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 쓴 그 남자 "어머니껜 비밀이에요"

[육아휴직 동행기 ①] 아빠 육아휴직

직장인 남환규(가명·남) 씨에게는 비밀이 있다. 올해 초 육아휴직을 썼다. 가까운 곳에 사는 장모님은 이 사실을 아신다. 어머니는 모르신다. 인터뷰를 요청받고 그는 신신당부했다. "본가에 알려지면 안 되니 꼭 익명으로 해주세요."

이유를 물었더니 매우 현실적인 답이 왔다. "알면 어머니 쓰러지실 텐데…." 비밀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그는 취재를 허락했다.

"슈퍼 아저씨는 제가 백수인 줄 알아요"

지난 10일 오전 서울에서 만난 남 씨는 외출 준비로 분주했다. 돌 지난 아이가 유모차에 탄 채 방그레 웃고 있었다. 동네 복지관에서 아이와 놀아줄 시간이라고 했다. 외출 필수품으로 그는 세 가지를 꼽았다. 물티슈, 기저귀, 간식거리. 그날 간식은 잘게 썬 오이였다.

▲ 남 씨에게 물티슈, 기저귀, 간식은 3대 외출 필수품이다. ⓒ프레시안(김윤나영)

유모차를 끌고 나가는 남 씨와 동행했다. 동네 주민이 남 씨와 기자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남 씨는 "남자가 아이 보는 것을 싫어하고,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고 말했다. 동네 슈퍼마켓을 지나갈 때 그가 귀띔했다. "경비 아저씨랑 슈퍼 아저씨는 제가 백수인 줄 알아요."

이런 일도 있었다. 한번은 아내가 휴가를 쓰고 아이를 데리고 슈퍼마켓에 갔는데, '슈퍼 아저씨'가 남편은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 여행 갔다고 하자 '슈퍼 아저씨'는 "부럽다, 좋겠다"고 한참이나 감탄했다는 것이다. 남 씨가 억울한 듯 중얼거렸다. "애가 저절로 크는 줄 알지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 안 키워봐서 몰라요."

그의 하루는 이렇다. 오전 6시 30분에 아이가 깬다. 밥을 먹이고 기저귀도 갈아준다. 오전에 아내가 출근하면 아이를 데리고 유아 도서관에 간다. 집에 돌아와 아이에게 점심을 먹이고 낮잠을 재운다. 아이가 깨면 놀아주고, 저녁에 아내가 돌아온다. 아이가 잠들기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이가 자면 약간의 자유 시간이 주어지고 하루도 끝난다.

복지관에 들어서자 '아이가 잠들기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이 실감 났다. 아이는 쉴 새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대화는 3분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지민(가명)아, 그러면 안 돼." 대화 중간마다 그의 말이 추임새로 들어가곤 했다.

"여성 수유실만 있으니 난감…장애인 화장실 이용"

그는 '○○가 없었을 땐 아이를 어떻게 키웠는지 모른다'고 말하곤 했다. "종이 기저귀가 없었을 땐, 세탁기가 없었을 땐" 상상도 하기 어렵다. 종이 기저귀는 너무 자주 쓰면 안 된다는 '깨알 같은' 설명도 뒤따랐다. 그랬다간 기저귀 상품명을 딴 이름인 일명 '하○스 발진'이 아이에게 생길 수도 있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가장 절실했던 건 남성도 이용할 수 있는 '수유실'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면 분유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데, 공공장소에는 주로 여성 수유실밖에 없다. 반대로 아이를 데리고 나가기 좋은 곳으로 남 씨는 국립중앙박물관을 '강력 추천'했다. 유아 쉼터가 잘 갖춰졌고, 여성 수유실뿐 아니라 '가족 수유실'이 있단다.

유모차를 끌고 다니기에 길에 있는 '턱'도 크게 느껴진다고 했다.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중간에 끊기고 에스컬레이터로 이어질 때도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아이 기저귀를 갈 때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해 왔다는 그는 "애 키우기 좋은 곳이 장애인 살기도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눈높이도 아이에게 맞춰졌다. 요즘은 담뱃불을 붙인 채로 팔을 휘저으면서 가는 사람 보면 가슴이 철렁하다. 예전엔 못했던 생각이다. 어른이 담배를 들고 걸을 때 팔 끝 길이가 딱 아이 눈높이와 같다는 것이다. "아이 눈에 불똥이 튀거나 재라도 떨어지면 정말 위험하거든요."

"아이가 넘어질 때 '아빠' 하고 울어서 당황"

ⓒ프레시안(김윤나영)
남 씨가 육아휴직을 쓴 이유는 단순했다. "둘 중 하나는 써야 하는데, 아내가 쓸 수 없는 상황이어서"다. 다행히도 남 씨는 육아휴직에 관대한 직장을 다니고 있다. 그는 공기업 다니는 사람 가운데도 육아휴직을 쓴 남성들을 몇몇 안다고 말했다. 혼자는 아닌 셈이다. "사기업은 책상 빠질까 봐 못 쓴다"고 안타까워했다.

고용보험 홈페이지에서 육아휴직을 신청할 때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신청란이 '모성 보호 급여 신청 > 산모를 위한 신청 서비스' 항목 아래 있어서 남 씨는 클릭할 생각을 못 했다고 했다. 그는 "육아휴직을 신청하는 사람은 당연히 여성인 산모라는 전제로 홈페이지를 설계한 것"이라며 "공무원들이 육아휴직을 보는 시각이 느껴진다"고 평했다. 육아휴직 급여를 받으러 노동청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직원이 '정말 육아 목적으로 휴직하는 것 맞느냐'고 꼬치꼬치 묻더라고요."

집안 반응을 물었더니, 남 씨는 장모님은 사위가 육아휴직을 해서 좋아하신다고 했다. 반면 부모님은 안 좋아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아 도서관에서 인터뷰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아이를 데려온 동네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남 씨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젊은 부부만 해도 덜한데, 60대 이상 어르신들은 여자가 직장 다니는 것도 탐탁지 않아 하고, 남자가 애를 보는 것도 상상이 안 되는 분들이 많아요. 제 주변에도 며느리가 직장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길 바라는 시부모가 있어요. 남자 어르신은 육아를 노동이라고 생각 안 하고, 아이 키우는 남자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육아휴직이 주는 기쁨도 있다. 아이와 아빠의 친밀도가 높아진다.

"넘어지고 울 때 보통 아이들은 '엄마'라고 하는데, 우리 아이는 '아빠'를 찾으면서 운 적이 있어요. 지금은 꼭 그렇진 않지만, 예전에는 본가에 갔을 때 아이가 아빠를 너무 찾아서 당황한 적이 있었죠. 비밀인데."

"남자도 육아휴직 쓰게 해주세요"

남 씨는 남성이 육아휴직을 쓰게 해줘야 여성에게도 좋다고 강조했다. 기업이 여성 채용을 꺼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육아휴직 공백 때문인데, 남자도 똑같이 쉰다면 여성 채용을 꺼리는 이유가 하나 줄어든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육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다고 했다. 육아를 해보니 외출도 제대로 할 수 없고, 몸이 안 좋아도 쉴 수 없는 등 고충이 많다고 했다. 그는 "젊은 남자인 나도 아이 키우기 힘든데 요즘 들어 어머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게 된다"며 "부인만 육아를 전담하면 남편은 부인과 어머니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육아휴직을 못 가더라도 남성이 돌봄 노동을 분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누구나 돌봄을 받아 성인이 되고, 누군가는 그 돌봄 부담을 져야 합니다. 아이가 있는데 자기 인생에서만 그 부담을 패스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자기만 평생 안 한다는 건 옳지 않잖아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이는 지친 듯 유모차 안에서 잠들었다. 남 씨는 회사로 복귀하면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길 계획이다. 요즘 그는 국공립 어린이집 대기표가 몇 백 번이 넘어가서 걱정이다. 남들은 다 임신 초기에 신청하는데, 남 씨 부부만 출산이 임박해서 신청한 탓이다. 남 씨의 육아휴직은 내년 초에 끝난다.

남 씨와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에 들른 지하철 화장실에서 '동반 유아용 의자'가 눈에 띄었다. 문득 그 역 남자 화장실에도 동반 유아용 의자가 있을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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