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제5장 귀국선 우키시마호 (2)
장지성은 안주머니에 권총을 찔러 넣고 행장을 꾸렸다. 오민균 이성유 조병헌도 단도 따위로 무장했다. 그들은 도쿄역으로 나가 교토 행 기차를 탔다.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이젠 나약하고 측은한 식민지 백성이 아니다.
“임무를 마친대로 돗토리 항으로 나오시오. 돗토리 항 3번 게이트에 배를 정박시켜 놓겠소.”
이 말을 남기고 강태선 사장이 중간에 내렸다. 오민균이 현용대를 향해 물었다.
“빠져나온 지점을 파악할 수 있지요?”
“안내할 테니 고길자씨를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앞장서기만 하면 됩니다.”
생도들이 탄 기차는 동해 연안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돌이킬수록 우키시마호의 선내 폭발과 부로수용소의 폭발사고는 의문투성이었다. 우키시마 호가 미군 기뢰에 의한 격침이 아니라 선내의 폭발물에 의한 폭발이라는 근거는 여러 생존자들의 증언에서도 나왔다. 설사 기뢰 폭침이었다고 해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기뢰가 존재하는 걸 알고도 일본 해군이 무리하게 출항했다는 것 자체가 책임질 문제였다.
미군은 태평양전쟁 시 일본 근해 주요 항구의 바다에 기뢰를 공중 투하했다. 기뢰의 기폭장치는 최대 10일간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기뢰가 마지막 투하된 8월 8일에서 열흘이 지난 8월18일 이후에는 기폭장치가 소멸되어 폭발 위험은 사실상 제로인 상태였다. 우키시마호가 마이쓰루 만에 들어갔을 때는 선박들의 왕래가 잦았고, 연합군으로부터 항행 금지를 받은 일본 해군 함정도 움직이고 있었다. 항행 금지였다고 했지만 일본 군함들도 자유 항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기뢰 폭발이라면 폭발과 함께 수십 미터의 물기둥이 솟아올라야 하는데 생존자들이 물기둥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잖아. 기뢰는 한 번 폭발하는 거지만, 연속적으로 폭발했다는 것은 기뢰가 아닌 걸 말해주는 거지. 저 자들은 미군의 기뢰폭발로 몰아가지만 왜곡하는 거야. 미군 기뢰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는 점을 고발하려는 의도도 담겨있는 거야. 자기들도 피해자라는 면피성 발언이야.”
장지성이 선내 폭발로 결론짓자 대부분 동의했다.
“연근해가 기뢰로 위험하다고 경고했다면 더 멀리 바다 가운데로 나가야 했잖나. 조선으로 들어가는 빠른 항로는 동해를 횡단하는 것이야.”
“애당초 부산으로 갈 의도도 없었다는군.”
“시모사바가(下佐波賀) 앞바다까지 들어간 것은 의문이야. 동해로 다시 돌아 나오기가 불편한 항로였으니까.”
따질수록 의문 투성이였다.
일본 정부의 사고처리문서 ‘수송함 우키시마호에 관한 자료(1953년 12월)’에 따르면, 승선한 한국인은 노무자 2,838명과 그 가족 897명 등 총 3,735명이었다. 일본 해군 승조원은 255명이었다. 이 가운데 한국인 524명과 해군승조원 25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정원초과는 없었다. 그러나 승선자 명부를 작성하지 않아서 정확히 몇 명이 승선했는지는 그들도 알지 못했다.
일부 증언자는 승선자가 최대 12,000명이라고까지 주장했는데, 아무리 적게 잡아도 정원(3,800명)에 맞게 승선했다는 발표는 꿰맞춘 인상을 주었다. 큰 객실은 해군병사 250여명이 점유하고, 조선인 탑승객은 탄약고와 기관실, 갑판, 창고 등 발디딜 틈없이 들어차 있었으며, 배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평형수나 자갈을 싣는 배 밑창에도 널빤지를 깔고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우키시마호 소속사인 오사카 상선은 침몰 선박을 사고 발생 5년 후인 1950년 3월 인양을 시도해 선미 부분을 건져 올렸다. 회사는 인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침몰 원인을 캐내는 작업을 수행하지 않았다. 인양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선박 재사용 여부를 확인했으며, 이에따라 배 안에 남아있는 유골ᐧ유물을 방치했다.
한국전쟁 이후 일본의 고철 값이 폭등하자 오사카 상선은 1954년 1월 두 번째 인수작업을 벌여 선수 부분을 인양했는데, 이때도 침몰 원인을 캐지 않고 선박을 해체해 팔아치웠다. 단연코 증거인멸인 셈이었다.
우키시마호는 해로와 수중 탐색이 가능한 해군 수송선이었다. 따라서 정밀 조사를 해서 원인 규명을 해야 했다. 그런데 누가 접급할세라 부랴부랴 선박을 해체해버렸다.
이때 수습한 유골이 103구였다. 이 유해를 사고 때 임시로 매장했던 153구의 유골과 함께 256구를 화장하고 이미 발표한 사망자 숫자에 맞춰 524위로 분골·합장했다가 1971년 도쿄 유텐사(祐天寺)로 유골을 옮겨 안치했다. 이렇게 저렇게 꿰맞추려는 흔적이 역력해 의구심을 낳고 있었다.<조선일보 2010.12.26.일자 보도>
일본 정부는 2차 대전 패망과 함께 앞으로 전개될 전범재판 과정에서 고통당한 한국인 징용자들이 악행을 고발하는 등 적극 행동에 나설 것을 우려했다. 저지른 악행들이 폭로되고, 노예로 취급당했던 죄상들이 전범재판소에서 속속들이 드러나면 세계 양심으로부터 배척받으며, 배상 요구와 함께 보복이 나올 것이며, 이때 패전국 일본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라는 우려의 중심에 있었다. 식민지 백성이 전승국의 일원이 되어서 공격하면 미군에게 항복한 데 이어 종으로 부렸던 조선인으로부터도 시달리게 된다는 것은 두고두고 수모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래서 무장해제된 총 대신 문서부터 소각하라고 명령했다. 강제 징용자, 강제 동원한 위안부 기록일수록 신속히 소각하도록 전 부대에 하달했다. 세계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인권유린 사례가 많은 관할 부서의 문서부터 태우도록 긴급 지시한 것이다.
그리고 연합국의 지시를 신속히 이행한다는 명분으로 한국인 징용자부터 본국 송환하라는 명령을 군에 내렸다. 한국인 징용자는 춥고 지형지세가 험악한 일본 북부지방 탄광과 항만·도로·비행장 건설에 집중 투입되었다. 해방이 되었으니 유독 고통을 겪은 이들이 앙심을 품고 항의하거나 고발할 것으로 일본은 우려했다. 그래서 항복 선언하자마자 연합군 조사반을 피해 본국 송환작업을 서두른 것이다. 우키시마호가 대표적 사례다. 우키시마호 승조원들은 한국으로 들어가면 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공포에 싸였다. 출항 전 승조원들이 한국행을 거부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한국으로 들어가면 조선 사람들한테 묶여서 영영 못나오는 것 아닌가?”
“맞아 죽을지도 몰라. 우리가 보복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명령을 거부하자.”
“평양에선 일본인들이 옷이 할랑 벗겨져 거리에서 쫓겨나고, 일본 여자들이 소련군에게 집단 겁탈 당하고 있다는데, 우리라고 온전하겠나.”
그러나 일본 정부는 승조원들의 불만보다 조선인을 가능한 빨리 자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고 송환작업을 강행했다.
“명령을 어긴다면 항명으로 처단하겠다.”
일본군은 명령불복종과 하극상을 최대의 범죄로 여기는 전통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일사불란한 군사문화를 만들고, 세계 최강의 군대를 유지하는 근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승조원들은 “전쟁에 동원된 인력을 지체없이, 그리고 안전하게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연합국의 항복 문서 명령에 따라 징용자 송환 작업을 벌였으나, 여전히 지배자의 태도를 보였다. 노예로 살아온 삶의 자세 그대로 송환자들은 변함없이 순하고 복종적이다. 몽둥이에 길들여진 탓일까,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굴종하는 모습이다. 그들에게는 자유인, 해방자란 인식이 없었다. 저런 것들을 “지체없이, 안전하게 제 자리에 돌려놓는다”는 것이 가당치 않다고 본 일본군은 패전국 신분 변화에 상관없이 오만을 부렸다. 송환자의 착하고 굴욕적인 품성이 그들의 오만을 더 키워준 셈이었다.
“빠가야로! 어디다 소변보는 거야? 짐승같은 놈들!”
갑판원들이 몽둥이로 송환자를 후려갈겼다.
“조센징은 어딜 가나 개돼지처럼 산단 말이야!”
그들은 선내 환경을 번연히 알면서도 채찍을 휘둘렀다. 승조원 눈에는 여기저기 비위생적으로 배설하고 먹고 자고, 아무데서나 쭈그려 앉아 토하는 모습이 꼭 미개한 토인들과 같았다.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하는 일본군 특유의 책임감은 사라지고, 될대로 되라는 식의 관리도 선내 질서를 어지럽혔다. 해군 승조원 중 패망의 절망에 빠져 바다에 투신한 자도 있었으니 그들 자신 삶의 의욕도 없어보였다. 이 결과 중화기와 폭탄 같은 위험물질도 방치했다.
무슨 사고가 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본군의 기강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해이와 나태와 무질서였다. 꼭 난파로 가는 절차처럼 보였다.
일본 패망과 함께 조선인 귀국 수송대책은 한국에 주재했던 일본인 귀환 시책에 비해 완전 방치 수준이었다. 그 무렵 이키 섬 북부의 가쓰모토 해안의 귀국선 침몰과 이키 섬 동쪽 아시베만에서 귀국선의 난파로 인한 십수 건의 조난 사고가 발생했다. 그것 또한 방치와 방관의 인재였다. 관리 소홀, 구조 회피로 귀국자들이 흔적도 없이 수장되고 말았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덮는 자는 침묵을 지키니 혼란한 시기 완전 범죄가 성립되었다.
이것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할 조국이 없으니 그저 모멸의 시간을 견디는 것이 귀국자의 선택지였다. 권력을 인수받은 미군정은 주재민의 안전관리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패전국의 폭력성이 드러났는데도 원인 규명과 사후책이 없었다. 가해자가 은폐하는대로 시간이 흘러갔고, 그래서 조작하고 지울 수 있는 시간만이 무한대로 열려있었다.
일본 정부는 미군이 우키시마호 격침을 수중에 부설한 기뢰에 의한 전과(戰果)로 본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가 이 뿐이라니, 도대체 우리에게 조국이란 무엇이지?”
오민균은 스스로에게 물었으나 돌아온 답은 없었다. 사람 값을 구할 수 없는 나라. 사람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나라. 희생자가 무수히 나왔어도 속수무책인 나라. 모든 것을 팔자소관으로 돌리는 무책임성. 그래서 개인의 팔자는 민족의 운명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것인가. 혼란과 권태와 나태 속에 졸고 있는 조국....
기차는 이름 모를 역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떠났다.
“부로수용소 뒤편으로 산이 있다고 했지요?”
오민균이 현용대에게 물었다.
“네. 언덕을 깎아서 건물을 앉혀서 뒤편은 절벽입니다. 뒷산을 넘으면 미야즈 시나 아미노 읍내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곧 바닷가에 닿을 수 있습니다. 돗토리 항이 그리 멀지 않습니다. 센자키 근방이지요.”
현용대는 고길자를 구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었다.
“현용대씨가 노역에 동원되었던 곳이 조선인이 그렇게 많았습니까?”
“많았습니다.”
승선자들은 대부분 군사요충지 시모키타반도 일대에 강제징용. 강제징병된 사람들이었다. 센다이 인근 비행장건설, 해군시설부 군항과 방공호 파기와 보수 작업에 동원되었다. 징용을 마치고 돈벌이를 위해 일시 눌러앉은 노동자들도 있었다.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어린 처녀도 흘러들어왔다.
“막노동에 시달리면서 맞지 않는 것만으로 고맙게 생각했지요.”
일본군은 시모키타 반도에서 대대적인 철도 부설과 터널·부두·비행장 공사를 시작했다. 시모키타 반도는 산세가 험난해서 대부분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지형이었다. 일본인들은 접근을 꺼려해 조선인들이 난공사에 투입됐다. 험한 지형공사를 조선인 징용자들이 마무리했다. 그러나 대우가 형편없었다.
강제징용자들은 굶주림, 중노동, 폭력에 시달렸다. 말 그대로 지옥과 같았다. 무 한 조각이 반찬의 전부였고, 끓인 바닷물국과 보리밥이 식사의 전부였다. 배가 고파서 돼지에게 주는 꿀꿀이밥을 훔쳐 먹었다. 이런 생활을 견디다 못해 탈출한 징용자들을 감독관이 잡아와 천장에 매달아놓고 장작불을 피워 본보기로 태워 죽였다. 탈출하면 이런 꼴을 당한다는 위협이었다.
불만을 가진 자들은 영하 3,40도의 사할린 혹한 지역으로 축출되었다. 쓰러지는 노동자 중 더이상 노동력으로 써먹기 어렵다고 판단하면 없애버렸다. 일하다 죽으면 그 자리에서 묻거나 수백 길 되는 낭떠러지 폐광에 버렸다. 굴 속에서 해골들을 자주 발견했는데 그런 연유로 죽은 조선인들이었다. 징벌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징용자들은 가족을 부르며 절규했고, 터널 암벽에 부모 처자의 이름과 배고픔을 손톱으로 새겼다. 그런 징용자들이 해방과 함께 희망을 품고 우키시마호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다가 바닷 속에 영원히 수장되었다.
“개새끼들!”
오민균은 억울해서 견딜 수 없었다.
마이쓰루 역에 내리자 생도들은 가판대에서 며칠 분의 신문부터 샀다. 해난사상 최악의 사고를 열흘 늦게 보도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조그맣게 단신성 기사로 처리되었다는 점이다. 사고원인과 배경, 사망자 명단은 물론 현장사진 한 장이 없었다.
“후속 기사 한줄 없으니 신문기자란 놈들도 공범이야. 보도관제가 풀렸는데도 이 모양이야.”
“해난사고가 보도관제와 무슨 상관이야? 그 새끼들이 의도적으로 지우려는 것이지.”
이성유가 신문을 찢어 날렸다. 승선자 가운데서 우키시마호에 화학물질과 탄약들이 실려있었다는 증언들이 나왔다. 해군승조원 200여명이 폭발 직전 구명정을 타고 하선했다는 증언도 되풀이되었다. 하지만 이런 의혹을 파헤친 언론은 없었다.
“국가 동원체제적인 군국주의에 체질적으로 순응한 언론들의 한계야. 권력의 선전대일 뿐이지. 언론이라고 할 수 없어.”
“그렇더라도 이건 아니지. 이런 어마어마한 사건을 덮고 간다는 건 언론이길 포기한 거야. 희생자 중엔 애절한 사연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을 거고, 기적같이 살아나온 생존자도 있었을 건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할 수 없었을까. 보도경쟁이 있었을 법한데...”
비슷한 시기 발생한 일본 중부 하치고선(八高線) 열차 충돌사고는 대서특필되었다. 열차가 선로를 이탈해 십수 명이 죽은 사고였다. 우키시마호에 비하면 작은 사고였다. 그런데 열차 사고는 연일 대서특필되었다. 지방신문은 호외까지 발행했다. 이처럼 두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이는 식민지 백성을 보는 그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해주는 것이었다.
“헤엄쳐서 육지로 올라온 생존자들도 잡히면 죽을까봐 산과 개울로 숨어서 도주했다니까요.”
현용대의 말이었다. 살아남은 것도 죄가 되는 것이었다. 조난자를 보호하고 조사한다는 차원이었지만, 생존자를 포로로 잡아가두고, 거기서도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수십 명 희생자를 냈으니 따지고 보면 송환자를 안전하게 송환해야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었다.
오민균은 산 위에서 쌍안경으로 타이라 해병단 본부를 살폈다. 숲속에 붉은 벽돌건물들이 들어앉은 병영은 여자대학 캠퍼스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건물들은 아름다움과는 전혀 상관없는 어뢰, 총포, 폭탄 등 군사무기를 보관해놓은 창고들이었다.
오민균으로부터 쌍안경을 받아들어 시내를 살피던 조병헌이 낮게 말했다.
“벽돌건물도 조선의 징용자들이 지은 거야.”
그런 건물이 30동 쯤 되었다. 초등학교 같은 건물이 일자로 길게 늘어선 곳이 해병단 본부였고, 그 옆 숲속에 병사동이 숨듯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기 건물들 중에 귀국자들이 수용돼 있을 거야. 조선인이 지은 건물에 조선인이 갇혀있는 거야.”
마이쓰루는 요코스카, 사세보와 함께 일본 해군장교를 양성하는 군항이었다. 청일전쟁 승전 전리금을 받아 건설한 군항인만큼 유서가 깊었다.
“두 조로 나눕시다. 우리 조는 본부를 찾을 테니 조병헌 조는 현용대씨와 함께 부로수용소로 가세요. 역할 분담하는 게 좋습니다.”
1조와 2조로 나누어 부대로 다가가자 산에서 바라볼 때와 달리 병영에는 사람들이 꽤 움직이고 있었다. 군인 가족들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침울했다. 패망의 그늘이 누구나없이 얼굴에 담겨있었다. 해병단 정문의 보초병도 총을 거꾸로 메고 풀밭에 쭈구리고 앉아 졸고 있었다.
“초병!”
오민균이 불렀지만 초병은 귀찮다는 듯 팔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가볍게 손바닥으로 때리더니 다시 졸았다. 군율이 엄격한 일본군이 이렇게도 지리멸렬할 수 있나.
1초소를 지나 본부를 향해 걸어갔다. 아취형 현관 입구에는 스리쿼터가 한 대 서있고, 그 옆에 근무병이 큰 나무에 등을 기대고 퍼질러 앉아 있었다. 오민균은 근무병을 무시하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본부 사무실엔 민간인인지 병사인지 구분이 안되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잡담을 계속하고 있을 뿐 방문객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한쪽 책상에서 무언가를 적고 있던 군조 계급의 병사에게 오민균이 다가갔다.
“우린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다. 지휘관을 면회하고자 한다.”
그가 말없이 일어나서 따라오라는 듯 앞서 걸었다. 부관실로 안내한 군조 계급은 다시 말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무슨 일이오?”
해병단장실의 부관은 중위 계급을 달고 있었다.
“수송선의 침몰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타이라 해병단의 화재사고도 접하고 왔습니다.”
부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으나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육군사관 생도들입니다.”
“사관생도가 무슨 일로?”
“사건을 알아보고 상부에 보고할 게 있소. 군사부에 의해 감찰명령을 받았소. 해병단장 어디 계시오?”
“단장 각하는 소환돼 해군본부로 갔소.”
오민균은 그가 해병단 화재사고로 소환된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부책임자를 불러주시오.”
“귀관들 소속이 뭐라고 했소?”
“사고가 났다면 누구에게든지 설명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육국사관 생도들입니다.”
“육군사관학교가 폐교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부관이 의심의 눈초리로 그들을 살폈다.
“부관께서 알다시피 육사는 폐교되었습니다. 연합군으로부터 맨먼저 폐교와 무장해제 명령이 떨어졌으니 폐교된 것입니다. 해병단도 해체 코스를 밟게 될 것입니다. 학교는 생도 인력을 풀어서 각 부대 현장을 감찰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우키시마호가 폭침되고, 해병단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해 수용된 조난자 수십 명이 불에 타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파견된 것입니다.”
오민균의 거짓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듯하다가 그래도 미심쩍었던지 물었다.
“다시 묻겠다. 여기 온 것은 공적인가 사적인가?”
“둘 다요.”
“알겠소. 잠시 기다려주기 바란다.”
부관이 벽에 부착된 비상전화 부스로 가더니 누군가와 한동안 통화를 한 뒤 돌아왔다.
“부단장과 담당 장교가 올 것이다. 기다리기 바란다.”
창 밖으로 병사들이 나무그늘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맥빠진 모습들이었다. 잠시 후 중좌 계급의 부단장과 대위 계급의 장교가 들어왔다.
“나카무라 부단장님이시다. 이쪽은 정훈장교 후쿠야마 대위다.”
부관이 소개하자 오민균과 이성유가 두 사람을 향해 경례를 붙였다.
“우리는 우키시마호 침몰사고와 해병단 화재사고를 접하고 왔습니다. 사고원인과 구조대책에 대해 알고자 합니다.”
“일본정부가 공식 발표한 것이 전부다. 그런데 당신들이 무슨 자격으로 여기 온 거냐? 신분이 불확실하다. 나가라.”
단번에 불호령이 떨어졌다. 오민균이 신분을 소개하고 방문 목적을 말하자 그는 단번에 부정했다.
“폐교된 육사는 폐교되었을 뿐, 어떤 권한도 부여하지 않았다. 나가라!”
그제서야 오민균이 버티며 큰소리로 말했다.
“우린 피해자 가족 중 한 사람입니다. 조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귀국선이 침몰했다면 사고 원인과 피해자 상황, 구조 상황, 사후대책을 알아야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군은 당연히 브리핑을 해야 하고요.”
“군 발표 기관은 따로 있다. 혹 우리가 발표할 권한이 주어졌다고 해도 제군들에게 말해줄 의무는 없다. 귀관들은 누구로부터도 임무가 부여된 것이 아니니, 나가라.”
오민균이 밀리지 않고 가슴을 내밀며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지금부터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말하겠소. 지금 일본은 무장해제가 됐소. 그 권총부터 내려놓으시오. 해병단장은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연합군최고사령부에 소환되었소. 일본 해군은 연합군의 명령에 따라 귀국선을 안전하게 조선으로 보낼 의무와 책임이 있소. 그런데...”
그러자 나카무라 중좌가 재빨리 그의 말을 자르고 나섰다.
“너희는 연합군 소속이 아니다. 같은 일본군으로서 패배했다. 우린 조난자를 보호 중이다. 추가 조사도 필요하다. 정 원한다면 브리핑하겠다.”
그러면서 곁에 서있는 부관을 향해 자시했다.
“이들이 원한다니 귀관이 상황을 브리핑하라.”
후쿠야마 대위가 옆구리에 낀 각반의 노트를 펼치더니 읽어나갔다.
-1945년 8월 24일 17시 우키시마호가 식수 공급과 연료를 보충할 목적으로 마이쓰루 항으로 입항중이었다. 연합군이 부설한 기뢰에 선수가 접촉하면서 폭발이 일어났다.
마이쓰루 만에는 미군이 부설한 기뢰 삼십 여기가 수중에 설치돼 있었는데 자기(磁氣) 기뢰에 대해서는 우키시마호 자체의 장비로 탐색이 가능하고, 음향 기뢰는 소해정이 음향발신기로 위치를 파악하게 되어있다.
우키시마호는 마이쓰루 항으로 들어가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기는 했으나 명령 전달 과정에서 혼동이 일어나 길을 안내하는 소해정들이 제 때 마중나오지 않았다. 우키시마호는 기다리지 않고 마이쓰루 만으로 들어갔다가 두 기뢰가 설치된 수역으로 진입하여 폭발하였다.
후쿠야마 대위는 여기까지 읽고 덧붙여 우키시마호 해군지도부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승조원과 승선자를 함선의 데크(갑판)로 유도했기 때문에 피해가 적었다고 설명했다.
사고 원인을 기뢰 폭발로 규정했는데, 기뢰폭발에 의한 사고라고 주장하는 직접적 근거로는 침몰한 우키시마호의 상태가 상부 구조물이 파괴된 것이 아닌 배 밑바닥의 선체가 파괴된 흔적이 있다는 점, 선상의 부품이 날아간 것이 없다는 점, 사망자들의 사체가 화상을 입지 않은 점 등을 들었다. 그리고 미군이 이 사건을 수중에 부설한 기뢰에 의한 폭발 전과(戰果)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도 증거라고 주장했다.
어찌됐건 이는 타의에 의해 귀국자들이 희생됐다는 얘기가 된다. 일본이 항복 문서에 조인하고 전쟁 수행중인 것도 아닌 때에 일어났으니 더욱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고가 난 지 9년이 지난 시점에 침몰한 배를 인양할 때도 선체를 제대로 살피지 않았는데 침몰 때 선체를 조사했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었다. 조사를 했더라도 객관적으로 조사팀을 구성해 나섰어야 했다. 해군이 일방적으로 조사하고 일방적으로 발표한다는 것은 진실을 의문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짓말 마시오.” 오민균이 소리지르며 그의 설명을 가로막았다. “우리는 생존자의 증언을 듣고 직접 여기에 왔소. 우키시마 호의 승조원들은 배가 부산에 도착할 경우 분노한 한국인들에게 보복을 당할 것을 두려워해서 부산으로 가라는 명령에 불복하고 항명했소. 그리고 해군이 우키시마 호에 실린 폭탄 처리에 대한 뚜렷한 방안도 제시하지 않고 귀국선을 운항했다는 말을 들었소. 그래서 자폭설도 나왔던 것이오. 우키시마호가 출항 당시 얼마 되지 않은 연료를 가지고 출항했다는 승무원의 증언은 우시시마호가 애당초 부산항까지 항해할 목적과 계획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아니오?”
“모르는 일을 예단하지 말라. 추론은 금물이다.”
“왜 모른다고 막나.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우키시마호가 출항하기 전 오미나토 군항 일대의 일본인들이 우키시마호가 제대로 조선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폭침되기 직전 승무원들이 갑판의 한국인들을 강제로 선내로 몰아넣고, 200여 명의 일본해군 승조원들이 탈출 후 폭발했다는 점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그들은 마이쓰루 군항으로 후송된 해군 병사들이다.”
“그들을 불러와 대면시켜 달라.”
“모두 다른 부대로 분산, 배치됐다.”
“의도적 회피다. 당신들은 미군이 설치한 기뢰 접촉에 의해 일어난 우발적인 사고라고 우기고 있지만, 마이쓰루 군항으로 들어오는 항로는 기뢰 기능이 이미 끝난 안전한 항로였다. 한 해군장교는 우키시마호가 마이쓰루 항에 입항하기 전 경비대로부터 ‘소해 완료’라는 사인을 받고 입항했다고 증언했다.”
“알고 싶거든 해군 수사반을 찾아라.”
후쿠야마 정훈장교가 발을 뺐다.
“아니, 해병단 해상에서 벌어진 사고를 해병단이 모른다니 말이 되는가. 현지주의에 입각해 사건현장에 가장 가까이 있는 부대가 무조건 구조하고,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군 수칙이다. 그것을 모르고 작전을 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해난사고는 사고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경찰이나 부대가 나서서 구조활동을 벌이고 원인 파악을 한다. 사고 전후 과정을 조사하는 것도 현지의 경찰과 군 수사기관이다. 그런데 당신들은 구조하지도 않았고, 수사도 하지 않았다. 사명감을 기망한 것이다.”
나카무라 중좌가 나섰다.
“귀관의 지적은 뼈아픈 교훈을 주고 있다. 변명하자면, 해병병단은 패전후 누구나 없이 자포자기 상태다.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정신적 충격이 크다. 절망과 좌절, 패배감에 젖어서 술에 의존하는 병사들이 많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무장해제가 하달되니 모두 손을 놓고, 군기가 빠지고, 상실감에 빠졌다. 자살자도 속출하고 있다. 이것이 사후대책을 세우지 못한 요인이다. 이 점 변명의 여지가 없다.”
고뇌에 찬 표정이 그의 얼굴에 짙게 드리워졌다. 초소병들의 흐트러진 모습들이 오민균의 뇌리에 스쳤다.
“생존자들이 선내에서 폭발음을 수차례 연속적으로 들었다고 했는데, 폭뢰에 따른 것이라면 이런 현상이 나올 수 없습니다. 물기둥이 솟구쳐 올라야 하는데 없었다고 했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사람이 이 사람입니다.”
오민균이 곁에 서있는 현용대를 앞세웠다. 현용대가 말했다.
“배가 폭발해 사람들이 튕겨져 나갔습니다.”
오민균이 다시 나섰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 그들대로 희생되었습니다. 구조된 조선인이 타이라 해병단에 수용된 뒤 원인모를 화재 폭발로 수십 명이 죽지 않았습니까.”
정훈장교 후쿠야마가 그의 얘기를 빠짐없이 수첩에 받아 적고 있었다.
“병영에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일본군대에서 있을 수 없는 치욕입니다. 사고원인이 무엇입니까.”
부단장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할 말이 없었다. 관리소홀 아니면 의도된 방치, 둘 중 하나였다. 일본 군대가 계획된 인간 도살로 이끈 것이라고 우겨도 해명할 방법이 없었다. 군기 우선의 해병단에서 이런 사고가 난 것은 누가 뭐래도 수모 그 자체였다.
밖이 소란하더니 조병헌 조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사할린에서 온 징용자의 얘기요. 에수토루란 마을에서 조선인 집단학살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들 패망했다구 뭣대로구만?”
“에스토루란이라니?”
사할린 서북부 에스토루 지역에는 징용자를 비롯한 조선인이 10,000명 정도 살고 있었는데 일본 패전 후 5,000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인구가 하룻 사이에 반 이상 감소한 것은 도망간 사람도 있지만 일본의 처치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병헌 뒤를 따르던 사람 중의 하나가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악에 받쳐있었다.
“소련 국경과 인접해 있는 사할린 가미시스카 지역에 일본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소. 철도와 도로, 비행장 건설을 위해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이 붙들려온 곳이오. 소련군의 진격이 시작되자 일본군이 후퇴하면서 조선인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사살했소.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첩자 노릇을 한다,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맞고 있다, 조선인들 밀대 역할을 하고 있다, 라는 소문을 퍼뜨리더니 8월 18일 일본 헌병들이 가미시스카 경찰서 유치장에 조선인들을 잡아 몰아넣고 불을 질렀소.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총으로 쏴 사살했소. 피난 차량에 조선인을 태운 후 차량과 함께 수장시키기도 했소. 그중엔 종군위안부 처녀들도 있었소. 나는 도망쳐서 홋카이도로 건너와서 아오모리를 배회하다 우키시마호를 탔소.”
이성유가 부단장의 얼굴을 가격했다. 후쿠야마 대위가 달려들었으나 나카무라 부단장이 제지했다.
“가만 두라!”
“개새끼들아, 우린 생사를 버리고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 목숨 바치고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런데 이게 뭐냐!”
“이 생도, 진정해요. 여기서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오민균이 그를 제지했으나 부단장이 말했다.
“당신들의 분노를 이해하오. 이렇게 해서라도 분풀이가 된다면 내 뺨을 열대라도 내놓겠소. 나 역시 가해자요.”
나카무라 중좌는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이성유의 얼굴에는 그 사이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1945년 제2차 대전 후 대일 점령 정책을 실시하기 위하여 도쿄에 설치했던 일본 주둔 연합군최고사령부(GHQ: General Headquarters)는 승전 직후 연합군총사령관 각서를 발표하고 일제 식민지 백성들의 지역과 직업별 귀국 순위를 정했다. 지역별 순위는 (1)하카다, 시모노세키 (2)오사카 고베 (3)기타지역으로 나누었다. 귀국자 직업별로는 (1)군인 (2)강제노역 노동자 (3)기타 등으로 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행정상의 구분일 뿐 제대로 지켜진 것이 없었으며, 각서에 근거한 송환은 묵살되었다.
일본 전역에 있던 한국인이 250만명에 이르렀으니 수송이 어려웠다. 잔류 희망자도 많았지만 백여 만 명 이상이 귀국을 희망했으니 수송전략에 차질이 생겼다. 패전국 일본은 연합군과의 패전 협정을 따른다고는 했으나 제대로 이행된 수송대책은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노예들인데 얌전히 제 자리에 갖다 놓는다는 것이 짜증나는 일이었다. 패망한 것도 불쾌한데, 그들을 얌전히 제 자리에 갖다놓다니... 그래서 행정 지시가 내려와도 하부(下部)에서 무시하거나 묵살했다. 현지 지도 명목으로 귀국자를 탄압했다. 전승국은 이를 방관했다. 결국 급한 사람들은 소형선박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주로 변을 당했다.
우키시마호 사건을 단순한 해난사고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일본의 지성들에 의해 제기된 것은 사고 발생으로부터 30년이 지난 1976년 전후였다. 일본의 양심적 인사들은 ‘우키시마호 침몰사고는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본 해군이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한 한국인 강제징용자에 대한 학살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1960년대 말부터 사이토 사쿠치 시모키타지역문제연구소장, 아키모토 료지 아오모리 대학교수, 와시오카 코쇼, 나루미 겐타로 씨 등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을 폈다.
반면 국내에서는 간간히 언론보도를 통해 사건의 존재만 알려졌을 뿐, 심층적으로 진실을 밝혀내려는 노력은 없었다. 사건에 대해 자료를 갖고 있는 우키시마호 연구가 사이토 사쿠치 상이 한국측 유가족들에게 일본측 자료를 제공하면서 한국내에서도 1990년대 이후 진상조사에 나섰다.
일본 지식인 사회가 먼저 움직인 계기는 해난사고가 난 마이쓰루 만 주민들이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제를 매년 지내면서부터였다. 이들이 일본 여론을 각성시킨 것이었다. 그 결과, NHK가 1977년 8월 13일자로 다큐멘터리 ‘폭침’을 탐사 취재해 방영했다.
방송은 일본측 자료를 인용해 “조선인과 조선인 해군 군속들이 빨리 고국으로 보내줄 것을 항의하는 등 불온한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다” 라는 등 일본 정부 관점으로 보도했으나, 참혹한 폭침의 과정을 상세히 보도함으로써 일본 여론을 움직인 계기가 되었다. 탐사보도를 통해 사회여론을 환기시키고, 누구나 합리적 의문을 갖게 한 시간들이 주어진 것이다.
우키시마호 승무원이었던 하세가와 모토요시 이등병조는 증언에서 “승선인원이 6천 명에서 8천 명이었다”고 회고했다. 조타장이었던 사이토 츠네지 상등병조는 “우키시마호가 세이칸(靑函) 연락선과 대체했을 때, 배 밑바닥에 4천 명을 태운 적이 있는데, 오미나토 항에서 탄 조선인은 더 많이 탈 수 없을 정도로 빼곡이 들어차서 그보다 2천 명은 더 되었을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일본 정부는 한 자료에서 생존자가 3,211명이라고 밝혔다. 6,000명 이상 승선했다는 하세가와와 사이토 증언을 토대로 한다면 승선자 6000명 중 3200여명의 생존자를 빼면 사망자 숫자는 최소 2,700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일본정부가 발표한 사망자 524명보다 다섯 배가 많은 수치다. 수치가 오락가락해 신빙성을 기대할 수 없지만 일본 정부가 말한 공식 사망자 숫자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승선자를 한국 당국과 크로스 체크하면 그 정확성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작업이 생략되었다.
기록을 중시하고 수치를 정확히 맞추는 일본인이 우키시마호에 관한 한 ‘숫자 백치’를 내보이고 있는 것은 ‘의도된 은폐‘라는 의구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일본이 희생자 명단을 작성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일본이 말하는 사몰자 명부 작성 시기는 사고 발생 7일만인 1945년 9월1일이었다. 그러나 신속하게 사망확인서, 호적말소 통지서 사본이 첨부된 사망자 명부를 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되는 일이다.
승선자 명부가 존재해도 교차 확인절차와 시일이 요구되는데 명부가 없는 가운데서 사몰자 명부가 일방적으로 나왔다는 것은 수치의 신뢰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다에 가라앉았거나 선체에 갇혀있는 유해가 얼마인지 확인되지 않은 시점이고, 전 가족이 사망했거나 독신자가 사망해 신고하지 않은 경우도 수다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귀국자가 탑승한 바람에 나중에 승선자 명단 작성 자체를 포기한 상태였던 것이다.
우키시마호 기관장이었던 노자와 다다오 소좌는 “출항명령이 내렸을 때 함장, 항해장 등 몇 사람이 도중에 어느 일본 항구에 입항하는 것을 협의했다. 작전에 관한 것은 기관장에게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듣지 못했으나 도중 어느 항구에 입항하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며 마이쓰루 행은 우연이 아니라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라고 말했다.
조타장 사이토 상등병조도 “우리는 처음부터 부산에 갈 생각은 없었다. 배의 항로는 출항 후에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가 결정되면 항로를 정하고 그 항로로 운항한다. 우키시마호는 부산으로 가는 항로가 아닌 일본 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항로로 갔고, 그것은 일본 항구에 들어가는 항로이다. 출항 때부터 마이쓰루 항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도중에 항로를 변경하는 그런 항해는 없었다”고 증언했다.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을 다룬 책 <アイゴーの海(비극의 바다)·1992>에는 당시 여러 자료를 근거로 자폭이라는 추론을 내렸다. 이 책의 한 대목이다.
-폭발은 기관실에서 일어났다. 군인들 대부분은 이미 갑판 위에 있다가 폭발과 동시에 구명정을 타고 도망가버렸다. 귀국 노동자들과 가족은 비명을 지르며 선실에서 갑판으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사다리는 하나밖에 없었고 배가 침몰하면서 승선자들의 시체가 파도 위에 뜨기 시작했다.
이때 조선인으로 일본 해군 헌병 중위였던 백일남(白一南·충북 출신)이 갑판에서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어 '저놈을 죽여라!' 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3명의 일본 수병이 그를 쫓아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온 몸이 바다에 뜬 기름으로 범벅이 돼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없어서 그는 살아났다.
왜 일본 수병들이 그를 죽이려 했는가. 그가 배 안에 폭발물이 놓여있고 전선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동포들에게 알렸기 때문이다.
1978년 ‘우키시마호 순난자추모회’가 폭침 현장인 마이쓰루 만 시모사바가에 추모비를 세웠다. 이후 해마다 8월 24일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
국내에서도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진상규명위원회(1995년·천안), 우키시마호폭침 한국희생자 추모협회(2010년·부산) 등이 발족해 진상규명과 추모사업을 펴고 있다. 희생자추모협회는 2012년부터 부산에서 ‘우키시마호 폭침 희생자합동위령제 및 추모제’를 매년 열고 있다.
그러나 사건은 여전히 미제다. 희생자추모협회는 “일본은 초고령으로 접어든 생존자들이 타계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때가 오면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시치미를 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민간단체의 활동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정부나 국제기구가 나서서 일본 정부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가능하다면 남북 합동으로 대응하는 방안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북한은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살아있는 령혼들, 2001)>을 제작, 상영했다. 2003년에는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 남북합동토론회가 평양에서 열려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와 일본정부에 보내는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일본은 그들이 저지른 악행에 대해서는 철두철미 은폐하고 있다. 숨기는 자가 범인이듯, 그들 스스로 내놓고 범죄자로 배짱있게 나서고 있다. 따라서 그들을 잡아 책임을 묻는 것은 피해자가 나서서 추궁할 수밖에 없다.
<출처 http://www.geocities.jp/k_saito_site/doc/tango>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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