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역사를 거울로 삼아야 오늘 일본을 넘어설 수 있다

[기고] 지금 우리가 일제잔재를 청산해야 하는 이유

필자는 최근 현재 2급 공무원 명칭인 이사관이 구한말 통감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동시에 서기관을 비롯하여 사무관, 주사 등의 공무원 명칭 역시 일제 잔재라는 점을 기술하였다(프레시안 “일제 강점기 때 공무원 직급명칭, 폐기돼야 한다”). 이에 전주시는 일재 잔재 청산 차원에서 이사관을 비롯한 공무원직급 명칭을 바꾸기로 하고, 중앙 정부에게도 건의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한 언론은 이와 관련해 이사관 명칭은 일제 잔재가 맞지만, 나머지 서기관, 사무관 등은 일제 잔재가 아니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에 따르면, 서기관 등의 명칭들은 모두 1894년 혹은 1895년 고종 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제 잔재’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점령된 경복궁, 포로가 된 고종


일본은 1894년 동학농민군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그러나 잘 알려진 대로 일본이 내세운 동학농민군 진압은 명분이었을 뿐이었고, 청나라 세력을 조선으로부터 축출하고자 한 것이 일본 파병의 중요한 목표였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가 흔히 간과하고 있는 당시 일본의 또 다른 중요한 목표가 있었다. 바로 경복궁 점령과 고종의 신변 확보 그리고 조선군 무장 해제였다.


일본은 “정한론(征韓論)”의 기치 하에 1876년 강화도 침략 이후 조선 식민지화 방책을 치밀하게 연구하고 준비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빌미로 그 계획의 현실화에 착수했던 것이었다. 물론 일본의 최종 목표는 “조선의 식민지화”였다.

일본식 ‘갑오개혁’, 일본 식민지의 토대 구축

당시 일본이 조선에 파병했던 총 병력은 8천 여 명이었다. 이들은 조선에 상륙하자마자 조선 정부와 전혀 합의 없이 임의로 경부 간 전선 가설을 무단으로 진행하였다. 그러면서 5천 명의 병력을 서울에 주둔시켰다. 이미 ‘의도’가 다른 데 있었던 것이다. 그 주력은 용산에 주둔했고 아현을 비롯해 공덕, 만리창 등 요충지마다 병력이 배치되었다. 한눈에 경복궁을 파악할 수 있는 북악산과 남산에는 포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7월 23일(이하 양력) 새벽에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영추문을 부수고 진입, 조선수비군을 제압하고 건청궁에서 고종의 “신변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고종을 강박해 작성된 교지(敎旨)로써 조선군을 무장 해제시켰다.


어디까지나 일본에 종속된 친일 정권 수립이 저들의 목표였다. 일본의 준비된 계획에 따라 7월 27일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나흘 뒤에는 일본식 관료제도인 <의정부 관제안>이 가결되어 8월 13일 조선 전역에서 정식으로 시행되었다. 결국 이는 일본 식민지로 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 ‘관제 개혁’에 서기관을 비롯하여 사무관, 주사, 서기 등 새로운 관제에 의한 “순수 일본식 직급과 그 명칭”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관제(官制)들이 ‘일제 잔재’가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 일제 잔재일 수 있는가?

지금 우리가 일제잔재를 청산해야 하는 까닭은?

아직 우리 사회에서 구한말의 이른바 ‘갑오개혁’을 전후한 역사에 대해 애매모호한 평가가 많다. 여전히 갑오개혁이나 개화파에 대한 긍정적 시각과 평가가 적지 않은 현실이다.


필자는 1988년 김종규라는 필명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펴낸 바 있었다. 그 책은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동학농민세력을 중심으로 일본에 반대하는 역량이 모두 연합하는 방안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개화파가 본질적으로 지닌 친일적 성격을 밝히고 있었다. 이러한 시각은 당시 상당한 반향이 있었는데, 그 무렵 어느 평론지에서 서중석 선생이 그 책을 언급하면서 좋은 평가를 내려주셨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지나간 역사를 거울로 삼아야 한다. 한 세기 전에 일본제국주의가 이 땅에서 행했던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평가해야 한다. 당시의 과오가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일본의 민주주의는 ‘도금’ 수준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일본헌법은 제1조에서 제8조까지 온통 ‘천황’에 할애하고 있으며, 정치는 신도(神道)라는 토템과 강인하게 결합되어 있다. 민주주의와 너무 거리가 멀고, 충분히 ‘봉건적’이다.
오늘 우리가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자 하는 이유는 비단 일제 잔재의 청산 그 자체에만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다 더 커다란 의미는 바로 일제 잔재 그것에 내재하고 있는 반민주성과 봉건성을 청산하는 데 존재한다. 우리가 진정 일제 잔재를 청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일본이 지금 벌이고 있는 ‘망동’도 넘어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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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준섭

1970년대말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학생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몸담았으며, 1998년 중국 상하이 푸단(復旦)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2004년 국제관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회도서관 조사관으로 일했다. <변이 국회의원의 탄생>(2019), <광주백서>(2018), <대한민국 민주주의처방전>(2015) , <사마천 사기 56>(2016), <논어>(2018), <도덕경>(2019)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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