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홧발'에 밀려 억지로 떠난 피난…그곳은 노근리였다

[노근리, 60년 전 오늘]<1> 비극의 시작, 7월 25일

노근리 사건을 아는가.

한국전쟁 발발 1개월째인 1950년 7월 26일, 미군에 떠밀려 강제로 피난길에 오른 양민 수백여 명이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일대에서 학살당했다. 그들에게 총을 겨눈 건 놀랍게도 미군이었다. 폭격기와 기관총은 여자와 아이들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전쟁통에 묻혔고 1953년 휴전과 함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한국과 미국의 정부는 역사 속에 노근리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렇게 사건이 세상에 묻혀있는 동안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다시 암흑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그들의 '기억 투쟁'은 1990년대가 되어서야 인정받을 수 있었다. 당시 열 살이었던 생존자들은 쉰 살이 넘어서야 언론 앞에 설 수 있었다. 국내 언론의 보도에서 시작해 <AP> 통신의 전 세계적 특종으로 이어졌다. 결국 미국의 사과를 받아냈고 명예회복위원회가 구성됐다. 그렇게 시작된 노근리 기록 작업이 영화 <작은 연못>으로 만들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60년이었다.

<프레시안>은 노근리 사건 60주년을 맞아 박건웅의 만화 <노근리 이야기>를 바탕으로 노근리 일대 철로와 쌍굴에서 벌어졌던 무차별 폭격의 순간들을 재구성했다. 2006년 출간된 이 만화는 노근리 사건 당시 아들과 딸(구팔, 구희)을 잃은 사건의 산증인 정은용의 실화 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이미 소설과 만화, 또 영화로 만들어진 사건을, 그것도 몹시 불편한 이야기를 재차 꺼내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과오를 떠올리고 반성하는 것만이 또 같은 과오를 반복하는 일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을 위해 기획된 '노근리, 60년 전 오늘' 시리즈는 사건이 발생한 날들을 그대로 따라 7월 25일부터 29일까지 매일 한 편씩 게재된다. <편집자>


비극의 시작, 7월 27일

1.


1950년 6월 28일, 서울엔 낮부터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장대비가 몰아쳤다. 불안하고 으스스한 밤이었다. 구팔이네 가족도 사흘 전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됐다는 소식에 잠을 뒤척였지만 아버지 정은용은 "라디오에서 국군이 잘 싸우고 있다고 하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며 아이들을 다독였다.


새벽 3시. 난데없이 폭음이 울려 퍼졌다. 구팔이네 가족은 한순간 온누리를 꽉 메운 파란빛에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딸 구희는 무섭다며 울음을 터트렸다. 집 근처에 포탄이 떨어진 것이 틀림없지만, 쏟아지는 비 때문에 바깥으로 확인하러 나가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흑암의 밤이 지나갔다.

다음날, 비 갠 마을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멀리 보이는 경부 간 국도 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여전히 "서울을 지킵시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이미 은용이 다니는 중앙대학교에도 휴교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학우들도 "꼭 살아서 이곳에서 다시 보자"며 뿔뿔이 흩어졌다.


은용의 가족도 피난길에 올랐다. 소속 부대를 잃은 부상 군인들의 처참한 모습과 "한강에서 지옥을 봤다"는 한 피난민의 증언이 불안한 마음을 부추겼다.

2.

6월 30일. 고생 끝에 정은용 가족은 고향인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에 도착했다. 따가운 햇볕, 풍성한 습기, 푸르른 초목….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은 전쟁 걱정, 피난 걱정으로 시꺼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2주 후인 7월 14일. 철로 위로 미군의 화물열차가 북상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피난 안 가도 되겠다"며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며칠 후 이변이 일어났다. 북상했던 미군과 무기가 전부 방향만 바꿔 남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실은 7월 20일, 미군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대전 방어선은 무너진 상태였다. 주곡리엔 다시 짙은 암운이 드리웠다.

마을회관에 들른 은용은 주민들의 원성을 들을 수 있었다. "미군들이 도람뿌를 치고 있는거여. 서양 화투말여~", "상여집에서 애들마냥 장난을 치구 있더라니께"…"우리는 지들을 하늘같이 믿고 있는데, 놀러 온 줄 아나 봐" 그들이 기울이는 술 주전자 소리, 뒷산 뻐꾸기 소리마저 무겁게 울리는 밤이었다.


7월 23일이었다. 마을로 미군 지프 한 대가 들어왔다. 미군 장교와 경찰 간부는 소리를 질렀다. "이 마을은 전장이 될 위험이 있소! 오늘 중으로 모두 피난을 가시오!" 주민들은 불안으로 눅눅해진 짐을 머리에 이고, 지게 위에 얹었다. 걱정어린 말들이 마을을 뒤흔들었다.


주곡리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전쟁이 어떤 건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전쟁은 이 순진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등을 아무렇게나 떠밀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채 피난길은 느리게 이어졌다.

이들은 누가 인도한 것도 아닌데 '큰산'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을에서 남쪽으로 5리 남짓 떨어진 곳을 지나가는 소백산맥의 지맥을 사람들은 그냥 '큰산'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곧 큰산 기슭의 임계리로 접어들었다.

정은용은 불안했다. 경찰관이었던 그는 인민군의 총살 대상이었다. 더 이상 임계리에 남아 있을 수 없음을 느꼈지만 부모님과 가족들을 데리고 부산이나 대구에 갈 자신은 없었다. 아이들은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다. 이내 아버지와 아내 선용은 "혼자서라도 가라"고 은용을 재촉했다. 어머니는 쌀 한말과 밥공기를 넣은 배낭을 쥐어줬다.


그는 혼자 떠나온 죄책감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황간면 노근리 어귀의 쌍굴에 들어서자 알 수 없는 오싹함마저 엄습해왔다. 은용은 그가 떠나온 곳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3.


7월 24일. 주곡리 사람들은 임계리에 제각기 거처를 만들기 시작했다. 남편 홀로 피난을 보냈지만 선용도 아이들에게만큼은 씩씩했다. 그러나 그날 밤 서쪽 하늘이 빨갛게 타오르고 불덩어리가 날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입에선 또 다시 절망의 소리가 돌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자 사람들은 다시 공포를 떨치고 생의 감각을 찾았다. 집집마다 나뭇가지를 뚫고 취사 연기가 올라왔다. 아이들은 계곡 물에서 노닥였다. 하늘엔 경비행기 한 대가 날아와 빙글빙글 돌았지만, 사람들은 "미군이 우릴 세고 있나보다"는 생각밖엔 하지 못했다. 미군은 그날 밤 돌연 나타나 "트럭에 태워 남쪽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구세주'의 행동은 거칠었다. 미군들은 군홧발로 주민들의 거처에 들어왔고 할머니와 아이들을 가리지 않고 총검으로 쿡쿡 찔렀다. 미군의 성화가 어찌나 심했던지 신을 신지도 못한 채 뛰쳐나간 아이들도 있었다. 느티나무 밑은 삽시간에 500~600명의 사람들로 들어찼다. 그리고 다시 영문도 모른 채 피난이 시작됐다.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노인들은 짐에 힘겨워했다. 더 이상 속도를 낼 수 없는 이들에게 미군은 야광 손목시계를 연신 들여다보며 '허리 업'을 외쳐댔다.

그렇게 국도를 따라 동쪽으로 1.5km쯤 걸어갔을 때, 인솔하던 미군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하천 바닥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하자 그는 소 고삐를 움켜쥐고 억지로 끌어당겼다. 소의 달구지가 굴러 떨어지면서 사람들도 데굴데굴 굴렀다.


그곳은 당시 군에서 임시 비행장으로 사용하던 같은 읍의 하가리 마을 앞 일대였다. 인솔자는 모두를 땅바닥에 엎드리게 한 다음 "오늘 밤은 이곳에서 지내도록 한다"고 소리쳤다. 어느 누구도 이 곳을 이탈해선 안 되며, 고개를 들어서도 안 된다는 고함이 한층 사납게 울려 퍼졌다. 미군 초병의 감시 속에서 사람들은 자갈 속에 코를 박고 숨을 죽였다.


멀리서 귀를 찢을 듯 굉음이 들려왔다. 선용은 구팔과 구희를 가슴에 안고 남쪽으로 내려간 남편을 생각했다.

* 본 기사에 쓰인 삽화의 저작권은 출판사 새만화책에 있음.

☞ <2> "잔인한 폭격, 7월 26일 ①" 바로가기
☞ <3> "쌍굴에서의 악몽, 7월 26일 ②" 바로가기
☞ <4> "두 얼굴의 미군, 7월 27일·28일"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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