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연금 문제에서 원죄를 씻어야 한다

[창비주간논평] 진보의 '포퓰리즘' 비판, 보수와 닮았다

돌이켜보면 적어도 연금문제에 관한 한 대한민국의 진보는 제 역할을 못 했다. 오히려 진보세력이 연금을 더 망쳐놓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1988년에 시작된 국민연금은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에서 두 차례의 개혁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정부에서 이루어진 두 차례의 '연금개혁'은 연금액을 대폭 삭감하여 국민연금제도를 품위 있는 노후는 고사하고 겨우 최저생계비 수준의 연금을 지급하는 초라한 제도로 만들어버렸다.

특히 진보정부로 자처한 '참여정부'는 2007년 제2차 연금개혁에서 국민연금액을 평균소득자 기준 60%에서 40%로 인하하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무지막지한 연금 삭감을 단행했다. 보수정권도 하기 힘든 큰 폭의 연금 삭감을 진보정부가 '용감하게' 해치운 것이다.

인수위의 공적연금제도 개편안

요즘 논란이 되는 '기초노령연금'은 바로 참여정부의 제2차 연금개혁 과정에서 탄생했다. 국민연금을 대폭 삭감해 국민연금만으로는 노후보장이 안 되자 이를 보충하기 위해 국민연금 전체 가입자 평균소득의 5%에 해당되는 약 9만5000원의 수당을 전체 노인의 70%에게 지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 모두 바로 이 기초노령연금액을 국민연금가입자 평균소득의 10%인 약 20만원으로 올리겠다고 공약했다. 박근혜 후보는 여기서 더 나아가 '기초노령연금'을 '기초연금'으로 바꾸고 이를 국민연금과 통합하여 공적연금제도를 완전히 재편하겠다는 공약을 인수위에서 논의하고 있다.

연금개혁안 관전 포인트

인수위가 정확한 개혁방안을 발표하지 않아 혼선이 있는 편이지만 기초연금을 현행 5%에서 10%로 인상하여 20만 원으로 높이겠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긍정적으로 바라볼 부분이다. 이렇게 될 경우 선진국 중에서 최고라는 한국의 노인빈곤율 45%는 상당히 낮아질 것이고 부부가 합해서 40만 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노후생활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보수신문과 관료들이 월 20만 원 지급은 재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노골적으로 공약 철회를 압박하고 있지만 박근혜 당선인은 시행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진보세력은 자괴감이 들지 몰라도 이 공약의 시행을 강력히 요구하고 방어해내야 한다.

ⓒ국민연금공단
하지만 박근혜의 연금 공약에서 지뢰가 나타날 수도 있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기초연금 두 배 인상을 명분으로 국민연금을 더 깎는 경우이다.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는 인수위의 연금개혁안에서는 이 방안이 논의되고 있는 듯하다. 국민연금은 참여정부에서 크게 삭감하여 30년 동안 보험료를 낸 사람의 연금도 1인가구 최저생계비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낮다. 기초연금 20만 원과 국민연금액을 합해야 겨우 생활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되기 때문에 국민연금의 추가 인하는 절대 수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 부분이 이번 연금개혁안의 관전 포인트다.

기초연금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까

기초연금을 두 배로 인상할 경우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에 대한 논란도 거세다. 기존의 국민연금기금의 일부인 3~4조 원을 기초연금의 재원으로 사용하겠다는 인수위의 방안이 알려지자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상당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국민연금기금의 일부를 기초연금의 재원으로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연대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진보적 방안에 부합된다고 생각한다(자세한 설명은 김연명, <기초노령연금 인상 논란? 악마는 다른 곳에 있다>, 오마이뉴스 2012.1.16 참조).

진보진영은 국민연금과 400조 원에 달하는 국민연금기금의 진보적 활용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고 진보적 정책대안을 갖고 있지 않다. 때문에 "복지 한다고 겨우 하는 것이 국민연금기금 빼서 복지를 하겠다는 것이냐" 식의 비난은 진보세력이 취할 태도로서 문제가 있다. 국민연금의 세대 간 노인부양 원리, 노인부양을 위한 사회적 공동저축으로서 국민연금기금의 성격을 이해한다면 국민연금기금의 일부를 현세대의 노인을 부양하기 위해 쓰는 것은 올바른 방향이다.

보수세력의 논리와 같은 진보진영의 '포퓰리즘' 비판

진보성향의 학자들 중에서는 기초연금을 두 배로 인상할 경우 막대한 돈이 들어가 재정적으로 지속 불가능하기 때문에 보수의 '포퓰리즘'이 아니냐는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다. 재미난 것은 이런 비판이 박근혜의 기초연금 공약을 흔들려는 보수세력의 논리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기초연금을 두 배로 인상하고 모든 노인에게 지급해도 2050년에 총재원은 GDP의 4.3%에 불과하다. 여기에 국민연금 지출액 5.5%를 더하면 2050년에 총연금 지출액은 GDP의 9.8%이다. 하지만 2050년에 한국의 노인인구는 19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40%를 차지한다. 서구의 복지국가들은 이미 2000년대 초반 노인인구가 15%일 때 연금으로 GDP의 10%를 지출했다. 때문에 2050년에 총연금지출액 9.8%는 재정적으로 부담 불가능하지 않으며 오히려 적은 지출일 수도 있다.

한국의 진보는 유독 연금에서는 실패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잘못된 인식으로 스스로 시장주의자들에게 투항해온 것이 지난 10년의 경험이다. 진보적 연금개혁에 대한 자화상이 없고 세대 간 연대라는 공적연금의 본질을 깊이 천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초연금 도입으로 촉발된 이번 연금개혁 논쟁에서 진보는 연금에 대한 원죄를 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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