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비핵화' 버리고, '한반도 비핵지대화' 논의를

[정욱식 칼럼] 한반도 비핵지대 창설을 공론화해보자

"우리는 비핵화가 무엇인지 합의된 정의를 갖고 있지 않으며 비핵화 정의 합의를 매우 중요한 출발점으로 간주하고 있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우리가 비핵화의 정의에 먼저 합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지난 19일(현지 시각) 애틀랜틱 카운실 토론회에서 한 말이다. 이 발언을 소개한 이유는 또다시 낙관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시점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를 비건이 언급했기 때문이다.

앞선 글에서 다룬 것처럼 '비핵화'라는 표현은 홍수를 이룰 정도로 넘쳐나고 있는데, 정작 비핵화에 대한 정의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건의 발언은 비핵화 정의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취지를 품고 있다.

답답한 마음에 사전을 찾아봤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핵무기가 없어짐. 또는 핵무기를 없게 함"이라고 짤막하게 나와 있다. 영어 사전인 메리엄-웹스터(Merriam-Webster)에는 "핵무기를 없애고, 핵무기 사용을 금지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한반도 비핵화"는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없애고 한반도에서 핵무기 사용을 금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왼쪽)과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지난 19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애틀랜틱카운슬과 동아시아재단이 주최한 전략대화 행사에서 기조강연에 이어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비핵화에 북한의 핵은 물론이고 모든 탄도미사일과 생화학무기, 그리고 이중용도 프로그램 폐기까지를 그 정의에 포함시켰다. 반면 미국의 대북 핵 위협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그렇다.

북한이 이러한 비핵화, 즉 미국이 북한에겐 무장해제에 가까운 요구를 하면서 자신의 의무 사항은 제외시키려고 하는 비핵화를 수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 실무회담이든, 고위급회담이든, 정상회담이든 북미가 다시 마주 앉기도 쉽지 않고 회담이 열려도 그 성과를 낙관하기 힘들다.

나는 언론과 전문가들이 점치듯이 앞날을 전망하는 것보다 이 문제에 대한 공론화에 앞장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비핵화에 관한 북한의 의무 사항을 어느 정도까지 잡는 것이 현실적이고 타당한지, 7000개의 핵무기를 보유한 미국의 대북 핵 위협을 해소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이들 문제를 포함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비핵화의 정의와 목표는 무엇인지에 관해 말이다.

내가 대안으로 한반도 비핵지대 창설을 제안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합의된 정의도 없고 그래서 동상이몽이 큰 비핵화보다는 국제적으로 통용되어온 정의가 존재하는 비핵지대를 한반도 핵문제의 해법으로 논의해보자는 것이다.

비핵지대는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첫째는 핵무기의 부재로서 지내 내에 핵무기의 개발·제조·실험·보유·배치·반입 등을 금지한다. 둘째는 비핵지대에 대한 핵무기 사용 및 사용 위협을 금지하는 것으로 이는 '소극적 안전보장'으로 불린다. 셋째는 비핵지대 조약의 위반을 방지하고 분쟁 발생 시 해결을 도모하는 조약 이행 기관을 설치한다.

이러한 비핵지대에 따르면 남북한은 첫 번째 의무의 당사자가 되고, 미국을 비롯한 핵보유국들은 두 번째 의무를 지게 된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남북한이 핵 검증체계를 구축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렇게 되면 북한은 국제적 검증체계와 더불어 이중 감시 하에 놓이게 된다. 동시에 이러한 합의는 조약 형태로 체결되고 유엔 안보리의 승인을 거쳐 국제법적 구속력을 강화할 수도 있다.

다만 '비핵지대+알파'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비핵지대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인정한 재처리 및 우라늄 농축 활동을 금지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1992년 남북한이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서는 이들 시설을 보유하지 않기로 명시했다. 이에 따라 한반도 비핵지대 조약 체결 시 이러한 내용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미국 등 핵보유국들로 하여금 한반도 비핵지대 창설에 동의하고 참여하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비핵화의 정의 및 최종 상태에 대한 논의는 언젠가는 불가피한 사안이다. 미국은 출발점에 해당된다는 입장이고 북한은 "첫 공정"부터 하고 나중에 다루자는 입장이다. 미국이 고집을 꺾지 않으면 '발등의 불'인 셈이고, 북한의 입장이 관철되더라도 '뜨거운 감자'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한반도 문제 해법은 북한의 비핵화와 미국 주도의 상응 조치 사이의 함수관계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도 한반도 핵문제의 당사자인 만큼 미국의 의무사항도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 사회 내부에서부터 먼저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제안한 한반도 비핵지대 창설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이게 아니라면 어떤 대안이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북미가 합의할 수 있고 한국이 지향하고자 하는 핵문제 해법을 국제사회에 내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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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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