2000년 6.15 선언을 통해 정상급에서 정치적 타결이 이뤄지면서 획기적으로 증대했다. 그래서 정경분리는 임시방편이고 결국은 정치적 타결을 해야 한다.

정치적 타결을 기껏 해놓은 것들이 지금 와서 거의 다 뒤집어졌다. 하나도 안 뒤집어 질 수는 없겠지만, 쉽게 다시 뒤집어지지 않게 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게 바로 6.15 선언에서 이미 합의한 통일방안에 따른 연합 기구이다.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공통점이 있으니 그 방향으로 통일을 추구하자고 했다. 현실적으로 연방제는 불가능하고, 모르긴 몰라도 북측에서도 연방제에 실제로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결국 현실적인 방안은 연방(federation)보다, 북측에서도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한 연합(confederation), 그것도 '낮은 단계의 연합'(영어로는 Korean Confederation이라기보다 Association of Korean States가 적당하다고 생각되는)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사실 현 상황에서는 그 역시도 본격적으로 하기 어렵고, 우리도 지금 그걸 하지고 할 수 없다. 남북의 사이가 나빠서이기도 하고, 북미가 적대적인 관계인데 남쪽은 한미동맹을 하고 있고 북쪽은 미국에 대해 철천지원수라고 하는 상황이라면 아무리 동족간이지만 그런 상태에서 국가연합을 할 수가 없다. 일단 포용정책1.0의 기조가 회복되고 진전되는 가운데에서나 국가연합 얘기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상황은 기필코 와야 하고 머지않아 오리라고 예상되니까 미리미리 생각을 해 놓아야 한다.

포용정책 기조가 복원되고 평화체제 건설 및 경제협력 확대가 진전되다 보면, 이 과정이 다시 역전되지 않도록 하고 변화의 과정에서도 북측의 체제 안전성을 일단 보장해주는 남북간 정치적 타결과, 그에 따른 제도적 장치가 필요해지게 마련이다. 국가연합 중에서는 스위스 같은 나라가 흔히 연방제라고 하지만 사실 국가연합이다. 대통령도 각 주별로 돌아가면서 하고, 칸톤이라고 하는 주(州)의 자치권이 굉장히 강하다. 그래도 유럽연합(EU)보다 훨씬 높은 단계의 국가연합이다. 중앙정부가 화폐(스위스 프랑)를 강력히 통제하고 있어서 스위스 프랑은 세계적으로 신용이 높다. 그보다 낮은 단계가 EU인데, 우리는 그보다 더 낮은 단계일 수밖에 없다. EU는 꽤 많은 지역에서 화폐를 통합했고, 주민들이 소속 국가를 마음대로 드나드는 이동의 자유가 있다. 그런데 남북이 국가연합을 할 때 그 두 가지가 모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동의 자유를 주면 대혼란이 벌어질 것이고, 화폐를 통합하면 지금 유럽에서 보이는 혼란보다 더 큰 혼란을 겪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EU보다 낮은 단계의 국가연합이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다.

그 경우 과연 역전 불가능한 통일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겠는가. 교과서적으로 말하면 통일과 거리가 먼 연합이지만 한반도에 건설되는 국가연합은 스위스나 EU와 전혀 다른 역사적 맥락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EU는 이미 국민국가로 확실히 자리 잡은 나라들이 모여서 통일을 할지 말지, 언제 통일할지 모르지만 조금 가깝게 지내자고 해서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경우다. 반면 남북은 통일국가로 오래 살아오다가 외세의 개입으로 전쟁을 통해 분단됐다. 오래 같이 살아온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민족이 통일하기 위해 갑자기는 안 되니까 느슨한 국가연합이라도 우선 만들자는 합의에 따라 만들어 놓으면 되돌리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게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로 남북 교류와 경제 통합이 상당히 진전된 것이고, 주변국과의 관계가 개선되고 동북아 평화체제를 만드는 과정이 꽤 진정됐다는 얘기니까 그런 상태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아니라 낮은 단계의 연합제라도 이뤄지면 남쪽 정권이 바뀐다고 뒤집기는 어렵다. EU보다 훨씬 느슨한 결합이지만 한반도 역사적 맥락에서는 그것만 이뤄져도 제1단계 통일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지금 민간인 방북도 정부가 허가를 안 하고, 언제 또 포격전이 일어날지 모르는 판에 무슨 꿈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느끼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사실 10.4 선언은 국가연합이란 걸 겉으로 내걸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낮은 단계의 국가연합으로 가는 시동을 이미 걸었다. 정상회담을 수시로 하자고 했다. 그리고 총리회담을 하고, 경제 회담은 종전의 재경부 차관 대신에 경제부총리가 나가고, 그밖에 국방장관 회담 등 여러 회담을 계속 하기로 했다. 일부는 실제로 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정부의 운영 방식이 달라진다. 과거 통일부 장관이 고위급 회담 대표로 나가면 다른 부처는 부처간 협력 차원에서 움직였지만, 총리가 대표가 된다면 내각의 모든 부처가 연구해서 보고서를 올려야 한다. 경제회담도 부총리가 수석대표로 나가면 모든 경제 부처가 보고하고, 합의가 나오면 같이 이행해야 한다. 남한 정부의 운영 방식이 남북간 긴밀한 협조와 조율을 전제로 돌아가는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정부 사이에 그런 일이 이뤄지면 그에 상응해서 민간 교류가 있게 된다. 이렇게 한동안 진전이 된 후에 '이 정도면 남북연합이 됐다고 선포하자'고 해서 '어느 날 문득'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남북연합이란 것이 요원한 것 같지만 2013년 체제를 제대로 출범시키기만 하면, 2013년 취임하는 대통령 임기 내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10.4 선언을 복원해서 업그레이드하면 1단계 통일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민주개혁 전략으로서의 포용정책2.0

포용정책2.0이 한반도 평화전략인 동시에 한국사회의 총체적 개혁을 수반하는 분단체제 변혁전략임을 서두에 언급했는데, 북측 사회도 남북연합이라는 '안전장치'와 '변화촉진장치'를 겸한 체제가 생기면 그 체제에 힘입어 새로운 단계에 진입할 것이 기대된다.

그런 것 없이 왜 북측은 안 변하느냐고 다그쳐대는 건 변하지 말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북이 제대로 변하면 남쪽에서 자기들이 구축한 특권을 위협받는 사람들이 오히려 북의 변화를 가로막고 있다고 본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 구상인 비핵·개방·3000이 대표적이다. 정말로 비핵화를 원하면 그런 구호를 안 낸다. 실질적으로 비핵화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대화를 한다. 비핵화 안 하면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에 대해 '혹시 그렇게 하면 비핵화가 될까'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은 비핵화를 별로 원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떠드는 영악한 사람들이 많다.

북측에도 지금 많은 변화가 있다. 그런데 남북연합이란 장치가 생기면 그때는 제대로 된 변화가 있을 것이다. 북에서는 2012년의 '강성대국 진입'을 설정하고 있는데 그것보다 2013년 체제가 53년 체제를 쇄신하거나 허문다면 53년 이후 60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이 공유하는 시대 구분법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북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다.

남한사회도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 즐겨 쓰는 '통일지향적 평화 프로세스'가 불가역적인 단계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차원의 민주사회가 나타날 것이다.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는 그것을 민주주의2.0이라고 표현했는데, 민주주의도 질적으로 다른 민주주의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또한 복지, 평등, 정의 같은 의제와 평화 의제가 상승작용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예컨대 평등 문제에서 제일 시급한 건 양극화를 해소하는 것이다. 평화체제가 다가올수록 양극화를 푸는 작업이 수월해진다. 평화체제 없이 양극화 해소하자고 하면 '당신 친북 좌파 아니냐. 그렇게 맘에 안 들면 평양에서 살아라'고 나와서 더 말을 해볼 길이 없어진다. 평화체제가 생기면 그런 식의 어거지가 안 통한다. 역으로 양극화가 극복되어가는 상황일수록 평화체제 구축도 힘을 받게 된다. 다수의 대중들이 먹고살기 급급하면 어떻게 평화체제를 구축하는데 민주시민으로 참여하겠나. 복지도 좀 되고 평등도 좀 될수록 평화체제가 쉬워진다. 이렇게 쌍방향으로 작용한다.

이런 복합적 전략의 한 예로 천안함 사건에 대한 대응을 논하는 것으로 끝맺고자 한다. 현재 남북관계 복원에 치명적인 걸림돌은 5. 24 조치이다. 작년 5월 24일 이명박 대통령이 전쟁기념관에서 남북교류를 전면 중단한다고 선포했고 아직도 철회되지 않았다. 요즘 교류를 다시 하면서도 철회를 안 하는 건 일종의 자가당착인데 정부는 '원칙을 고수하되 유연성 발휘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다.

5.24 조치는 정부가 천안함 사건을 북의 소행이라고 결론 내려면서 취한 것이다. 그런데 정부의 발표에 대해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다. 여론조사를 해 보면 '북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특히 작년 11월 연평도 사건 후에 많은 사람들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은 '천안함 사건에 대한 정부 발표를 믿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응답자의 1/3만 믿는다고 답했다.

진실을 규명하는 일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정부가 자기 결론만 고집하기 때문에 진실이 쉽게 밝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실 규명을 물고 늘어지는 건 이명박 정부의 (남북대화) 지연작전에 동조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포용정책을 주장하는 분들도 그런 지적을 많이 한다. 사건의 진실을 일단 덮어두더라도 대화와 접촉부터 재개함으로써 포용정책의 기조를 되살리자고 말한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찬성한다. 6자회담이나 남북회담을 재개하는 데에 있어서 천안함 사건을 일단 덮어두자는 데에 동의한다.

그러나 거기서 끝난다면 그건 포용정책1.0 수준이지 2.0 수준까지는 못 가는 것이다. 포용정책2.0이란 단순히 남북관계를 복원하고 교류를 촉진하는 게 아니다. 남한사회의 변화와 연계된 적극적인 통일과 분단체제 변혁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와 달라야 한다.

포용정책을 주장하는 분들 중에서는 포용정책1.0의 타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10.4 선언이 이행됐더라면 천안함 폭침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천안함 폭침이란 말 자체는 북이 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진실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정부의 발표를 수긍해 주는 것이다. 포용정책 기조 회복이 아무리 시급해도 이렇게 정부의 입장을 미리 인정하고 들어가면 2.0으로 발전하는 길이 막힌다.

민주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로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장기적 통일 과정에서는 우선 남북 두 당국의 성격과 행적에 대해 제3당사자인 민간사회가 정확한 인식을 갖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남쪽 편도 아니고 북쪽 편도 아닌 입장에서는 양쪽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아야 한다.

만약 정말로 북이 천안함을 침몰시켰다면 두 가지 결론이 나온다. 첫째, 우리가 아는 것보다 북이 훨씬 유능한 집단이란 것. 둘째, 북쪽 정권은 나쁜 사람들일 뿐 아니라 이해가 안 되는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된다. 왜냐? 북한은 연평도 포격에 대해 남쪽이 먼저 도발해서 경고하다가 쐈다고 한다. 쏘고 나서는 혁혁한 전과를 거뒀다고 자랑했다. 그런데 천안함 사건 때는 달랐다. 2009년 11월의 대청해전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한 것이라면 '우리가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한미연합 훈련 중에 들어가서 깨버렸다'고 자랑을 해야 하는데, 안 했다고 부정하고 있다. 북한이 정말 천안함을 침몰시켰다면 그들의 이런 상반된 반응을 볼 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집단인 것이다. 그래서 과연 북이 그런 집단인지, 아니면 조금 이해가 안 되지만 그 정도로 이상하지는 않은지를 알아야 제3자가 적절하게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정부에 대해서도 포용정책1.0을 깬 것은 나쁘다는 정도는 많은 사람들이 안다. 그러나 북이 정말로 천안함을 공격했다면 5.24 조치도 좀 과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나쁘다고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충분한 근거도 없이 그런 조치를 취했다면 역사적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관련 당사자들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도 우리는 이 사건의 진실을 알아야 한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지난회 한반도평화아카데미 강의에서 "솔직히 나는 누가 천안함을 침몰시켰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또 북한 공격의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실제로 북한이 천안함을 침몰시켰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국민들이 우리 정부의 천안함 조사 결과를 신뢰하지 못한 것처럼 나 역시 그렇다"고 말했다.(☞관련 기사 바로보기)

이종석 씨가 누구인가. 일국의 통일부 장관을 지냈고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핵심 간부를 역임한 전문연구자다. 그런데 정부가 국제적 조사단까지 끌어와 조사하고 공식 발표했는데 못 믿겠다고 공언하는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가 북을 무조건 옹호하려는 친북좌파이거나, 아니면 이런 사람한테까지도 불신을 받는 정부의 발표는 다시 좀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둘 중의 하나다. 이걸 어물어물 넘기면 우리 사회의 발전은 없다.

그래서 당장은 남북관계 복원이 시급하니까 남북대화도 하고 6자회담도 하자, 여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이 사태에 대한 각자의 입장을 이성적으로 정리하고 그에 따라 요구되는 민주시민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2.0은커녕 민주주의1.0의 복원도 장담할 수 없고 2013년 체제나 포용정책2.0은 그럴싸한 구호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포용정책 기조의 복원은 '천안함에도 불구하고' 하루 빨리 달성해야 하는 당면 과제와, 한반도식 통일을 '천안함을 포함한 우리 시대의 진실'에 튼튼히 뿌리박은 시민참여의 과정으로 만드는 역사적인 과제를 슬기롭게 결합할 수 있는 그런 능력과 지혜가 필요하다.

☞ 더 읽을거리

1. 백낙청, 계간 <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 "'포용정책 2.0'을 향하여"
2. 백낙청, 계간 <실천문학> 2011년 여름호 "'2013년체제'를 준비하자"
3. 백낙청 2011년 신년칼럼 "2010년의 시련을 딛고 상식과 교양의 회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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