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로폴리스에서 고대 그리스를 맛보다

<현지에서 계속 소식을 전하려던 계획은 그곳의 열악한 통신사정으로 미뤄졌음을 이해해주세요. 지금 한국으로 돌아와 정리하고 있어요.>

8월 19일 새벽. 조용한 아테네 거리가 갑자기 들썩인다. 서른 명 남짓한 동양 여행객들의 방문이다. 꽤 긴 시간의 여행이었던 듯 얼굴마다 피곤이 가득하다. 버거울 정도의 커다란 짐들. 서로 도와주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다. 이국의 언어들이 대리석 보도블록을 수놓기 시작한다. 처음 밟는 땅에 대한 그들만의 예우일까. 흥분을 한껏 자제한 소곤대는 목소리들이 참으로 싱그럽다.

그들 중 몇몇은 똑같은 하얀 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 앞면에 새겨진 파란 글씨 KNUA. 무슨 암호인 듯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궁금한 마음에 뒷면을 서둘러 흘끔거려 본다. 아하! The Korean National University of Arts의 약자로군.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학생들이다.

그들이 온 것이다. 이곳 그리스에. 그리스 비극 '헤카베'를 공연하기 위해서.

아테네에서의 첫날밤은 매우 지루했던 비행기 여행만큼이나 달콤하고 포근했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는 전령의 대명사 헤르메스(Hermes)의 이름을 딴 헤르메스 호텔. 로비가 널찍한 것이 매우 인상적인 꽤 현대적인 호텔이었다.

유러피안 스타일의 간단한 아침 식사를 즐긴 후, 우리는 아크로폴리스 유적지로 향했다. 주최측에서 올림피아행 버스를 보내 주기로 한 시간은 오후 3시. 그 때까지 아테네의 유적지들을 여유롭게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아침에 다시 만난 아테네 거리는 소박하면서도 아기자기했다. 하얀 색과 아이보리 색이 주조를 이루는 건물들과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대리석 보도블록. 그리고 시인 윤동주의 말처럼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듯한 파란 하늘이 정겨웠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아름다움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멋을 뿜어내고 있었다. 대부분 그리스 여행이 처음인지라, 여기 저기서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덕분에 20분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곳을 40분 걸려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언덕을 한참 올라가자, 탁 트인 곳이 나왔다. 말로만 듣던 아크로폴리스였다. 그리스 도시 국가의 중심지에 있었던 언덕 아크로폴리스.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대부분 중심지에 약간 높은 언덕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을 폴리스라고 불렀다. 이후 도시 국가를 폴리스로 부르게 되었기 때문에, 본래 폴리스였던 작은 언덕은 'akros(높은)'라는 형용사를 붙여 아크로폴리스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아크로폴리스 위에는 폴리스의 수호신 등을 모시는 여러 신전이 세워져서 도시 국가의 중심지 구실을 하게 된다. 각 폴리스에는 원칙적으로 아크로폴리스가 있었지만 오늘날 아크로폴리스라고 할 때에는 아테네 시를 가리킨다.

아테네 시의 아크로폴리스는 동서 약 2백70m, 남북 약 1백50m로 서쪽의 올라가는 입구를 제외하고 다른 세 방향은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 다시 성벽을 쌓고 인공을 가해 방비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미 미케네시대부터 중요한 거점이었고, 페이시스트라토스·페리클레스 시대에 파르테논 등의 신전과 현문이 세워졌으며 언덕이 미화되어 아테네의 영광의 상징이 되었다. 그 후 로마와 터키인 등의 지배를 받은 시대에는 언덕이 고쳐지거나 강화되기도 하였다. 19세기에는 중세 이후에 고쳐진 부분은 제거되고 언덕의 발굴도 행하여졌다. 이 곳은 현재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적지 제1호이다.

아크로폴리스 성벽에서 내려다 본 음악당과 디오니소스 극장 그리고 아스클레피오스의 병원. 고대 그리스인들이 저 곳에서 예술을 즐기면서 살았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기만 했다.

유재원 교수님께서는 각각의 건물들에 대한 짤막한 설명을 곁들이시며, 앞으로 보게 될 파르테논 신전에 대해서도 귀중한 설명을 해 주셨다. 백과사전에서만 보던 파르테논 신전을 직접 눈으로 바라보면서, 유명한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조각품들을 박물관에서 감상하면서, 연극 개론서에서 수없이 읽었던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우리는 어느 새 고대 그리스 문화에 한 걸음 다가가 있었다.

아크로폴리스 근처에서 각자 맘에 드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해결한 뒤, 오후 2시경 숙소로 돌아왔다. 처음 경험해 본 아테네의 햇살은 정말 뜨거웠다. 자외선 차단제를 꼼꼼히 바르지 못한 부분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이제야 그리스의 '낮잠 문화'가 조금 이해되었다(그리스인들은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낮잠을 잔다. 회사에 출근했던 사람들도 다시 집으로 귀가해서 낮잠을 잘 정도로 매우 철저하게 지켜지는 문화이다).

오후 3시. 주최측에서 올림피아로 가는 버스를 보내 주기로 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버스는 30분이 지나도 도착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김석만 교수님께서 자원봉사자에게 상황을 물어 보았지만, 자원봉사자는 시원스런 답을 해 주지 않았다. 여기 저기 전화를 걸더니, 갑자기 나가 버린 자원봉사자. 그로부터 우리는 약 2시간 동안 호텔 로비에 앉아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려야만 했다.

기다림에 지쳐 있는 우리에게 유재원 교수님께서는 뜻 모를 이야기를 던지셨다. "원래 그리스 사람들이 지나칠 정도로 여유롭다"라는 말씀이셨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겪게 될 수많은 사건들을 암시하는 중요한 힌트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우리들은 버스 연착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올림피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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