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춤꾼' 이애주, 국립극장 '블랙리스트' 오른 이유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이애주 서울대 교수 "춤은 생명의 깨달음"

1987년 6월 항쟁 당시 박종철, 이한열 열사를 기린 '살풀이 춤'으로 대중들에게 '민중춤꾼'으로 알려져 있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인 서울대 이애주 교수를 만났다. 서슬 퍼렜던 시절, 광장에서 바람맞이 춤을 추는 것이 무섭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때 나는 국민들의 열망과 함께 몸으로 말한 것뿐이다. 그림 하는 사람은 그림으로, 문학 하는 사람은 글로 이야기하듯 나는 몸으로 나의 생각을 춤추었을 뿐이다. 안하고는 못 배길 만큼 시급한 상황이었다"라고 답한다.

"춤은 경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 안 되면 막을 올릴 수 없다. 근 7,8년 동안 나는 제대로 된 극장에서 춤판을 벌인 적이 없는데 극장을 얻을 자본도 없고, 정치력도 없고 '내가 가진 것은 오로지 춤뿐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혹시 기득권들이 싫어하는 현장에서 춤을 췄던 것이 대관도 힘들어지고 후원도 받기 힘들어지게 한 것은 아닌가 궁금했다. 그래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지는 않았나 물었다. 그러자 "타협이라는 것조차도 생각해 본적이 없고 그냥 내 갈 길을 가는 거다. 타협이니 비타협이니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나한테는 질문 자체가 안 맞는 질문이다. 어렵지만 내가 추구하는 것을 계속하다 보면 뜻 맞는 사회와 뜻 맞는 사람들을 만나 잘 될 때가 있겠지. 오로지 자기가 생각한 그 길을 가는 거다"라고 이야기한다.

춤, 마당, 판이라는 말을 처음 공식적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라는 질문에 "1974년에 개인 춤 발표를 했다. 그런데 발표회 제목을 그 당시는 '이애주 무용발표회'라고 하여야 했는데 도저히 그렇게 쓸 수가 없어 '이애주 춤판'이라고 했다. 왜냐, '무용'이란 말은 일제 강점기 때 들어온 식민 용어로서 그때부터 춤이, 몸짓이 본격적으로 왜곡되고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때 식민용어로 바꿔진 우리말을 제대로 회복시키려고 하는 사람을 두고 불온한 용어를 쓰는 색깔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분류시켰고 국립극장 '블랙리스트' 10명 안에도 포함돼 있다고 들었다". '춤'이란 단어가 이렇게 편하게 쓰이기까지 이런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지 몰랐다.

꿈이 무엇이냐고 묻자 "정말 융합적인 우리의 몸짓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춤 대학이 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기관이 없다. 내게 우리 몸짓을 제대로 교육할 수 있는 자율성을 준다면 춤 학교를 제대로 만들어서 교육하고 싶다. 우리 후손들뿐 아니라 생명의 정통몸짓을 원하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라고 한다. 춤 대학 이야기를 들을 때 마치 "내 공연은 무용발표회 대신 춤판이라고 할 거야"라며 상기된 표정으로 재잘대던 20대의 이애주를 마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겁이 난다. 한번은 다리가 아파 쓰러진 적이 있는데 '이러다 영 못 일어날 수 있겠구나. 이제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이야기에 나도 겁이 난다. "이번 년도 상반기까지를 춤 60년으로 보고 그 안에 꼭 정리를 해야만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호흡도 그렇고 어쩌다 삐끗해서 몸이 잘못되면 영영 내 춤은 구체적 몸짓이 영상으로나마 남게 될 수 없다. 하지만 그 작업을 여태 못했다. 음악, 조명, 연출, 의상을 정통으로 갖추고 음향, 영상 작업 등을 헤아려보니 억대 이상이 든다고 한다. 1000만 원도 없는데 말이다(웃음)"라는 이야기에 춤은 경제라는 말이 서늘하게 들려온다.

공연 예술가로서 무대에 설 기회를 차단당하면서도 그 당시 주류 담론인 무용이라는 말 대신 한국 전통의 춤, 마당, 판이라는 말을 쓰기로 작정하고 밀어붙였던 20대 청년 이애주.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1970년대의 그가 그럴 수 있었듯이 2010년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20대도 그저 힐링을 당하는 세대가 아닌 세상을 힐링할 수 있는 판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제주 4·3 희생자,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핵 없는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죽음을 추모하는 대한문 앞에서 지금도 특별한 무대 없이 현장의 아픔을 위로하고 있는 그의 춤을 2050년대의 청년들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 다만, 이런 아픈 현실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 이애주 서울대 교수는 1987년 6월 박종철·이한열 열사를 기리기 위해 '살풀이 춤'을 췄다. 이후 그는 '민중춤꾼'으로 알려졌다. ⓒ프레시안(최형락)


1987년 6월 항쟁 당시 박종철, 이한열 열사를 기린 '살풀이 춤'으로 대중들에게 '민중춤꾼'으로 알려져 있다. 서슬 퍼렜던 시절에 시국 열사들의 죽음을 기리는 자리에 홀로 서 한풀이 춤을 춘다는 것이 보통 용기가 없으면 못했을 일인 것 같다.

그 당시는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지나 독재가 몇십 년 이어진 상황이라 나뿐만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폭발 직전에 있었다. 1987년 1월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죽고 이 사건이 신문에 대서특필 되면서 전 국민이 경악을 금치 못했고 한마음으로 모이면서 6월 항쟁이 일어났는데 그날 바로 바람맞이를 추게 되었다. 사실 1960, 70, 80년대에 독재정권이 이어지면서 그들의 표현대로 반합법적이고 비합법적인 집회와 투쟁들이 계속해서 이어져 왔고 이 와중에 서울대생 박종철의 사망으로 6월 항쟁이 일어난 도화선이 되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춤으로 몸이 그렇게 움직여진 것이다. 춤이 삶의 몸짓이 축적된 것이라면 과거의 살아온 몸짓, 지금의 사는 몸짓, 미래의 살아갈 모든 몸짓 등이 춤의 생생한 토대라고 본다. 춤은 사상과 철학이 몸놀림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때 나는 국민들의 열망과 함께 몸으로 말한 것뿐이다.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때도 그랬다.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쓰러지고 나서 병문안을 갔더니 연세대 도서관 앞에 수천 명의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모여 밤샘 집회를 하고 있었고 나에게도 발언을 좀 해달라고 하여 "나는 말도 잘 못하고 춤으로 할 수 있을 때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돼서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춤을 추게 된 것이다. 그림 하는 사람은 그림으로, 문학 하는 사람은 글로 이야기 하듯 나는 몸으로 나의 생각을 춤추었을 뿐이다. 안 하고는 못 배길 만큼 시급한 상황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대통령 후보격이었던 노태우 씨도 국민의 폭발적인 민주화 투쟁에 6.29 선언으로 굴복한 척한 것이 아닌가.

어떻게 해서 바람맞이 춤을 추게 된 것인가?

그 당시는 연습장도 없어지고 주위 사람들은 다 감옥 가고 고문 받고 있을 때였다. 혼자 활동도 못하고 리듬도 다 죽어가는 것 같았고 내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침잠해 있을 때 서울대생 박종철 물고문 사건이 터졌다. '인간성을 말살시키고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 현상은 도대체 뭘까' 하며 저절로 몸으로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마침 그때 처음 김민기, 김석만, 이상우 등 연우무대 후배들이 신촌에서 혜화동 이전 개관 공연을 부탁한 게 계기였다. 본격적으로 준비를 하며 고문, 탄압과 관련된 춤을 다 조사해 봤는데 고문 춤은 서양이고 어디고 세상에 없더라.(웃음) 성춘향을 어르며 추는 칼놀림 정도밖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연우무대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그러자고 승낙하고 나니 기운이 막 살아나는 것 같았다. 사물놀이 원조격인 이광수, 김덕수한테 요청을 했더니 흔쾌히 악을 맡기로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사물놀이 10주년을 맞으며 돌파구가 없었는데 아주 잘 됐다고 좋아하였다. 그렇게 만들어 나간 것이 '바람맞이'이다. 일주일간 공연을 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몰려들어 표도 환불해 줄 정도였다. 돈을 받으려면 제대로 최고로 받자고 하였는데도 표가 동이 났었다.

그때 학생들은 대부분 못 들어왔다. 그 후 서울대 학생회에서 학교에서 꼭 해주셨으면 하는 간청을 하여 선뜻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서울대에서 하기로 한 전날 사물놀이패가 일본 공연 운운하며 못하겠다고 하여 방까지 붙였는데 하지 못했다. 내가 지도교수로 있던 춤패 '한사위' 학생들이 나에게 선생님 공연취소로 자기네들이 얼굴을 못 들고 다니고 나는 서울대 학생들에게 약속을 안 지킨 비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웃음) 당시 춤패 '한사위'는 남북한 통틀어 최고의 춤패라고 소문이 났을 정도로 대단한 춤패였다. 그냥 있을 수 없어 '한사위'에게 제안을 했는데 "내가 밤을 새워 장단을 가르쳐줄 테니 할 수 있겠어?"라고 물었더니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러겠다고 해서 밤을 새워 반주 음악을 가르쳤고 아주 어려운 장단은 그냥 그리듯이 했다. 기본으로 깐 장단이 도당굿장단이었는데, 도당굿장단하면 기법적으로 정말로 까다롭고 어렵기도 하지만 음악적으로는 고도의 기법과 예술성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그 악과 같이하는 춤도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한사위' 학생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장단을 비슷하게 그려가며 밤새워 연습했고, 다음날 새벽에 학교로 이동해서 포스터를 붙이며 준비했다. 공연을 하려고 대기실에 있는데 햇빛은 눈이 부셨고 밤에 잠을 못 자서 그런지 눈이 시큼시큼하며 눈물이 저절로 났다. 소도구 준비과정에서 물춤을 추기 위해 물자배기가 필요한데 학교에 있을 리 만무하고 여기저기 뒤지다가 그냥 플라스틱 쓰레기통을 잘라 광목을 씌웠고 어디 가서 가마때기 하나를 장만해서 멍석 대신 깔고 하는 그런 식이었다.

그날이 바로 6월 26일이었고, 1시에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바람맞이 춤판이 열린 것이다. 원래는 연우무대라는 작은 실내 공간에서 춤을 췄었는데, 그날 춤을 춘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은 하늘 뚜껑이 열린 것 같았다. 장단이 시작되면서 눈부신 파란 창공이 보이더니 나도 모르게 하늘과 땅을 껑충 오르내리는 춤사위로 바뀌어 붕붕 뛰어올랐다. 당시의 춤판과 관객과 학생들의 기운이 하나가 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춤사위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연우무대에서 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바람맞이가 되었다. 한 시에 시작한 그 춤이 두 시에 끝나니 바로 전국적으로 민주화 대행진이 일어나는 시각이었다. 두 시를 기점으로 서울에서 부산에서 광주에서 대도시와 방방곡곡에서 전국적으로 국민들의 거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신문에 하늘로 뛰어오른 춤 사진(한국일보 최규성 촬영)이 게재되어 모두가 충격이었고 신참이었던 그 기자는 덩달아 유명해졌다.(웃음) 그 춤판에 외신기자를 포함해서 웬 기자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 찍어대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는데, 다음날 보니 춤춘 사람이 서울대 모 여교수라고 하며 '이애주 교수가 민주화 대행진에 불길을 댕겼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 이후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하나의 진혼의식으로서 춤을 추며 뜻하지 않게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자연스럽게 현장과 연결되어 인천 수은공장에서 명을 달리한 16살 소년 문송면, 태백 탄광에 성완희 열사, 거제도 조선소에 이석규 열사 등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례식 등 전국으로 각 지역으로 다니며 또 다른 바람맞이 의식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이한열 열사 장례식 당시의 상황에 대해 조금 더 듣고 싶다.

장례식 때 춤 의식을 치르기 위해 밤을 새워 노동자 풍물패와 대학생 풍물패에게 장단을 가르쳤다. 내 춤을 반주하겠다고 연세대 강당에 전국에서 모여든 200여 명 풍물패에게 짧은 시간에 장단을 가르치느라고 한숨도 못 잤다.(웃음) 나는 학생회 측에 "전 세계에서 외신기자들도 속속 모여들고 있는데 기독교식 장례는 우리 민족 문화의 망신이다. 우리 식의 장례식을 해야 한다"고 몇 번이고 당부했다. 며칠을 토론한 후 마지막 날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우상호(현 민주당 국회의원)가 "선생님 뜻대로 하기로 했습니다"라고 하더라. 그러나 장례식 당일 날 보니 기독교식으로 진행됐고 사회자가 장례식이 끝난 후 모교수가 춤을 춘다는 식으로 발언을 했다. 밤새고 난 새벽에 준비하고 앉아 있는데 후배 조경만(현 목포대 교수)이 "누님, 사회가 춤추게 해야 합니다"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맞는 말이었다. 또 민문연(민족문화연구소) 후배이자 정책국장으로 있던 정희섭이 핏빛 물든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나에게 "누님, 어쩌다가 이렇게 되셨습니까?" 하더라.(웃음) 이런 이야기들을 지금 생각해 보니 참 눈물겹다. 그러고 나서 민주화 운동이 전국적으로 불길처럼 올라 그 열기로 그야말로 사회가 춤춘 것이다.

▲ '승무'를 추고 있는 이애주 교수.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이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13일 이 교수의 퇴임기념 학예굿에서 찍었다. ⓒ프레시안(최형락)

'바람맞이'라는 춤의 이름에 담긴 뜻이 궁금하다.


바람이라는 것은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바람에 의해서 춤이 추어진다. 움직이는 자연이다. 나는 우리 춤을 자연춤이라 하는데 '스스로 自'에 '그러할 然'자라 스스로 그러하게 몸짓이 나오는 거다. 모든 춤은 움직여지는 것이고 그 움직임은 바람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는데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현상, 꽃봉오리가 마지막에 터뜨려지고 씨앗이 흩뿌려지는 등 모든 과정이 자연이고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매개체가 바람이다. 바람은 생명 그 자체로서 생명의 몸짓을 일어나게 하고 쓰러지게 하고 재탄생시키기도 한다. 바람을 맞이해서 스스로 그러하게 같이 간다는 이야기다. 예컨대 해맞이 춤을 출 때 여명이 밝아오며 해 뜨는 찰라 그 밝은 빛을 맞이하게 되고 모든 만물을 따뜻하게 비춰주고 꽃피우게 한다. '맞이'라는 의미는 해가 지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지는 해를 보내고 다음날 뜨는 해를 또 맞이하는 것이다. 바람맞이도 그렇다. 그 춤거리가 씨, 물, 불, 꽃으로 이루어졌는데 맨 처음 씨 춤은 바람에 의해서 흩뿌려진 씨가 싹으로 움트는 과정이다. 물춤에서는 비가 오고 적당량의 물이 있을 때 제대로 된 생명활동을 할 수 있는데 반대로 물이 너무 넘쳐 버리면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물춤이다. 불도 마찬가지인데 불이 없으면 우리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지만 이것을 과도하게 잘못 사용했을 때 사람이 죽어 넘어가고 생명활동은 끝이 나게 된다. 바로 불춤의 주제이다. 마지막 꽃춤은 물고문과 불고문으로 목숨이 스러지고 그 죽음이 거름이 되어 다시 생명의 꽃이 피어나는 상생의 과정을 빚어낸 춤이다.

'맞이'가 '환대'의 뜻이 있는 건가?

춤에 '올림채'라는 춤사위가 있다. 나를 숙이고 비우면서 상대방을 모시는 것인데 '모신다'는 것은 공경으로 맞이한다는 뜻이다. 곧 올리고 모시며 하늘을 맞이하는 의미다.

그 시대 사람들의 열망을 바람맞이 춤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춤은 몸의 언어이자 시대의 언어라고 한 말이 이해가 된다.

루쉰 예술론이든, 마르크스 예술론이든 그리고 좌파이론이든 공통적으로 예술이란 정치, 경제, 사회와 하나로서 인민들의 삶과 같이하는 개념이다. 이전엔 글로만 읽고 알고 있었지 그것을 몸으로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바람맞이를 추며, 이한열 열사의 춤을 추며, '춤은 정치이고 사회이고 모두가 하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기자는 내 춤을 보며 '시국 춤'이라고 했고, 어떤 기자는 사회적인 관점에서 '사회 춤'이라 했고 정치의 관점에서 본 기자들은 '정치 춤'이라고도 했다.

춤은 경제라고 해도 맞는 말이고, 정치라고 해도 맞는 말이다. 결국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모두 연결된 것이 예술이고 그 안의 핵심 정신이 어우러져 움직여지는 운동성이 춤이라고 본다. 1990년대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단독 춤판을 벌였을 때 서울대 민교협 교수들이 많이 오셨는데 그 중 경제학을 하시는 원로 교수님 한 분께서 막이 올라가는 순간 '춤은 경제다'라고 느꼈다고 말씀하시더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 안 되면 막을 올릴 수 없다. 근 7,8년 동안 나는 제대로 된 극장에서 춤판을 벌인 적이 없는데 극장을 얻을 자본도 없고, 정치력도 없고 '내가 가진 것은 오로지 춤뿐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요즘 같아서는 제대로 한번 펼치고 싶다. 2012년이 춤 60년인데, 제대로 60년 춤을 정리해 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웃음)

극장을 마련할 만한 후원을 얻을 수는 없는지?

없다. 공연을 해도 광고 하나 못 얻는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내 일에는 100만 원짜리 광고 하나도 못 딴다.(웃음) 올해 2월에 정년퇴임을 하니 이번 년도 상반기까지를 춤 60년으로 보고 그 안에 꼭 정리를 해야만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몸도 나이가 들면서 달라질 것 아닌가? 호흡도 그렇고 어쩌다 삐끗해서 몸이 잘못되면 영영 내 춤은 구체적 몸짓이 영상으로나마 남게 될 수 없다. 영상으로도 제대로 남겨 둔 것이 없다. 춤을 출 때 함께 하는 반주 가락 연주도 후대를 위해 남겨 두어야 한다. 앞으로 비록 이 세상에서 안 보이더라도 반주 음악이나 영상을 꼭 남겨 둬야 한다. 그 작업을 여태 못했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건 갖춘 극장을 얻고 비용을 다 따져 봤는데 음악, 조명, 연출, 의상을 정통으로 갖추고 음향, 영상 작업 등을 헤아려보니 억대 이상이 든다고 한다. 천만 원도 없는데 말이다.(웃음) 그래서 지금껏 공연을 기획할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올해가 중요한 해이고 앞으로 더 어려워지는 것 아닌가 하는 강박관념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춤 한 판 작업으로 영상 등 자료를 남기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서도 "누님, 그래도 지금 움직일 수 있을 때 남겨놔야죠. 음악도 CD로 남겨 둬서 후손들한테 전해야 됩니다"라는 얘기들을 벌써 십여 년 전부터 한다. 같이 했던 동료·후배들의 말이다. 1989년에 스승이셨던 한영숙 선생님이 타계하셨다. 그 이듬해인 1990년에 '한영숙 류 이애주 춤'을 호암아트홀에 올렸는데 그때 내 춤의 연주를 바람맞이 장단을 같이 했던 김덕수, 이광수 같은 명인들과 선율악기 명인들이 붙어서 해주었다. 한 20여 명 정도의 연주단이 자발적으로 반주를 한 것이다. 그야말로 차비 정도도 제대로 못 챙겨 줬을 거다. 요즘도 지방에 심사를 가거나 학술대회 등에서 만나면 "누님, 우리 그때 했던 것 빨리 재연합시다. 우리들도 이제 기운이 좀 약해집니다"라고 말한다.(웃음) 자기네들이 더 하자고 한다. 그런데 내 몸은 더 급박하다.(웃음) 사실 겁이 난다. 한번은 다리가 아파 쓰러진 적이 있는데 '이러다 영 못 일어날 수 있겠구나. 이제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바로 다리를 너무 쓰고 혹사해서 생긴 직업병이라고나 할까. 지금은 회복해서 일어나 춤을 출 수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만할 때 꼭 남겨야 한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는 거다.

▲ "춤은 경제다"라고 말하는 이애주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혹시 기득권들이 싫어하는 현장에서 춤을 췄던 것이 대관도 힘들어지고 후원도 받기 힘들어지게 한 것은 아닌가? 그런 상황들을 실제로 맞닥뜨릴 때 타협하고 싶지는 않았나?


타협이라는 것조차도 생각해 본 적이 없고 그냥 내 갈 길을 가는 거다. 타협이니 비타협이니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나한테는 질문 자체가 안 맞는 질문이다. 어렵지만 내가 추구하는 것을 계속하다 보면 뜻 맞는 사회와 뜻 맞는 사람들을 만나 잘 될 때가 있겠지. 오로지 자기가 생각한 그 길을 가는 거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서민들의 지갑이 가장 닫히는 것이 문화 · 예술 쪽이고, 정치적으로 찬바람이 불 때 제일 먼저 칼바람을 맞는 곳 또한 저항적 기운이 센 문화 · 예술 쪽이 아닌가 싶다. 제2의 IMF라며 힘들었던 2009년 인터뷰에서 "빈곤한 무대를 겪고 나니 춤이란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사회·경제와 맞물리는 예술 양식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고 이야기했는데, 한 사회에서 예술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지구가 망가지고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홍수와 가뭄이 많아지고 온도도 올라가면서 환경도 파괴되는 상황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당연히 어렵다. 왜냐, 춤이 예술이 자연 그 자체니까. 춤은 정치, 경제, 사회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제대로 춤을 출 수 있는 건데, 그 조건이 너무나 안 맞아떨어진다. 가진 자는 너무 많이 갖고 그런 사람들이 즐기고 원하는 부류의 예술만 많이 발표된다. 나같이 본질과 본성을 추구하는 자연 춤을 추는 사람은 모든 조건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내 경우에 그렇다는 얘기다.(웃음)

현대 사회가 다 그렇지만 특히 한국에서 예술을 하기 위해선 돈이 많이 필요한 것 같다. 특히 춤은 종합예술이라서 다른 것보다 더 많은 자본이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떤가?

복합 예술인 춤 분야에서는 모든 조건이 융합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발표조차 할 수 없다. 공간적 제약 때문에 연습조차 하기 어렵다. 춤 반주가 되는 생음악을 실제로 못하면 녹음이 된 음악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녹음을 한번 하려고 하면 몇천 대를 능가한다. 명인들을 자리에 모으려면 그 정도 비용이 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중요무형문화재이기 때문에 1년에 한 번씩 문화재 '승무' 공개 행사를 해야 하는데, 문화재청의 지원이 너무 미약해서 그걸 가지고는 한 시간은 넘어야 하는 공연 한 판을 채울 수가 없다. 승무만 3, 40분 내외로 발표하고 오신 손님들을 가라고 할 수 없으니 다른 프로그램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다 자본이다.

며칠 전 문화재 공개행사에서 승무를 하는데 생음악도 제대로 못 쓰고 더구나 승무 의상인 장삼에 구멍이 나서 북 가락이 빠져나와 망신을 당했다. 제때 못해 입으니 그런 것인데 장삼을 한 번 새로 하려면 기백만 원이 든다. 600만 원 정도의 지원을 받는데 연주나 소리를 하시는 분들은 모르지만 춤은 그렇지가 않다. 생음악을 써야 하고, 의상을 맞춰야 하고, 조명에서부터 무대 구조까지 모든 조건이 춤에서는 달라진다. 그런데 똑같은 금액을 주고 춤 공연을 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는 정말 못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마이크 잡고 이야기를 했다. 정말 예술무대를 만들 수도 없고 해서 내가 직접 사회를 보면서 춤 이야기를 해가며 공연을 진행했는데, 춤에 맞는 극장 공간을 못 잡고 간편하게 해야만 했던 중요무형문화재 전수회관 풍류극장은 춤에 맞는 조건이 전혀 아니었다.

음악 연주는 몰라도 움직이는 공간이 필요한 춤은 그렇지 않다. 무대가 옆으로만 길쭉해 춤을 추기에는 전혀 맞지 않은 모양이었다. '헥헥'거리는 입김이 관객 앞까지 가서 민망할 정도로 확보 거리가 전혀 없었다. 생음악도 쓸 수 없어 처음에는 녹음에 맞추어 하고 북 치는 대목부터는 직접 장구와 바라를 두드리며 해설도 하는 식으로 공연을 진행했다. 재작년 행사 때에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 "이런 식으로 학예회처럼 하기 싫으니까 특수 분야에 지원을 늘리든가 2~3년 치 지원을 모아서 최소한 음악이라도 갖추고 춤을 추면 좋겠다"고 했는데 반영이 되지 않았다. 옛날 문화재 관리국 시절에는 인간문화재들의 발표를 위해 큰 극장을 잡아 각자 한 종목씩 발표하도록 했다. 그런 방식으로 하면 인간문화재들이 다른 것 신경을 덜 쓰고 자기 종목에만 매진할 수 있게 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승무에만 매진할 수 있고 말이다.

요즘에는 공연 자료집을 만들고 장소를 얻고 모든 기획을 알아서 해야 하니 힘든 것이다. 옛날처럼 며칠 기간을 잡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유산축제'의 성격으로 전 국민 대상으로 세계의 축제로 만들어 가면 좋겠다. 지역 축제에는 지자체에서 지원을 잘해 주는 것 같은데 정작 문화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인간문화재 공연은 학예회 수준으로 만들 수밖에 없고 창피할 정도이다. 인간문화재 종목들이 마음껏 춤도 추고 악기하고 소리도 할 수 있게 있다면 훌륭한 사업도 될 것이다. 우리 문화유산을 살리는 의미에서 입장권을 판매할 수도 있고 기업에도 후원을 요청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오히려 문화재에 후원할 수 있는 판이 만들어져야 한다. 더 이상 개인적으로 마련해야 하는 허술한 무대에 서고 싶지 않다. 그러니 '춤은 경제다'라는 이야기가 자꾸 떠오르는 것이다.

좀 다른 얘기이지만 예술뿐 아니라 어느 학문 분야라도 제대로 하려면 어렵다. 서울대 경제학과 김수행 명예교수가 마르크스 경제학, 자본론을 했었는데 그 때문에 굉장히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이것을 보면 예술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제대로 하려고 하면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춤이 경제라는 말이 참 가슴에 와 닿는다.

춤은 경제인데, 경제는 정치와 연결되어 있다. 춤은 정치라는 말도 결국은 정치와 경제가 연결되어 하나라는 말이다.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서 이런 점이 정말 어렵다.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라는 것은 중앙에서 지정된 국가지정 문화재인데 시·도 단위에서 지정되는 그냥 '무형문화재' 종목들이 오히려 지역 차원에서 더 많이 지원을 받는다. 예컨대 각 시, 도에서는 자기 지역의 지정 무형문화재에 지원을 해주고 우리는 국가지정이고 역사도 오래지만 오히려 찬밥이다. 또한 예술원이나 학술원 회원도 우리보다 더 많은 지원을 받는다. 현대예술이 못하다는 말이 아니라, 만년의 역사를 끌어온 살아 있는 국보급 종목이, 현대예술의 어버이라고 할 수 있는 종목이 어떻게 더 낮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가. 그런 것도 시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진짜 중요한 국보급 문화재들에게 좀 더 지원을 해 주어 제대로 맥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틀로 볼 때 만년 이상 문화의 맥을 이어나가기에는 너무 어려운 점이 많다. 그런 게 힘들다. 87년을 지나면서 몇 년 동안 여기저기서 정당에 들어와라, 비례대표를 해라, 뭘 만들자는 등 온갖 제의가 많았다. '만약에 했다면 이런 문제점들을 다 바꿀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까지도 들 지경이다. 만일 그랬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웃음)

이제 조금 더 개인 이애주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다섯 살 때부터 춤을 추었는데, 중간에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지?

춤 자체로는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그런데 70, 80년대부터 현장에서 했을 때 밖에서는 이해도 못 하면서 말도 안 되는 반응들이 나올 때 또 현대 자본사회에서 뭐 하나도 특히 춤판 하나도 제대로 펼칠 수 없을 때는 고민이 많다. 춤은 종합 예술이기 때문에 내 몸짓만 가지고 안 된다. 음악에 의상에 조명에 무대까지 붙어야 할 것이 더 많다. 그런 면에서 너무 힘들면 힘이 빠지고 처지게 된다.(웃음) 그렇지만 반대로 극한 상황을 넘어서기만 하면 어떤 것도 따라올 수가 없다. 그래서 춤이 위대한 거로 생각한다. 편한 것, 간단한 것만 해왔다면 오늘날의 내가 있겠는가. 어렵지만 내가 극복하고 그대로 가는 것이다. 또 지나고 보면 그런 것들은 별 게 아니고 여하간 몸짓이 최고더라. 몸짓을 통한 인간의 깨달음, 삶의 깨달음, 생명의 깨달음이 궁극의 화두이다.

"고 3 때 무용협회 주최 콩쿠르에 나가 장구춤을 췄는데, 춤만 춘 게 아니고 본격적인 가락을 넣어서 설장구를 막 두드려 부수면서 추니까 만장일치로 특상을 받았다"고 했다. 창조적 즉흥성, 그 자유는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런 창조성을 기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어렸을 때 일들을 지내놓고 보니 그것이 창조성이다. 우리 춤에는 즉흥이 있다. 춤을 추며 팔을 올릴 때 어떤 경우에는 굿거리장단에 올릴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제일 느린 장단에서 전혀 다른 방법으로 들어 올릴 수도 있다. 출 때마다 달라진다. 한국 춤의 장점이 기운에 따라 늘였다 줄였다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즉흥성이다. 생각의 확장, 몸짓의 확장, 판의 확장 등이 나중에 상징적으로 그렇게 표현된다. 그렇지만 그 안의 정신과 틀은 그대로다. 우리 선생님이 그렇게 자유자재로 춤을 추실 때 '저게 뭔가' 하고 따라 할 수가 없었는데, 나도 춤을 춰온 60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며 그렇게 되었다. 즉흥성이 고도로 가면 그 자체가 그냥 창조성으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장단과 동작이 자유롭게 극대화되면서 창조로 나타나는 것이다.

20대 때 대학원 졸업 후 춤을 공부하기 위해 교수직을 포기했다고 들었다. 교수라는 직업은 모두가 선망하는 직업이었는데?

대학원 졸업장을 받기 전에 이미 모 대학교에 교수로 내정되어 있었다. 방콕 아세안 올림픽 때 예술단으로 2개월 돌고 오니까 그렇게 되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그런데 그 무렵 한영숙 선생님이 승무 문화재로 지정되시면서 그것을 전수시킬 제자로 나를 발탁해 주셨다. 직전에 훌륭한 선생님들이 다 돌아가시자 덜컥 겁이 났을 때였다. 특히 '한영숙 선생님께 꼭 공부해야 하는데' 하고 있었는데 우리 집 형편상 독공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첫 제자로 들어오라고 하셔서 너무나 행복했는데, 마침 그 직전에 교수로 내정돼 있었다. 첫 학기 시작 전인 2월 말에 교수 자리 연결을 하셨던 선배 교수께 못하겠다고 하니 이해를 못 하시더라. 충격을 받으시며 "너가 이런 식으로 하면 앞으로 우리 졸업생들은 아무 데도 취직 못 한다"고 매우 노하시더라. 내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더라도 그렇게 이야기했겠다.(웃음) 그래도 내가 "지금이 아니면 춤을 공부할 수 없게 됩니다" 하고 고집을 피우니, 나를 끌고 당시 원로 교수이셨고 나의 정신적 스승이셨던 이병위 교수님께 갔다. 이 교수님께서 자초지종을 다 들으시더니 "O군, 애주 양을 공부하게 놔둠세!" 그 한마디로 끝났다. 역시 스승님이셨다. 이 분 덕분에 홀가분하게 해결되었다.(웃음)

집에서는 내가 교수가 됐다는 사실에 모두가 기뻐하고 있었는데 차마 그만뒀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그냥 고민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한영숙 선생님께서 어머니한테 말씀을 드렸는지 그날 저녁에 난리가 났다. 그때는 엄마와 둘째 오빠네 내외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다음 날 아침 밥상에서 '네가 인제 네 밥벌이를 해야지 또 오빠한테 손 벌리려 한다'며 뭐라 하시는데 그 말을 다 듣고 있던 오빠가 "어머니, 그냥 애주 공부시킵시다. 학자 한 명 키웁시다" 그러더라. 그것 하나로 또 된 거다.(웃음) 이런 것들이 다 해결된 후에 편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공부의 궁극 목적이 결국은 바르게 살면서 진짜 깨달음을 얻어 가자는 것인데, 춤의 목적도 마찬가지다. 춤을 왜 추는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왜 사는가라는 궁극적 물음으로 간다는 면에서 같은 것이다. 교수도 마다하고 공부하겠다고…. 참, 그러고 보니 나는 역사 이래에 없는 일을 굉장히 많이 한다.(웃음) 바람맞이라는 춤의 형식도 내용도 역사에 없다. 국민적 장례식 때 춤을 춘 것은 어느 나라의 역사에도, 춤 역사에도 없다. 내가 생각해도 딴 사람이 나를 참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웃음)

이십 대 후반에 교수임용이 된 것인데 어린 나이에 앞날이 보장되는 교수자리를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교수고 뭐고 다 싫고, 이거 안 하면 나 죽는다, 이것을 꼭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웃음)

뭔가를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면 뒤돌아보지 않고 뚫고 가는 타입인 것 같다.

그렇다. 내가 행한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보면 결국은 중심을 잡고 본질을 추구하는 것에는 양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거 아닌가. 그것을 생명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이애주 교수는 일제 치하 식민지 표현인 '무용'이라는 단어 대신 우리나라 말인 '춤, 마당, 판'을 처음 공식적으로 썼다. ⓒ프레시안(최형락)

지금 모두가 당연히 쓰고 있는 '춤, 마당, 판'이라는 말을 1974년의 '제1회 이애주 춤판'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썼다. 그때 '배운 애가 무식하게 춤이 뭐냐, 판이 뭐냐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는데, 사실 개인적으론 '무용'이라는 말이 식민지 표현이라는 것을 인터뷰 자료 조사를 하면서 처음 알았다. 이렇게 비판을 받으면서도 '춤, 마당, 판'이란 이름을 쓰기로 작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1974년에 개인 춤 발표를 했다. 그런데 발표회 제목을 그 당시는 '이애주 무용발표회'라고 하여야 했는데 도저히 그렇게 쓸 수가 없어 '이애주 춤판'이라고 했다. 왜냐, '무용'이란 말은 일제 강점기 때 들어온 식민 용어로서 그때부터 춤이, 몸짓이 본격적으로 왜곡되고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래 우리가 쓰던 '춤'이란 용어를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말로, 글로 나오고 앞으로 연구의 기본 토대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무슨 배운 사람이 상스럽게 춤이라고 하나"라며 비판하기 시작했다. 신문 사설에까지 격에 맞지 않는 용어를 쓴다고 욕을 먹었다. 배운 사람이 지식인답게 무용이라고 해야지 하며 사적으로도 비난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나는 서구식의 사각 극장 무대와 달리 우리의 무대는 열려진 공간 개념의 마당이고 그 열려진 마당을 총칭하는 것이 판이라고 생각했다. 장소 개념만이 아닌 닫혀 있는 정신의 열림까지도 생각했다. 그래서 '춤판'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거의 매일 만나던 우리 문화패 몇 명이 서울 문리대 앞 '타박네(우리나라 카페 1호)'에서 왁자지껄 토론을 벌이며 통금 시간이 가까워져 올 때인데 누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바로 유홍준 교수로 옆구리에 보자기로 싼 것을 끼고 있었다. 펼쳐보니 고구려 고분 벽화가 담긴 북한에서 펴낸 책이었다. 당시엔 북한 책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옥 가는 행위였다. 일본에서 다시 펴낸 <고구려 고분벽화> 영인본이었는데, 첫 장을 들추자 '무용총'이라고 배운 말이 순수 우리말로 '춤무덤'이라고 되어 있었다. '삼실총'은 '세칸무덤'으로 '각저총'은 '씨름무덤'으로 되어 있더라.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고 '내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었구나' 하고 정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식민용어로 바꿔진 우리말을 제대로 회복시키려고 하는 사람을 두고 불온한 용어를 쓰는 색깔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분류시켰고 국립극장 '블랙리스트' 10명 안에도 포함돼 있다고 들었다. 이 사람들이 극장을 빌리려고 하면 대관 절대불가라는 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우리말인 '춤'이 많이 대중화 되었지 않나. 진짜 우리말을 제대로 쓸 때 사고와 행동이 바르게 된다. 서구식으로 무용이 어떻고 댄스가 어떻고 하면 행동 몸짓도 그렇게 되는 거다. 예부터 해 오던 변할 수 없는 순수 몸짓을 춤이라고 하면 된다. 그 당시 나는 무용계에서 쓰는 전체 춤 용어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뿐만 아니라 예술 용어, 학문 용어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부터 실천하자 하고 내 분야에 관해서는 용어를 본래대로 바꾸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민족문화의 복원이라는 것을 생각했고 현재 이 문화가 어떻게 중심을 갖고 나아가야 할 것인가 끊임없이 생각했다.

청년 시절 이애주를 생각하면 어떤가?

현장에 나오기 전인 학창 시절, 전통춤만 출 때는 '정말 춤 잘 추네'라는 소리를 듣던 평범한 어린 학생이었다. 그러던 내가 민주화 과정에서 현장춤으로 각종 집회에서 드러났다. 그러다 보니 각 대학의 축제에는 거의 다 초청을 받았다.(웃음) 전통춤만 추던 전통춤의 춤꾼이 시대와 역사의 아픔과 연결된 첨예한 시기에 창조적인 현장춤의 춤꾼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각 대학의 젊은이들과 노동현장의 젊은이들과 많이 어울리게 되었다. 그때는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푸릇푸릇하니 젊었다.(웃음)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중 한복을 입고 꽃을 든 사진을 보니 무척 앳되어 보였다. 지금으로 치자면 학생 운동의 아이돌이었을 것 같다.(웃음)

그런가?(웃음)

88년 이후에 민중 개혁 춤 활동을 중단했던 이유가 몸으로는 안 뛰고 입으로만 활동하는 사람들에 문제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당시의 고민에 대해서 듣고 싶다.

기본적으로 갖춰야 될 기본 토대, 기본 실력이 안 되어 있구나 하는 것을 여러 상황에서 느끼고 있었다. 좀 더 기본적인 공부를 하고 중심이 제대로 잡힌 후에 서로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 자신부터 기본을 다시 정리하고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10년간 승무에 매진해서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좀 독한 것 같기도 하다.(웃음)

나는 그냥 가야 할 길을 간 것뿐인데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안 하니까 상대적으로 내가 독해 보이는 거다.(웃음) 아니 독한 것이 아니고 그냥 생각대로 해 온 것뿐이다.

제주 4·3 희생자,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핵 없는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2012년 10월에는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죽음을 추모하는 대한문 앞에서 특별한 무대 없이 춤을 추었다. 계속해서 춤으로 현장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쌍용자동차 현장에서 춤을 추었을 때 느낌이 궁금하다.

그거야말로 몸으로 말한 것이다. 일상적인 삶의 과정에서 내 말과 생각을 몸으로 표현한 것인데 다른 이가 봤을 때는 춤으로 보인 것이다. 부당하게 죽어간 생명, 억울한 죽음, 농성 현장 등 모든 삶의 문제에서 맺히고 잘못 된 것은 풀어주고 해결되어 제대로 나아가야만 생명이 생명답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즉흥 몸 의식을 드린 것이다.

망자의 혼을 불러들여 위로할 때, 특히 살풀이를 할 때는 자기를 비워 내주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것이 힘들지는 않은지, 그런 비움의 작업들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

힘들다기보다는 오히려 나 자신을 다 내려놓고 비우기 때문에 홀가분해지고 편안해진다. 몸과 정신이 맑아지면서 '뭔가 해야 될 것을 해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필요 없는 것을 다 비워낼 때 뿌듯함 같은 것이 꽉 차는 거다. 비움이 곧 채움이다. 무소유라는 것이 다 버리는 것 같지만 그 텅 빈속에 맑고 밝은 기운이 꽉 차는 게 무소유다.

전쟁을 할 때 나팔수가 있듯, 민주화 현장에서나 쌍용자동차 현장에서나 춤을 통해 사람들의 기운을 일으키는 역할을 해왔다. 그렇기에 어떤 면에선 자기가 서 있는 자리, 지향하는 삶의 방향에 대한 믿음이 더 많이 필요했을 것 같은데, 그 방향을 잘 잡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나?

▲ 이애주 교수는 쌍용차 추모제에서 춘 춤이야말로 "생명이 생명답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즉흥 몸 의식을 드린 것"이라고 말했다. ⓒ프레시안(최형락)
방향을 잘 잡겠다고 생각을 했다기보다는 늘 기초를 닦으며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던 자연스러운 것을 한 것이다. 삶 자체를 제대로 살아가고 생각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바른 쪽에 서서 바른 몸짓을 하려고 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 방향을 일부러 잡으려 한다고 되겠는가. 지나고 보니 '사람으로 걸어야 할 길을 제대로 걸어오긴 한 건가'라는 생각이 든다.

솔직하게 춤을 출 때 나의 의식과 타인의 시신을 의식하지 않는 게 어려울 것 같은데 어떻게 춤에만 집중할 수 있는지? 춤을 추다가 사람들의 기에 얼어붙어 버린 적은 없는지?

중심이 안 서 있고 경험이 없을 때 사람들 앞에 서면 얼고 떨 수도 있다. 나는 비교적 춤을 오래 추고 현장과 하나 되다 보니 오히려 남들의 시선이 상생의 기운으로 바뀐다. 타인의 기운과 내 기운이 하나가 되어 신명의 판으로 바뀔 때 그것이 바로 희열이다. 희열.(웃음)

사람들의 시선을 춤을 출 때의 에너지로 삼나?

당연하다. 나 자신은 물론 그 기운이 함께 축적되면서 새 판의 장이 펼쳐진다. 그리고 춤이란 또 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흥이 난다.

기사를 발행해도 아무도 안 읽어주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말인가?(웃음)

그렇다.(웃음) 하지만 춤을 추려면 사람만 많다고 중요한 게 아니다. 일당백이라고 수가 적어도 그것을 정말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인식하게 되면 상생이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춤꾼과 관객의 기운이 맞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맞다. 요새 유명한 오페라니 연주니 하면서 대기업에서 후원한다고 하여 표를 몰아서 구입해 회사원들에게 다 나눠준다고 들었다. 그런데 연주자 입장에선 분위기가 안 살고 그 기운이 모이지 않아 연주를 망친다고 하더라. 연주자는 무대에 나가면 들을 만한 사람들이 왔는지 그냥 회사에서 표를 주니까 문화경험 한번 한다고 왔는지 단번에 알게 된다. 그러면 공연이 망하는 거다. 내가 현장에서 바람맞이를 출 때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모였기 때문에 불꽃이 튕겼던 거다.

이애주에게 전통춤이란 무엇인가?

한쪽에서는 내가 추는 춤을 순수예술이 아니고 어쩌고 말들이 많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순수의 개념이 무엇이냐가 관건인데 정치, 사회, 경제, 역사 등 모든 것이 융합된 시대의 삶, 민중의 삶에서 나오는 의지의 표현이야말로 순수예술인 것이다. 특히 전통춤에 일춤이나 탈춤, 놀이춤 등을 보면 그 시대의 사회상, 역사성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예컨대 양반에게 천대받고 억압받던 민중의 몸짓, 그것을 푸는 신명의 몸짓 등이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그 당시에는 그 춤들이 또 다른 저항의 몸짓이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려웠지만,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깨달아가면서 지금까지 왔다는 것에 참 행복하다.

말한 것처럼 전통춤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왕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춤, 또 하나는 억압받는 민중의 한을 풀어주는 춤, 이 모두가 다 전통춤인데, 이애주의 춤은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나?

전통춤의 99.9…% 즉 거의 다가 민중의, 민중을 위한 몸짓이고 그 나머지 극소수가 왕과 양반들을 위해 추던 몸짓이다. 82년에 서울대 부임을 해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그 당시에는 학생운동이 거셀 수밖에 없었고 데모도 많이 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학생들에게 기본을 가르치다 보면 그 자체가 민중춤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궁중춤의 대표격인 '춘앵전(春鶯囀)'을 가르쳤다. '춘앵전'과 같은 궁중춤은 삼진삼퇴와 좌우대전이라는 간이한 틀로 구성되어 있다. 제자리에서 앞까지 나아갔다가 절하고 창사로 할 말 하고 좌우회전으로 돌다가 다시 왔다갔다하고 빙그르르 크게 돌고 본래 자리로 돌아 와서 끝나는 춤이다. 그렇게 간결한 형식일 수가 없다. 그런데 어느 학생이 "선생님,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왕조의 궁중춤을 가르치십니까?"하더라. 궁중춤의 단순하고 간이한 틀은 극소수의 상위층들이 향유하던 춤이었고 민중춤은 억압받아 오던 대다수 서민, 민중들이 하던 것이기 때문에 그 당시 현실에서 그런 질문이 나올 수 있었다고 본다. 학생들이 그렇게 성토하듯이 질문을 하자 나는 궁중춤 속에 안 보이는 보편적인 의미를 설명하면서 "인간의 삶 자체가 이렇게 단순 명료한 것이다. 민중의 춤도 즉흥적으로 자유롭게 추지만 결국은 진퇴의 문제이고 생사의 문제로 간결하게 정리된다"라고 얘기했다. 춤 연구자로서, 교육자로서 몸짓의 역학·몸짓의 구조에 나타난 간단명료한 철학을 가르쳤다고나 할까. 최고의 춤은 가장 단순하고 쉬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간이(簡易)의 철학'이다.

많은 청년들이 문화예술인을 장래 희망으로 삼고 있는데, 주로 순수 예술보다는 아이돌 같은 대중문화예술인이 되고 싶어 한다. 그 자체를 탓할 것은 아니지만 순수 예술, 그중에서도 한국 전통 예술을 하는 사람들 또한 많이 나와야 우리 문화예술이 튼튼해질 텐데 이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청소년들이 우리 유구한 역사의 진짜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가 없다. 정통성이 무엇인가를 공부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웃음) 정말 교육이란 것은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연아나 손연재가 어떻게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의 혼이 알게 모르게 밑받침이 되어 무한대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남들은 짧은 동작으로 끝낼 것을 김연아는 영혼의 움직임으로 길게 늘이지 않는가.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감탄을 하는 거다. 사람 마음을 이완시켜 주고 행복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손연재도 어리지만 갑자기 두각을 나타냈다. 손연재가 체조하는 것을 보다가 다른 나라 1등 하는 선수가 하는 것을 보니 영 못 봐주겠더라.(웃음) 흐름이 뚝뚝 끊기는데 손연재의 동작에는 무한한 연속적 부드러움이 나타난다. 역사의 혼, 민족의 혼이 알게 모르게 배어 있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강수진 같은 유명한 발레리나가 발레로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강수진은 유려한 긴 호흡으로 영원한 선으로 늘이며 유럽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이다. 이러니 제대로 체계적인 교육만 이루어진다면 어떻겠는가.

그러니 민족혼의, 민족문화의 기반 토대가 되는 예컨대 정통의 중요무형문화재를 대우해주고 잘 활용하여 모든 후손들에게 제대로 이어질 수 있게 해 줘야 한다. 내 바람은 몸으로 체득할 수 있게 하여 그 맥을 제대로 잇게 하는 것이다. 제대로 맥을 잇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대학 체제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서울대학교에도 춤 전공은 없다. 체육교육과라도 있어서 내가 이만큼 해 왔지만 더 이상 기대할 수가 없고 본격적 교육기관인 춤 학교·춤 대학이 있어야 한다.

실질적 춤 자체의 교육은 물론 제대로 된 역사 교육, 민족혼 교육, 민족 철학과 사상 교육을 바탕으로 하는 전통의 몸짓을 가르치고 싶다. 그래서 정말 융합적인 우리의 몸짓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춤 대학이 있으면 좋겠다. 우리 민족춤을 제대로 교육하다 보면 창조적인 시대의 춤, 세계적이고도 우주적인 춤이 거기서 또 나올 것이다. 우리의 정통 몸짓을 제대로 체득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고 특히 창작에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초 교육부터 자기 민족의 정통 몸짓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기관이 없다. 내게 우리 몸짓을 제대로 교육할 수 있는 자율성을 준다면 춤 학교를 제대로 만들어서 교육하고 싶다. 우리 후손들뿐 아니라 생명의 정통몸짓을 원하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지금 현재의 꿈이다. 학교도 그만두는데.(웃음)

우리의 정통 몸짓을 제대로 전수할 수 있는 '춤 대학'에 대한 꿈이 참 멋지다. 이 꿈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내 제자라든가 극히 일부의 동료들은 함께 공유한다. 특히 내가 속했던 민교협 교수들이 대단히 격려해 주신다. 내용은 다 가지고 있다. 기반만 갖추어지면 된다. 그러나 물적 토대가 없는 것이 문제다.

▲ 이애주 교수는 "전통춤의 99.9…% 즉 거의 다가 민중의, 민중을 위한 몸짓"이라며 한국 전통의 몸짓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춤 학교·춤 대학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프레시안(최형락)

한국전통 예술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선 전승하고자 하는 앞선 세대와 전승받고자 하는 뒷 세대의 노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청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싸이처럼 대중 예술로 한류를 일으키기도 하고 다른 부분에서도 잘들 하고 있지만 갑자기 드러나서 각광받는 것만이 한국의 문화가 아니고 그것들을 지탱해 줄 정통의 한류 즉 기본 토대의 본질, 정통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청년 대중문화만 열광하지 말고 지루하고 재미없더라도 한국인의 끈기로 내재된 힘, 역동적인 힘, 그 깊이 있는 혼의 무게를 인식해야 하고 공부해야만 한다. 그 예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은 전 세계에서 반드시 계승해야 할 문화유산을 지정하는 제도 아닌가. 그 제도가 바로 1964년에 시작된 우리나라의 중요무형문화재 제도를 보고 만든 것이다. 이런 판에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문화재들이 허술하게 대우받고 제대로 활동도 못하고 있다. 진짜 본류의 한류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전 세계에 영적인, 정신적인 지도까지 연결되어야 한다.

이애주에게 '자유'란?

'자유'는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자연은 '스스로 자(自)'에 '연유할 연(然)' 아닌가. 스스로 그러한 것을 그대로 허용하게 할 때 그것이 '자유'다. '자유'는 생명이고, '자유'를 하는 사람은 '자유인'이다. 나 스스로 그러한 것을 허용하고 그렇게 하다 보니 내가 60년간 추어왔던 우리 춤에 자유의 몸짓이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 춤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70년대 초부터 삿포로 동계 올림픽, 뮌헨 올림픽, 방콕 아시안게임 등 공산권까지 합쳐 30개국 이상을 돌아다녔다. 갈 때마다 국빈대우를 받고 꼭 국립무용단, 국립무용학교에 가서 그들 춤도 보고 교류도 하였다. 그러면서 느꼈던 것은 우리 춤만큼 인간의 본성을 자유롭게 놓아 주는 몸짓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짓은 온몸을 써서 육체와 정신이 자유로워지는 해방의 몸짓이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생각에서 나는 자유를 본다. 자유의 몸짓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사람이 자유인이다. 자유인은 행동을 자연스럽게 하고 자연스러운 사상을 갖고 궁극적으로는 사람다운 생각을 하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자유인인 것이다. 나는 그것이 자유라고 생각한다.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손어진, 김민희)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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