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주 부둣가에서 '동대문 패션'을 보다

[압록·두만에서 바라본 북한의 오늘]<2>

지난 8월 초순 한국의 북한전문가들이 8박9일 동안 압록강 서쪽 끝 단동(丹東)에서 두만강 동쪽 끝 방천(防川)까지 북·중 국경 1376.5㎞, 3000리가 넘는 거리를 답사하면서 강 건너 북한 땅의 사정을 보고 듣고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답사는 북한 전문가들이 그 동안 문헌자료와 현장경험을 통해서 축적해온 지식과 눈앞의 현실을 대조하고 검증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답사단의 분석과 평가는 정보와 자료로서 가치가 적지 않습니다. <프레시안>은 답사단의 일원이었던 황재옥 박사가 이번 현장답사에서 보고 듣고 느낀 내용들을 정리한 글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첫째날 2] 단동과 압록강단교, 그리고 항미원조(抗美援朝)기념관

중국의 동대문, 단둥

단둥(丹東)의 원래 지명은 안둥(安東)이었다. 과거 안둥 부근은 중국의 동쪽을 관리하는 변방의 요새로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그러기에 안둥은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에 점령됐고, 1907년 개항 후 1910년부터는 일본의 대륙진출 교두보로 활용됐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1910)한 후 지금의 동북3성에 세운 괴뢰국가였던 만주국(1932-1945)은 14개성을 두었는데, 안둥 부근 압록강 이북에 안둥성(安東省)을 설치하고 안둥을 그 성도(省都)로 삼았다. 안둥은 한반도를 관리하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중국대륙의 동대문같은 관문도시였다.

1965년 초, 안둥이라는 지명이 북중관계에 도움이 안 된다는 취지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의 지시에 따라 단둥으로 개명됐다. 안둥이 제국주의적인 냄새가 나는 지명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단둥도 '홍색 동방지성(紅色 東方之城)'의 줄임말이라는 점에서 안둥과 의미상 별반 차이 없는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돕는다) 혈맹으로 붉게(丹) 물든 동방(東)의 도시, 즉 중국이 북한을 도와준 관문 도시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니까.

단둥 외에도 중국에는 역사적으로 국경지역을 관리하면서 그 지명에 '평정'과 '관리'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중국의 국경이 하도 길다 보니 관리하기가 쉽지 않아서 관리들의 역할과 사명을 일깨워 주기 위해 지명에서라도 역할을 분명히 표시했을지도 모른다. 대표적인 것이 베트남과 중국 국경에 있던 관문인 진남관(鎭南關)이었다. 그 뜻은 중국 남쪽의 베트남을 진압하는 관문이라는 뜻이었다. 안둥을 단둥으로 바꿀 때 진남관은 목남관(睦南關)으로 바뀌었다. 베트남과 화목하게 지내는 관문이라는 뜻이다.

중국 정부가 자진해서 안동을 단동으로, 진남관을 목남관으로 바꾼 이유는 뭘까 궁금했다. 중국외교사에 조예가 있는 한 분이 그에 대해 설명했다. "1950년대 중반, 스탈린 사후 시작된 중·소 이념분쟁이 1960년대 중반으로 넘어 오면서 국경분쟁으로까지 번질 정도로 치열했다. 그런 정치·군사적 상황에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들 중 소련과 가까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국가들을 중국이 선제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선심을 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역시 그랬구나! 대학시절 외교사 강의시간에 "국가끼리 외교를 하는데 있어 순수한 선의나 공짜는 없다"고 했던 교수님의 말씀이 새삼 떠올랐다.

어쨌건 오늘날 단둥은 중국의 한반도 진출의 교두보, '중국의 동대문' 역할을 하는 도시가 되어 있다. 우리가 단둥을 주목하는 것은 단둥을 통한 북중교역 때문이다. 북중교역이 2008년 20억 달러에서 2011년 63억 달러로 3배 이상 증가했고, 북중교역의 80%가 단둥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북한을 방문하는 중국 관광객이 2008년 10만 명에서 2011년 15만 명으로 늘었다.

답사단 중 한 분이 작년 겨울, 중국에 들어 와서 돈벌이를 하는 북한 거주 화교에게 들었다며 전한 바로는 단둥에서 평양까지의 차비는 중국 돈 300위안(55달러 정도)인데 단둥에서 평양까지의 왕복 티켓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평양에서 단둥까지의 차비를 84달러로 책정해 놓고 직접 표를 파는 평양 측의 방침 때문이라고 한다. 단둥에서 평양으로 들어가는 차비보다 평양에서 단둥으로 나오는 차비가 1.6배 가까이 비싼 셈이다. 같은 거리를 오가는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나마 평양에서 표를 살 때는 반드시 달러로 결제해야 한다고 한다. 북한이 달러를 많이 필요로 하는 모양이다. 북한에서 달러와 위안화가 통용되고 있다고 들었지만, 북한 내에서 달러의 효용가치가 위안화보다 훨씬 더 큰 모양이다.

북한 거주 화교는 중국공민권자인 동시에 북한영주권자로서 1년에 적어도 한 번씩은 북한을 방문한다고 했다. 화교 3대인 자신의 할아버지가 한국전쟁때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으로 참전했고, 전후복구사업을 도와주기 위해 북한에 남게 됐다고 했다. 당시 이들에게는 많은 혜택이 주어졌고, 현재에도 북한에 있는 중국화교는 북한주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산다고 했다.

단둥에 도착해 보니, 그곳은 중국인과 조선족을 포함한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가게 간판이 한자와 한글로 적혀 있는 곳이 많았다. 그리고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모델들의 사진이 상점 입구에 걸려 있었다. 나는 그러한 가게가 혹시 우리 조선족이 경영하는 가게는 아닌지 생각하면서 이왕이면 그들의 가게에서 물 한 병이라도 사주고 싶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초행길이라 단둥의 도심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압록강단교 근처에 이르자 자동차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금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압록강단교 주변에는 중국 관광객들이 많았다. 도로 양 옆에는 번듯하고 규모가 큰 식당과 호텔같아 보이는 건물들이 깨끗하게 늘어 서 있었다. 지방도시에서 자동차가 겹겹이 주차되어 있는 모습도 새로웠다. 그만큼 자동차가 많아지고 경제형편이 좋아졌다는 얘긴데, 강 건너 신의주의 형편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 압록강단교 근처 시가지 모습. ⓒ황재옥

현재 단둥에서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통하는 다리는 하나다. 일제 말인 1943년에 완공돼 쓰이다가 지금은 중조우의교(中朝友谊桥)로 불리게 된 이 다리의 길이는 944m, 기찻길과 차도가 함께 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각에도 신의주에서 단둥으로 건너오는 파란색 트럭 여러 대가 다리 위에서 서서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뭔가를 실어다 놓고 나오거나 실어가기 위해서 단둥 쪽으로 건너오는 빈차들인 것 같았다.

▲ 압록강철교 위 단둥과 신의주를 오가는 트럭들. ⓒ황재옥

단둥 쪽에서 봤을 때 중조우의교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1911년 일본이 세운 다리가 또 하나 있는데, 이 다리는 1950년 한국전쟁 때 미군의 폭격에 의해 파괴됐다. 다리가 끊어졌다 해서 압록강단교(斷橋)라고 불리고 있는데, 단둥 쪽에서 보면 중조우의교와 압록강단교가 쌍둥이 다리처럼 보일 수도 있다. 단교는 부산의 옛날 영도다리처럼 도개교(跳開橋) 형식으로, 배가 지나갈 수 있도록 오르락내리락 하는 다리였다고 한다. 현재는 중국 쪽 300∼400m만 복원돼 있다. 반면 북한 쪽 구간은 교각만 남아있는 상태다.


▲ 중조우의교와 압록강 단교. ⓒ황재옥
▲ 끊어진 압록강 단교. ⓒ황재옥

단교 위 양쪽 난간에는 한국전쟁 당시의 국제상황을 알려주는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눈에 익은 처칠, 이승만, 마오쩌둥, 맥아더 등 역사적 인물들의 사진과 설명들을 볼 수 있었다. 다리 중간에는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지면서 구부러진 철로의 모습도 보였다. 압록강단교를 걸어보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중국인들에게 압록강단교는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원조하여 국가를 보위한다) 정신을 상기시킴으로써 '사회주의 애국주의'를 가슴에 새기고 자긍심을 느끼게 하는 관광지가 되어 있었다.

압록강단교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좀 더 바다 쪽으로 신압록강대교가 건설되고 있었다. 2009년 10월 4일 북한과 중국은 경제기술합작협정서에 따라 압록강 위에 새로운 다리를 건설하기로 합의하였다. 2014년 완공을 앞두고 건설 중인데, 현수교(懸垂橋)의 교두보가 모습을 이미 드러내고 있었다. 이 다리가 완성되면 단둥에서 신의주로, 그리고 평양까지 고속도로로 연결될 것이라 한다. 신압록강대교가 완공되면 황금평과 위화도에서 만들어진 중국 제품과 북한의 물자들이 이 다리를 통해 북한과 중국을 오갈 것이다.

▲ 건설 중인 신 압록강대교. ⓒ황재옥

신압록강대교 건설과 황금평·위화도개발이 바로 중국의 일교양도(一橋兩島) 개발계획이다. 도로 확장이 산업 발전과 연결되고 물류 증가가 도시 발전과 인구 유입을 유발한다고 볼 때, 아마도 몇 년 내에 단둥은 그 덕을 톡톡히 보게 될 것인데, 신의주도 그 덕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압록강단교 위에서의 단상(斷想)

압록강단교 입구 가까운 곳에 항미원조기념관이 있었다. 1950년 10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인 펑더화이(彭德懷)가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북한에 들어가서 북한을 구원해 준 일을 기념하는 곳이다. 중국의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온 사건은 임오군란(1882년) 이후 그 때가 두 번째였다고 한다. 한국전쟁 참전 초기, 1950년 10월 19일 부터 10여 일 사이에 중국인민지원군은 유엔군에 들키지 않으려고 야음(夜陰)을 이용하여 북한 쪽으로 건너갔다. 중국인민지원군 12개 사단이 북한 지역에 투입되었는데, 6개 사단은 신의주를 통해서, 다른 6개 사단은 집안(輯安) 건너 만포를 통해서 북한지역으로 들어갔다.

참전 초기 60만 명이 한반도에 들어왔고, 60만 명씩 3차례에 나누어 교대하면서 총 180만 명이 참전하였다. '전투조-순환조-대기조'의 3교대 순환제 채택은 장기전에 대비한 중국의 전략이었다. 수나라-당나라 때부터 중국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오면 으레 '백만대군' 운운하면서 약간 과장을 해 왔는데, 한국전쟁 때는 실제로 백만이 넘는 대군이 인해전술을 편 것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중국인민지원군의 손실은 전체병력의 40%였다고 한다.

항미원조기념관 밖에는 펑더화이와 왼손으로 강 건너 신의주를 가리키는 군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있었다. 많은 중국인들이 그 조형물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펑더화이 발밑에 새겨진 '포 피스'(FOR PEACE)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는 말인가 본데 그 평화가 과연 누구를 위한 평화인지, 그리고 무엇이 평화인지 헛갈리지 않을 수 없었다.

펑더화이의 발밑 'FOR PEACE'라는 문구가 중국인들로 하여금 자기나라가 평화의 사도인 것처럼 생각하여 항미원조기념관을 방문하게 하고, 압록강단교를 찾아오게 하는 것인가? 중국 정부는 그렇게 해서 '사회주의 애국주의' 정서를 중국인민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는 것인가? 필자는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끊어진 압록강 다리 위를 걷는 내내 우리 부모님이 겪었을 고통과 당시의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 오는 것 같았다. 이 압록강단교를 거니는 중국인과 한국인의 감정은 분명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주위의 희뿌연 날씨가 내 기분인 양 다리 위를 걷는 내내 우울하고 착잡했다.

▲ 항미원조기념관 앞 조형물. ⓒ황재옥

북중 접경지역은 우리 민족에게는 특별한 감상을 느끼게 하는 곳인가 보다. 우리 민족과 중국과의 얽혀 있는 역사, 북한-중국-한국과 국제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사건들을 생각하면 특별한 장소인 것은 확실하다.

압록강단교의 펑더화이 조형물 발밑에 새겨진 'FOR PEACE' 문구는, 워싱턴DC에 세워진 한국전쟁 참전 미군 조각을 떠올리게 하였다. 펑더화이 조각이 진격명령을 내리는 모습인 데 비해 미군 조각은 전투복과 전투모에 판쵸 우의(雨衣)까지 걸친 미군 병사들이 두 손으로 총을 들고 진격하는 모습이다. 역시 평화를 위하여 미군이 고생했다는 취지의 조형물이고, 그것도 미국 국민들에게 아메리카니즘(Americanism)을 고취하는 일종의 정치사상 교육용 자료인 셈이다.

우리에게는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이 참전국가에서는 자기 나라 국민들에게 애국주의를 교육하는 소재가 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니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저러나 한국전쟁을 계기로 시작된 중조우의는 오늘날 북중경제협력의 원동력으로 작용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신의주 부두의 '선군조선의 태양…만세!' 구호와 아벡크(avec) 남녀

압록강단교와 항미원조기념관을 나와서 우리는 압록강 유람선 선착장으로 갔다. 해가 거의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으나, 유람선을 타기 위한 줄은 제법 길게 늘어서 있었다. 북한 마을을 바라보고 압록강을 유람하는 관광 상품을 개발해 놓은 것이었다.

신의주 부두 맨 서쪽 끝, 유람선 관광객들 눈에 잘 띌 만한 위치에 붉은 글씨로 쓴 '선군조선의 태양 김정은 장군 만세'라는 구호가 눈에 들어왔다. 김일성은 '민족의 태양,' 김정일은 '21세기의 태양'이라고 했었는데 김정은은 '선군조선의 태양'이 된 것이다. 선대에는 '민족,' '21세기'와 같은 거창한 호칭을 썼기에 김정은에게는 또 무슨 거창한 호칭을 부칠까 약간은 궁금했었는데, 의외였다. '선군조선'은 '민족'이나 '21세기'보다 다소 범위도 좁고 기간(time-span)도 짧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북한의 새 지도부가 허세를 부리기보다 현실적으로 바뀌어 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아마도 이런 판단에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바탕에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신의주 부두 가까이에는 잔뜩 녹이 쓴 북한의 화물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부두에는 트럭에서 화물을 옮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좀 떨어진 곳에는 할 일 없이 멍 하니 앉아서 오가는 유람선을 응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떨어진 거리이지만 우리를 바라보는 북한사람들의 모습과 표정까지도 살필 수 있었다. 예전에 봤을 때보다 살기가 나아진 것 같았다. 옷차림도 좋아진 것 같고 영양상태도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았다.

그런데 신의주 부두를 산책하는 젊은 남녀 한 쌍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거의 밀착하다시피 가까이 손을 잡고 부두를 거닐고 있는 남자의 복장은 북한 남자들이 흔히 입는 진회색의 반소매 남방과 같은 색의 바지였지만, 젊은 여성의 복장은 예전에 내가 봤던 그런 옷이 아니었다. 패션을 생각하고 입은 차림이었다. 이른바 '백(白) 바지'에 분홍색 반팔 라운드 티셔츠를 입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남자와 손을 잡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평양에서도 젊은 남녀가 손잡고 걷는 모습이 눈에 띈다고는 하지만, 신의주 부두의 젊은 여성의 패션은 중국의 유행을 따르는 것 같았다. 듣자하니 중국패션을 리드하는 것은 옌볜이고, 옌볜은 동대문 두타-밀리오레 패션의 중국내 전파기지라고 한다. 동대문 패션이 돌고 돌아 신의주에까지 들어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 신의주 부두에서 본 북한의 연인. ⓒ황재옥


대북사업가들의 어려움과 걱정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신의주를 아주 가까이서 본 뒤 우리는 선착장에서 10분 거리의 호텔로 이동하였다. 지나고 보니, 단둥에서 묵었던 호텔이 전 일정 중 가장 현대화되어 있고 깨끗한 호텔이었다. 단둥에 그런 호텔들이 계속 건립된다는 것은 그만큼 방문객이 많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건 상당 부분 북한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관련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저녁식사는 운 좋게도 단둥에 거주하면서 북한과 교역을 하는 사업가 몇 분과 함께 하게 되었다. 요즘도 북한을 드나들기 때문에 북한의 실정을 실시간으로 잘 알고 있는 분들에게 북한의 실상에 대해서 듣는 것은 북한 연구자로서 당연하면서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동안 북한에서 의류 임가공 사업을 했던 사업가들이 2012년 현재 많이 북한을 떠나 베트남이나 버마(미얀마)로 옮겨 갔다고 한다. 북한지역으로 원자재를 가지고 들어가서 가공해 나오는데, 남북관계가 막히면서 승인이 잘 나지 않고 해서 남한출신의 사업가가 북한에서 사업을 하는 것이 예전과 같지 않다고 했다.

한편 한국에서 생산된 물자를 중국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북한에다 파는 사업가는 북한주민들이 한국 상품을 선호하고, 북한주민들의 의식주(衣食住) 수준도 상당히 높아졌다고 했다. 그는 북한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생활용품 500~600여 가지를 팔아 왔는데, 숟가락에서 냉면 뽑는 기계에 이르기까지 물품의 종류가 다양하다고 했다. 자신는 냉면국수 뽑는 기계를 평양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냉면가게와 식당에 팔았다고 하였다. 과장된 부분도 있겠지만 약 500대 정도라는 숫자까지 들어 말했다.

사업가들이 북한사람들을 직접 만날 때는, 한 번에 보통 4~5명이 나온다고 한다. 사장, 부사장, 관리지도원, 생산담당 등이다. 상호감시인지, 역할분담이 확실해서 그런지 물었지만 시원한 답은 안 나왔다. 필자 스스로는 아마도 두 가지 다 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무튼 대북사업가들은 자신의 경제활동이 남북관계로 인해 많은 영향을 받는다며 이러저러한 고충들을 토로하였다.

분위기를 바꿔 답사단은 현재 북한주민들의 현실상을 듣고 싶었다. 사업가들은 우리에게 전달하기를, 북한주민들의 체제에 대한 비판이 줄어들었다고 했다. 주민들도 요즘은 자유롭게 말을 할 정도라고 했다. 식량사정과 관련해 평양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식량배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있다고 했다. 북한의 식량사정은 1990년대 중반보다 나아지기는 했으나 아직 모든 주민들이 먹고 살 만큼은 아닌 듯하다는 것이었다.

남북관계가 막힌 동안 북중관계가 우호적으로 변화하면서 중국 사람들의 대북사업이 활기를 띠고 있으며, 이를 통해 중국 사람들이 북한에서 돈을 벌고 있다고 했다. "곡마단에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X이 받는다"는 속담을 인용하면서 지난 13년간 한국 정부와 기업이 닦아 놓은 기반을 이용해 중국 사람들이 혜택을 보고 있다고 했다. 북한과 중국의 교역이 빠른 속도로 증대하고 있으며, 햇볕정책의 후과를 중국이 챙기고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도 최고의 장사꾼으로 꼽히는 '저장(折江)상인'들이 북한 최고의 백화점을 접수했다고 하면서, 북한 경제가 점점 중국에 예속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기도 했다.

또한 이같은 북중 경제관계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자유로운 북중간 송금이라고 했다. 이는 금융거래가 자유롭다는 말인데, 교역이 곧바로 송금으로 이루어지는 시스템이 북중간에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공산품이 들어가고, 북한은 중국에 석탄을 비롯한 자원을 팔고 있다고 했다. 지난 2011년에도 북한 석탄 2000만 톤이 중국에 들어 왔는데, 광물에는 관세가 없어 북한의 자원이 중국에 많이 들어온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 단둥에 거주하는 남한 사람은 3000명, 북한 사람은 2만 명이라고 지적하면서, 북중간 교역과 남북간 교역 활성화 정도를 이에 종사하는 사람의 숫자를 근거로 설명했다. 앞으로 북한의 김정은은 10만 명의 북한 주민을 단둥에 보낼 것이라는 전망도 덧붙였다. 사업가들은 북한 사람들을 만나서 절대 정치 얘기는 꺼내지 않는다는 말도 해 주었다.

이들 사업가와의 만남을 통해 대북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사업과 기업적인 측면에서 대북활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대북사업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내색을 다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고충을 읽을 수 있었다. 남북관계가 복원되면 이들의 사업도 보다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자리에 중국 상인들이 들어서서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이 썩 기분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국제품이 북한주민의 손에까지 이르러 쓰이고 있다고 생각하니 필자가 직접 준 것은 아니라 해도 마음 한켠이 그나마 뿌듯하였다. 북한주민들도 중국제품이 아닌 한국제품을 받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떨까? 그들의 느낌과 생각이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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