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 뒤가 아니라 강 건너 있는 나라였다"

[인터뷰]대북 의료지원 10년 스티븐 린튼 회장을 만나다

스테판 린튼 회장은 말을 아꼈다. 유진벨 재단 창립 10년만에 처음이라는 28일 기자간담회에서도, "여기서는 편하게 말할 수 있다"던 집무실에서도, 대북 인도지원을 중단한 한국 정부에 대해 직접적인 논평을 피했다.

"남의 하는 일을 평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한국인들은 긴 안목을 갖지 않고 대책없이 지원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돈으로 마음을 사겠다는 접근에는 문제가 있다. 일방적으로 돕겠다는 게 아니라 필요한 일을 같이 하고 같이 돕고 같이 믿는 파트너십을 맺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단단히 하고 싶은 말이 있을 텐데도 아끼는 것은 유진벨 대북 지원액의 3분의 1이 우리 정부의 호주머니에서 나오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눈치'를 보는 사람이라면 "나는 한국 정부의 종"이라고 납작 엎드려버리기가 오히려 더 어렵다.

"정부 지원도 상징적인 것보다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비료 지원은 큰 역할을 했다. 북한에 가면 한국에서 온 비료부대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만 말하겠다. 감히 말한다면 식량 지원은 못 하더라도 비료라도 줘야 한다. 미국 정부도 유진벨이 하는 일에는 아무 얘기 안 한다."
▲ 유진벨 재단의 스테판 린튼 회장 ⓒ프레시안

"북한에는 남쪽서 온 비료부대가 널려 있다"

유진벨 재단은 북한의 결핵퇴치를 비롯한 각종 질병 치료를 위해 의약품과 의료물품을 지원하는 민간단체다. 국내 최초로 대북 보건의료사업에 나선 유진벨은 1997년 북한 보건성으로부터 북한 내 13개 결핵예방원과 63개 결핵요양소를 대상으로 결핵환자에 대한 의료지원을 공식 요청받으며 대북 지원사업의 '맏형' 노릇을 하게 됐다.

1996년 의료 지원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16개 결핵예방원과 결핵전문병원에 이동 엑스레이 검진차를 1대 이상씩 총 18대를 지원했다. 50여개 결핵예방원과 요양소에는 약 21만 키트에 달하는 결핵약을 비롯해 100여 대의 엑스레이 진단 기계와 400여 대의 현미경, 18세트의 수술실 패키지 등을 보냈다.

이렇게 10년간 지원한 약품과 장비는 약 400억 원 어치에 달했고, 20만 명 가량의 결핵환자가 유진벨의 직간접적인 도움으로 병에서 나았다. 현재 후원액은 한국 정부 지원금과 한국 민간 후원금, 해외(주로 미국) 민간의 후원금이 각각 3분의 1씩 차지한다. 린튼 회장은 "해외 민간 후원액도 대부분 한국 교민들이 내고 있어 유진벨은 한국 사람들의 심부름꾼에 불과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그 '심부름꾼'은 이미 모여져 있는 돈과 물자를 전달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후원자를 모으는 일, 정부를 설득하는 일, 그리고 가장 힘들었던, 북한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 일 모두를 유진벨이 홀로 감당해야 했던 고난의 10년이었다.

"북한이라는 말을 들을 때 많은 사람들은 장벽을 생각한다. 베를린 장벽 같은. 그러나 북한은 장벽 뒤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넓은 강 건너에 있는 나라였다. 우리는 지난 10년간 넓은 강을 건너는 디딤돌을 놓는 사업을 했다. 처음에는 환자도 못 만났는데 이제는 차트까지 볼 수 있다. 한국이나 미국에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그 강물이 많이 얕아진 것 같다. 디딤돌을 놓고 강 건너편까지 거의 온 것 같다"

미국인 선교사 유진 벨의 외증손자로 태어나 자신도 두 번씩이나 결핵을 앓으면서도 북한 의료지원의 한 길만 달려온 린튼(한국명 인세반) 회장은 지난 세월을 이렇게 말했다.

"유진벨의 메시지는 '그 친구들(북한), 상대하기 어렵고 고집에 세다. 그러나 오랫동안 깨끗하게, 그리고 상처를 주지 않는 방향으로 만나면 그 어느 나라에 대한 지원보다 더 많은 걸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린튼 회장이 북한 평천구역의 인민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장면 ⓒ유진벨 재단 제공

북한 접근보다 모금 능력 약화가 더 문제

모든 지원대상 의료기관을 1년에 최소 한 번 이상 방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 유진벨은 지난 4일부터 18일까지도 평안북도와 평양 인근의 19개 의료기관을 방문했다.

직접 북한에 다녀온 린튼 회장은 "핵실험 이후의 긴장에도 불구하고 북한 보건성이 민간단체를 대하는 입장은 한결 더 부드러워진 편"이라며 "일부 지역의 경제난은 전보다 나아진 것 같았지만 의료기관의 사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북한 관계자들이 더 이상 외교문제와 인도적 차원의 민간교류를 연관시키지 않고 분리시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걱정스러운 것은 남쪽의 분위기. 핵실험 후 '북한에 퍼준 돈으로 핵무기를 만들었다'는 여론이 확산되면서 아무리 웬만한 일에 영향을 받지 않던 유진벨의 후원사업도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린튼 회장은 "핵실험이 최근 일이기 때문에 얼마나 영향을 받을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후원자들로부터 오는 전화를 받아보니 상당한 영향이 있을 것 같아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대북 지원사업에는 막히는 부분이 항상 있다. 과거에는 북한에 대한 접근 문제에서 많이 막혔는데 이제 접근 기회는 갈수록 넓어지지만 모금 능력이 약해져 일을 못하게 되는 시절이 오지 않을까 싶다"고 우려했다. "미래는 후원자들에게 달려 있다"고도 덧붙였다.

유진벨의 힘

린튼 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환자를 위해 헌신하는 북한 의료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경제난으로 엑스레이 필름이 부족해 방사선에 노출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환자의 폐를 직접 들여다보는 북한 의사들의 정신은 살신성인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 결핵환자를 치료하다 방사선 과다 노출로 세상을 뜬 북한 의사 김애란씨의 사진이 린튼 회장의 집무실에 걸려 있다. ⓒ프레시안

그렇게 방사능 과다 노출로 죽어간 의사들을 기억하고 있는 린튼 회장은 집무실에 김애란이라는 '할머니 의사'의 생전 사진을 걸어두고 있었다. 이화여대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월북해 결핵 퇴치 사업에 앞장섰던 김 씨는 5년 전 결국 방사능 과다 노출로 운명을 달리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김 씨의 사진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마음을 연 분"이라고 회상하는 린튼 회장이 숱한 난관 앞에서도 대북 의료지원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은 북한에서 목격한 의사들의 모습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유진벨은 앞으로 북한의 6개 인민병원을 대상으로 응급의료장비와 수술실 장비 지원을 시작하고 인민병원 내 일반 의료장비와 의약품까지 지원함으로써 사업영역 확대를 준비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군 단위 인민병원 의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전문교육실'을 병원마다 설치해 의료장비의 사용은 물론 환자 치료방법에 대한 재교육 시스템을 도입할 계획도 세워두고 있다.

이런 계획을 밝힌 린튼 회장은 "10년간 국내 민간단체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남북간 민간교류의 물꼬가 어느 정도 트인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긴급구호성 지원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북한의 의료기관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개발중심 지원이 절실하다"며 "그것이야말로 통일을 준비하는 핵심 과정이며 향후 대북지원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 깊은 물에 디딤돌을 놓기 힘들었다"

- 스테판 린튼 회장 기자간담회와 별도 인터뷰 (28일 서울 서교동 유진벨재단)

1997년 북한이 유진벨에게 결핵퇴치 사업을 요청했을 때에는 '약공장을 돌려라', '식품가공 공장을 인수해라', '병원을 세워라'는 등의 건설 요청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간접 지원은 효력이 떨어진다고 봤다. 오히려 치료 기능을 강화하는 게 더 경제적이라고 판단해 의료기관 설립보다 기존에 있는 기관의 치료 기능 강화를 위해 필요한 물품을 주기로 했다.

유진벨은 후원자들이 준 돈을 어떻게 가장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가를 강조한다. 나는 한국인이 접근 못하는 기관을 방문하면서 지원품을 분배하고, 사업이 계속 운영되도록 한다.

북한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장벽으로 생각한다. 베를린 장벽처럼. 그 장벽이 무너지면 자연히 남북교류가 가능하게 되고 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이미지로 북한을 생각한다. 나도 처음에 그랬다. 영구적으로 일할 필요는 없고, 3년만 버티면 자연히 남북관계가 좋아지면서 한국 의료진들이 우리가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날까지만 견디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북간 왕래는 많아졌지만 의료지원에 관심있는 한국사람들이 직접,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유진벨이 '도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은 벽 뒤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넓은 강 건너에 있는 나라였다. 10년간 넓은 강을 건너는 디딤돌을 놓는 사업을 했다. 첫해에는 병원에도 들어가지 못했고 환자도 못 만났다. 빈 건물이나 부서진 장비밖에 볼 수 없었다. 그래도 그 환경에서 지원하고 사업을 설계하니까 다음부터는 환자를 만날 수 있고, 약을 직접 보내게 됐다. 이제는 장비 보내면 장비 수리 대책, 운송 대책, 시골 의료진들에 대한 교육 대책까지 세운다. 물이 얕아진 것 같다.

5년 전부터 시, 군, 구역 인민병원 결핵과를 지원할 기회가 생겼다. 북한 병원들은 응급치료 시설도 필요하고 진단기구도 필요해서 그런 사업을 하다가, 올 봄부터는 모자지역건강(산모, 아동) 중심으로 활동할 기회를 새로 얻었다.

디딤돌을 놓고 거의 건너편까지 온 것 같다. 17개 인민병원(종합병원급)을 지원하는데, 한 병원당 7~10만명씩 최대 100만명 가량을 지원한다. 지역 의료 체제를 부활시키는 운동이 일어나면 효과적으로 북한 동포들의 건강을 되찾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스테판 린튼 회장 ⓒ프레시안

- 핵실험 이후 북한의 상황은 어떠한가?

"우리 지원사업과 정세가 완전히 분리될 순 없지만 다행히 이번 가을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는 작년보다 나았다. 10년을 하니까 이제는 보건성하고 직접 일을 하는 기회가 많이 생겼고, 정세와 상관없이 활동하는 시절이 왔다."

- 북한 경제가 나아진다고 본 이유는?

"복합적이다. 이제는 어려움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스스로 살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전보다 낫다는 거다. 배급제로만 살던 97년 갑자기 배급이 끊어지면서 간단치 않은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노력으로 사는 연습을 많이 했다.

당시 북한이 지원을 원할 경우, 말하자면 '911'로 전화를 걸었다. 워싱턴, 제네바 등 서양에 손을 뻗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지원이 없었다. 그러나 서양에서의 지원은 빨라야 2~3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지금은 '119'로 건다. 한국에서는 1주일 내에 도착할 수 있지 않나. 그래서 훨씬 든든하다."


- 인도적 지원이 정세와 분리됐다고 느꼈다는데...

"10년 전에 가서 정치적인 의미의 지원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 아무도 안 믿었다. 그러나 10년 동안 그런 얘기를 하면서, 민간이 뜻을 가지고 보내는 물품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이제는 소위 '당근과 채찍'과 관련없이 하는 일로 인식하고 있다. 희망적이다. 거기까지 끌어올리는 데에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고, 이런 얘기를 수백번 해야 했다."

- 핵실험 이후 후원자들의 분위기는?

"1년에 10억 넘는 지원을 두 번 한다. 유진벨의 자금으로 일단 보내고 모금을 하는데, 핵실험이 최근 일이기 때문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지 정확히 모른다. 전화 오는 걸 보니 상당한 영향이 있을 것 같아 걱정된다. 물건은 이미 나갔는데 하반기 지원액이 다 들어올지 모른다. 그래서 답답하다. 지원을 할 때는 막히는 자리가 항상 있다. 주로 북한에 대한 접근 부족이 문제였다. 그러나 이제는 접근 기회는 갈수록 넓어지는데, 모금 능력이 약해지면서 일을 못하게 되는 시절이 오지 않았나 싶다. 미래는 후원자들에게 달려 있다."

- 유엔 대북 제재에 영향을 받지 않나?

"우리가 제공하는 것에 대한 제재는 없다. 그러나 의료진 교육을 하면서 컴퓨터를 공급할 필요가 있다면 제재에 걸릴 수 있을 것이다."

- 10년이나 대북 지원을 하게 된 힘은 무엇인가? 어려웠던 점은?

"나는 대리인이다. 후원자의 대표로 일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디딤돌을 놓기 쉽지 않았다. 운송체제 구축에 5년 걸렸다. 장비 수리를 위해 한국의 전문가와 공장을 북한 의료진에 연결하는 데에도 3년 걸렸다. 처음에는 한국말로 표기된 약도 못 보냈는데 이제는 한국말 지침서까지 보낼 수 있다. 디딤돌이 크고 넓지 않아서 그 깊은 물에 놓는 게 쉽지 않았다. 어서 빨리 한국 의료진들이 방북해서 우리가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날이 와야 한다. 아직까지 한국 지원금은 건축이나 상징적인 지원 사업에만 많이 들어간다."
▲ 린튼 회장이 북한 평천구역 인민병원에 지원된 응급진단장비를 둘러보고 있다. ⓒ유진벨 재단 제공

- 유진벨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 친구들 상대하기 어렵고 고집이 세다. 그러나 오랫동안 깨끗하게, 그리고 상처를 주지 않는 방향으로 만나면 다른 데 이상 지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쓰나미 때 부러웠다. 비행기 표만 사면 도우러 갈 수 있지 않았나. 북한에는 그렇게 못 간다. 해외의 다른 엔지오들은 북한에 자신들의 의료진을 보내 적접 치료하려고 한다. 그러나 북한 의사들이 더 잘할 수 있도록 돕고 있고 실제로 더 잘 한다."

- 한국 정부 인도지원 중단에 대한 생각은?

"남의 하는 일을 평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한국의 대북 지원 과정이 더 성숙해지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누구를 도와줄 때 마음이 뜨거운 것 하나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일을 시작할 때는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하지만 냉철한 이성과 설계, 추진, 인내, 자기비판 등 여러 요소를 갖춰야 한다. 열심히 해도 실수하는데 단순히 생각하면 실수가 커진다.

한국인들은 긴 안목을 갖지 않고 대책없이 지원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돈으로 마음을 사겠다는 접근에는 문제가 있다. 일방적으로 돕겠다는 게 아니라 필요한 일을 같이 하고 같이 돕고 같이 믿는 파트너십을 맺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설계가 부족한 사업 때문에 실효적인 지원마저 손상될까 걱정이 된다. 한국이 지원을 하면 북한에서 공사만 한다. 그것도 필요하겠지만 진짜 어려운 사람을 직접 만나서 직접 접촉하는 사업이 더 중요하다."


- 북한 핵실험 이후 미국의 분위기는?

"미국은 세계에 벌여놓은 일이 너무 많아 한반도 문제에 집중할 능력이 부족하다. 많은 경우 전문가 의견도 안 듣고 대책을 세우고 있다. 지금은 이라크에서 비싼 수업을 받고 있다. 이라크의 교훈이 한반도 정책에 좋은 영향을 미치리라 보고 앞으로 대화로 문제를 풀려는 노력이 더 있을 것이다."

- 북한의 경제상황은?

"자전거를 많이 타고 다니고 버스 같은 운송수단도 늘었다. 옷도 점점 잘 입고 다닌다. 일본, 한국, 중국, 베트남처럼 북한도 외국과의 교역이 반드시 필요한 나라다. 한국은 중국이 부상하기 전에 경제개발을 해서 앞질렀지만 북한은 불리하다. 그렇다고 영원히 지원만 받고 살 수는 없으니 수출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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