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너무 빨리 기존질서의 비위에 맞춰 살고 있잖아!

김민웅의 세상읽기 <253〉

1. 우에하라 이치로는 유물이 아니다
  
  <남쪽으로 튀어라>라는 제목의 책을 집어 들고는 단숨에 읽어내려 갔습니다. 두 권으로 된 이 책은 1959년생인 일본 작가 오쿠다 히데오(奧田英郞)가 쓴 작품입니다.
  
  주인공은 이제 초등학교 6학년생 지로(二郞)이지만, 정작 관심의 인물은 그의 아버지 우에하라 이치로(上原一郞)입니다.
  
  우에하라 이치로는 한때 진보운동권의 전설적 맹장이었고, 아시아 공산주의 혁명공동체의 일원이었지만 이제는 아나키스트가 되어 도쿄의 어느 가난한 집안의 가장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품에서 얌전하기만 한 일본인의 상식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을 보게 됩니다.
  
  그는 기존의 체제가 담아내기 어려운 강한 야성을 가지고 국가주의와 미국의 패권체제에 대해 강렬한 반감을 품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이미 시대에 맞지 않는 한물 간 혁명세대의 유산쯤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그는 매우 당당한 모습으로 자존심을 꺾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지켜내고 있었습니다.
  
  소설은 이제 곧 열두 살이 될 일본 소년 지로의 눈을 통해서 본 세상과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한때 다른 세상에 대한 진보의 꿈을 꾸고 살았던 한 사나이의 좌절하지 않고 또한 타락하지 않은 단단한 삶을 목격하게 됩니다.
  
  1960년대 일본은 이른바 안보투쟁으로 격렬한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미국과 일본이 군사동맹을 맺어 과거로 돌아간다는 상황에 치열하게 반대한 세대의 운동은 그러나 우파세력의 반동적 대응으로 실패하고 맙니다.
  
  오늘의 일본은 그 운동의 실패가 가져온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많은 진보운동은 파산했고 침몰했습니다. 남아 있는 운동들은 조직 유지 자체에 힘을 쏟는 이상한 운동으로 변질하거나, 또는 이탈자들은 기득권을 쫓아 이전의 운동을 낡아빠진 유물처럼 대했습니다. 주인공 우에하라 이치로는 이런 현실에서 별종이 분명했습니다.
  
  사실 그는 오키나와 섬 출신으로 미군기지 반대 투쟁에도 나섰고, 학생 때에는 걸출한 활동으로 일본 공안당국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시대가 바뀌어 대부분이 일상의 소시민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는 오늘의 일본은 도대체가 틀려먹었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고, 저항의 기회를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이 책에서는 무엇보다도, 세상의 눈치를 이리 저리 비굴하게 보지 않고 자신의 양심과 뜻대로 살아가려고 담대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 우에하라 이치로의 모습이 단연 가슴에 파고듭니다. 애초에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아들 지로는 아마도 점차 그 아버지의 세계에 눈을 떠가게 될 겁니다.
  
  우에하라의 가족은 결국 도쿄를 떠나 오키나와 섬 밑에 있는 이리오모테 섬으로 갑니다. 책 제목대로 남쪽으로 간 겁니다. 모든 국가주의적 질서와 구속을 벗어나 공동체적 생활을 사랑하는 사람들 속으로 떠났습니다. 문명의 기만과 작별한 겁니다.
  
  2. 끝까지 저항해야 변하는 것들
  
  도쿄에 살고 있던 우에하라 이치로 가족이, 일단 오키나와 남부에 있는 이리오모테 섬으로 간 데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그곳에 간 이들 가족들은 도시와는 다른 공동체적 분위기 속에 빨려 들어갑니다.
  
  한번 더 강조한다면, 우에하라 이치로는 한때 일본 운동권의 맹장이었고, 담대한 성격과 확고한 정치적 윤리에 따라 거침없이 사는 인물입니다. 그러던 중, 이들 가족은 자신들이 얻어 살게 된 집이 개발업자들이 장악한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새로운 싸움이 시작됩니다.
  
  도쿄의 언론매체들은 왕년의 전설적 투사가 남쪽 섬 이름 없는 곳에서 개발주의자들과 격돌한다고 하자 이곳에 잔뜩 모여듭니다.
  
  우에하라 이치로는 일장 연설을 합니다. "그 자들이 우타키를 때려부순다고 한다면 나는 야스쿠니를 불지르겠다." 여기서 우타키는 이 섬 사람들의 성지같은 곳입니다.
  
  아버지 이치로와 대립했던 도시형 처녀 딸 요코도 이 섬에 와서 아버지의 진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딸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무분별한 개발의 폐허가 일본 전국에 없는 데가 없잖아요."
  
  온 가족이 개발업자들과, 이들과 야합한 정치와 관료에 치열하게 저항합니다.
  
  우에하라 이치로는 아들 지로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지로,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노예제도나 공민권 운동 같은 게 그렇지.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 날 아침에 거저 내준 것이 아니야. 민중이 한발 한발 나아가며 어렵사리 쟁취해낸 것이지.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아버지는 그 중 한 사람이다, 알겠냐?"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하지만 너는 아버지 따라 할 것 없어. 그냥 네 생각대로 살아가면 돼."
  
  인간의 자유와 평등, 존엄성 그리고 정의에 대해서 초등학교 6학년 소년에게 또박또박 전한 것입니다.
  
  오쿠다 히데오의 이 작품은 오래 전 16세기, 오키나와 섬이 유구 왕국에 지배받게 되었을 때 무거운 세금에 저항했던 민중의 지도자 아카하치와 관련된 설화를 뼈대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나간 소산입니다.
  
  결국 체포된 우에하라는 부인 사쿠라와 함께 도주, 책 제목대로 '남쪽으로 튀어' 버립니다.
  
  아이들은 그런 부모와 바닷가에서 몰래 이별하면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합니다.
  
  아들 지로의 가슴에는 전설의 인물 아카하치의 모습이 그대로 남고, 아버지 우에하라 이치로는 그의 인생에 우뚝 선 모습이 됩니다. 바람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떠난 남쪽 섬에서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거대한 변화를 모색하다가 좌절했던 이후, 여전히 남아 있는 꿈을 꾸는 사나이 우에하라 이치로. 이제는 꿈이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서 일상의 소시민이 되거나 권력에 취해 사육되어버린 예전의 혁명가들 모두 이 이치로 앞에 서면 난장이가 되거나 아니면,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올지 모릅니다.
  
  남쪽으로 튀어서 다시 시작하는 이 사나이의 모습은 오늘의 역사에 도전이 됩니다. 오늘의 일본도 이 우에하라 이치로를 추방하고 있습니다.
  
  우린 너무 빨리 기존질서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국의 사나이 우에하라 이치로가 우리 앞에도 우뚝 서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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