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처럼 의료 관광하자던 정부, 태국 의료 현실 아나?"

[민영화 공동 기획 ⑤] 의료 민영화의 현실과 명백한 미래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국민의 뜻에 반하는 민영화는 추진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정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국토교통부는 '자회사' 형태의 수서발 KTX 분리를 추진하고 있으며, 기획재정부는 영리 병원과 각종 규제 완화로 대변되는 '의료 산업 활성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새누리당은 도시 가스 도매 시장에 경쟁 체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가스 민영화법(도시가스사업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일부 지자체도 수자원공사를 통해 상수도를 민간 위탁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프레시안>과 민주노총은 철도, 의료 등 각 분야에서 진행되는 민영화(사유화) 현황을 짚는 기획을 공동으로 마련했다. <편집자>

민영화 공동 기획
<1> '박정희 폐해' 해결책이 사유화? 잘못 짚었다
<2> 50여 명 죽인 '돈 먹는 하마'…한국 철도도?

<3> "세계 어디서도 안 되는 걸 왜 박근혜 정부는 된다고 하나"
<4> 박근혜 야심작 '의료 관광', 실은 독(毒)사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후 한국에 전면적인 의료 민영화가 도입될 경우 위내시경이 4만 원→100만 원, 심혈관조영술 14만 원→430만 원, 관상동맥우회술 350만 원→4140만 원, 맹장수술비 30만 원→900만 원이 된다는 얘기가 인터넷상에 떠돌았다. 소위 '한미 FTA 괴담'이다.

그러나 의료 민영화가 진행된 나라의 상황을 보면 괴담은 단순히 괴담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계 25개국의 100개 보험사가 모인 단체인 국제의료계획연맹 IFHP(The International Federation of Health Plans)이 3월 26일 발표한 '2012년도 국가별 의료 비용 비교 보고서'를 보면, 미국은 자연 분만 비용이 평균 9775달러(약 1080만 원), 제왕절개 1만5041달러(1650만 원), 맹장 수술 1만3851달러(1530만 원), 관상동맥우회술 7만3420달러(8050만 원), 하루 입원비 4287달러(470만 원)를 하는 등 조사국 11곳 가운데 의료비가 가장 비쌌다.

특히 치과 치료는 너무 비싸서 아예 약국에서 가정용 치료기구와 치과용 진통제를 사서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수술비를 감당하지 못해 외국에 나가서 수술하는 경우도 많은데, 왕복 비행기값을 포함하더라도 더 싸기 때문이다. 보험료도 비싸다. 3-4인 가족을 기준으로 월 보험료 700달러(약 78만 원)-1000달러(약 110만 원)를 감당하지 못해 보험을 포기하는 사례도 있다.

의료 디스토피아

▲ 미국의 의료 현실을 고발한 <식코>
미국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건강보험이 없는 나라이고, 이 때문에 의료 민영화가 가장 발달한 나라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 6월 발표한 'OECD 헬스 데이터 2012'를 보면, 미국의 의료비는 GDP(국내총생산)의 17.6%로 OECD 평균인 9.5%보다 훨씬 높다. 이렇게 많은 의료비를 쓰고 있지만 정작 미국 국민 중 4700만 명은 보험료가 비싸서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고, 보험에 들었어도 병원비가 비싸 병원비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국민들도 1800만 명이나 된다. 병원비를 제대로 내지 못해 파산하는 사람이 연간 200만 명이고 개인 파산의 62%가 병원비 때문이다. 국가적으로 의료 비용은 많이 들지만 극심한 의료 불평등을 겪고 있으며, 국민들의 건강 수준은 세계 30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의료비 중 많은 부분이 민간 보험회사, 제약회사, 영리법인 수중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시민단체 Health Care for America Now(HCAN)에 따르면, 불황과 실직으로 2009년 270만 명이 무보험 상태로 전락했는데도 미국의 5대 보험회사들의 수익은 56% 늘어났다. 비싼 의료비 감당이 부담스러워 병원에 잘 가지 않기 때문에 불황 가운데서도 미국 의료보험 회사들은 엄청난 고수익을 올리고 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실패한 의료 민영화 사례로 꼽힌다.

1994년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 후 멕시코에서는 의료 민영화 정책이 추진되어 민간 의료보험이 공적 의료보험을 붕괴시키는 현상이 벌어졌다. 멕시코의 의료 시스템은 △기업과 공공 기관 종사자들이 가입한 사회보험 △전체 인구의 4%인 중상류층이 가입해 있는 민간 보험 △실직자와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1차 진료만 제공하는 의료 보장 등 3개로 차등화돼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2010년 발간한 '중남미 의료 시스템 개혁 연구' 보고서를 보면, 멕시코에서 공적 의료보험 혜택을 받는 인구는 2004년 기준으로 46%에 불과하다. 멕시코 국민 중 52%가 진료 비용이 너무 비싸 진료비를 부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진료를 포기한다는 연구조사 결과도 있다.

칠레 또한 멕시코와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칠레는 국민 보건 서비스(NHS : National Health Service) 방식으로 국민에게 포괄적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왔으나 군사 정부가 들어선 지 8년 만인 1981년 강력한 민영화 정책을 펼쳤다. 이에 따라 공보험과 민간 의료보험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됐고, 이원화된 의료보험 체계에서 민간 의료보험이 활성화됐다. 그 결과 고소득자들이 민간보험으로 넘어가면서 공보험 재정 상태가 악화되었고, 의료 수요가 많은 노인이 주로 가입해 있는 공보험이 취약해지면서 의료 양극화도 심화되었다. 특히 건강하고 부유한 인구가 민간보험에 가입했다가, 나이 들고 건강이 나빠지거나 가난해지면 대거 공보험으로 넘어오면서 보험 재정 상황이 악화됐다.

▲ 건강보험-민간보험 경쟁 체제를 도입한 칠레에서는 가난할수록 공보험에, 부자일수록 사보험에 가입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 '중남미 의료 시스템 개혁 연구' 보고서 갈무리

미국과 비교할 때 캐나다는 상대적으로 '무상 의료의 나라'이다. 일정 정도 의료 보험료를 내면 모든 진료비와 치료비(조제약, 치과 등 제외)를 100%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나 NAFTA 체결 이후 캐나다 정부는 재정 지원을 축소하고 있고, 캐나다에서도 민간 의료보험 시장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NHS라는 무상 의료 시스템을 통해 모든 의료 서비스를 100% 국가 부담으로 제공하는 영국에서도 1980년대 대처 정부가 의료 보장 범위를 줄이고 지역 간 형평성을 무너뜨리면서 국가 보건 서비스의 많은 부분을 민간 부문이 차지하는 일이 벌어졌다.

의료 민영화를 실행한 나라들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문제는 △비싼 의료비 △정부 지원 축소 △민간 의료보험 활성화 △영리병원 도입 △의료 불평등 심화 등이다. 멕시코와 칠레 등 중남미 국가들은 '경쟁 체제 도입, 효율화, 지출 절감' 등을 명목으로 공보험과 민간보험을 이원화했다. 그러나 여러 연구 조사를 보면, 민영화는 '건강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공공 지출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분석된다.

오히려 의료 민영화의 심각한 폐해를 겪고 있는 미국에서는 전 국민 건강보험제도 실시를 주축으로 한 의료 개혁이 최대의 사회적 과제로 떠올랐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명박 정부 당시 의료 기관 당연 지정 제도를 폐지하려다가 국민들의 저항에 직면하였고, 각종 의료 민영화 법안들을 제출했으나 번번이 국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성공하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 당시에도 의료 분야에서만큼 "민영화는 절대 추진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국민들 사이에서 많았다.

▲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의 선거 광고. 박 대통령은 "국민의 뜻에 반하는 민영화는 추진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정부는 최근 의료 관광 산업 활성화를 위해 추가 시장 개방과 규제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새누리당

민영화 위협이 지속되는 국민건강보험

우리나라는 △모든 병원·의원에 건강보험 적용을 강제하는 건강보험 당연 지정 제도 △병원 주주나 채권 소유주에게 이윤 배당을 허용하지 않는 비영리병원 규정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건강보험에 가입하도록 하는 건강보험 강제 가입 제도가 운용되고 있다. 소득이나 재산과 관계없이 모든 국민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우수한 제도이다. 이 우수한 제도를 무너뜨리는 것이 의료 민영화이다. 건강보험 당연 지정 제도 폐지, 영리병원 허용, 민간 의료보험 확장 등이 의료 민영화의 핵심이다.

그런 의료 민영화가 끝임없이 시도됐다. 돈벌이를 위해 △건강 관리 서비스 민영화 △원격의료 허용 △영리병원 도입 △민영 의료보험 제도화 △공보험과 민간보험이 개인 의료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보험정보원 설립 △병원 경영 지원 사업을 의료법인의 부대사업으로 허용 △의료 채권 발행과 같은 시도들이 끊임없이 진행됐다. 2012년 10월에는 경제자유구역 안에 외국 의료 기관을 설립할 수 있는 요건을 규정한 규칙을 제정함으로써 국회 동의 없이 정부 허가만 받으면 외국 투자자나 재벌 기업도 외국 영리병원을 세울 수 있게 됐다. 국내 자본이 영리병원에 50%까지 투자할 수 있고 외국 의사 면허를 가진 의사를 10% 이상만 확보하면 나머지는 국내 의사로 채울 수 있도록 했고, 외국 영리병원의 내국인 진료도 허용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최근에는 의료 관광 활성화 기치를 내걸고 △한국 국적 크루즈선에 외국인 전용 선상 카지노 허용 △의료 서비스와 문화·음식·유적지·휴양지 같은 관광 자원을 결합한 의료 관광 클러스터 선정 △의료와 호텔·숙박업을 연계시킨 메디텔 허용 △국제공항, 외국 의료 관광객 밀집 지역 등을 대상으로 외국어로 표기한 의료 광고 허용 △보험사가 국외 판매 보험 상품과 연계하여 국내 의료 기관에 외국 환자를 소개·알선·유치하는 행위 허용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의료 민영화가 광범한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의료 관광 활성화를 내세워 해외 환자를 대상으로 우선 민영화를 추진하고, 의료 민영화에 걸림돌이 되는 각종 규제를 풀겠다는 것으로서 의료 민영화로 가기 위한 수순 밟기라 할 수 있다.

정부는 의료를 신성장 동력, 고부가가치 산업, 고용 효과가 높은 산업이라며 의료 관광 산업 활성화에 집중하고 있다. 의료 관광 활성화에 성공한 사례로 인도, 태국, 싱가포르 등을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 태국, 싱가포르 등은 우리나라와 여건이 다르다. 태국은 1차 의료를 대상으로 전 국민 건강보험 체계를 도입하고 있으며, 2011년 기준으로 민간병원이 213개인데 비해 871개의 공공병원을 갖고 있는 등 공공 의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한국보건산업진흥원, 의료기기 해외 시장 브리프 재인용, 2013). 싱가포르도 2, 3차 의료의 경우 공공 병상 수가 전체 병상의 70-80% 수준이다(1차 의료는 민간이 80%).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공공 의료 기관 수 5.9%, 공공 병상 수 10.4%로 공공 의료가 매우 취약하다. 영리병원이 도입될 경우 공공 의료가 고사 상태에 내몰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 한국의 공공 병상 비중은 꾸준히 감소해 왔다. ⓒ김종명

의료 관광 활성화된 인도·태국·싱가포르, 의료 양극화 심화

인도, 태국, 싱가포르에서 의료 관광 활성화의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내국인 환자에 대한 의료 서비스 약화, 의료 서비스 질 저하, 건강 불평등 심화, 공보험 축소, 우수 의료 인력 유출, 중소도시와 농촌 지역의 의료 인력 부족, 의료 양극화 심화 등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의료 민영화와 의료 관광 활성화를 추진한 나라들에서 겪고 있는 현실은 우리나라 보건의료가 가야 할 미래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의료 민영화는 건강보험제도를 붕괴시키고 의료비 폭등을 야기함으로써 돈이 없으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국민 대재앙이다.

우리나라의 우수한 건강보험 제도는 지켜야 하며, 오히려 63% 수준에 머물고 있는 보장성 수준을 90% 이상으로 강화하여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을 더 줄이고 국민 건강권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것이 과제이다. 의료는 돈벌이 상품이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보편적으로 제공해야 할 기본권이자 인권이며, 보편적 복지이다. 의료 민영화가 아니라 완전한 무상 의료 실현이 우리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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