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격훈련에 묻힌 '빅뉴스', 리처드슨 방북 보따리

94년 카터와 닮은꼴 행보…美 정부 설득 의지 내비쳐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는 제2의 카터가 될 수 있을까. 16일부터 엿새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리처드슨의 방북 보따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리처드슨 주지사의 평양 행보는 남측의 연평도 해상사격훈련 보도에 묻혀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북한 외무성과 군부의 핵심 인사들과 나눈 얘기는 사격훈련으로 고조된 한반도 위기 상황과 결코 별개로 볼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우선 리처드슨 주지사는 연평도 사격훈련에 대해 북한에 최대한의 자제를 요청했다. 남측이 사격훈련을 할 경우 '예상할 수 없는 타격'을 가하겠다고 공언했던 북한은 실제로 아무런 무력 대응을 하지 않았다. 리처드슨의 대북 설득이 효과를 봤다고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다.

리처드슨이 평양에 머물던 지난 21일 캐슬린 스티븐슨 주한 미국 대사와 월터 샤프 주한미군 사령관이 청와대를 방문했다. 청와대는 이들의 방문이 한국의 훈련에 전적인 지지를 표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한 소식통은 "훈련을 지지한다는 외교적인 말을 하긴 했지만 훈련을 절제된 수준에서 실시하고 신속히 종결하라는 메시지도 분명 전달했다"고 말했다.

이를 종합해 볼 때 미국은 스티븐슨 대사와 샤프 사령관을 통해 한국의 과도한 사격훈련을 견제하고, 리처드슨 주지사를 통해서는 북한의 무력 대응을 막은 셈이 된다. 하지만 리처드슨 주지사는 오바마 미 행정부의 특사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북한에 갔다.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킨 '개인 차원의' 공헌을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다.

▲ 21일 엿새간의 방북을 마치고 베이징에 도착한 빌 리처드슨 미국 뉴멕시코 주지사 ⓒ연합뉴스
카터와 리처드슨

리처드슨의 이같은 활동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1994년 6월 방북과 유사하다. 카터 전 대통령은 당시 클린턴 미 행정부의 탐탁찮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평양행을 고집해 전쟁 위기로 치닫던 정세의 물꼬를 대화 쪽으로 돌리는데 기여했다. 카터는 김일성 주석과 만나 핵개발 동결,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복귀, 북·미 회담 재개, 남북 정상회담 등을 합의했다.

리처드슨이 <CNN> 취재진과 함께 평양에 들어가 필요할 경우 자신의 육성을 송출하는 모습도 카터의 94년 방북 때와 똑같다. 리처드슨과 이번에 동행한 <CNN>의 유명 앵커 울프 블리처는 94년 당시 <CNN>의 백악관 출입기자로 백악관 뜰에 테이블을 놓고 평양의 카터와 원격 인터뷰를 했던 인물이었다.

카터는 최고지도자인 김일성 주석을 만났지만 리처드슨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못 만났다는 차이는 있다. 그러나 이는 전직 대통령이 만나는 사람과 주지사가 만나는 사람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의전상의 차이일 뿐이란 해석이 우세하다. 주고받는 대화의 무게는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리처드슨이 '클린턴의 사람'인 동시에 오바마 행정부와도 인연이 깊다는 점에서 북한에 전달된 메시지의 무게가 카터 때보다 오히려 더 무겁다는 시각도 있다. 리처드슨은 클린턴 행정부 시절 유엔 주재 미국 대사와 에너지부 장관을 지냈다. 오바마 행정부 출범 당시에는 국무장관 하마평에도 올랐다가 상무장관에 내정됐으나 개인 비리 문제로 중도 탈락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리처드슨의 이번 방북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지난 8월 중순 소집한 대북정책 평가회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클린턴 장관은 당시 회의에 국무부 고위 인사와 외부 전문가들을 불러 압박 일변도의 대북정책을 '참신한'(fresh) 접근으로 바꾸는 길을 물었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바 있다.

IAEA 사찰단 복귀 합의, 중요한 실마리 될 수도

리처드슨의 방북 성과는 사격훈련 대응을 만류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북한으로 하여금 IAEA 핵 사찰단을 영변 핵시설에 복귀시키고, 우라늄 농축을 위한 핵 연료봉을 외국으로 반출하며, 1만2000개의 미사용 연료봉 판매를 협의하는데 동의하도록 하는 중요한 합의를 이뤄냈다.

한·미·일 3국은 최근의 협의를 통해 6자회담을 재개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조건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명확히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 중단을 포함한 핵개발 동결 선언 △IAEA 감시·검증팀 복귀 △9.19 공동성명 이행 확약 △정전협정 준수 △탄도미사일 발사 보류 등이 그것이다.

북한이 리처드슨 주지사에게 약속한 사항들은 이같은 '5대 조건'의 일부에 해당한다. 그러다 보니 이명박 정부의 반응은 매우 냉랭했다. '리처드슨 합의'가 전해진 20일 저녁 정부 고위 관계자는 북한의 핵 사찰단 복귀 허용에 대해 "자신들의 핵 개발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는 속셈"이라며 "이미 낡은 카드"라고 낙인찍었다.

이 관계자는 또 미사용 연료봉 반출에 관해 "핵 연료봉 문제는 2008년 이미 정부와 북한간에 대화가 오갔던 것"이라며 "그러나 미사용 연료봉은 농축 이전단계의 재료여서 그 자체로 별 의미가 없으며 더욱이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까지 공개한 마당에 실질적으로도 쓸모없는 카드"라고 지적하고 "북한은 돈이 된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필립 크롤리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는 '리처드슨 합의'에 대해 "확실히 긍정적인 조치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그는 그동안 되풀이했던 대로 북한의 향후 행동을 지켜보겠다고 거듭 강조했지만, 한국의 반응과는 온도차가 있었다. 국무부는 리처드슨이 귀국하는 대로 북한과의 협의 결과를 들은 후 향후 대응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리처드슨 "북한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길 원한다"

리처드슨 주지사가 귀국해 미 정부 당국자들과 무슨 얘기를 할지는 그가 21일 베이징(北京) 서우두(首都) 공항에서 한 말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그는 공항에 나온 기자들에게 "북한이 남한의 연평도 해상사격훈련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공언했던 보복 공격을 하지 않은 것은 향후 대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매우 중요한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리처드슨은 또 "북한이 IAEA 사찰단 복귀를 허용한 것 등은 매우 건설적인 조치로 북한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며 "나의 느낌으로는 북한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기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이같은 논리로 클린턴 장관을 비롯한 국무부 관계자들을 강력히 설득한다면 미국의 대북정책이 궤도를 바꿀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와 관련해 외교·안보 관련 전직 고위 당국자는 "북한은 리처드슨 방북 결과에 따른 미국의 방침이 정해지고 반응이 나올 때까지 추가적인 위기 고조 행위를 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고 전망했다. 리처드슨의 대 국무부 설득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라도 북한은 당분간 '행동'을 자제할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또 다시 한국 정부다. 국내정치적 이유 때문에라도 대북 강경 태도를 거둘 수 없는 이명박 정부가 미국의 노선 변경을 강력히 견제할 경우 오바마 행정부는 또 다시 주저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직 고위 당국자는 "핵 사찰단 입국 허용 등 북한이 내놓은 사항들이 비록 미약하지만 그걸 실마리 삼아 비핵화를 추구해야 하는데 이명박 정부는 아직도 북한의 진정성만을 묻고 있다"며 "비핵화에 대한 이 정부의 진정성을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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