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 한국의 식민 피해 호소를 묵살하다 ⑪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⑪

김민웅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가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지금 일본은 과거사 문제를 빌미로 한국에 '무역 도발'을 감행했습니다. 선전포고도 없이 사실상 '경제 전쟁'을 선언한 셈입니다. 현 상황은 매우 엄중합니다. 한일 관계에서 이른바 '1965년 체제'를 전환해야 할 시기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 '1965년 체제'는 비단 한일 관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북아 질서와 한일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965년 체제'는 무엇인지에 대해 차분히 되새겨봐야 합니다. 그 시작점은 1965년 박정희 정권이 체결한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입니다.

김민웅 교수가 한국어와 일본어로 '한일협정은 무엇인가'에 관한 글을 문답형으로 정리했습니다. <프레시안>은 김 교수의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이 글이 한국과 일본의 독자들에게 널리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12) “일본의 대한(對韓) 청구권 포기”, 애초에 없던 것을 포기한다? 그러면서 무슨 선심을 쓰는 것 같이 들리네요. 1965년 한일협정에서 정리된 차관을 포함한 5억 달러에 대해서도 그걸로 우리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었지 않느냐라는 논리가 꼭 그런 식인 거 같아요.

일본 정부도 그렇게 우리 내부의 친일세력도 그런 논리를 펴지요. 그 돈 아니었으면 이런 경제발전이 있었겠느냐? 라는 겁니다. 빼앗긴 걸 일부, 그것도 아주 최소의 수준으로 돌려받은 것이고 만일 그런 식으로 빼앗기지 않았다면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발전을 했을 지에 대한 반증이 되기도 하는 거지요.

강도에게 빼앗긴 재산의 일부를 겨우 돌려받았는데 그 강도가 “그걸로 너 이제 좀 살게 되었잖아!” 하면 누가 그 말에 “아, 그러네요. 감사합니다.” 하겠습니까? 일본으로서는 강도와 비유하는 게 불편할 수 있지만, 1947년 미군정 하의 과도 정부가 설치한 대일배상대책위는 “약탈, 강제동원, 학대 강탈”의 세 분야로 나누어 조사합니다. 강도당한 재산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그 경제적 효과로 보면 일본이 훨씬 더 많은 혜택을 누렸습니다. 일본은 한일협정을 통해 자신의 시장 확대 기반을 확실하게 마련합니다.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 한국전쟁, 한일협정 이 세 가지는 일본의 경제기반에 대한 역사적 본질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1965년 한일협정을 본격적으로 다룰 때 더 자세히 논의하기로 하지요.

(12-1) 1947년의 대일배상대책위가 벌써 있었군요. 그게 나중에 1949년의 '대일배상요구조서'의 기반이 된 거겠네요.

정확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되었지요. 미군정 아래의 과도정부는 1947년 2월 행정권 이양을 위해 독립운동가 안재홍(安在鴻)을 민정장관에 임명해 출발했고 미군정청(美軍政廳)은 이후 6월에 남조선 과도정부로 개편합니다. 물론 미군정이 전권을 쥐고 있는 체제지만 우리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생겨난 겁니다. 이 남조선 과도정부가 8월에 “대일배상문제대책위원회” 설치를 결정합니다. 이런 움직임이 있게 된 것에는 두 가지 국내외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12-2) 국내외적인 요인이라, 국제적인 요인부터 듣고 싶네요. 1947년이면 미국의 대일정책(對日政策)이 종전(終戰) 직후와는 다르게 변화되는 “역(逆)코스” 적용 시기라는 점에서 짐작이 가는데, 대일배상문제와 관련해서는 구체적으로 뭔지 몰라서요. 미국의 냉전체제를 만들기 위해 일본의 경제적 부담을 줄인다, 일본의 국가적 역량을 강화시킨다, 그에 장애가 되는 것은 정리한다, 그 정도는 이제 파악이 되요.

종전 직후와 1947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 역코스에 대한 개념, 국제적 요인, 이런 단어들이 술술 나오는 걸 보니 전체 판이 많이 읽혀지나 봐요. 잘 질문하셨습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이 종료되면서 일본에 대한 미국의 자세는 분명했지요. 일본의 산업능력 박탈이었습니다. 군국주의 체제의 기반이었으니까요. 그 박탈의 과정을 통해 일본의 침략으로 피해를 입은 나라들의 경제복구에 쓰겠다는 방침이었습니다. 1945년 11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대일배상사절단 단장 폴리(Edwin E. Pauley)를 도쿄에 파견, 조사 후 보고를 받게 됩니다. 대일배상 문제 처리 과정에서 당시 우리 민족이 엄청나게 주시했던 조사단이었습니다.

보고의 내용은 확실했습니다. 그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불가능하게 하기 위해 일본에서 잉여 공업 설비를 제거하고 이 설비를 일본의 침략을 받은 나라들로 옮긴다. 독립된 조선 경제의 부흥에 도움이 되기 위해 배상 청구의 일부로서 조선의 자원과 인민을 착취하기 위해 사용된 일본의 산업 설비를 한국에 이전한다.”

(12-2) 오, 그대로 되었다면 오늘의 일본은 아니었겠군요.

그렇지요. 바로 이 보고서의 연장선에서 미군정은 배상목록 작성을 위해 1946년 특별경제위원회를 만들고, 조선 문제에 관건을 쥐고 있던 도쿄의 맥아더가 지휘하고 있던 “극동위원회”의 움직임에 당시 우리 민족 전체가 주목하게 됩니다. 극동위원회에 참가해서 우리 요구를 알리고자 하기도 했지만 좌절되지요. 그 시기 조선상공회의소는 폴리가 방한했을 때 일본 식민지 지배의 수탈과 파괴에 대한 배상 없이 조선의 경제적 미래는 없다는 호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1947년이 되면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스트라이크(Clifford Stewart Strike)를 단장으로 하는 새로운 대일배상특별조사단이 일본을 방문한 뒤 맥아더에게 폴리 보고서의 권고 내용을 뒤집어 버립니다. “폴리 보고서대로 하면 일본 경제에 중대한 악영향을 미쳐 미국의 일본 점령 비용을 증대시켜 미국의 납세자 부담으로 돌아온다. 극동지역 전체에 대한 이해와도 충돌한다.” 이런 소식이 들리자 남조선 과도정부 구성원들은 다급해졌습니다. 신속하게 배상 목록자료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이 생겨난 것이지요. 이러면서 “약탈, 강제동원, 학대강탈”의 세 분야가 정리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12-3) 미국의 정책 변화에 상당한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네요. 이런 정책변화가 있었으니 나중에 “상쇄론”이니 뭐니 하는 식의 논리가 나온 거네요. 그래도 우리의 독자적인 준비와 대응이 있었다는 게 참 다행스럽네요.

그렇지요? 당시는 아무래도 일본의 식민 지배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그 역사적 기억도 생생하고 그로 인한 고통의 심각성, 피해 복구의 절박성이 개개인 모두의 실존 문제였기 때문이지요.

배상 목록과 분야를 구체적으로 정리한 당시 실무 책임자이자 훗날 한일교섭 과정에서 청구권 위원회 대표가 되는 조선은행 업무부 차장 출신인 이상덕은 치열한 노력을 했습니다. 기억할 이름입니다. 그는 배상의 입장과 권리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힙니다.

“일본의 장구한 조선 지배가 국제 정의의 기본적 조건인 도의, 공평, 호혜의 원칙에 입각한 것이 아니고 폭력과 착취의 지배이었음은 카이로, 포츠담 선언에 ‘조선인민의 노예상태’를 지적한 바로 충분하다. 원래 한일합병은 조선인민의 자유의사에 반하여 일본으로부터 강조되었던 것이다. 이번 대전(大戰)도 일본이 기도하고 강제로 동원케 되었으나 조선인민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끈기 있게 반항했다. 그러나 대일배상이 있어서의 조선의 요구는 일본을 징벌하기 위한 보복의 부과가 아니고 폭력과 탐욕의 희생이 된 피해 회복을 위한 필연적 의무의 이행이다.”

(12-4) 아, 위엄이 있고 단호한데다가 포용력까지 있는 문장이네요. 1949년 '대일배상요구조서'의 서문과 이어지는 정신이네요. “폭력과 착취의 지배, 강제동원, 그에 대한 끈기 있는 반항, 그러나 이런 역사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징벌적 요구는 아니다, 폭력과 탐욕의 희생이 된 피해 회복을 위한 필연적 의무 이행이다” 와! 박수치고 싶어요, 울컥하구요.

그렇지요? 일본이 이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역사의 양심 앞에 섰다면 지금의 한일관계도 이런 모양이 아니었을 것이며, 일본 역시 자기를 구하는 길로 걸어왔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조사와 대응에는 피해 민중들의 자발적 요구와 운동이 있었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과도정부나 이후 제1공화국 단독의 국가적 차원의 대응에만 주목해서는 안 됩니다. 8월 15일 바로 다음 날인 8월 16일, 당시 조선인들은 식민지 지배. 전쟁 피해 보상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자들은 각지에서 공장관리 위원회를 조직해서 일본 경영자가 회사의 물품과 자본을 빼돌리는 걸 막기 위한 투쟁을 벌입니다. 귀환 강제 징용 노동자들도 손해배상을 요구하게 됩니다.

특히 전쟁 피해자들의 조직이 생겨나와 대일배상 요구 운동을 벌여나갑니다. 태평양 전쟁에 징병, 징용되었던 청년들이 “태평양동지회”를 구성했고, 사할린 쿠릴 열도 등지에서 비참한 지경을 겪고 있던 동포를 구하기 위한 “화태(樺太)천도(千島) 재류(在留) 동포 구출위원회”,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전국 유가족 동인회”등이 나서서 배상요구를 구체화합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위안부 출신 여성들이 생존의 위기에 몰리면서 이미 휴지조각이 된 일본 군대 군표(軍票)를 화폐로 바꿔 달라는 청원까지 합니다. 위안부 문제 최초의 등장이었습니다.

(12-5) 정말 놀랍네요! 그런 움직임들이 있었기 때문에 논의의 기반이 생겨났다는 게 말이지요. 식민지 지배 청산은 과거사의 문제로만 볼 게 아니라 당장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 제기였네요.

하지만 이 모든 요구는 미군정에 의해 묵살당합니다. 쫓겨나가는 일본인들은 이런 요구를 자신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증오의 복수를 하는 것으로 여겼고, 미군정은 “소요, 협박, 강탈”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식민지 지배의 고통을 겪은 이들의 원통함이 외면당했고, 해방 공간의 아우성은 길을 잃고 맙니다. 이후 한일협정은 이런 역사의 현실을 담아내지 못한 채, 식민지 지배 청산이 냉전체제에 압박된 결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하게 주목해야 할 바는 민중 자신의 요구와 운동이 결국 힘을 발휘했다는 사실입니다. 2005년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공개도 식민지 지배, 전쟁 피해자의 소송 판결의 결과이며, 일본의 한일회담 일부 문서 공개도 한국에서의 문서공개에 자극받은 일본의 학자들과 시민운동이 노력해 2006년에서 2008년에 이르는 기간 가능해진 것이지요. 강제징용 관련 대법원 판결도 그렇구요.

이 문제는 이제 피해당사자에게만 맡길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나서서 파고들어야 할 임무입니다. 한일(韓日) 시민연대의 힘도 길러가야 하구요.


[韓日協定、何が問題なのか] ⑪

12)「日本の対韓請求権放棄」、最初に無かったものを放棄する?そう言って何か企んでいるように聞こえますね。1965年韓日協定で整理された借款を含めた5億ドルについても、そのことで私たちの経済発展の力になったではないかといういつもの方式です。

ー日本政府も私たち内部の親日勢力もそういう論理を繰り広げます。そのお金がなければこのような経済発展はあり得たのかというふうにです。奪われたものの一部、それも非常に最低のレベルで取り戻したものであり、そのように奪われてなかったら、私たちがどれほど驚くような発展を遂げたかという反証にもなるのです。

強盗に奪われた財産の一部をようやく取り戻したのに、その強盗が「それで少し生活出るようになったじゃないか」と言うと、誰がその言葉に「あ、そうですね。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と言うでしょうか?日本としては強盗と比喩するのは聞きづらいところもありましょうが、1947年米軍政の下での過渡政府が設置した対日賠償対策委は、「略奪、強制動員、虐待強奪」の三つの分野に分けられ調査します。強盗された財産問題でした。
※過渡政府:一つの政治体制から異なる政治体制に移行する過程で臨時で構成された政府のこと

そのうえ、その経済的効果で見ると、日本がはるかに多くの恩恵を受けました。日本は韓日協定を通して、自身の市場拡大基盤を確実にしていきます。朝鮮に対する植民地支配、韓国戦争、韓日協定この三つは、日本の経済基盤に対する歴史的本質問題と関連があります。これに対しては1965年韓日協定を本格的に取り扱う時に詳細に論議するようにしましょう。

12-1)1947年の対日賠償対策委がすでにあったのですね。それは後の1949年の〈対日賠償要求調書〉の基盤になったものですね。

ー正確におっしゃいました。その通りです。米軍政の下での過渡政府は、1947年2月行政権の移譲のために独立運動家安在鴻を民政長官に任命することから始まり、美軍政廳(在朝鮮アメリカ陸軍司令部軍政庁)は、この後6月に南朝鮮過渡政府として改編します。もちろん米軍政が政権を取っている体制ですが、私たちの声が反映できる政治的空間が生まれたのです。この南朝鮮過渡政府が8月に「対日賠償問題対策委員会」の設置を決めます。このような動きがあるようになったのには、両国の内外的な要因が大きく作用しました。

12-2)国内外的な要因のうち、国際的な要因から聞きたいですね。1947年というとアメリカの対日政策が、終戦直後とは異なる方向に変化した「逆コース」適用時期という点で見当はつくのですが、対日賠償問題と関連して具体的にどういうことかわからなくてですね。アメリカの冷戦体制を作るために日本の経済的負担を減らす、日本の国家的力量を強化させる。それに障害になることは整理する、その程度はすでに把握できます。

ー終戦以降から1947年の間に起こった変化、逆コースによる概念、国際的要因、このような単語がすらすら出てくるところを見ると全体の状況がよく読めてきたみたいですね。よく質問されました。

1945年太平洋戦争が終了してからの、日本に対するアメリカの姿勢ははっきりしていました。日本の産業能力の剥奪でした。軍国主義体制の基盤であったからです。その剥奪の過程を通じて、日本の侵略で被害を被った国々の経済復旧に使うという方針でした。1945年11月アメリカのトルーマン大統領は、対日賠償使節団団長ポーリー(Edwin E.Pauley)を東京に派遣、調査後報告を受けるようになります。対日賠償問題処理過程で当時私たちの民族が非常に警戒した調査団でした。

報告の内容ははっきりしていました。その核心は次のようなものでした。
「日本軍国主義の復活を不可能にするために、日本において剰余工業設備を除去して、この設備を日本の侵略を受けた国々に移す。独立した朝鮮経済復興の助けになるように、賠償請求の一部として、朝鮮の資源と人民を搾取するために使われた日本の産業設備を韓国に移転する」。

12-2)おぉ、そのまま実行されていたら今の日本はなかったですね。

ーそうです。まさにこの報告書の延長線上において、米軍政は賠償目録を作成のために1946年特別経済委員会を作り、朝鮮問題の鍵を握っていた東京のマッカーサーが指揮していた「極東委員会」の動きに、当時私たち民族全体が注目するようになります。極東委員会に参加して私たちの要求を伝えようとしますが挫折してしまいます。その時期朝鮮商工会議所はポーリーが訪韓した時に、日本の植民地支配の収奪と破壊に対する賠償無くして朝鮮の経済的未来はないという訴えをしました。

しかし1947年に入ると方向が完全に変わってしまいます。ストライク(Clifford Stewart Strike)を団長とした新しい対日賠償特別調査団が日本を訪問した後、マッカーサーに対しポーリー報告書の勧告内容を覆します。
「ポーリー報告書どおりにすると日本経済に重大な悪影響をきたし、アメリカの日本占領費用を増大させ、アメリカの納税者負担として跳ね返ってくる。極東地域全体に対する理解とも衝突する」
このような消息が聞こえてくると南朝鮮過渡政府構成員たちは緊迫してきます。迅速に賠償目録資料を作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切羽詰まってきたということです。このようにして「略奪、強制動員、虐待強奪」の三つの分野の整理が始まります。

12-3)アメリカの政策変化に相当な危機感を覚えるしかなかったのですね。このような政策変化があったから、後で「相殺論」やら何やらという論理が出てくることになるのです。それでもわたしたちの独自的な準備と対応があったことが本当に救われました。

ーそうでしょう?当時はどうしても日本の植民地支配から抜け出して間もない時期ということで、その歴史的記憶も生々しく、それによる苦痛の深刻さ、被害復旧の切迫性が個々人すべての実存問題であったからです。

賠償目録と分野を具体的に整理した当時実務責任者であり、後に韓日交渉過程で請求権委員会代表になる朝鮮銀行業務部次長出身イサンドクは、熾烈な努力をしてきました。覚えておくべき名前です。彼は賠償の立場と権利を次のように明確に明らかにします。

「日本の長く久しい朝鮮支配が、国際正義の基本的条件である道義、公平、互恵の原則に立脚したものではなく、暴力と搾取の支配であったことはカイロ、ポツダム宣言で“朝鮮人民の奴隷状態”と指摘されたことで十分である。本来韓日併合は、朝鮮人民の自由意志に反して日本から強制されたものである。今回の大戦でも日本が企図し強制動員されたが、朝鮮人民は可能なすべての方法で忍耐強く反抗した。しかし対日賠償があってからの朝鮮の要求は、日本を懲罰するような報復を課するものではなく、暴力と貪欲の犠牲になった被害回復のための必然的義務の移行である」

12-4)あぁ、威厳があって、断固としていて包容力まである文章ですね。1949年〈対日賠償要求調書〉の序文と繋がる精神ですね。「暴力と搾取の支配、強制動員、それに対する忍耐強い反抗、しかしこのような歴史的経験にも関わらず懲罰的要求ではない。暴力と貪欲の犠牲になった被害回復のための必然的義務の移行だ」わ~!拍手を送りたいですね。けれど、むかっとします。

ーそうでしょう?日本がこのような声に耳を傾け歴史の良心の前に立っていたら、今日の韓日関係もこのような形になっていないことですし、日本もやはり自分を救う道を歩んできたでしょう。

しかしこのような調査に対応して、被害民衆たちの自発的要求と運動があったという点は必ず記憶してお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過渡政府や以降の第1共和国単独の国家的次元の対応にだけ注目してはなりません。8月15日まさにその次の日の8月16日、当時朝鮮人たちは植民地支配、戦争被害補償を要求し始めました。労働者たちは各地で工場管理委員会を組織して、日本の経営者が会社の物品と資本を奪うのを防ぐ闘争を始めます。帰還した強制徴用労働者たちも損害賠償を要求するようになります。

特に戦争被害者たちの組織が出来てきて、対日賠償要求運動が広がります。太平洋戦争で徴兵、徴用された青年たちが「太平洋同志会」を構成し、サハリン千島列島等でも悲惨な境地にあっていた同胞たちを助けるための「樺太千島在留同胞救出委員会」「中日戦争、太平洋戦争全国遺家族同仁会」等が出てきて賠償要求を具体化します。この過程で一部の慰安婦出身女性たちが生存の危機に追い込まれながら、すでに紙くずの切れ端になった日本軍隊の軍票を貨幣に変えて欲しいという請求までします。慰安婦問題の最初の登場でした。

12-5)本当に驚くことですね!そのような動きがあったから、論議の基盤が生まれてきたということですね。植民地支配清算は過去史の問題としてだけに見るのではなく、即座に生存と直結した問題提起だったのですね。

ーしかし、このすべての要求は米軍政により黙殺されます。追い出される日本人たちはこのような要求を自分たちの財産を略奪し、憎悪の復讐をしていると捉え、米軍政は「騒乱、脅迫、強奪」という報告書を作成します。

植民地支配の苦痛を経験した人々のの悔しさは無視され、解放直後の気勢をあげていた状況は道を失ってしまいます。以後韓日交渉はこのような歴史の現実を組み込むことができないまま、植民地支配清算が冷戦体制に圧迫された結果として出てきます。

しかしここで重要で注目すべきことは、民衆自身の要求と運動が結局は力を発揮したという事実です。2005年韓日会談関連外交文書公開も植民地支配、戦争被害者の訴訟判決の結果であり、日本の韓日会談の一部文書公開も、韓国での文書公開に刺激を受けた日本の学者と市民運動の努力の結果、2006年から2008年に至るまでの期間可能になったことです。強制徴用関連大法院判決もそうです。

この問題はすでに被害当事者たちだけに任せることではなく、私たちみんなが立ち上がり深く入り込まなければならない任務です。韓日市民連帯の力も育ててい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

(번역 : 재일교포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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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미국 진보사학의 메카인 유니온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동화독법>, <잡설>, <보이지 않는 식민지> 등 다수의 책을 쓰고 번역 했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국제·사회 이슈에 대한 연재를 꾸준히 진행해 온 프레시안 대표 필자 중 하나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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