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꼼수'는 '박근혜 굿판'을 꼭 제기해야 했나?

[기고] 저주와 비난으로는 못 이긴다

역사 속에서의 대중(大衆)과 영웅(英雄)

정치적 격동을 만들어내고 역사를 변화시키는 것은 대중(大衆)인가, 아니면 영웅(英雄)인가? 헤로도토스(Herodotos, 그리스 역사가) 이래로 지금까지의 주류(主流)는 '영웅의 역사'로 서술하였던 데에 반하여, 마르크스주의나 생디칼리즘(syndlcalism,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일어난 노동조합주의의 하나), 무정부주의 등의 시각은 인류의 정치사를 '근로대중의 역사'로 바라보았다. 무엇이 옳을까?

질문이 틀렸다. 대중과 영웅은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될 '양쪽의 날개'이다. 역사를 바꾸는 것은 '대중'이며, 그 대중을 움직이는 것이 '영웅'이다. 그렇다고 대중이 '단순한 도구'이거나 '수동적인 객체'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국가와 사회', '집단과 개인', '자유와 평등'이라는 각 쟁점에 관하여 모든 대중은 직업·출신·지역·교육·성장환경·소득 등의 차이에 따라 각자 자신의 가치체계와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때로 이성적으로 때로는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대단히 복잡한 존재들의 집합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까다로운 그들'을 하나로 조직하여 역사의 흐름 속에 기꺼이 헌신케 하는 자(者)야말로 마땅히 '영웅(英雄)'이라고 불려야 한다.

'영웅'은 대중을 자신의 이념에 동화(同化)시키고 관념에 불과했던 가치를 대중을 통해서 '이 땅 위'에 실현한다. 반대로 '대중'은 정치적 리더를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스스로를 영웅화하여 자신의 자아(自我)와 이해(利害)를 충족시킨다. 그리고 '그 역사가 진보할 것인가 퇴보할 것인가'는 오직 그 영웅과 그를 추종하는 대중의 몫이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대중주의'에 관한 논쟁에서,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정권을 지지했던 대중적 운동이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동일시의 대상으로 원했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그러면서 동일시할 지도자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대중주의는 원형적 파시스트적(protofacist) 경향을 띠게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논의의 본론은 아니었지만, 대중이 지도자에 대해 동일시하는 현상을 '파시즘의 원형적 현상'으로 전제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지금까지의 역사상 모든 파시즘 권력이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얻었던 게 사실이지만,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얻었다고 하여 이를 '파시즘적 현상'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옳을까?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 지도자에 대한 대중의 자기동일시(自己同一視) 행위는 파시즘적 현상이 아니라 '정치의 본질적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 정치의 진영은 '영웅들의 우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공화당을 지지하는 미국인은 낙태에 대한 반대, 총기휴대에 대한 찬성 등의 입장으로 자신을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미국 공화당의 이데올로기는 공화당 지지자들 깊숙이 체계화되어 있다. 한편 사회주의적 전통과 노동운동의 역사가 강한 유럽의 경우에는 그의 계급적 지위가 투표행위에 주된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정치적, 사회적 쟁점으로 자신을 보수주의자 또는 진보주의자라고 규정지을까? 아니면 계급적 지위가 그것들을 규정할까?

우리 정치의 진영(陣營)은 '영웅(英雄)들의 우상(偶像)'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쪽은 '박정희·전두환·박근혜', 다른 한쪽은 '김대중·노무현·문재인·안철수'로 구축되어 있다. 즉 박정희에 대한 지지 또는 비판, 그리고 김대중 혹은 노무현에 대한 지지 또는 비판으로 스스로를 보수주의자 또는 진보주의자로 규정짓는다.

그런데 과연 '박정희'나 '김대중'이 '절대적 부정' 또는 '절대적 긍정'의 신화(神話)로 마냥 찬양되거나 비난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 모두 수많은 '긍정'과 '부정'을 함께 겸유(兼有)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어느 한 진영을 선택한 우리의 유권자들은 자신의 영웅에게 절대적 찬사를 보내고, 상대편의 반(反)영웅에게 저주와 비난을 보낸다. 그래서 이 둘은 토론에 의한 합의가 불가능하며, 오로지 짓밟고 쓰러트려야 할 적(敵)으로 대치할 뿐이다.

박근혜는 우리 시대의 '정치적 영웅'이다

특정인에 대한 지지와 반대로 이루어진 우리의 정치적 진영은 아주 예민한 영역이 있다. 즉 정치인에 대한 인신공격을 바로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자신의 정치적 영웅에 대해 스스로를 동일시한 결과이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지지자들은 이정희 통합진보당 전 대선후보가 박근혜 당시 후보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았다며 대단히 분노했다. 한편, 문재인 지지자들은 공격과 방어를 하는 정치토론의 장에서 '예의'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것 자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이해하든 못하든 '분노'는 실재하는 팩트(fact)였고, 분노의 이유는 '자기동일시'로 인하여 자신이 모욕당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제 민주당은 이미 분노에 빠진 '그들'을 어떤 의제(議題)로도 설득하지 못한다.

▲ 지난 대선에서 이정희 전 후보의 박근혜에 대한 '독설'은 유효했을까? ⓒ뉴시스

'긍정적인 의제'(Positive agenda)를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박근혜'를 설득할 수 없으며, 그럴 필요조차 없다. 그렇다고 하여 박근혜의 지지자마저 '적(敵)'으로 돌려야 할까?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박근혜 지지자로 하여금 종전의 선입견에 의심을 품게 할 수 있을까? 도대체 그들을 매료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려면 '긍정적인 의제'(Positive agenda)를 제시해야 한다. 우리 생활과 밀접한 부분에 대한 '앞으로의 긍정적이고 구체적인 계획'만이 그들을 매혹시킬 수 있다. '과거의 비리'를 들추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관한 계획'이 필요한 것이다.

지난 3월 스위스에서 국민투표로 가결된 '기업 CEO의 보수를 주주가 결정하는 법안'을 예로 들어 보자. 만약 이러한 법안에 대해서 찬반을 묻는다면, 설령 새누리당 지지자라고 하더라도 대다수가 찬성할 것이다. 우리의 경우 보수당 지지자라고 하더라도 미국 공화당 지지자들만큼 세뇌당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이에 관하여 실패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다. 미국은 주주결정까지도 아니었고 단지 보수를 공개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는데도, 법률 시행 이후 CEO들의 보수가 오히려 더 껑충 뛰었다.

도대체 비리를 들추는 것은 왜 효과가 없을까? 부도덕한 비리가 드러나면 그 정치적 영웅에 대한 지지자들의 믿음에 금이 가고, 아직 영웅을 선택하지 않은 스윙보터(Swing voter)들에게는 선택의 기준이 되지 않을까?

남자 A, B가 미팅을 나갔다. 그런데 미팅女 둘 다, 세련된 매너와 훈훈한 외모의 A에게 빠졌다. B는 질투가 생겼다. 마침 A가 화장실에 가자, B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 A의 전모(全貌)를 공개했다. 바람둥이에다가 양다리 세 다리는 다반사고, 현재도 사귀는 여자가 있다고 폭로했다. 그러나 B의 폭로는, 미팅女들의 A에 대한 감정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그리고 더욱 확정적인 사실은 미팅女들이 B를 절대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B를 '찌질이'라고 결론 내린다.

정치, 특히 선거는 'Love-Triangle', 즉 삼각관계이다. 한 명의 이성을 매료시키기 위해 두 명의 동성이 경쟁하는 것이다. 상대를 비난한 결과가 자신에 대한 선택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택은 긍정적인 미래가 보장될 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 사람과 함께 하면 내 미래가 어떻게 될까? 앞으로 잘 살 수 있을까?'가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지, '과거에 어떤 편력이 있었다'는 폭로만으로, 그 사실을 폭로한 사람을 결코 선택하지 않는다.

이정희 전 후보의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는 말은 아마 선거역사상 '최악의 슬로건'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대중과 영웅, 그리고 선거와 정치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아마추어리즘의 극치다. 정말로 상대방을 떨어뜨리기 위해서조차 '자신에 대한 선택'을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의제'를 제시해야 한다.


'나꼼수'는 '박근혜 굿판'을 꼭 제기해야 했을까?

지난해 대선기간 전,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가 '박근혜의 억대 굿판'을 보도한 것과 관련해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이 지난 5일 <시사인> 주진우 기자를 조사했다. 당시 나꼼수가 '박근혜 굿판'을 제기한 저의(底意)는 아마도 기독교도들을 이반(離叛)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진실로 밝혀지더라도, 그 정도의 사실로 박근혜에 대한 지지에 균열을 일으키지 못한다.

미국 클린턴 전 대통령과 모니카 르윈스키(Monica Lewinsky)의 섹스 스캔들이 세상을 시끄럽게 할 때 미국 민주당 지지자들은 공화당과 FBI가 클린턴을 모략한다고 생각했다. 사실로 들러났을 때조차도 대다수의 민주당 지지자들은 '르윈스키가 먼저 클린턴을 유혹했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네거티브 공격은 반대파를 균열시키지 못 한다. 심지어 스윙보터들에게는 공격하는 쪽도 똑같이 짜증스럽다.(☞ 관련기사 : "'셀프민주화 훈장' 떼지 않고는 못 바꾼다")

'나꼼수'는 긍정적인 의제도 제시했었다. 예를 들어 패널이었던 정봉주 민주당 전 의원은 '유럽식 후불제 등록금'이 우리의 교육정책으로 전면화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한편으로 '나꼼수'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떤 정치캠페인보다 재미있었다는 유력한 특징도 있었다. 하지만 '박근혜 굿판'이라는 적대적, 부정적 담론은 옳지 못했다.

주진우 기자는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은 기자의 사명인데 그게 잘못됐다고 압박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네거티브'는 오로지 '정책비판'에 국한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책비판' 또한 새로운 계획을 입안하기 위한 논리적 전제로서의 의미만을 가져야 한다.

'박근혜 굿판'과 같은 부정적 담론은 더 이상 생산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나 '굿'을 벌일 자유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박근혜가 굿을 벌였는가 벌이지 않았는가'라는 문제는 결코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의 영역에 있지 않다. 종교적인 이유에 따라 반대할 수도 있지만, '나꼼수'는 기독교 방송이 아니지 않는가?

잘못된 전략으로 인해, '나꼼수'가 그동안 제기했던 '정당한 비판'마저도 부당한 것으로 매도될 위험에 처했다. 더구나 이러한 부정적 담론은 그 지지자들의 감정을 격화시킨다. 그러면 이미 감정적으로 분노한 '그들'을 우리는 어떠한 정당한 의제(議題)로도 설득하지 못한다. 보수당 지지자들 대부분이 우리가 설득해야 할 서민들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 지난 4월 총선에 출마했던 김용민(왼쪽) 씨 지원 유세를 하는 주진우(가운데), 김어준 씨 ⓒ뉴시스

보수주의자들에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전혀 다른 논리의 전개로 귀납 된 결론이지만, 아래의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의 조언은 앞서의 결론과 완전히 일치한다.

△ 여러분이 응대하는 보수주의자에 대해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라.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 비열한 언행을 삼가라. 만약 그쪽에서 우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렇다고 우리도 삐딱하게 나가서 좋을 것은 없다. 어쨌든 상대방을 존중하고 오히려 다른 뺨도 들이밀어라.
△ 소리 지르면서 싸우는 것을 삼가라. 우리가 소리 지르기 시작하면 그들이 이긴다.
△ 정상적인 보수주의자와 역겨운 공론가를 구분하라.
△ 진심을 말하라. 내가 정말로 믿는, 진심으로 지지하는 가치에 근거한 프레임을 사용하라.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유나영 옮김, 삼인 펴냄) 중 208~218쪽 참고 : 2부 4.보수주의자들에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구체적인 의제로 '영웅들의 우상'을 깨뜨려야 한다

교육 분야를 예로 든다면, '박정희의 교육평준화 정책'과 '전두환의 학원과외 금지조치'는 오히려 지금의 진보주의자들이 적극 계승해야 할 진보적 정책이다. 진영으로 분할된 우리의 서민들에게 '교육 평준화와 사교육 철폐'를 제기했을 때, 그들이 여전히 대립할까? 학생들이 학비 걱정 없이 공부를 하고 나중에 취직을 해서 갚아나가는 '후불제 등록금' 정책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빨갱이 정책'이라고 답할까? 아니다. 그들은 모두 환호할 것이다.

다른 예로 국민연금이 가지고 있는 재벌회사들에 대한 지분에 따른 '주주권 행사를 강화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의 유권자들은 자신의 진영과 상관없이 '강화해야 한다'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국민연금이 국민의 자금으로 운영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것은 정치적 당파성과 상관없는 '확정적 정의(確定的 正義)'이기도 하다.

파편적이고 단편적인 몇 가지의 사실을 이유로 "나는 노무현이 싫어"라고 하면서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결론 내린 박근혜 지지자에게, '노무현이 얼마나 심지가 곧은 민주주의자였는데 왜 싫어하느냐'라고 다그쳐서는 안 된다. 심지어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가 얼마나 추악한 독재자였는지 아느냐'라고 소리쳐서도 안 된다. 왜 과거에 얽매여 있는가? 우리 생활과 밀접한 부분에 대한 '앞으로의 긍정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하라! 그러면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것이다.

의제의 핵심을 법률과 제도, 즉 시스템에 두어야 한다

우리의 정치적 진영이 특정인에 대한 지지와 반대로 이루어진 탓에, 정치투쟁 역시 종종 '특정인에 대한 반대'로 이끌리곤 한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 2012년 MBC 파업이다. 당시 대중들에게 각인된 의제는 '김재철 사장 퇴임'이다. 결국 파업은 실패했고, 새 정부 들어서 '위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김재철 사장은 쫓겨났다. 그렇다면 MBC 노조는 승리한 걸까? 무언가 찜찜하다. 그 이유는 '제2의 김재철 사장'이 온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반대하는 식의 '인격화(人格化)된 투쟁'을 피해야 한다. 어떤 정치적 사건에 대해 그 문제부서의 수장(首長)의 퇴임으로 마무리하려는 것이 집권당의 대책이다. 오히려 그 특정인의 개인적 문제가 아닌 구조의 문제임을 지적해야 한다. 의제의 핵심을 '어떤 개인에 대한 반대' 혹은 '그의 퇴임'에 두어서는 안 되고, 법률과 제도, 즉 시스템의 진화(進化)에 두어야 한다. 당시 MBC 노조는 '김재철을 그대로' 두고, 지배자의 독선을 감독할 장치와 그 전횡에 맞서는 방어기제를 구축하는 것을 의제로 삼았어야 했다.

조급증과 메시아주의를 버려야 한다

지난 대선 즈음, 이번 대선을 패배하면 엄청난 재앙이 올 거라는 비관주의가 팽배했다. 게다가 안철수 전 교수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은 흡사 메시아에 대한 욕망과도 같았다. 대선은 박근혜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지금까지 진보진영을 지탱해 왔던 '민주 대 반민주 프레임'이 역사적으로 유통기간이 끝났다는 사실을 이제야 확인했다. 진보진영이 미래에 대한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패배했던 것이다. 이제 준비해 나가자. 우리 생활에 밀접한 부분에 관한 긍정적이고 구체적인 의제로써.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집권하면 대단한 변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과도한 조급증이다. 신자유주의적 경제관료에 둘러싸여 있었던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를 '좌파 정부'라고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많은 의문이 있다. 그에 대한 준비 없이는 새누리당 정부와 큰 차별성이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유토피아를 비판하고서 '잠정적 유토피아'라는 개념을 제시했던 스웨덴 복지국가의 설계자 에른스트 비그포르스(Ernst Wigforss)는, '우리는 몇십 년, 몇백 년 후에나 찾아올 낙원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그런데 '좀 더 가까운 유토피아'를 구축하기 위해 스웨덴 사회민주당이 1932년부터 1976년까지 무려 44년간 장기집권 했었다는 점을 상기하라!(분명 스웨덴 체제 역시 많은 문제를 노정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 문제를 염려할 단계가 아니다). 한두 번 싸움에 진 것에 대해 비관해서는 안 된다. 대신 '진 싸움'에 대해서는 정확한 평가를 해야 한다. 그리고 왜 선거기간만 선거운동을 하는가? 지금부터 다음 선거까지 '긍정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을 계속 제시하라! 좀 더 정의로운 법률과 좀 더 정의로운 제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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