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전문가가 지적하듯, 이제는 지역사회 감염이 널리 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예상컨대, 여기부터는 방역 당국의 힘만 가지고는 어렵다. 바이러스가 닿는 최종 대상은 각 개인이니, 이 문제에 그 누구도 만능은 없다.
지금까지 '중국의 시간', '전문가의 시간', '당국의 시간'이 대부분이었다면, 이제부터는 '한국의 시간', '지역사회의 시간', '개인의 시간'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 단기적으로는, 모두가 협력자이자 공동 작업자(코워커)가 되어야 한다.
다행스러운 일도 있다. 접촉자, 감염자, 확진자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사이, 확진 후 치료 중인 환자들은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 않고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고 한다. 아예 감염되지 않은 것만은 못하지만, 차선은 되는 셈이다.
국내 확진환자 11명은 대체로 건강 상태가 양호하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검사를 반복해서 받고 있다...1∼3번 환자는 발열감이 줄었고, 근육통 등 증상이 호전됐다. 4번 환자는 폐렴이 있어 산소 공급 치료 등을 받고 있지만 위중한 상태는 아니다. 다른 환자들의 건강 상태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국내 환자 가운데 상태가 중증인 환자는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관련 기사 : <연합뉴스> 2월 1일 자 '국내 확진환자 11명 상태 '양호'…"바이러스 검사 반복 시행"')
건강 전체로 보면 전파와 감염만큼 중요한 것이 치료와 회복이 아닌가. 세계보건기구나 랜싯 편집인이 설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염자를 제대로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만한 여건을 갖춘 상황에서는 그만큼 '위험'이 적다. 불행 중 다행이고 그나마 조금 마음이 놓인다.
상황을 종합하면 지나친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는 불확실한 때, 그래도 행동의 원리는 명확하다. 방역 당국을 중심으로 차분하고 냉정하게 대처하는 것. 문제는 투명하게 드러내고 빠르게 보완해야 맞지만, 그 어느 경우라도 틀을 흔드는 정략적 개입은 사태를 그르칠 뿐이다. 과학이 아닌 믿음과 의견, 주장은 혼란을 가중한다.
오늘 우리는 특히 언론과 정치가 제 역할을 하도록 촉구하려 한다. 며칠 전 '일등'을 자처하는 신문이 대문짝에 내건 기사 제목은 '3차 감염 2명, 하루에 5명 확진...방역 참사'(<조선일보> 2월 1일 자)였다. 어떤가? 우리는 이 제목이 언론의 금과옥조인 사실 또는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무슨 근거로 '참사'라는 극단적 표현을 서슴없이 쓰는지. 무엇을 바라건대 '참사'라는 틀을 씌우려 하는지.
'포스트 진실' 시대에 이것이 진실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철학자 이사야 벌린이 제시했다는 그 유명한 예를 되새겨봐야 한다(방향은 완전히 반대다). 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진술 중 무엇이 '참'인지를 묻는다. ① 인구가 줄었다, ② 수백만 명이 죽었다, ③ 수백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④ 수백만 명이 학살당했다.
보통은 ④가 최선의 진술이라고 본다. 가장 평가적이고 실제 사건을 가장 정확하고 자세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사실'이긴 하나 이 말들은 잘못된 쪽으로 힘을 발휘한다. 한때 유행하던 말로는 '주어 없음'이 핵심, 유대인 학살을 마치 자연재해처럼 오도하지 않는가.
지금 방역을 '참사'라 부르는 것은 전혀 반대다.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조차 '주어'를 찾으려 하는 의도적 진술임이 분명하다. '사실'을 전해야 하는 언론이 '진리'를 판단하는 정치적 행위자 노릇에 나선 것이다. 정략적 의도가 아니었기를 바란다.
어디 이 신문만, 이때 이 사건에 대해서만 이럴까? 중국에서 들어온 사람들을 어디에 수용할지를 두고 혼란이 있었을 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언론들은 이렇게 기사 제목을 뽑았다.
'"인구 65만 도심에 우한교민 수용? 무슨 죄냐" 불안한 천안'(<중앙일보> 1월 28일 자)
어느 누군가 따옴표 속의 말을 했으면 거짓말은 아닐 것이나, '불안'이나 '강력 반발'은 전혀 다른 문제다. 누구의 판단, 의견, 주장인가? 그리고 이렇게 표현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방역 당국은 어떻게 하라는 소리인가?
'비상' '뚫렸다' '무방비' '방치' '허점' 따위의 비과학적이고 문학적인(?) 표현도 비슷하다. 사실관계가 틀린 것부터 침소봉대까지, 때로는 작심하고 비난하려는 의도도 보인다. 언론이 본래 문제와 비판을 본령으로 삼는다지만, 문제를 만들거나 키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니.
문제는 이런 진술들이 그냥 허공으로 흩어지지 않고 말로서 힘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영향력이 있을수록 이 말은 바이러스와 같이 감염되고 퍼지며 마침내 시스템을 흔들고 병들게 한다. 방역이 '참사' 상태면, 그리고 사람들이 이 말을 더 믿으면, 어떻게 행동할까? 방역 당국이 하는 모든 말을 의심할 때 방역 당국과 방역 시스템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부 언론과 더불어(또는 편승하여) 방역 시스템을 수시로 위협하는 또 하나의 세력이 현실 정치(인)이다. 두어 달 뒤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으니, 이른바 '프레이밍'에 목을 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정치인과 정당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 정치적 명운을 걸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명과 안전을 볼모로 삼는 것은 죄악이다. '무능한 정권 심판'과 '발목 잡기' 프레임 사이의 전쟁과도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치자. 감염병과 방역 모두 '깊고 두껍게' 사회와 정치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어느 정도 정치화하는 것도 피하기 어렵다.
다시, 문제는 지나친 정치화가 '정략'으로 이어지고 현재 작동하는 시스템과 활동을 공격하고 비튼다는 점이다. 정략적 목적을 지녔음이 분명한 선언들, 예를 들어 '박멸'이니 '전수'니 '완전'이니 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다. 금지, 실시간, 강제 같은 유혹도 마찬가지, 정략으로서 효과는 몰라도 감염병 전파를 막는 데는 무용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사람들, 그리고 모자란 돈과 시간을 쓸데없는 일에 동원하고 싶은가?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면 핵심 업무는 소홀하기 마련이고 그 피해는 사람들로 향한다. 상담할 사람들을 다 빼다 쓰고 싶은가? 더 크게 보면, 예를 들어, 올해는 인플루엔자 유행은 방치할 것인가?
노파심에서 다시 강조하지만, 이대로 완전하다는 뜻이 아니다. 아무런 지적과 비판을 하지 말자는 제안도 아니다. 지금이라도 문제가 있고 고칠 수 있는 것은 마땅히 개선하고 보완하며 수정해야 한다. 다만, '문제해결형' 비판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방역 수준은 방역 당국의 실력과 더불어 사회적 역량에 따라 달라진다. 상식이다. 정치도 언론도 당장 문제를 해결하고 개선하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다. 본령이 그게 아니라고? 그래도 아쉬우면, '총괄 평가'는 차후에 정말 제대로, 충분한 시간을 써서, 그리고 근본적으로. '메르스 이후'와는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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